“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누가복음 19:41-42) 은퇴한 목사님이셨다. 은퇴기념으로 성지에 왔는데 현장을 보니 상상했던 것들과 너무나 달랐다. 평생 목회를 했는데 본의 아니게 사실과 다른 말을 했던 것이다. 은퇴하고 온 것이 후회스럽고 죄스러워 울었다는 것이다.
감람산 중턱에 조그마한 기념교회가 하나 세워져 있다. 화려하거나 웅장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조용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런 교회이다. 이곳을 들르는 사람들은 차분하고 조용한 모습으로 골짜기 너머 성전산에 우뚝 서 있는 황금 사원을 바라보거나, 조용히 성경을 읽으며 묵상의 시간을 갖는다. 그래서 이곳 분위기는 항상 침묵이 감돈다. 이따금 순례객들이 단체 사진을 찍으며 내는 소리마저 귀에 거슬리는 그런 장소이다.
이곳이 바로 ‘도미누스 플레빗’((Dominus Flevit·주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즉 ‘눈물 기념교회’이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성전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던 사건을 기념하는 곳이다. 누가는 그때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9:41-44)
주후 5세기 이곳에 처음 기념교회가 세워졌는데 지금도 그때 교회의 모자이크 바닥을 볼 수 있도록 보존해 놓았다. 요즘 우리를 맞이하는 교회는 1955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지붕이 시작되는 네 모서리에 큼직한 눈물방울이 올려져 있고, 건물 전체의 모습 또한 하나의 커다란 눈물방울 모양으로 고안되었다. 특별히 기념교회 내부에서 창문을 통해서 황금사원을 바라보면, 성전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마음에 또렷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눈물기념교회
이곳에서 필자로서는 잊지 못할 경험 하나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곤 한다. 이스라엘에서 수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1990년도 초반 성지순례가 한참 붐을 이뤄 이스라엘에는 한국 단체들로 넘실거렸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안내할 사람이 부족했고 경험이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안내해야 했던 시기였다. 눈물교회에서 장황한 설명보다 조용히 묵상할 시간을 갖고 있는데, 마침 내 옆에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말없이 서서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슬쩍 곁눈질로 보아도 예사로운 눈물은 아닌듯싶었다. 살며시 자리를 피한 다음 나중에 조용히 여쭤보았더니 은퇴한 목사님이셨다. 교회에서 은퇴기념으로 성지순례를 보내주었는데, 막상 성지에 와서 보니 지금까지 성경을 읽으며 상상했던 것들과 현장이 너무나 달랐다. 그러니 평생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도들을 가르치고 목회를 했는데, 본의 아니게 많은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다. 성경이 쓰인 현장에 대한 고려 없이 성경을 읽고 가르쳤다. 젊어서 성지를 다녀가지 않고 은퇴기념으로 이제야 온 것이 후회스럽고 죄스러워 울었다는 것이다.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눈물기념교회 모자이크 바닥
이 사건 이후로 필자는 장로님이나 성도들에게 핀잔하듯 하는 말이 있다.
“목사님과 교역자들 보다 먼저 성지에 오신 분들은 교회에 돌아가면 절대로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목사님 은퇴 기념으로 성지에 보내 드리겠다는 생각은 아예 그만두십시오. 한국에 돌아가면 만사를 제치고 목사님, 그리고 교역자 먼저 성지에 보내드리십시오. 그리고 권사님보다 신학생과 젊은 청년들을 먼저 성지에 다녀오도록 돕고 격려해 주십시오.”
지금 생각해보니 필자 또한 이 사건을 빌미로 잘못을 했던 것 같다. 눈물교회에서 예수님이 흘리신 그 눈물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경험담을 통해서 은근히 성지광고를 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예수님은 눈앞에 우뚝 서 있는 찬란한 예루살렘 성전의 미래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바로 눈앞에서 ‘호산나(구원자)’ 소리치던 군중들의 입이 자신을 향해 저주를 퍼부을 것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로마의 속박 밑에서도 자신의 권력과 잇속에 눈이 멀어 회개할 줄 모르고 불법을 자행하며, 끝없이 아귀다툼하는 정치인과 종교인, 그들이 불러올 참담한 민족의 장래를 보셨다. 예수님의 눈물은 시대를 읽고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자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윗이라는 왕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가장 강성한 나라를 만들었던 왕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나라를 통일하고 주변 국가들을 정복한 후, 강성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각 지파 출신의 수많은 용장이 그와 함께했으며, 시세(時勢)를 읽을 줄 아는 사람,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사람, 통찰력을 갖고 현실을 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그와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대상 12:32)
요즘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 마음은 너나 할 것 없이 무겁고 답답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19, 민족과 민생은 안중에 없는 정치판, 수렁에서 빠져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경제 현실, 눈뜬장님이 되어버린 종교인들….
시대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의 눈물이 절실히 요구되는 지금이다. 시세를 알고 마땅히 행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는 이 시대의 선견자가 간절히 기다려진다. 예수님 눈물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이 시대의 선견자가 나타나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