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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의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대해 마지막으로 정리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 동안 정신없이 달려온 터라 종착역에서 지난날의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던 등반을 차분한 마음으로 기록하고 싶고,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커다란 도움과 위안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내게 히말라야 14좌 완등이라는 영광을 안겨주신 소병겸 원장님, 이번 원정뿐 아니라 마나슬루와 시샤팡마 등반 때마다 단장으로 참가해 적지 않은 경비와 고락을 함께 나눈 강익수 단장님, 그리고 내가 14좌 등반을 펼치는 동안 가장 큰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셨고 어려움 속에서도 조금도 싫은 내색하지 않고 경비와 스폰서 문제를 도맡아 주신 이동호 선배님(항상 이 선배님 생각만 하면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또한 이번 14좌 완등에 임하는 나에게 엄청난 행복감을 안겨주셨고 한편으로는 기대에 부응해야한다는 중압감을 느끼게 하셨던 한고상사 한철호 사장님, 특히 한 사장님에게는 그 동안 특별한 직업이 없었던 나에게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그리고 한 가정의 든든한 가장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끔 직원으로 채용해주시고, 이번 원정의 모든 경비와 이벤트 행사를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데 대해 지면을 통하여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또한 그 동안 목숨을 담보로 나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했고, 숱한 난관을 보잘 것 없는 나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해주신 선후배 대원들과, 14좌를 향해 무모하리만치 가정을 내팽개쳐 두었음에도 사랑하는 나의 아들 대성이와 산이를 해맑게 키워주고, 누구보다도 큰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 준 나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지금도 나의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로 남아 있는 그리운 우리 어머님-. 히말라야가 어머님의 임종보다도 더 소중했다는 말인가란 자책을 해본다. 불효자식의 철없는 객기가 지금 어머님을 더욱 그립게 만든다.
진입도로 붕괴로 시작부터 차질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의 마침표를 찍을 가셔브룸2봉(8,035m)과 브로드피크(8,047m)를 동시에 등반하는 원정을 앞두고 예전과 달리 만감이 교차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성공한다면 세계 열한번째, 국내 세번째 완등이라는 영광스러운 면과, 이번 원정을 마치면 이제는 더 이상 고산등반을 하지 않겠다는 가족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경비에 대한 부담을 전혀 받지 않은 채 짐을 꾸릴 수 있다는 게 너무도 행복했다.
사실 8,000m급 14좌를 오르는 동안 어느 산인들 쉬운 산이 있었겠는가마는 특히 무엇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은 바로 경비에 대한 부담이었다. 물론 기업체를 찾아가 스폰서가 되어줄 것을 요구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좋아서 다니는 산이었기에 쉽사리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일 때도 있어 대부분의 원정경비를 산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몇 분에게 도움을 받았고, 또한 그 분들을 단장이나 부단장으로 함께 원정을 떠났으며,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참가 대원들이 얄팍한 주머니를 털어 보태주곤 했다. 그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으로 인해 원정을 가기 전부터 늘 번민하고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한철호 사장님의 배려로 난생 처음 특급 호텔에서 발대식을 치르고 고락을 함께 할 대원들도 모두 즐거운 기분으로 인천 공항을 출발했다. 방콕을 경유해 6월18일 현지시각 오후 10시30분에 파키스탄의 라호르 공항에 도착, 현지 대행사 직원과 미팅을 하고 이슬라마바드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라왈핀디의 프레시맨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번이 다섯번째 방문이었음에도 파키스탄은 여전히 변화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19일 아침 일찍 달러를 루피로 환전하고 행정적인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기로 했다. 긴 여정에 피곤할만도 한 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매일 저녁식사 후 모든 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동안 내가 원정에서 겪었던 일들을 간단히 설명해 주고 일처리의 순서를 정해주고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하나하나 점검해 나갔다.
20일, 정부연락관을 만나 한국에서 가져온 장비를 지급하고, 현지에서 구입할 것들과 스카르두에서 구입할 것들을 정리하도록 했다. 정부연락관은 10년 전 장비 리스트를 가지고 와서는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옛날 장비를 달라고 요구한다. 한편으론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급해준 장비의 우수성을 설명해 주자 그제야 환한 웃음을 짓는다.
21일 오전에 한국에서 화물로 보낸 짐을 찾고 관광성 브리핑을 하기로 한 날이다. 모두들 아침 일찍 일어나 부산한 모습들을 보니 마음이 든든하다. 원정대 도착 전인 5월2일 캐러밴 루트인 길기트 지방에 엄청난 산사태가 발생해 모든 도로가 두절되어 스카루드에서는 야채 등의 식량을 구입하는 데 지장을 초래하고, 모든 원정대들이 며칠씩 운행에 차질을 빚고 있었다.
라왈핀디에서 스카르두까지는 직선거리 330km로, 이틀 정도의 운행 거리지만 먼저 온 원정대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약 200km 구간이 차량 이동이 불가능해 도보로 이동하는 바람에 2주일이란 시간을 허비했다고 한다.
