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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합의 역사
1. 집합
집합은 수학의 기초가 되는 부분으로 여러 분들도 처음으로 홍 성대님의 베스트셀러인 수학의 정석을 공부 했을 것이다. 집합은 모든 영역과 연관지어져 있다. 특히, 집합에서는 주어진 조건을 이용하여 어떤 사실을 추측해 내는 추론능력의 문제, 유한집합의 원소의 개수와 관련된 실생활을 소재로 한 수학 외적 문제, 문장으로부터 정확한 집합의 표현과 표현된 집합의 성질을 파악하는 능력을 묻는 문제, 집합의 연산을 통하여 벤다이어그램을 나타낼 수 있는 표현 능력의 문제 등이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의 내용은 처음부터 필자가 논하였듯이 여기서는 수학을 가장 쉽게 근접하여 아주 재미있는 학문으로 인식하기 위한 그래서 이렇게 만들어진 이 골치 아픈 학문을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각자의 생활에서 특히 산업 현장에서 유용하게 쓰이기 위함이라고 했다. 따라서 상기의 내용은 여러 분들 각자의 추리에서 결과되어지는 것이고 그 전 단계를 아주 재미있게 살펴나아가 보자.
(1) 집합은 왜 만들었을까?
물론 필요하니깐 만들었을 것이다. 집합은 왜 만들었을까? 처음 수학책을 접하면 집합이 제일 먼저 나온다. 사실 이 부분에서는 거의 수학 실력의차이는 나질 않는다. 하지만 점점 차이가 벌어지고 소외감이 느껴지는 때가 오면서 수학 잘하는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 무슨 B612별에서 이상한 모자를 쓰고 연구하는 외계인으로 보일 정도로 내겐 너무나 먼 학문으로 남게 만든 첫 번째 손님이다. 수학책의 첫 단원을 항상 장식하는 것은 늘‘집합’이다. 집합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일까? 아니면 집합이 그 중 쉬운 내용이라는 뜻일까? 집합이 현대수학에서 확고 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집합론은 독일의 수학자 칸토어(Cantor ; 1845~1918)에 의해 창시되어 체계화되었다. 그렇다면 칸토어는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그 당시에는 생소하기만 한 개념인 집합론을 연구한 걸까? 칸토어가 집합론을 창시하고 연구한 목적은 바로 무한의 성질을 규명하기 위해서 였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운 집합이 무한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의아해 할 것이다. 이것은 칸토어가 집합론을 세운 것은 주로 무한 집합을 다루기 위해서인데 학교에서는 주로 유한 집합을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분은 집합 하면 집합의 연산 같은 것이 전부라고 생각 했을지 모르나 집합은 무한을 보다 조직적으로 다루기 위해 창조된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2) 큰 집합과 작은 집합
두 집합 A, B 의 크기를 비교하려면, A의 원소 개수를 구한 다음, B의 원소 개수를 구하여 두 수 를 비교하면 된다. 예를 들어 A={1, 2, 3, 4}, B={쌀, 보리, 조, 콩, 기장} 일 때 원소의 개수를 나타내는 기호로 |A| 또는 |B|로 나타내면 A와 B의 원소의 개수는 각각 4개와 5개이므로 |A|=4, |B|=5로 나타낼 수 있고 B의 원소 개수가 A의 원소 개수보다 크다는 것을 안다. 집합 A에 대하여 굳이 A의 원소의 개수 |A|를 정의하고자 한다면, A가 유한 집합일 경우는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A가 유한 집합이 아닌 집합이면 또 다른 무한 집합 B와 크기를 비교 할 때 어떻게 하면 그 크기를 비교할 수 있을까? 원시 시대뿐 아니라 지금 오지의 마을에서도“셋”을 넘는 수를 세는 방법을 가지지 못한 마을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을 사람들은 자기가 기르는 닭의 수가 오늘 아침에도 어제 저녁과 같은지, 적은지 많은지를 안다. 그들의 방법은 무엇일까? 그들은 가지고 있는 “돌뭉치”와 닭들의 수를 일대일 대응시켜 보아 그 수를 세고 있는 것이다.
