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팬데믹 직전에 만난 ‘오멜라스’ 이야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국내에 확산되기 직전 겨울방학, 팬데믹을 미처 예견하지 못한 저는 밖에 나가 놀지 않고 방구석에서 독서를 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그중 기억에 남는 책은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목에 이끌려 읽기 시작한 이 책에는 가상의 마을 ‘오멜라스’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멜라스는 풍요와 행복이 넘치는 마을이지요. 다만, 이 마을의 번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단 한 명의 아이가 캄캄한 지하실에 갇혀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하더라도, 오멜라스에 이런 불편한 진실이 존재하는 한 이곳을 평화로운 마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평화롭고 풍요로운 지구에 살고 있는 저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1997년 늦가을에 태어난 저는 목회자 가정에서 세 자녀 중 막내로 자랐습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 교회에서는 인문학 독서학교가 열렸습니다. 덕분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헨리 D. 소로우의 《월든》과 《시민 불복종》, 짐 월리스의 《회심》을 읽으면서 청소년 시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 책들은 제게 많은 것을 일러주었습니다. 《오래된 미래》는 빈약한 자원과 혹독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생태적 지혜를 통해 1,000년이 넘도록 평화롭고 건강하게 이어오던 공동체가 서구식 개발 속에서 환경 파괴와 사회적 분열을 겪는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월든》 《시민 불복종》을 쓴 소로우는, 안정된 직업을 갖지 않고 측량 일이나 목수 일 같은 정직한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한 인물로 ‘현명한 사람이라면 정의를 운수에 맡기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정의가 다수의 힘을 통해 실현되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정의를 선호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정의를 이루는 데 동참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마지막으로, 짐 월리스의 《회심》은 그리스도를 따른 회심이 빈곤과 전쟁 등 부정의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영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정도로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실전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을 갖고 대학에 입학한 이후, 저는 작년 한 해 동안 총학생회에서 정책국장으로 일했습니다. 총학생회 공약으로 ‘학생식당 채식 식단 추가’를 내거는 등 대학문화의 민주성, 다양성 보장을 기조로 출범한 총학생회였기에, 큰 고민 없이 합류했습니다. 총학생회 집행부로서 캠퍼스 외관 조명 소등 캠페인도 추진하고, 텀블러를 배부하고, 비건 간식 행사도 추진하는 등 나름으로 이것저것 시도해보았습니다. 작은 변화들이 중요하다는 마음으로 진정성을 갖고 일했지요. 그러나 1년간 임기를 채우고 난 뒤 드는 생각은 ‘이 정도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채식 공약을 들고 나온 총학생회였지만, 중요한 행사를 마치면 기분을 내기 위해 소고기집, 돼지갈비집으로 단체 회식을 갔습니다. 초반에는 너무 고생한 우리들밖에 안 보였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고깃집에서 회포를 풀었습니다. 임기 중반쯤에 이르니, 채식 식단을 도입하고 채식 간식을 선정하는 회의에 앉아있는 저 자신이 가증스럽게 느껴지더군요. 당시 저는 기후 문제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기후위기에 공감하면서 대학에서 채식 문화를 위해 힘쓰는 내가, 왜 정작 채식을 시도할 생각은 안 하는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문제 해결에 동참하지 않으면, 그 문제의 일부가 되고 만다는 말이 있습니다. 1kg의 고기를 위해 얼마나 많은 지구 자원이 고갈되는지를 저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나서부터는 육식의 무게를 가벼이 여길 수 없었습니다. 표리부동한 저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낀 뒤, 그렇게 즐겨 찾던 고기반찬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습관적인 육류 소비를 하지 않게 되었고, 무한리필 고깃집 회식을 하는 날에는 옆 골목 일식집에서 초밥을 사와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기도 했습니다.
숱한 회식 자리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하루가 있습니다. 간만에 총학생회 전체 회식을 가는 날, 사전 메뉴 수요 조사와 투표를 거쳐 무한리필 고깃집이 회식 장소로 선정되었습니다. 따로 샐러드를 먹고 2차부터 합류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동료 3명이 샐러드를 먹으러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혼밥이 워낙 익숙하고 편했던지라, 누군가와 함께 식사한다는 것이 이렇게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그날 고깃집 근처 샐러드 가게에서의 든든한 식사는 저에게 오랫동안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청년기후긴급행동’이 꾸려지다
다사다난했던 총학생회 임기를 마치고, 좀 더 적극적으로 기후 문제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기후위기 관련 세미나를 통해 알게 된 분으로부터 ‘학교, 지역 상관없이 기후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행동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올 초에 서울 거주자 중심으로 ‘청년기후긴급행동’이 꾸려졌고, 현재는 제주, 광주, 부산 등 각지에서 50명 이상의 활동가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청년기후긴급행동에서 만나게 된 분들은 거의 모두 초면이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종종 예기치 못한 접점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일례로 식사 자리에서 가족을 주제로 이야기하다가, 제 친언니가 강북구 인수마을 밝은누리에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러자 옆자리에서 식사하시던 분이 자기 고향 친구도 상경해서 밝은누리에서 지낸다고 하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두 분이 같은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기후행동이라는 목적 하나로 새롭게 만나는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지인, 자주 가는 장소, 인상 깊었던 강연이나 논문 등 개인적이고 소소한 공통분모가 서로를 이어주었습니다.