23일 한국에서 후발대인 KBS 취재팀이 도착하는데 후발대와 다른 짐들을 항공편으로 이동시키면 예상하지 않은 오버차지가 엄청나게 발생할 것 같아 길기트까지는 차로 이동하고 길기트에서 스카르두 구간은 항공편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날씨는 네팔 히말라야보다 더 좋은 편이라 등반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오늘은 파키스탄 관광성 신사옥 10층에서 인터뷰와 브리핑을 하는 날이다. 정부연락관과 대원들이 함께 등반 전체에 대한 유의 사항을 듣고 서류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다. 그런데 관세 및 대행료가 작년의 2배나 된다며 태연하게 말하는데 어이가 없었다. 초행의 원정대들이 참고할 만한 사항이며 지루한 실랑이와 흥정을 인내심을 갖고 한다면 경비를 많이 절약할 수 있다.
23일 새벽 6시 후발대 7명이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이동이 시작됐다. 항공으로 이동하려고 했는데 비행기 기내가 너무 좁아 짐을 모두 실을 수 없어서 일정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길기트 지방의 폭우로 인해 도로가 유실됐는데도 “내일이면 복구가 가능하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정부연락관이나 관광성 관료들의 말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24일 새벽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를 걱정하며 미니버스 2대에 2톤 가까이 나가는 짐을 가득 싣고 카라코룸하이웨이로 들어섰다. 도로 유실로 길기트와 스카르두에서 야채를 구할 수 없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샹기야리 마을의 야채시장에 들러 부족한 식량과 싱싱한 야채를 구입했다.
약 466km(약 15시간 소요)를 달려 칠라스 마을의 호텔에 도착하니 모든 대원들이 파김치가 됐지만 피곤을 뒤로한 채 짐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쓰럽기만 하다. 내일 일찍 차량 캐러밴을 위하여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누가 일찍 일어나라고 재촉한 것도 아닌데 대원들은 새벽부터 분주하다. 저런 대원들과 함께 등반할 수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오늘은 칠라스에서 스카르두까지 약 210km 거리를 운행하는데, 도대체 유실된 도로가 어느 정도 복구됐는지도 모를 길을 향했다. 다행히 군데군데 유실된 도로가 엉성하나마 복구되어 있었다. 그나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이건 장난이 아닐 정도로 이동속도가 처진다. 가다 서다 반복하는 가운데 어느덧 만년설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원들의 눈빛도 초롱초롱해졌다.
가벼운 짐에도 힘 못쓰는 파키스탄 포터들
오전 10시30분경 낭가파르밧(8,125m)이 보이는 자그만 마을에 도착해 잠시 차를 세우고 낭가파르밧을 바라보지만 가스가 잔뜩 낀 정상은 그 위용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았다.
대원들에게 98년 낭가파르밧 정상에 섰던 등반루트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98년 당시 IMF 여파로 원정대 짐꾸리기가 무척 난감했다. 국내 팀은 포항제철팀이 유일했는데 회사 사정으로 원정을 포기하면서 “낭가파르밧 입산허가서를 저렴하게 줄 테니 원정을 갈 수 있느냐?”는 제의가 왔다. 원정 경비에 허덕이는 나에게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러나 막상 결정하고 나니 나머지 경비 조달이 버거웠고, 그동안 도와주시던 몇몇 분들도 IMF 여파를 받고 있던 터라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다. 어렵사리 6,000달러를 만들 수 있었다. 원정대 규모도 대폭 축소하고 고용인이나 장비 식량도 최대한 줄였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예산이었지만 나는 그 돈에 모든 일정을 맞추었다. 무리였지만 한편으로는 원정을 떠날 수 있다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라관주 대원과 단 둘이서 원정을 감행했다.
현지 베이스캠프에서는 더 비참했다. 고소포터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원정대가 고용하는 키친보이나 쿡도 고용할 수 없어 단 둘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저 낭가파르밧은 내가 14좌를 하는 중 정신적으로 가장 어려웠고 한편으로는 그 어려운 역경을 떨쳐버리고 정상에 올랐으니 어쩌면 가장 행복했던 원정이기도 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설명을 듣는 대원들의 모습을 보니 역시 산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중 분명 저 아스라한 낭가파르밧 정상에서 거친 숨을 몰아 쉴 후배가 나올 것이다.
12시20분쯤 길기트와 스카르두 갈림목에 도착하자 오른쪽 스카르두로 향하는 다리는 겨우 차가 한 대씩만 이동하는데도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불안하게 만든다. 약 1시간을 더 이동하니 FWO라는 카라코룸하이웨이 도로관리 군부대가 복구작업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포터 약 20명을 고용해 다음 도로가 나오는 곳까지 짐을 메고 걷기로 했다.
포터 20명이 5회 왕복해 짐을 나르기로 하고, 대원들도 1, 2조로 나누어 스카르두(해발 2,300m)로 이동하는데, 2조가 스카르두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새벽 2시30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이 구간은 도로 유실 후 우리 팀이 처음 지나가는 것이다. 항공으로 이동한 스페인의 두 팀은 짐이 도착하지 않아 닷새째 속만 태우고 있었다. 그 순간 대원들에게는 정말 미안했지만 과감하게 차량이동을 결정한 것이 잘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신속히 짐 정리를 마치고 내일 운행을 위해 자리에 누웠지만 베이스캠프 입성까지 들어갈 생각에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26일 새벽 5시30분 모두들 토끼잠을 잔 탓인지 얼굴들이 푸석푸석하다. 안쓰러워 재촉할 엄두가 나지 않는데 내 마음을 읽기라도한 듯 씩씩하게 웃으며 준비를 한다. 지난해 등반을 마치고 현지 여행사 사무실에 맡겨놓았던 장비를 찾아와 정비하고 부족한 장비들과 야채를 구입했다.