닭 한 마리 = 돌 하나, 닭 두 마리 = 돌 두 개,
닭 세 마리 = 돌 세 개, ...
이러한 방법은 실제로 고대사회에서 물물교환을 할 때 실제로 사용하였는데 집합론을 창시한 독일 수학자 칸토어도 두 집합의 크기를 구별하는 방법으로“일대일 대응”을 이용하였다. 칸토어는 두 집합의 크기를 비교할 때, 두 집합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존재하면 두 집합은 같은 크기를 가진다고 말하였다. 두 집합의 크기가 같으면 A~B, 또는 |A|=|B| 로 나타낸다. 이 때 주의할 점은 집합 A, B 의 개수를 세어서 |A|=|B| 로 결론짓는 것이 아니라, A, B 각각의 개수를 셀 수 없어도 |A|=|B|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록 우리가 각 집합의 크기를 모르더라도 두 집합의 대소를 구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두 집합 A,B 가 있어서 A={x|x 는 자연수}, B={x|1을 제외한 자연수} 로 정의 할 때 A와 B의 대응을 A의원소 x 에 B의 원소 x+1 을 대응시키면 일대일대응을 이룬다. 이 때 A~B , 또는 |A|=|B| 로 나타내고 두 집합은 크기가 같다고 한다.
(3) 가산집합
원소의 개수가 유한이거나 또는 자연수 전체의 집합과 원소의 개수가 같은 집합을 가산집합이라고 부른다. 특히 자연수 전체의 집합과 원소의 개수가 같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자연수전체의 집합과 일대일 대응을 이루는 집합이라는 뜻이고 이것은 원소의 개수가 무한할지라도 첫째,둘째, 셋째, 넷째,... 등으로 그 원소들의 순서를 매길 수 있는 집합을 말한다. 어떤 집합이 가산집합일 때 그것이 가산집합임을 알아내는 것은 그 집합의 원소를 순서대로 나열하는 방법을 찾아 내는것과 같다. 가산집합을 가부번집합(denumerable set)이라고도 한다.
① 가산집합의 예는 다음과 같다.
ㆍ영과 자연수의 집합={ 0, 1, 2, 3, 4, 5, 6, 7, 8,9.. }
ㆍ짝수 전체의 집합={ 2, 4, 6, 8, ...}
ㆍ홀수 전체의 집합={ 1, 3, 5, .... }
ㆍ소수 전체의 집합={ 2, 3, 5, 7, 11, 13, 17, 19 ... }
ㆍ정수 전체의 집합={ ..., -3, -2, -1. 0, 1, 2, 3, ... }={0, 1, -1, 2, -2, 3, -3, ... }
ㆍ양의 유리수 전체의 집합={1/1, 2/1, 1/2, 3/1, 1/3, 4/1, 3/2, 2/3, 1/4,...}
ㆍ유리수 전체의 집합={0, 1/1, -1/1, 2/1, -2/1, 1/2, -1/2, 3/1, -3/1, 1/3,-1/3, 4/1, -4/1, 3/2, -3/2, 2/3, -2/3, 1/4, -1/4, ...}
ㆍ대수적인 수(algebraic number) = {계수가 유리수이고 차수가 n 차인 다항식의 근}
② 가산집합에 관하여 다음 내용과 성질을 알아보자.
가산합(countable union) : 유한개의 집합 또는 무한개의 집합을 순서대로 나열할 수 있을 때, 그 집합들의 합집합을 가산합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A1={0}, A2={1}, A3={-1}, A4={2}, ... 일 때, 이런 집합들의 합집합 {0}∪{1}∪{-1}∪{2}∪{-2}∪{3}∪{-3}... 은 주어진 집합들의 가산합이다.
가산집합의 가산합은 가산집합이다.
ㆍA1={a11, a12, a13,... }
ㆍA2={a21, a22, a23, a24,...}
ㆍA3={a31, a32, a33, a34,... } .... 일 때,
ㆍA1∪A2∪A3∪A4∪...= {a11, a12, a21, a13, a22, a31, a14, a23, a32, a41,.... }은 가산집합이다.
