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암봉(臺巖峰)과 요령봉(搖鈴峰) 산행을 하기 위해선 옻골마을을 원점회귀로 하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다.
옻골마을은 3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오목하다고 옻골이라고 불리웠다지만, 주변에 옻나무가 많아 옻골이라고 불리웠다는 설이 더 유력해 뵌다.
옻골을 '칠계(漆溪)라고도 부르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 옻 칠(漆),시내 계(溪)
옻골마을엔 ‘대구 경주최씨 종택(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61호)’이 있어 살펴볼 만하다.
오래된 한옥 2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성촌엔 수령 350년이 넘는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오래된 마을임을 대변해 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공을 세웠던 대암(臺巖) 최동집(崔東㠍 1586~1661)이 1616년(광해 8년)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경주최씨 종택은 'ㅁ'자형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로 나뉘어 있으며, 중앙의 개방된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로 배치돼 있다.
안채에는 2개의 방과 부엌, 사랑채에는 사랑방과 침방을 두고 있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다양한 용도의 공간이다.
골목을 따라 기와지붕을 이고있는 돌담장은 한옥 마을의 격조를 한층 더 고풍스럽게 한다.
나는 일행들에 뒤쳐져 최씨고택부터 먼저 답사하였고, 산길 10여분 만에 뜻밖의 사고소식을 접하였다.
산행은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이 답사기만 올리게 된 것.
참고하는 국제신문 지도 <클릭하면 원본크기>
네비엔 대구 옻골마을을 입력.
더 이상 차량진입이 불가한 곳에 문화관광해설사의 집과 옻골마을 표지판이 있다.
옻골마을 돌담길(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266호) 안내석을 일별하고...
잘 설계된 화장실과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을 곁눈질하며...
옻골마을 표지판 뒤로 오른다.
길 옆 고목 두 그루가 반기는 곳에서...
좌측으로 나란히 고목들이 줄지어 선 곳에 인공호수가 꾸며져 있다.
이 나무들은 비보풍수(裨補風水)를 위한 것. 이는 풍수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고치는 술법을 말한다.
일행들은 좌측 인공호수 나무다리를 건너며...
산길로 바로 붙지만 나는 먼저 '경주최씨종택'을 답사하기 위하여 그들을 배웅하듯 뒤쳐져 있다.
대암봉이 거북의 형상을 하고 있어 여기에 인공호수를 조성하여 풍수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함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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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나무 두 그루는...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일명 최동집 나무라고 이름지어졌다.
답사조들과 함께 동선을 이어가고 있지만 나는 마음이 바쁜 사람. 주어진 산행코스를 다 타야하기 때문이다.
정면으로 올려다 보이는 거북형상의 대암봉.
골목을 따라 흙과 돌로 쌓아올린 토담은 전통가옥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지만 이곳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만 답사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
골목을 돌다보면 막다른 곳에 '대구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이 있다.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 제261호「대구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大邱 屯山洞 慶州崔氏 宗宅)」안내판.
대문을 들어서자 백불고택(百弗古宅) 현판이 걸린 사랑채.
현판 뒤로 휘어진 써까레가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백불고택 현판은 백불암 9대 종손인 최진돈(崔晉惇, 1947년생) 씨의 부친인 8대 백헌(白軒) 최병찬(崔秉瓚)의 글씨란다.
안쪽에 걸린 수구당(數咎堂) 현판. 이곳은 백불암이 초호를 ‘수구암(數咎庵)’으로 짓고 사랑채에 수구당의 현판을 걸어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백불암(百弗庵)은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최흥원(崔興遠 1705∼1786)선생의 호로서 환갑 년(영조41, 1765)에 새로 지은 호다.
‘백부지(百不知) 백불능(百弗能)’에서 따왔다. ‘불(弗)에는 부(不)의 뜻이 있어서 하나도 알지 못하고, 하나도 하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수구당 현판은 최종응(崔鐘應ㆍ1873~1943)의 글씨.
사랑채는 두 채의 건물을 연결한 모양.
'ㅁ'자 형의 안채.
대청마루에 걸린 글귀는...