상기야리보다 훨씬 큰 시장인데도 도로 유실로 인해 싱싱하고 좋은 야채를 구할 수 없어 약간만 구입했다. 시장에서 돌아와 보니 첫 포터들이 짐을 가지고 와 있었다. 두번째 포터들의 짐이 도착하면 곧바로 캐러밴을 하기로 결정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27일 오전 6시30분 드디어 우리 팀의 쿡인 치링이 두번째 짐을 싣고 도착했다. 그런데 짐을 가지러 간 2조의 포터들이 영 소식이 없어 갑갑하게 만들었다. 오후가 다 되어서야 포터들이 짐을 싣고 나타났는데 오는 도중 엉성하게 복구된 도로가 또 유실되어 돌아서 오느라 이제야 도착했다는 포터들의 말을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원정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파키스탄 포터들은 네팔 포터들보다 힘을 못쓴다. 네팔 포터는 30kg을 메고 파키스탄 포터는 25kg을 메는데도 영 힘을 못 쓴다. 그만큼 쉬는 시간이 많아 운행 속도도 느리다. 오후까지 부족한 식량과 포터들의 장비를 구입하고 다음날 지프 캐러밴에 대비해 꼼꼼히 준비했다.
스카르두를 출발, 아스콜레 캠프장(2,950m)에 도착해 본격적인 캐러밴을 위하여 포터들을 고용하는 날이다. 언제 소문을 들었는지 운집한 사람들이 400명이 훨씬 넘어 보였고 서로 짐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이전 원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야박하게 흥정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여느 원정 때와 달리 넉넉한 살림살이여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기로 했다. 일일이 무게를 달아 짐을 분배하고 식량과 장비를 그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었다.
고로혼~졸라브리지~호불세(3,700m)~우르두카스~고로(4,500m)~콩코르디아(4,600m)~샤그린을 거쳐 베이스캠프로 들어서는 사이 발토로 빙하 양옆으로 웅장하게 솟구친 하얀 산들을 바라보니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고교 시절부터 등산에 취미가 있었지만 체계적인 등반기술과 지식을 배우려고 우석대에 입학하자마자 산악부실을 찾았다. 대학 시절은 그저 사람과 어울리는 게 좋아서 다니는 산이었다. 그러다 92년 대학산악부의 동계 일본 북알프스 종주등반에 합류하게 됐다. 비록 보름 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첫 해외등반이었고 다녀온 후 선후배 관계가 더욱 끈끈하게 유대를 맺게 되어 점점 산에 매료됐다.
이후 일반산악회인 전주 개척산악회를 이끌던 이동호 선배에게서 캉텐그리 원정대에 합류해줄 것을 제의받았지만 대학산악부와 일반산악회의 미묘한 갈등 속에서 선배들의 압력도 많이 받아야 했다. 결국 해발 7,010m의 거봉 캉텐그리를 오르고 왔다. 하지만 예상보다 후유증은 컸다. 선배들의 엄청난 질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94년 개척산악회 초오유 원정에서 처음으로 엄홍길 선배와 박영석 선배를 만났다. 그 만남은 나에게 히말라야 8,000m급 고산원정을 새롭게 생각하고 눈뜨게 해준 계기였다. 이후 95년 박영석 선배가 에베레스트에 새 루트를 개척하자며 함께 등반할 것을 제의해왔다. 이동호 선배로부터 히말라야 원정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엄홍길 선배와 박영석 선배의 원정대에 대원으로 합류할 수 있는 행운도 많이 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대한 꿈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000년 엄홍길 선배가 나와 함께 K2를 등정하면서 완등에 마침표를 찍고, 한 해 뒤 박영석 선배가 14좌 완등 대열에 동참하자 내 생각도 갑자기 바뀌기 시작했다. 엄홍길 선배가 매스컴으로부터 엄청난 조명을 받는 것에 대해 솔직히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직업도 없이 가정을 팽개쳐두고 나만 좋아하는 산만을 고집한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었고, 가장으로서 현실도피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까지 해외원정만 다닐 것인가. 목표가 있어야 했고, 시기를 정해야 했다. 14좌 완등에 대한 꿈은 아마도 그 때였던 것 같다. 솔직히 나도 할 수 있다는 오기가 들기도 했다. 그리고 14좌 완등은 개인적인 소원을 이루는 것인만큼 이후부터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기로 자신과 약속한 때이기도 하다. 때문에 나는 가족 앞에서 14좌 완등 후 두 번 다시 고산원정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베이스캠프 도착 직후 고소증으로 혼란 겪어
드디어 가셔브룸2봉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포터들에게 넉넉하게 임금을 지급하자 안전한 등반을 기원하며 힘찬 파이팅을 외쳐주며 하산한다. 그러나 콩코르디아에 5~6시간 늦게 도착한 부단장님의 증세가 심각했다. 우려하던 고소증세가 아주 심하게 나타났다. 한 모금의 물도 마실 수 없고 계속 토하며 고통을 호소하고 정신까지도 혼미한 것 같아 보였다. 경험으로 볼 때 아주 심각한 증상이었다.