(4) 무한집합의 정의를 내려보자
“어떤 집합이 자신의 일부와 일대일 대응 관계에 있을 때, 그 집합을 무한집합이라고 부른다”무한대를 수학적으로 정의한 최초의 수학자 게오르그 칸토어(Georg Cantor: 1845-1918)는 끝없이 계속되는 자연수의 총 개수를 무한대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자연수의 개수만한 크기를 가진 양은 모두 무한대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파라다임이 세상에 나오면 그 당시에는 인정을 못 받는 것이 파라다임의 독특한 특성인 아이러니가 있는 것처럼, 칸토어의 상상을 초월한 무한대 정의에 대한 수학계의 맹렬한 비난은 칸토어를 정신장애자로 만들게 하였다. 무한대는 잠정적으로 존재한다는 2000년 이상 내려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무한이라는 것은 확실히 존재하긴 하지만 도달할 수 없고 무한 이상을 이야기 할 수 없는 잠재성으로만 무한을 인정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무한대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의를 내렸다는 점을인정 받게 된 것이다.
(5) 무한의 성질을 규명하다.
무한 개념은 언어와 문학에서 뿐만 아니라 철학과 신학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무한 개라는 것은 있을 수 있을까? 일찍이 아르키메데스는 우주를 모래알로 채웠을 때, 모래알의 개수는 적당한 가정 하에서 1063보다 작다고 했으며, 오늘날에도 우주에 흩어져 있는 원자의 총수는 9의 99제곱보다는 작은 것으로알려져 있다. 비록 현실적으로 무한의 개념을 사용하는 일이 많지는 않지만, 무한이라는 개념은 수학에서는 절대로 배제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쉬운 예로, 자연수의 개수는 도대체 몇 개일까? 또, 정수의 개수는? 실수의 개수는? 이것들이모두 무한 개라는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쉽게 알수 있을 것이다.
자연수의 개수와 실수의 개수가 모두 무한 개라면 자연수와 실수의 개수는 같은것일까? 만약 실수의 개수가 더 많다면 실수를 나타내는 무한개와 자연수를 나타내는 무한개는 다른 무한 개인가? 무한이라는 개념처럼 흥미를 끄는 것도 드물지만, 이것만큼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또 다루기 힘든 것도 없을 것이다. 일찍이 갈릴레이는“무한에 대해서는 많다든가 적다든가, 같은 수만큼 있다든가 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선언하고, 깨끗이 무한의 문제에서 손을 땠다. 이에 대하여“아니야, 한 번 해 보자.”하는 마음으로 무한의 문제를 파고든 사람이 바로 칸토어였다. 우선 칸토어는 1872년의 논문에서‘집합이란 확정되어 있고 또 서로 명확히 구별되는 것들의 모임’이고, “두 집합 사이에 1대1의 대응관계가 성립할 때 두 집합의 농도(=원소의 개수)는 같다.”고 정의했다.
칸토어는 집합의 원소의 개수가 같다는 것을 각각의 원소를 하나씩 짝지을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우리가 보기에도 너무나 당연하다). 그는 이 같은 개념을 써서 여러 무한집합 사이의 대응관계를 조사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연수 전체와 유리수 전체는 1대1로 빠짐없이 대응시킬 수 있다. 둘째, 자연수 전체와 실수 전체를 1대1로 빠짐 없이 대응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밝혀 냈다. 이로써 그는 자연수와 유리수는 개수가 같고, 자연수와 실수는 그 개수가 같지않음을 밝혀 냈다. 이는“전체는 부분보다 크다.”라는 그리스 이래 전해져 온 통념과“무한은 모두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라는 그 때까지의 상식을동시에 깬 일대 사건이었다(자연수는 유리수의 한 부분인데도 그 개수가 같으므로 전체가 부분과 같고, 자연수의 개수나 실수의 개수는 모두 무한대지만 실수 쪽이 개수가 많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무한을 셈하는 무한에 관한 연산과 그 밖의 성질들도 규명해 냈다.
