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문화사랑 오솔길
 
 
 
카페 게시글
중원문화유산 스크랩 동양방면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비
신기루 추천 0 조회 156 06.11.26 18:07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비신에 총알흔적이 수드룩하다. 못난이들....   6.25의 아픈 상처인가 !? 

 

  법경대사비의 이수     중앙에

 

 崔彦撝(868~944 執事省侍朗瑞書院學士.文翰.大相元鳳大學士翰林院令平章事)가

 奉 敎撰,     서예가 구족달(具足達) 奉 敎書

 

                                      ........... 대왕전하영언부..........

내가 임금과 향화(香火)의 인연을 맺었으니, 마땅히 최후에 大王殿下를 찾아가서

부처님께서 마지막 부촉(付囑)하신 당부를 정성껏 왕신(王臣)에게 부탁하리라...

 

   법경대사비 비좌      정면 ↑

                                                                                         측면  ↓

 

  법경대사자등탑비의 비좌.   귀부의 꼬리,

 

   법경대사자등 비좌인  거북의 뒷발및 육각귀갑문양내의  

 

  옛 정토사의 건물 장대석 !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 모형을 다시 건립하여 비옆에 2005.12.20 점안 봉안  

                                       

 (원품 1017년에 건립한 국보 제102호.보물 제359호는 중앙박물관에)↓사진 :문화재청

  

 

  동량면 하천리  開天安 솟대    조각가 윤영호 作

 

 정토사 가는길 주변의 가로수길을 능금나무로 가로수를 조성하엿다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    보물 제17호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정토사터에 전하고 있는 비(碑)로, 신라말·고려초의  법경대사탑비이다.
정토사는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법경대사가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태조 24년(941)에 입적하자, 그의 뒤를 이어 홍법대사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비받침에 새겨진 거북조각이나 머릿돌의 용조각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비신의 첫머리에 ‘법경대사’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대사의 행적이 새겨져 있다.

 

이수의 중앙에 字가 크게 새겨지고, 비좌인 거북의 등에는 육각문에 字를

 

법경대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5년(879)에 태어나  20세에 출가 하였다.
906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도건대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924년에 귀국하였다.

경애왕은 그를 국사로 대우하여 정토사의 주지로 임명하였고, 고려 태조 24년(941)에

63세로 입적하자 태조는 시호를 법경, 탑이름을 ‘자등’이라 내렸다.

 

태조 26년(943)에 이 비를 세웠고,사리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이곳에 남아 있지 않다.

 

이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 최언위가 봉 교찬,  구족달(具足達)이 봉 교서.  

충주댐에 의해 지금은 원래의 자리에서 300m 후방의 뒤편 언덕 위로 물러나 있다(1984년).

 

★홍법국사는 통일신라 선덕왕대에 태어나 12살의 나이에 출가하였고,당나라를 다녀온

   뒤 선(禪)을 크게 일으켰다. 정토사에 머물다 입적,시호:弘法, 탑호:實相, 손몽주奉撰.
      대송고려국중원부개천산정토사원광편조홍법대선사

     (大宋高麗國中原部開天山淨土寺圓光遍炤弘法大禪師).

국보 제102호(부도)와 보물 제359호(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다음검색
댓글
  • 06.11.26 22:11

    첫댓글 신기루님 오늘 정토사 법경대사비도 돌아보고 왔어요? 다시 글 읽으니 감이 옵니다. 감사드립니다.

  • 06.11.29 07:46

    늘 대할때 마다 시공을 열어 주는 귀한 유산 입니다....

  • 06.12.13 08:43

    좋은 자료에 감사....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