우선 정부연락관과 상의해 다음날 구조 헬기를 요청하는 한편 응급조치로 비상용 산소를 마시게 했다. 가모백(휴대용 가압조절백)이 있으면 지금 같은 상황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원정대는 대부분 이 장비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외국 원정대의 경우 가모백은 필수장비다. 후회가 됐다. 그나마 비상용 산소를 챙겨 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2001년 마칼루 등반시 첫 고산 경험인 대원 1명이 부단장님과 똑같은 고소증세로 인해 생명에 위협을 받았지만 다행히 외국 원정대 의사를 만나 그들이 준비한 가모백과 적절한 조치로 생명을 건진 적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현장에서 지켜보고 지시했던 나로서는 이런 응급상황에서 가모백과 응급조치, 그리고 얼마나 빨리 구조헬기가 올 수 있는지를 빨리 판단해야 했다. 그런 갈등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다음날 날씨가 좋지 않아 헬기는 오지 않았고, 또 다행히 응급조치를 받은 부단장님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트레킹팀과 현지 가이드 및 포터 3명을 붙여 고도를 낮춰 하산하게 했다. 단장님과 부단장님을 제외한 다른 대원들 모두는 건강하게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5,200m)에 식당 텐트와 대원 텐트를 설치하고, 장비와 식량을 캠프용과 고소용으로 정리하고, 메인 캠프를 구축한 후 캐러밴 여독을 풀기 위해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잠시 대원들과 루트에 관해 상의를 하고 있는데 경일대팀 대원이 달려온다. 대원 한 명이 지금 심한 고소증세로 위급하다는 것이다. 응급약과 비상용 산소를 들고 달려가 보았다. 상황을 보니 생명까지도 위태로울 정도였다. 지체없이 산소를 마시게 하는 등 응급조치를 하고 정부연락관을 통해 가까운 군부대의 의사를 데려 오도록 하고, 쿡을 보내 외국 원정대의 가모백을 빌려 오도록 했다. 다행히 가모백이 다른 원정대에 있었다.
신속히 그 대원을 가모백에 넣고 산소를 마시게 하던 중 군부대 의사가 또 가모백을 들고 왔다. 의사는 내가 조치한 상태를 보고 더 이상 도움을 줄 것은 없고 약간의 약을 주고 가면서 아주 훌륭한 조치를 취했다고 얘기해준다.
많이 호전된 상태를 보고 텐트로 돌아와 잠시 피곤한 눈을 붙이는데, 새벽녘에 또 경일대팀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갑자기 증세가 악화됐다는 것이다. 직감적으로 산소가 떨어졌을 거란 생각을 하고 비상용 산소를 들고 가보니 역시 예상대로였다. 재빨리 산소를 공급하고 정부연락관에게 구조헬기를 요청하라고 일러두고 병원으로 후송하도록 당부한 후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니 온몸이 파김치 상태다. 그러고 보니 우리 대원들이 사용할지도 모를 비상용 산소를 모두 써버렸다. 그러나 어쩌겠나. 다른 동료들에게 소중하게 쓰였으니 흐뭇했다.
2000년 K2 등반 때 나는 아주 무서운 고산증세를 경험했다. K2를 무산소로 등반하고 베이스캠프로 귀환한 후 나는 뇌혈관이 막히는 급박한 증세를 보여 구조헬기로 후송돼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와 무려 4번에 걸쳐 뇌동맥 조형수술로 막힌 부분을 뚫는 대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실 고소증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찾아오는 무서운 고산병으로 모든 원정대에게 커다란 위험요소임에 분명하다. 고산병은 해발 3,000m 이상이면 누구에게나 다 나타나는 증상이지만, 사람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나타날 뿐 위험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외국 원정대들은 보통 원정을 오기 전 4,000~6,000m대 산에서 검증을 거쳐 대원들의 컨디션을 체크하지만, 우리나라 원정대들은 국내에서의 산행경력과 훈련강도만으로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고 곧 바로 8,000m의 고산원정에 나서게 된다. 우리도 이제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고산증세를 방지하고 안전 등반을 위해 외국 원정대처럼 한두 번의 고산적응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8일 새벽 5시30분 C1 구축을 위해 나와 김웅식, 선영희, 문창호 대원, 고소포터 라자, 무사 6명이 베이스캠프를 출발했다. 가셔브룸2봉은 BC~C1 구간에 크고 작은 크레바스가 많기로 유명하다. 일일이 표지기를 꽂아가며 운행하다보니 속도가 늦어진다.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지 6시간만에 C1(5,750m)에 도착했다. 텐트를 쳐두고 오면 다음에 한결 더 수월하겠지만, 불가사의하게도 이 높은 곳까지 까마귀가 날아와 텐트를 찢어놓기 일쑤여서 우리는 등반장비와 취사장비를 카고백에 넣어 텐트 칠 곳만 다져놓고 표지기를 꽂은 다음 곧바로 베이스캠프로 철수했다.
이틀동안 많은 눈이 내려 그동안 장비를 점검하고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11일 나, 김웅식, 선영희, 문창호 대원, 고소포터 라자 5명은 8일 데포시켜 놓은 곳에서 고도 50m를 더 올리는 데 그쳤다. 날씨가 급격히 악화되어 더 이상 진전이 없는 데다가 갑자기 라자가 머리를 감싸며 눈위에 뒹굴렀다. 직감적으로 고소증이 왔음을 인식한 나는 응급조치를 취하게 한 후 조금 더 지켜보았지만 호전될 기미가 없어 지체 없이 하산을 지시했다. 선영희 대원에게 라자와 안자일렌하게 한 후 안전하게 하산할 것을 지시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고소포터가 고소증세를 보이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도 첫 고산등반이었던 칸텡그리 원정 때 고소가 얼마나 무서운지 경험한 적이 있었다. 문득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고산 지식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C1에 도착해보니 컨디션도 좋고 운행 시간도 짧았다. 시간을 계산해보니 정상까지 오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고소등반의 ABC인 업다운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젊은 혈기 하나만으로 정상으로 향하던 중 6,500m 지점에서 갑자기 기절할 것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말로만 듣던 고소증세였다. 기다시피 하여 카자흐스탄 원정대의 구조대 텐트 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적절한 조치를 받고 곧 바로 베이스캠프로 하산해 목숨을 건진 기억이 있다. 그만큼 고소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그 고통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위험하다.
