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의 모범행, 문수의 무애행 / 대원 큰스님
문수보살은 어떤 한계가 정해진 모양을 나타내 보이는 게 아니라
걸림 없는 무애행을 한다. 이것만이 道라는 한계를 지어서 보여주면
그건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중생을 제도하는 데는 모범을 보여야 된다.
보현보살은 그런 모범적인 행을 하는데,
온 몸을 다 바쳐도 했다는 상(相)이 없다.
그러나 그런 보현의 모범행만이 옳고,
문수의 무애행은 틀렸다고 보면 그걸 단견(斷見)이라고 한다.
한쪽에 치우쳐서 떨어지는 사람이다.
도라는 자체는 단견(斷見)도 아니고 상견(常見)도 아니다.
그런데 중생들이 괜히 잘못 알아가지고 단견에 떨어지고 상견에 떨어진다.
진리의 세계에서 문수보살의 행은 무애행이라,
걸림이 없어서 개다리도 씹으며 나타나고, 거지처럼 나타나고,
때에 따라서는 깡패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금도 틀린 것이 없다.
중생들은 겉모양만 보니까 나쁜 중이라고 욕하는 거다.
그분이 문수보살인 줄도 모르고 중생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얼마나 서글프고 불쌍한가.
속세의 불자만 눈이 먼 게 아니라 절에 있는 중도 눈이 멀어가지고
그런 분별하고 따지고 시비한다. 기가 차는 거다.
일생을 그러고 산다. 그러니 하나도 공부가 늘지 않는다.
깨달음의 마음의 세계에서 행하는 데는 티끌만한 것도 흠을 잡을 게 없다.
그렇다고 해서 깨닫지 못한 여러분이 깨달은 것처럼
무애행을 하라는 말은 아니다. 잘못 착각하고,
'아하, 우리도 이렇게 해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러면 안 된다.
깨달은 사람은 무엇을 해도 허물이 없다는 거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자기 개인적인 사사로운 게 없다.
중생을 위해서 행을 그렇게 해서 나타낼 뿐이지,
중생들처럼 자기를 위해서 하는 건 없다.
중생을 위해서 그렇게 나타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24.10.06 학산 대원 대종사)
출처: 학림사 오등선원 지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