(6) 자연수와 무한수
자연수(0, 1, 2, 3, 4...) 전체는 무한하다. 최초의 자연수 0에서 출발하여 1, 2, 3, 4,....계속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자연수를 n이라고 하면 그 다음 자연수인 n + 1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마지막 자연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곱수(0, 1, 2, 4, 9, 16...)도 무한하다. 마지막 제곱수를 k라고 한다면 (k의제곱근+1)의 제곱수가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제곱수도 무한하다. 그러면 자연수는 제곱수 보다 많을까, 아니면 적을까. 쉽게 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이에 대한 해답을 갈릴레오(1564-1642)가 제시해 주었다. 즉, 제곱수의 개수는 자연수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고 같다는 것이다. 자연수 만큼 제곱수가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이 많겠지만 같음, 많음, 적음과 같은 속성이 무한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면 수긍이 갈 것이다. 자연수가 홀수와 짝수로 되어 있지만 홀수의 개수도 자연수 만큼 있고 짝수도 자연수만큼 있다고 하면 또 한 번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한 집합의 속성인 것이다. 자연수 전체의 무한집합에서 짝수 집합인 무한집합을 빼면 홀수 집합인 무한 집합이 된다. 즉 무한집합-무한집합=무한집합이 되고, 무한집합+무한집합=무한집합이 되는 것이다.
(7) 무한을 셈한 칸토어
우리가 바라보는 별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또, 바닷가의 모래알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모래알의숫자는 충분한 시간과 인력이 있다면 셀 수 있을것이다. 실제로 지금부터 2200여 년 전, 그리스의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전 우주를 모래알로 채우려면 얼마나 많은 모래알이 필요한지를 계산했다고 한다. 지구로부터 우주의 지평선까지는 150억-200억 광년이고 거기까지에는 약 1000억 개의 항성이 있고 항성의 1/3이 태양계와 마찬가지로 행성을 갖고 있다. 그 개수를 평균 10개라고 하면 은하계에는 1조 3천억 개의 행성이 있다고 예측하기 때문에 하늘의 별의 개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유한’이다. 그러나, 별의 수이든 모래알의 수이든 우리가 다루기 힘든 수임에는 틀림없다.무한을 세기 위해서는 무한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무한의 수학을 창시한 수학자에 대하여 말하기로 한다. 무한의 수학을 창시한 칸토어(G. Cantor, 1845-1918)가 무한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기 이전에는 무한은 유한이 아니다라는 정도의 인간이 셈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다는 의미로나 쓰였다. 이 시절까지도 무한을 분석, 규명하는 것은 수학계의 금기로 여겨지면서 수학은 유한인 경우만 다루고 있었다.
칸토어는 무한의 세계를 파헤치고 이것을‘수학의 언어’로 나타내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았던 ‘무한’을 새롭게 조명하고, 유한 수를 셈하듯이 무한 수를 셈해 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무한의 문제를 깊이 성찰한 철학자였다. 집합론의 바탕에는 실제로 무한에 관한 그의 사상이 깔려 있다. 무한을 다루는 방법으로 그가 선택한 것은 원소의 개수를 하나 하나 비교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다. 즉 일대일 대응을 이용하여 무한을 셈한 것이다. 칸토어는 ‘무한의 수학’인 집합론을 29세 때인1894년에 최초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논문을 발표하기까지 10년 간이나 스스로도 확신과 회의를 반복하였다고 한다. 