베이스캠프에서 무전으로 급하게 연락이 왔다. 라자가 계속 고통을 호소한다는 내용이었다. 산소를 마시게 하고 안정을 취하도록 지시하고, 선영희 대원과 라자가 두고 간 짐까지 끌어올리느라 나머지 대원들도 파김치가 됐다.
허공 가르며 크레바스 속으로 추락
12일 아침 새벽부터 거센 바람과 눈이 쉴새없이 내렸다. 무전으로 연락해보니 베이스캠프에도 눈이 많이 내린다고 한다. 일단 철수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란 판단이 들어 안자일렌을 하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최악의 날씨였다. 강풍을 동반한 눈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이 퍼부었고, 더구나 화이트아웃 현상까지 겹쳐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대원들에게 긴장을 늦추지 말고 크레바스를 조심하라고 소리쳤다.
하산을 시작한 지 1시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내 몸이 공중을 날았다. 눈앞이 캄캄하고 정신이 혼미했다. 비명을 질렀을 때는 이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크레바스의 허공에 내 몸이 매달려 있었다. 순간 허벅지가 잘려져 나갈 듯한 고통이 느껴졌고 죽음의 공포가 빠르게 스쳐갔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는 생각에 크레바스 밖에서 끌어올리는 대원들에게 자일을 내려달라고 소리를 쳤다. 그러나 김웅식 대원은 정신없이 나를 끌어올리려고만 할 뿐 자일을 내려주지 않았다. 다리에 또 한 번의 참기 어려운 통증이 전해져 왔다.
한참 동안 사투 끝에 김웅식, 문창호 대원이 피켈을 확보하고 두 대원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크레바스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손이 마비된 것일까? 감각이 없다. 대원들이 입으로 내 손을 녹이고 자기들 가슴속에 차디찬 내 손을 넣어 녹이기 시작했다. 눈물겨운 동료들의 노력으로 난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베이스캠프로 돌아와 뜨거운 물에 손발을 담그고 동상연고를 바르는 등 대원들의 응급조치를 받고 청심환을 먹고 안정을 취했다.
안정을 취하면서도 에베레스트 등반을 끝내고 합류하기로 한 구은수, 라관주 대원의 합류가 늦어져 걱정됐다. 지금 대원들도 물론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8,000m급 등반은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걱정하고 있던 차에 오후 늦게 두 대원이 상기된 얼굴로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대원들의 사기가 한층 높아지고 활기가 넘친다.
14일 아침부터 베이스캠프가 분주하다. 라마제를 지내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주민들은 라마제를 지내지 않지만, 네팔식으로라도 우리는 라마제를 지내기로 했다. 어제부터 라마제단을 쌓고 오랜만에 대원들이 그야말로 깨끗이 목욕재계를 했다. 네팔에서 온 옹추 셰르파가 경전을 외우며 안전하고 성공적인 등정를 위하여 제를 올렸다. 이 의식에는 먼저 도착한 오스트리아팀도 참석해 우리의 안전 등반을 기원해 주었다.
라마제를 마치고 서둘러 나, 김웅식, 문창호, 구은수, 라관주 대원, 네팔의 옹추, 닝마 셰르파 8명이 C1으로 향했다. 베이스캠프 출발 6시간만에 C1에 도착해 문창호 대원과 닝마 셰르파를 베이스캠프로 하산시키고, 텐트 한 동을 구축하고 저녁 식사를 하는데 모두들 긴장하고 피곤한 탓인지 식사들을 제대로 못한다. 내일 아침을 위해 협소한 텐트 한 동에 6명이 서로의 몸을 의지하면서 눈을 붙였다.
새벽 5시 베이스캠프에서 문창호 대원과 닝마가 피피로프 200m 1롤, 장비, 부족한 식량을 가지고 출발했다는 무전을 받고 나는 대원들을 독려해 곧바로 C2(6,560m) 구축에 나섰다.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설벽의 각이 심하고 워낙 청빙이 심해 피켈과 크램폰이 잘 먹히지 않아 체력이 많이 소모됐다. 더 이상 운행이 어렵다고 판단해 바나나리지 초입에 장비를 데포시키고 오후 3시 C1으로 하산했다.
C1에서 8명이 새우잠을 잔 뒤 16일 새벽 4시 기상, 6시30분 C2 공격에 나서는데 날씨가 너무 좋다. 설릉 상에서 뒤돌아보니 우리가 개척해 놓은 루트를 통해 그 동안 꼼짝하지 않고 베이스캠프를 지키고 있던 오스트리아팀과 다른 외국팀이 뒤따르고 있다. 데포 짐 수송조와 루트개척조로 대원을 나눠 C2까지 고정로프를 800m 깔았다.