조상을 숭상하고, 자손을 사랑하라는 숭조애손(崇祖愛孫)과...
예도를 가문에 전하라는 의미의 예도전가(禮道傳家). 낙관엔 임진년 여름 이당(怡堂).
그렇다면 조선후기의 서예가인 이당 조면호인가? 아니면 근대/일제강점기의 서화가인 이당 이경승인가? 더 알길이 없다.
숭모각(崇慕閣). 대구시 시도유형문화재 제51호(2003.04.30)로 지정된 종가소장전적 2종 664점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유형원(柳馨遠)이 지은 반계수록(磻溪隨錄)을 1770년 백불암이 영조의 명을 받아 최초로 교정한 장소.
주마간산으로 한바퀴 돈 뒤...
사랑채로 돌아 나왔다.
‘광당정사(光堂精舍)’는 ‘빛이 가득한 집’이라는 뜻.
광당정사 현판.
옆 골목으로 조금 돌았더니...
개울가에 지어진 동계정(東溪亭). 동계(東溪)는 백불암의 아들 최주진(崔周鎭)이다. 동계정의 전서체 현판은 미수 허목(許穆))선생의 글씨.
이제 앞서건 사람들의 꽁무니를 물어야 한다.
아까 일행들이 올랐던 인공호수까지 내려가지 않고, 네이버지도에 그어진 트랙을 따르기로 했다.
옻골마을 회화나무에서 회화나무집으로 들어가...
산자락으로 바로 붙었더니...
길은 그런데로 괜찮은 편.
잇단 묘지는...
유인창녕조씨지묘.
이어지는 능선의 잇단 무덤에...
반듯한 비석이 있어 살펴보니...
'칠호(漆滸)선생 경주최씨지묘'.
5대손 칠호(漆滸) 시교(時敎)는 일제 때 국채보상운동을 벌인 대구 지역 대표 중의 한 분이다.
'광복후 경술사월'이면 1970년. ‘증손 병찬 근서(曾孫 秉瓚謹書)’라고 쓰여져 있으니 아까 그 백불고택 현판을 쓴 8대손 최병찬이다.
일행들이 올랐던 그 등로는 잘 닦여진 길.
이정표.
해발 약 190m 초입의 등로에서 서표대장이 쓰러졌다 한다.
심폐소생술에다 온갖 응급처치를 하였으나 그는 깨어나지 못한다.
얼마 후 바람을 일으키며 헬기가 도착하였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환자를 태운 헬기는 이착륙장이 있는 경북대병원으로 떠났고...
우리는 망연자실하였다.
뭐가 그리 급해 앞서 떠나는가? 서표대장.
좋아했던 산에서 산바람이 되어 떠난 걸 그나마 위로 삼아야 하는가?
분명한 건 이제 당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열흘 전 담양의 만덕산에서 “요새 술 먹나?” 하였더니 손을 썩 내밀었지?
몸이 좋지 않다며 한동안 술을 먹지 않더니 그날 청주 한 잔을 냉큼 받아 먹대.
그게 내가 서표대장께 권한 마지막 잔이 되고 말았네.
저승에도 산이 있겠지?
즐겨 마시던 막걸리도 있겠고?
좋은 산친구들과 산을 타면서 목이 마르면 막걸리도 한 잔씩 들게나.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져 있지만 언젠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렇게 가겠지.
우리 모두 스치는 바람이고, 떠가는 구름인 것을...
잘 가~~ 서표대장,
첫댓글 어디서 나도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군요.
살고 죽는것이 이따위로 불가항력이고 하늘의 뜻이라 해야하는지 ,,,
이 자릴 빌려서 뒤늦게나마 먼저 떠난 악우의 명복을 빕니다.
남무관새음보살 ...
새벽 선잠을 깨면 다시 잠을 들이지 못하고 뒤척이게 됩니다. 남의 일로만 알았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면서 나에겐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산을 제일로 알던/ 정든 그 악우/ 언제나 꿈속에서/ 만나보던 그 악우여../ 눈 덮인 알프스여/ 대답해 주려마.
나에게 한 마디만/ 가르쳐 다오./ 덧없이 사라져간/ 사랑했던 그 岳友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