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칼럼
삼성 퇴임임원 회보, SAMSUNG Forever
2022 가을, 114호, p.16~ 19
풍수기행 (25)
고려의 수도, 강화도의 풍수지리
글ㆍ사진 김정인 회원
강화산성문, 강화도의 성곽과 문은 조선시대에 다시 정비되었다.
강화도는 사면이 바다와 섬, 육지로 둘러싸인 곳으로,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예성강, 임진강, 한강 아래의 아름다운 섬이라 하여 '강화도(江華島)'라고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이 침입하여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39년간 몽골에 항쟁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유사시에 대비한 행궁이 있었다. 강화도 일대를 돌아보고 풍수지리에 대해 알아보았다.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
강화도는 우리나라 섬 중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4번째로 큰 섬이다. 강화도에는 이미 1만~1만 5천 년 전인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았고, 선사시대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천년 전 단군왕검이 하늘 문을 연 곳이 강화도이며, 마니산 정상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참성단이 있고, 개천절에는 지금도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강화도는 고구려시대에는 갑비고차 또는 혈구군이라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해군이라 개칭하였고, '강화'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940)에 이르러 강화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고종 때 (1232) 강화군으로 승격되었고, 1995년에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한반도 중심에 위치한 강화는 구석기시대부터 한민족이 살기 좋은 땅,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하구, 즉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있다.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 때를 틈타 육지와 교류하고, 강과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뗏목 등 이동수단이 개발됨으로써 맹수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고, 각종 해산물을 풍부하게 채취할 수 있는 자연환경 덕분에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정주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본다.
강화도가 한반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인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골제국의 제1차 침입 때부터이다. 당시는 징기즈칸이 건국한 몽골제국이 전 세계를 정복하던 시기였다. 몽골의 침입이 잦자 고려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강화도는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갯벌이 있어 기마병이 주력인 몽골군이 쉽게 접근하기에 어렵다고 보았다. 또한 개경에서 가깝고 땅이 비옥하여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한남정맥이 바다를 건너와 솟은 곳
강화도는 김포반도에서 이어진 내륙이 오랜 세월 침강하면서 섬이 되었다. 강화도는 한남정맥이 위로 솟아 그 기운이 매우 왕성하다. 강화도는 작은 섬이지만 문수산(376m)에서 뭉친 기운이 바다를 건너 40여 개의 산이 솟았다. 마니산489m)이 가장 높고, 혈구산(466m), 진강산(443m), 고려산(436m) 등 크고 작은 산들이 즐비하다.
단군왕검이 하늘 문을 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참성단 아래마니산 원형광장
천년고찰 전등사
전등사 천년살이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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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쓰임새가 큰 땅이다.다리 하나만 놓으면 개성, 파주, 영종도와 연결된다.남북이 통일되어 서울이나 평양 외에 새로운 입지를 잡는다면강화도가 그 후보지가 될 수 있는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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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은 우리나라의 산 중 기(氣)가 가장 센 곳으로 알려져 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이곳에서 전국체전 성화를 채화하기도 한다. 강화도에는 천년이 넘는 고찰이 전등사(381년), 백련사(416년), 적석사(416년), 보문사(635년), 정수사(639년) 등 5개나 된다. 천년이 넘는 사찰이 많다는 것은 강화도가 좋은 명당이라는 것이다.또한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3강이 강화도로 모여들며, 3강
이 바다와 만난다. 3강으로부터 흘러든 퇴적물이 강화도에쌓여 땅이 비옥하다. 강화도는 농토가 비옥하고 풍부하여자급자족이 가능했다.
'한 해 농사를 지으면 10년은 먹고살 수 있다'라는 옛말이전해질 정도로 농사가 잘되는 곳이며,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이미 간척사업이 시작되었다. 강화도는 시대별로 그 지도가 달라질 정도로 농토가 늘어났다. 강화도는고구마 모양인데, 고구마는 강화도의 특산물이며 강화 인삼,순무, 강화 쌀 등의 특산품이 유명하다.
강화도는 사면이 바다와 섬, 육지로 둘러싸여 생기(生氣)가응집된다. 북쪽으로는 개성이고, 동쪽으로는 김포, 서쪽으로는 교동과 석모도, 남쪽으로는 영종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겹겹이 감싸 준다.
그리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풍수적으로 보면 음양의 교구지이다. 강화도는 10m에 이르는 간만의 차를 나타내며, 이러한 간만의 차에 의하여 개펄이 형성된다. 개펄은 육지가되기도 하고, 바다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개펄은 음과 양의기운이 서로 결합하는 이른바 음양이 화(和)하는 공간으로서 생기(生氣)가 충만하다.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현상은 음과 양이 결합하는 과정으로 분석되는데, 인체로말하면 생식기의 역할과도 같다고 해석한다.
고려궁지는 개경으로 환도시 모든 건물을 없앴고, 조선시대 관헌들이 이곳에 들어섰다.
철종 이원범이 왕이 되기 전 살던 집으로 왕이 된 후 그의 집은 '용흥궁'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었다.
노아의 방주, 고려의 수도 고려궁지
강화도는 몽골의 침입에 항거하여 39년간 수도의 역할을 한 곳이다. 고려 고종은 몽골의 침입을 받자 1232년 7월 7일 수도 개경을 뒤로하고 강화도로 천도하여 39년간을 버텼다. 39년간 버티는 동안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켰다. 강화의 궁궐은 개경의 궁궐 그대로 짓고 궁궐의 이름도 개경 때의 이름 그대로 사용하였다.
1270년 원나라(몽골제국)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강화도에 성벽이나 왕궁의 모든 것을 없앴지만, 7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의 흔적들은 강화도에 남아 있다. 고려시대의 왕릉 4개(홍릉, 석릉, 곤릉, 가릉)가 남아 있고, 강화의 성벽과 고려궁지가 일부 복원되었다.
조선시대 25대 왕인 철종 임금이 살던 용흥궁이 고려궁지 경내에 있고, 용흥궁 바로 뒤 언덕에는 노아의 방주 모양의 성공회 성당이 100년 전에 세워졌다. 1232년 한여름 고려고종이 강화도로 갑자기 오자 새우젓으로 간을 한 돼지고기를 바쳤는데 그 맛이 일품이요, 영양가도 최고였다. 그때 왕이 먹었던 젓국을 지금도 만들어 토속음식으로 하고 있는데, 고려의 음식 문화를 이어온 식당도 고려궁지 터 부근에 있다.
고려궁지 권역에는 노아의 방주 모양의 성공회 성당이 100년 전에 들어섰다.
강화도의 잠재적 가능성
강화도는 개경에서도 가깝고 수도 서울에서도 가깝다. 강화도는 1995년에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인천은 육지부(346㎢)와 도서부(711㎢)로 구성되어 있는데 섬지역이 육지의 2배에 달하며, 강화군은 인천의 육지부보다 더 큰 면적(401㎢)이다. 인천광역시의 인구는 300여 만명이나 강화군의 인구는 7만여 명으로 인구의 비중은 2.3%에 불과하다.
앞으로 이곳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강화도의 과제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농사가 잘되면 제일이었으나 현대 사회에서는 새로운 용도 개발이 요구된다. 동북아시대, 통일 한국에 대비하여 강화도를 바라봐야 할 때다. 강화도는 쓰임새가 큰 땅이다. 다리 하나만 놓으면 개성, 파주, 영종도와 연결된다. 남북이 통일되어 서울이나 평양 외에 새로운 입지를 잡는다면 강화도가 그 후보지가 될 수 있는 땅이다.
풍수기행(25)
고려의 수도, 강화도의 풍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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