앞으로 소요될 로프가 400m 정도 더 필요했다. 우리 고정로프를 사용하는 대신 C2 이후 소요될 고정로프를 가져오기로 한 오스트리아팀이 C2를 다 구축한 뒤에도 올라오지 않는다. 베이스캠프로 무전을 보냈더니 중간에서 철수했다는 것이다. 대원들 모두 허탈해 한다. 고산등반이 처음인 선영희 대원과 문창호 대원이 짐수송을 하겠다고 자원한다. 가슴이 뭉클했다. 고산등반이 처음이고 더구나 C2까지는 위험과 체력을 요구하는 구간이다.
날씨는 좋았지만 부족한 장비로는 어쩔 수 없다. 화가 났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어렵게 올라온 C2에서 아까운 식량을 소비할 수는 없었다. 대원들을 독려하며 청빙지대와 크레바스를 예측할 수 없는 공포를 뚫고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니 밤 9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24일 날씨가 오랜만에 화창하다. 인공위성으로 받은 일기도에 의하면 26일이 가장 날씨가 좋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26일을 정상 공격일로 정했다. 출발에 앞서 갈등이 나를 괴롭힌다. 욕심 같아서는 모든 대원을 데리고 오르고 싶지만, 많은 인원이 나서면 소요시간과 장비 무게, 식량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해 2개조로 나누기로 결심했다.
이런 결정을 설명하는 순간 몇몇 대원들 얼굴에 서운함이 역력하다. 특히 김웅식 대원은 나와 여러 차례 고산등반을 했고, 구은수 대원은 체력과 고소적응이 잘돼 정상 공격에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제외할 수밖에 없는 나의 심정은 정상을 오른 과정보다 더 심적 고통이 컸다.
25일. 일찍 간단히 요기한 후 라관주 대원, 셰르파 2명과 함께 C2로 향했다. 역시 날씨가 좋다. C2를 출발한 지 12시간만에 위험한 곳에 로프를 설치하며 C3(7,400m)에 밤늦게 도착해 캠프를 구축했다. 베이스캠프에 무전해보니 후발대인 구은수, 김웅식 대원도 차질없이 C1에 도착했다고 한다.
브로드피크 등반으로 대원들 G2 등정 기회 잃어
26일 새벽 1시 거의 뜬눈으로 지새운 나와 라관주 대원은 서로를 격려하며 정상으로 향했다. 라 대원의 컨디션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아 컨디션을 몇 번이나 물어봐도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내가 왜 라관주 대원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이미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온 터라 고소적응은 잘 되어 있지만 체력이 소진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등반의 중요성을 알고 나를 위해 악전고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캠프를 출발,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까지 3시간 정도 등반하는 동안 왼쪽에서 판상 눈사태가 나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안자일렌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의 잘못으로 나머지 세 사람이 위험을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안자일렌을 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안전이 최우선이었기에 몇 번이고 소리를 지르며 대원들을 독려하며 정상으로 향했다. 오전 9시30분까지 운행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정상 같은 봉우리가 보였다. 그곳까지 사력을 다해 올라갔지만 정상이 아니었다. 왼쪽으로 훨씬 더 높은 봉우리가 보였다. 직감적으로 저것이 진짜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능선을 오르고 보니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칼날능선이 버티고 서 있었다. 또 한 번의 두려움과 공포가 강풍과 함께 나를 세차게 몰아친다. 칼날능선을 포기하고 2~3m 내려서서 중국쪽에서 오르는 루트에 고정로프 40m를 깔고 정상으로 향했다.
가셔브룸2봉은 K2를 뒤로하고 서 있어야 정상 포인트라는 것을 새롭게 알았다. 모두들 이 봉 등반을 쉽게만 생각하는데, 우리가 사용한 로프가 무려 2,000m였고, 불과 100m를 전진하는 데 4시간이 걸리는 구간도 있었다. 운행 중 위험한 순간이 어디 한두 곳이겠는가.
오전 11시5분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었다. 정상이었다. 둘이서 부둥켜 안았다. 그리고 베이스캠프로 무전을 날렸다.
“여기는 정상! 여기는 정상!”
27일, 2조 대원들은 정상을 100m 남겨두고 갑자기 몰아닥친 강풍과 정상부의 심한 가스로 C3로 하산, 하루 더 머물며 상황을 살폈으나 기상이 계속 악화되어 곧바로 베이스캠프로 하산하도록 했다. 이후 몇 번의 등정 기회가 있었지만 브로드피크 등반일정 때문에 대원들의 기회를 박탈하고 말았다. 이런 나의 기분을 알기라도 한 듯 대원들은 내색하지 않고 흔쾌히 내 결정에 동의해줬다.