지난 5월 열린 청년긴급기후행동의 '탈석탄 그린뉴딜' 촉구 기자회견 (사진: 필자 제공)
하루는 한 신문사의 요청으로 기후위기 활동가 5명이 함께 영상 인터뷰를 촬영했습니다. “기후위기 활동을 하다가 기운이 빠질 때는 언제인가요?”라는 기자님의 질문에, 한 분은 다음 순간을 꼽았습니다. 본인이 기후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임하는 걸 지켜 본 친구가 “너 교회 다녀?” 하고 묻더랍니다. 그 활동가는 ‘나는 남들보다 특별히 착해서 기후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내 삶과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건데…’ 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물론 기독교인도 아니셨고요.
교회에 다닌다는 말을 꺼내기가 민망할 만큼 기독교의 사회적 입지가 위태로워졌음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일반의 기대치는 높습니다. 황송하게도 질문을 받았던 그 활동가도, 그분에게 질문한 친구 분도 교회 다니는 사람을 ‘기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 ‘특별히 착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지만,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의문의 1승’을 거둔 것이 의문스러웠습니다. 적어도 제 주변에는 기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들 중 그리스도인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후운동을 ‘국내 온실가스 배출 비중의 86%를 차지하는 에너지의 전환, 산업 구조 재편, 기후위기 대응 법제화 등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활동’이라고 정의한다면 말이죠. 하지만 많은 기업과 정부기관에서는 개인의 일상 속 작은 실천을 기후위기 대응책으로 제시하는 정도가 우리의 현실입니다.
기후위기, 개인의 실천으로만 대응할 수 없다
기후위기의 원인은 18세기 이후 지속되어온 산업화와 인구 증가에 따른 과도한 온실가스 배출입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중들의 문제의식이 높아지면서 일회용품 쓰지 않기, 에코백과 텀블러 이용하기 등 많은 실천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유한한 지구 자원의 소중함을 인지하고 지속가능한 생활 방식으로 전환하려는 개개인의 노력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기후위기의 대응책으로 개인의 작은 실천만을 강조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부문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국내 온실가스 배출량의 86.8%를 에너지(철강, 전기 및 열 생산 등) 부문이 차지합니다.(2017년, 환경부) 2021년부터 적용되는 파리협약에 따라 대한민국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 2억 톤을 줄여야만 합니다. 이는 기후위기가 결코 개인적인 실천만으로 대응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걸 말해줍니다.
올해 7월 14일 정부의 ‘한국판 뉴딜’ 발표 후, 청년기후긴급행동에서는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한국판 뉴딜 국민보고대회 내내 문재인 대통령님과 홍남기 경제부총리님, 그리고 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님의 입에서는 무엇을 도입하겠다, 무엇을 실시하겠다는 포부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100조 원을 뛰어넘는 규모의 건국 이래 최대 프로젝트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한국판 뉴딜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치셨습니다. 하지만, 국가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재정 투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한국판 뉴딜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100년 설계’라는데, 인류에게 22세기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인식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님은 ‘위기는 곧 불평등 심화’라는 공식을 깨겠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윤과 성장이라는 가치가 생명 위에 군림하는 한, 불평등한 사회는 그린뉴딜 이후에도 지속될 것입니다. 한국판 뉴딜의 10대 대표 과제 중 하나만 짚고 가자면, 조정식 정책위의장은 학교 현장을 혁신하겠다며 ‘그린스마트스쿨’을 야심차게 발표했습니다. ‘그린스마트스쿨’ 사업이란 전국 초중고교에 친환경 단열재를 깔고 와이파이, 교육용 전자기기를 보급하는 사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전환한다는 것일까요? 입시 위주의 공교육 체질 개선, 대학 무상교육 실시 등 기존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 없이는 대한민국의 대전환은 결코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발전'을 위해 이 땅에 오지 않았다
청년기후긴급행동이 광화문 앞에서 그린뉴딜 기자회견을 가졌던 그 날,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제4회 대한민국 청년의 날 조직위원회 발대식’이 개최되었습니다. 행사의 당사자로 참석한 많은 청년들은 대부분 의자가 아닌 통로 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았습니다. 저도 이전에 참석한 그린뉴딜 국회 토론회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유명한 해외 석학의 기조연설이 준비된 토론회 현장은 시작 전부터 많은 사람들로 메워졌습니다. 저는 바닥에 앉아서 토론회를 들었지요. 참석 의원들은 연이은 축사와 사진 촬영까지 마친 뒤 대부분 자리를 떠났습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직접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후위기 대응에 있어서는 이를 더더욱 절감하고 있습니다. 모든 세대, 지역, 계층에 기후위기라는 파도가 덮쳐오지만,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지 않습니다. 《2050 거주불능 지구》라는 책 제목에 기대어 얘기한다면, 한계치를 넘어 종말로 치닫는 2050년 사회를 책임질 세대는 지금의 10대, 20대입니다. 2020년의 정부와 국회, 기업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왜 하지 않는지 고민하고 직접 목소리를 내야만 우리가 원하는 미래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닿을 수 있습니다. 