스승 이였던 바이에르슈트라스(Weierstrass, 1818-1897)와 동 료 데 데 킨 트(Dedekind, 1831-1916)는 칸토어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무한을 셀 수도 있고, 크기도 비교할 수 있다는 당시의 상식으로는 너무도 엉뚱한 생각 때문에 세상은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고, 결국 칸토어는 그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흔히 천재들의 업적이 그러하듯이 칸토어의 업적이 제대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몇 해가 지난 후였다. 너무나 거센 반대와 비난 때문에 정신 이상까지 일으켰지만 그의 수학은 이후 20세기에 모든 수학의 기초를 집합론 위에서 새로 다지도록 만드는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유럽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권위적인 견해와 새로운 것을 일단 거부하는 세계에 맞섰던 칸토어는 그의 논문 속에서‘수학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8) 쓸쓸히 생을 마친 칸토어
칸토어는 유태계의 유복한 상인인 아버지와 예술을 좋아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1845년에 태어났다. 일찍이 칸토어는 수학에 재능을 나타냈지만,그의 아버지는 그가 기술자가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더없이 사랑하고 따르던 칸토어는 아버지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심했으나, 그의 수학적재능이 매우 탁월했기 때문에 대학을 진학할 때에는 아버지도 수학을 전공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가우스(Gauss ;1777~1855)가 무시한 정수론을 연구하여 학위를 받았고, 그 후 무한급수에 간한 이론에 접하면서 무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9세의 젊은나이에 그는 무한 집합에 관한,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칸토어가 발표한 무한집합론은 오늘날에는 모든 수학의 기초가 되어 있지만, 그것을 발표했을 당시만 해도 그의 논법이 너무나 혁신적이고 대담한 것이어서 수학자들 사이에서조차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대수학자 크로네커(Kronecker ;1823~1891)는 칸토어가 창시한 무한집합론을 수학에 대한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칸토어의 이론에 대해서 공격을 퍼부었다.이러한 과정에서 매우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인칸토어는 이를 견뎌 내지 못하고 결국 정신 병원에 여러 번 입원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만년에 가서야 칸토어는 겨우 자신의 수학적 업적을 인정받고, 크로네커와도 화해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에는 이미 칸토어의 정신병은 심각한 지경에 있었다. 그는 할레라는 도시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1918년 1월 6일 쓸쓸히 눈을 감았다. 수학사에 빛나는 큰 업적을 남기고도 생을 정신병원에서 쓸쓸히 마쳤던 것이다.
맺음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수학을 풀어 보자는 개념이 아니고 수학을 알아 가보자는 개념의 수학 이론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어떠했는지 모르겠다. 수학이라는 학문을 처음부터 어렵게 이해한다면 결국에 가서는 포기하기 일쑤다. 그냥 재미있게 접근하여 관심있게 풀어 보는 것이 좋은 듯 싶다. 한 예를 들어 보겠다. 우리가 흔하게 쓰고 있는 일반적인 프린트용 종이나 복사용지 혹은 설계도면에 쓰이는 종이는 모두 규격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이들 마저도 수학이 들어가 있다. 필자 역시 설계를 함에 있어서는 A1이나 A2 규격의 종이를 사용하고 있으며 공문 용지로는 A4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어떠한 일들을 구상하고 설계하고문서화 시키는데 가장 기본으로 사용되어 지고있는 종이를 우선 알아보자. 복사용지를 포함해 공문서 등에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종이가 바로 A4용지다. A4 용지의 규격은 97mm×210mm이다. 단순하게 300mm×200mm로 정하면 훨씬 편했을텐데 왜 이렇게 복잡한 수치가 쓰였을까?. 게다가 A4 용지는 우리 눈에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황금비를 이루지도 않는다.