3일 동안 휴식을 취한 후 14좌 등반 마지막 봉인 브로드피크 등반을 위해 29일 포터 40명을 고용해 가셔브룸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콩코르디아 약간 위쪽의 큰 빙하지대를 지나 거의 11시간만에 브로드피크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이미 도착해 있던 외국 원정팀들이 축하한다며 우리 캠프를 방문해 주었다. 그러나 가셔브룸2봉 등정의 감회를 만끽할 시간이 없었다. 저녁에 대원들을 모아 놓고 브로드피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곤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브로드피크에는 우리 팀을 비롯한 외국 원정대 3개팀이 등반중이었으나 새 고정로프를 설치하지 않고 작년에 설치한 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나슬루(8,156m)를 8,000m급 고산 중에서는 쉬운 산이라고 말들 하지만, 나에게는 14좌 중 가장 어렵게 오른 산이다. 무려 네 번의 등반 끝에 정상을 셰르파 없이 단독으로 올랐었다. 이번 브로드피크로가 마지막 등반인데 혹여 네 번의 쓰라린 경험을 안겨준 마나슬루의 재연이 되지 않을까 걱정됐다. 작년 원정 때 김웅식 대원과 정상으로 오르다가 7,600m 지점에서 뜻하지 않은 제트기류를 만나 눈물을 머금고 철수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7월4일쯤 날씨가 쾌청하리란 정보를 입수하고 베이스캠프에서 휴식을 취할 틈도 없이 등반 준비에 착수했다. 베이스캠프에서 급히 철수하는 바람에 장비 몇 개를 두고 왔다. 이틀 뒤 짐이 오기로 했는데 등반하기로 한 날 오전까지도 오지 않아 가슴을 태웠다. 다행히 오전 11시경 짐이 도착해 C1으로 모든 대원이 출발했다. 출발에 앞서 이번 등반은 철저히 알파인스타일로 하기로 하고 상황에 맞는 장비와 식량을 준비했다. 대원들의 고소적응 상태도 양호하고, 날씨 또한 그리 나쁘지 않아 좋은 예감이 들었다.
C1으로 오르다가 눈사태를 맞기도 했고 막내 김영미 대원이 컨디션 난조를 보여 하산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두 대원이 가져온 식량과 장비를 나머지 대원들과 나누어 지고 올랐다. 이미 고소적응이 잘된 대원들이었지만 짐이 무거워 C1에 밤늦게 파김치 상태로 도착했다. 3일, C2 중간까지 선영희 대원과 문창호 대원이 짐을 수송해주고 하산했다.
두 대원이 두고간 짐을 수송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무릎 이상 차오르는 눈을 헤치며 어려운 구간에 하산을 대비한 고정로프를 설치하고, C2(7,000m)에 도착해 설사면에 텐트 한 동을 설치하고나자 이미 오후 6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4일 새벽 0시 기상, 1시에 정상으로 출발했다. 낮에는 정상으로 오르는 콜이 가깝게 느껴졌는데, 막상 운행해보니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헤치며 9시간 사투를 벌였음에도 겨우 약 7,600m 지점밖에 도달하지 못했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는데 아직 반도 오르지 못했다.
마지막 거봉 등정 후에도 쫓아온 죽음의 그림자
베이스캠프에서 무전이 날아왔다. 한국에 있는 엄홍길 선배에게 현재의 위치를 일러주자 아직 콜까지도 못 갔고 앞으로 4시간은 더 운행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순간 많은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14좌 완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원들의 안전이기 때문이다.
나는 함께 등반하는 대원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불안한 마음에 집중력이 떨어져 더 이상 등반이 불가능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14좌를 등반하는 동안 한 명의 대원도 잃지 않았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나의 14좌가 중요해도 대원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무모한 결정은 내릴 수 없었다. 대원들은 아무 말 없이 내 결정을 기다렸다. 대장인 내가 한 순간 판단을 잘못한다면 저 반짝이는 눈망울들을 사지로 등을 떠미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주저 없이 하산을 결정했다.
하산 후 닷새 동안 눈보라와 강풍이 계속됐다. 이웃하고 있는 오스트리아팀 대원 2명이 인공위성을 통해 날씨 정보를 받았다며, 12일이 최고의 날씨라고 귀띔해 주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본국의 산악연맹에서 실시간으로 날씨 정보를 받고 있었다. 은근히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입수한 정보에도 그 때쯤이 최적이었다.
10일 대원들을 독려하면서 C1으로 향했다. 11일 C3를 해발 7,400m 지점에 올려 구축하고 내일 정상을 오르기로 결정했다. 7월12일 새벽 1시 체감온도 30℃가 넘는 새벽바람을 등지고 정상 공격에 나섰다. 예상과 달리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았다. 5시간 동안 악전고투를 하면서 콜을 눈앞에 둔 순간 갑자기 시속 100km가 넘을 듯한 강풍이 불어댔다. 더 이상 전진은 무모했다. 해가 뜨면 바람이 잦아들까 해서 강풍을 온몸으로 버티며 약 1시간을 기다렸지만, 좀처럼 바람이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원들은 그야말로 초죽음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C3로 철수할 것을 지시했다. 그곳에서 기회를 보기로 하고 베이스캠프로 무전을 보냈더니 15일 기상이 좋아진다는 말에 만약 이 순간 베이스캠프로 철수한다면 더 이상의 어택은 불가능할 것이란 판단에 C3에서 1박 하고 13일 C1까지만 하산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부족한 장비와 식량을 보충해 주기 위해 선영희 대원과 문창호 대원이 장비를 지고 올라왔다.
14일 C3로 이동하기에 앞서 구은수 대원이 갑자기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하산시켜줄 것을 고집한다. 순간 구은수 대원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가장 뛰어난 체력과 고소적응을 보였던 구 대원이 하산을 자진한 이유는 C3로 올라가면 텐트가 한 동뿐이어서 6명이 몸을 포개야하는데 나와 다른 대원들의 컨디션을 위해 자진 하산을 결정한 것이다.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맙고 미안하기만 하다.