기후변화는 명백하고 심각한 위기니까 국가가, 사회가 알아서 대응해줄 것이라 믿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2014년 4월 16일의 교훈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굶주리고 추위에 떨던 인간이 기술과 경제의 발전으로 매끼 든든한 밥을 먹고 따뜻한 집에 살 수 있게 된 것은 인류 문명의 진보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발전’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핀잔을 들을 수 있지만, 배부른 소리가 맞습니다. GDP 세계 10위 국가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여전히 식량 주권, 불평등 해소, 살 만한 미래보다 경제 성장을 우위에 둔다면, 그것이야말로 뭔가 잘못된 것이겠죠. 고도의 기술과 산업으로 인해 결국 자멸하고 만다면, 진보와 성장, 지능은 무슨 소용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루과이의 대통령이었던 호세 무히카는 “우리 문명은 거짓된 도전을 하고 있다. 이제 낭비는 문화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지금처럼 소비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기후변화는 그 원인에 대한 책임이 거의 없는 국가들이 훨씬 더 빈번하게 위험에 노출되는 현상, 즉 ‘기후 불평등’을 야기합니다. 2021년에 적용되는 파리협약은 선진국에만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지운 교토의정서와는 달리, 197개 당사국이 모두 지켜야 하는 최초의 세계 기후협약입니다. 197개 당사국 중 온실가스 배출 상위 10개 국가의 배출 비중만 63.9%에 달합니다.(2016년,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그리고 이 가운데 한국은 9위를 차지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일상에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숙고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하는 일상의 경건
올해 54일간 이어진 장마뿐 아니라 폭염, 태풍, 산불 등 이상기후 현상은 매해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는 전쟁 난민보다 ‘기후 난민’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호주에서는 한국 등 식량 자급률이 낮은 국가들로부터 기후 난민들이 유입될 상황에 대비하여 중장기적인 국가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보고서가 발표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서 재앙을 겪고 사랑하는 존재들을 잃기 전까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애굽의 바로 왕처럼, 우리는 이미 깨어진 세상의 경고를 받아들이기까지 너무도 많은 시간과 희생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오멜라스 마을의 연약한 사람들이 다시금 떠오릅니다.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쉽게 행동에 나서지 않는 건 이기심에 쫓겨 진실을 외면하고 문제를 등한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곧 도래할 암담한 미래와 불안감에 압도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세상의 종말은 〈2012〉 〈투모로우〉와 같은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처럼 한순간에 찾아오지 않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기후위기의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경고처럼, 앞으로 우리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기후재앙을 눈앞에 둔 현재,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는 게 사치인 것만 같고 윤리적으로 맞는지도 의문스럽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우리에게 닥쳐올 앞날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직접 들려줍니다. 그리고 어떤 가능성도 없었음에도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력함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주위를 서성거리며 조심스레 의문을 던지지도 않았습니다. 2020년에도 하나님께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고 온전히 무릎 꿇는 한 사람을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까요?
“역사적인 구체성을 띨 때, 제자도는 세상을 철저하게 변혁하는 급진적 힘이 된다.” 짐 월리스의 문장을 마음 한 켠에 품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가슴 뛰는 문장에 비하면 저의 하루는 너무나도 보잘 것 없습니다. 얼마 전 어머니와 함께 산책할 때,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열정과 순수를 잃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시편 119편 9절 말씀처럼 청년은 무엇으로도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열정은 곧 식기 마련이고요. 그럼에도 그 불가능을 바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주의 말씀만 지키고자 하는 경건입니다.
성경은 저에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라고 답을 주었습니다.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하루, 말씀과 하나님 앞에 독대하는 훈련이 저를 살아가게 합니다. 주의 장막에서 하루가 궁정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는 말을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면 저는 충분합니다. 암울한 세상 가운데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하루를 사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강은빈
첫댓글 우리가 원하는 미래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닿을 수 있도록 고민하고 적접 목소리를 내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