황금비는 (1 + 5 ) / 2≒1.618인 반면, A4 용지의 폭에 대한 길이의 비는 약 1.414이다. 바로 위의 의문점이 필자가 학교 다닐 때 시험 시간에 자주 나왔던 문제로 규격 종이의 사이즈를 묻는 질문이 자주 있었다. 물론 그 때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지금의 규격품으로 모든 설계와 문서를 작성한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는 종이는 제지공장에서 만든 큰 규격의 전지를절반으로 자르고 또다시 절반으로 자르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절반으로 자르다 보면, 원래의 규격과 다른 모양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300mm×200mm와 같이 폭에 대한 길이의 비가 1.5인 종이를 절반으로 자르면, 200mm×150mm 크기로 만들어지고 이때의 비는 1.333(4/3)이다. 1.333의 비를 가진 직사각형은 1.5의 비를 가진 처음 종이에 비해 뭉툭해 보인다. 이런 종이를 실생활에 필요한 용도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일부를 잘라내어 보기 좋은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아까운 종이와 펄프를 낭비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독일공업규격 위원회(Deutsche Industrie Normen)에서는 큰 종이를 잘라서 작은 종이를 만드는 과정에서 종이의 낭비를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종이의 형태와 크기를 제안했다. 적절한 규격을 선택했을 때, 타자용지의 절반을 그대로 편지지로 사용하고 편지지의 절반을그대로 메모지로 사용한다면 종이를 많이 절약할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바로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A4 용지다. 절반으로 자르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종이를 그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전지의 규격이 보기 좋아야 하고, 이를 절반으로 자르고 또다시 절반으로 자른 작은 종이들이 전지의 규격과 같으면 바람직하다. 수학적으로말하면 서로 닮은꼴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전지의길이 대 폭의 비를 x:1이라고 하자. 그러면 이것을절반으로 자른 종이의 길이 대 폭의 비는 1: x/2이다. 두 직사각형이 서로 닮은꼴이므로 비례식 x: 1 = 1 : x/2 가 성립하고, 이로부터 이차 방정식 x ^ 2=2 를 얻는다. 그래서 x= 2이다. 이렇게 전지의 폭에 대한 길이의 비를 2로 택하면, 반으로 자르는 과정에서 이 비가 항상 유지된다. 2는황금비는 아니지만 눈으로 보아서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렇게 도형의 닮은꼴, 비례식, 이차 방정식, 무리수 등의 수학적 개념이 실생활에유용한 종이의 재단에 이용된다. 앞에서 A4 용지의 폭에 대한 길이의 비는 약 1.414였다. 눈치챘겠지만, 이 값은 실제로 2를 가리킨다. 단지 제조 과정에서 편의를 위해 근사값을 택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297mm×210mm일까. A4 용지의 전지를 A0라고 하는데, A0의 규격은 1189mm×841mm이다. 더 복잡한 수치다. 그런데 A0용지의 넓이를 계산해보면 999949mm2임을 알 수 있다. 이는1000000mm2, 즉 1m2의 근사값이다. A0는 폭에 대한 길이의 비가 2이고 넓이는 1m2가 되도록 만든종이이다. 이를 절반으로 자르는 과정에서 A1, A2,A3, A4 등의‘에이(A)판’용지가 만들어진다. B4와 B5 용지도 많이 사용된다. 이런 종이도 A판과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다. 전지 B0의 폭에 대한 길이의 비는 2이고 넓이는 1.5m2가 되도록 규격을 1456mm×1030mm로 정했다. 이를 절반으로 자르는 과정에서 B1, B2, B3, B4, B5 등의‘비(B)판’이만들어진다. A판과 B판의 모든 용지가 서로 닮은꼴(A0와 B0)의 닮음비는 1.5이기 때문에, 적절한비율로 확대하거나 축소해서 다른 용지에 복사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점이 있다. A판과 B판의 폭에 대한 길이의 비는 우리 눈에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황금비는 아니다. 그렇다고 주변에서 황금비를 이루는 종이나 책을 찾아보기 쉬운 것도 아니다. 실제로 황금비를 이루는 직사각형을 그려보면이것이 매우 길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수학적으로’만들어진 종이인 A판과 B판이 현대적 황금비가 아닐까.
무한을 셈한 칸토어
소크라테스는 수학은 모든학문의 근본이며 최고학문이라고 하였다. 인문과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예술분야 등 수학이 개입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궁극적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에 수학이 관여하고 있다. 수학자들은 신의 비밀을 알기 위하여 수학을 사용하고 신의 영역에 접근하는 순간 미쳐서 죽어갔다. 수비학처럼 신비주의와 연관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기 칸토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별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또, 바닷가의 모래알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모래알의 숫자는 충분한 시간과 인력이 있다면 셀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부터 2200여 년 전, 그리스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전 우주를 모래알로 채우려면 얼마나 많은 모래알이 필요한지를 계산했다고 한다. 지구로부터 우주의 지평선까지는 150억-200억 광년이고 거기까지에는 약 1000억 개의 항성이 있고 항성의 1/3이 태양계와 마찬가지로 행성을 갖고 있다. 그 개수를 평균 10개라고 하면 은하계에는 1조 3천억 개의 행성이 있다고 예측하기 때문에 하늘의 별의 개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유한'이다. 그러나, 별의 수이든 모래알의 수이든 우리가 다루기 힘든 수임에는 틀림없다.