C1과 C3를 오가며 기회를 보던 중 7월15일 새벽 1시 잠시 바람이 잦아든 사이를 틈타 정상으로 향했다. 콜을 넘자 중국쪽에서 숨을 쉴 수조차 없을 정도의 강풍이 나를 맞아주었다. 그동안 사진으로만 본 것은 온순한 모습이었으나 막상 올라서 보니 왼쪽은 천길 낭떠러지고,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거의 기다시피 해야 될 정도의 암릉이 군데군데 도사리고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정상에 오른 팀들이 없었던 탓인지 고정로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난코스에 약 100여m의 고정로프를 설치하면서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으로 착각할 정도로 높은 서너 개의 봉우리를 지나 능선 끝에 있는 정상을 향해 운행을 계속했다. 약 10시간30분의 악전고투를 거듭하던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력을 다해 마지막 한 발짝을 내디뎠다. 그곳이 바로 브로드피크 정상이었다. 브로드피크 정상부는 악마의 검은 산이라고 불러주고 싶을 정도로 험난했다.
14좌를 등반하면서 늘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나를 짓누르는 공포 속에 떨어야 했다. 이제 그 기나긴 공포의 터널 속에서 그 검은 그림자를 떨쳐버리고 나올 수 있는 순간이 왔다. 정상에서 태극기를 꺼내어 목 놓아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아무런 생각도 느낌도 들지 않았다. 여기가 정상인데, 여기가 분명 정상인데….
하산길에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2002년 캉첸중가 원정길에 오를 때 어머님께서 암 말기 선고를 받으시고 병원에 입원하고 계셨다. 병원을 들락거리며 여위어만 가는 어머님의 손을 부여잡고 갈등을 많이 했다. 임종을 눈앞에 둔 어머님을 뒤로한 채 원정길에 올라야만 했던 철없는 나 자신의 모습과 아무 말씀 없이 못난 아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라며 두 손을 꼬옥 잡아주시던 어머님의 얼굴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어머니 불효자식을 용서하십시오.
12일 오후 5시 C3를 출발한 지 10분 정도 지났을까 발이 엉키면서 순간적으로 오른쪽 아이젠이 왼쪽 종아리를 찍으면서 중심을 잃고 말았다. 설사면을 구르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피켈을 찍었다. 피켈에 나의 체중이 실리면서 한동안 그 자리에 매달려 있었다. 발밑은 끝을 알 수 없는 천길 낭떠러지가 삼킬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여기서 죽을 순 없었다. 사력을 다해서 기어올랐다.
대원들은 이미 눈에서 보이지 않았다. 김웅식 대원은 한참 뒤로 처져 있어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10여 분 남짓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죽음의 공포가 온몸을 엄습해 왔다. 사지에서 벗어난 순간 난 그 자리에서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다. 그 순간에도 눈물이 뒤범벅된 얼굴로 제발 판상 눈사태가 나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간절히 신께 빌었다.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C3에서 C2로 내려가는 길은 심한 화이트아웃 현상으로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다. 1시간 넘게 내려왔지만 우리는 결국 C2를 못찾고 C3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러셀하면서 올라가는 길은 정말이지 정상을 가는 것보다도 더 힘들었다. C3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3시간이 지나서였다.
완등자보다 산을 사랑하는 이로 기억되기를
귀국한 후 내가 이룩한 14좌가 내 인생에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애당초 나는 유명한 산악인을 꿈꿔본 적도, 그리고 산을 처음 접할 때부터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꿈꾸진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산에 대해 공부하고 이해하면서 등반경력을 쌓아 가면서 나의 목표도 조금씩 상향 조정되기 시작했고, 그러자 좀더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등반을 지향하게 됐다. 그러다 어느 순간엔가 나의 목표치가 14좌 완등에 접근해 있음을 알았다.
히말라야 14좌는 분명 나에게 있어 커다란 영광이며 사건이다. 그러나 기록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듯이 더 많은 후배들이 또 다른 형태의 등반으로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할 것이고, 히말라야 14좌 완등자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탄생할 것이다.
한 가지 14좌를 완등하기까지 변하지 않은 나의 철칙은 정확하고 아름다운, 그래서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깨끗한 등반기록을 남기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노력해 왔다고 생각한다. 등정주의니 등로주의니 하며 논란을 벌이는 것은 호사가들의 소모적인 논쟁일 뿐이다.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향해 겸허하게 매진하고, 보편타당한 등반 철학을 가지고 자신이 이룩한 등반 내용에 스스로 책임질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요 며칠사이 신문과 방송 여러 곳에서 14좌 완등에 대한 인터뷰 요청이 밀려온다. 하지만 그게 어디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룩했겠는가. 특히 이번에 함께 한 대원들의 희생정신과 양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지면을 빌어 김웅식 형, 선영희, 구은수, 문창호, 라관주 대원, 그리고 홍일점이자 막내였던 문영미 대원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귀국한 지 보름이 지났다. 그 동안 보살펴 주신 선후배들에게 인사를 다니고 열심히 회사도 다니고 이렇게 등반기도 쓰고,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등반기는 쓸 기회가 없을 것만 같다. 나는 가족과 소중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대신 10년을 넘게 8,000m급 고봉을 등반하면서 심각한 환경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원정대가 쏟아 붓고 떠난 빈 자리에는 엄청난 쓰레기가 산재해 있다. 이제부터 히말라야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싶고 그 쓰레기를 청소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 그리고 작은 바람이 있다면 내가 14좌 완등자로 기억되기보다는 정말 산을 사랑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해 본다.
한왕용 개척산악회 회원·한고상사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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