무한을 세기 위해서는 무한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무한의 수학을 창시한 수학자에 대하여 말하기로 한다. 무한의 수학을 창시한 칸토어(G. Cantor, 1845-1918)가 무한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기 이전에는 무한은 유한이 아니다. 라는 정도의 인간이 셈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다는 의미로나 쓰였다. 이 시절까지도 무한을 분석, 규명하는 것은 수학계의 금기로 여겨지면서 수학은 유한인 경우만 다루고 있었다. 칸토어는 무한의 세계를 파헤치고 이것을 '수학의 언어'로 나타내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았던 '무한'을 새롭게 조명하고, 유한 수를 셈하듯이 무한 수를 셈해 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무한의 문제를 깊이 성찰한 철학자였다. 집합론의 바탕에는 실제로 무한에 관한 그의 사상이 깔려 있다. 무한을 다루는 방법으로 그가 선택한 것은 원소의 개수를 하나 하나 비교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다. 즉 일대일 대응을 이용하여 무한을 셈한 것이다. 칸토어는 '무한의 수학'인 집합론을 29세때인 1894년에 최초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논문을 발표하기까지 10년 간이나 스스로도 확신과 회의를 반복하였다고 한다. 스승이였던 바이에르슈트라스(Weierstrass, 1818-1897)와 동료 데데킨트(Dedekind, 1831-1916)는 칸토어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무한을 셀 수도 있고, 크기도 비교할 수 있다는 당시의 상식으로는 너무도 엉뚱한 생각때문에 세상은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고, 결국 칸토어는 그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흔히 천재들의 업적이 그러하듯이 칸토어의 업적이 제대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몇 해가 지난 후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독일을 한 시골 정신병원에서 생애를 마쳤다. 너무나 거센 반대와 비난 때문에 정신 이상까지 일으켰지만 그의 수학은 이후 20세기에 모든 수학의 기초를 집합론 위에서 새로 다지도록 만드는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유럽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권위적인 견해와 새로운 것을 일단 거부하는 세계에 맞섰던 칸토어는 그의 논문 속에서 '수학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칸토어에 대하여 더 소개를 하자면
집합이론을 세웠다. 무한히 크지만 서로 다른 수인 초한수의 개념을 수학의 의미로 소개했다.
칸토어의 부모는 덴마크인이었다. 예술을 애호하는 로마 가톨릭교도인 어머니는 음악가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개신교도인 아버지는 상인이었다. 1856년 아버지가 병이 들자 가족은 프랑크푸르트로 옮겼다. 칸토어의 수학적 재능은 15세 이전 사립학교에 다닐 때와 다름슈타트 중등학교, 비스바덴 중등학교에 다닐 때 드러나 공학도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학자가 되었다. 취리히대학교를 잠시 다닌 뒤 베를린대학교로 옮겨 물리·철학·수학을 전공했다. 그곳에서 해석학의 전문가로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K. T. 바이어슈트라스, 고등산술의 E. E. 쿠머, 정수론의 전문가이며 나중에 칸토어를 반대한 크로네커 등에게서 배웠다. 1866년 괴팅겐대학교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칸토어는 가우스가 〈산술연구 Disquisitiones Arithmeticae〉(1801)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에 의거해 1867년 그의 박사학위 논문 〈수학에서는 답보다 질문이 더 가치 있다 In re mathematica ars propendi pluris facienda est quam solvendi〉를 썼다. 베를린 여학교에서 잠시 가르친 뒤 1869년 할레대학교에서 강사, 1872년 부교수, 1879년 정교수가 되어 남은 일생을 그곳에서 일했다.
1869~73년 10편의 논문에서 칸토어는 먼저 수론을 다루었다. 이 논문은 자신의 수론에 대한 매력, 가우스 연구, 크로네커의 영향 등을 반영했다. 할레대학교의 동창이며 그의 능력을 인정했던 H. E. 하이네의 충고로 칸토어는 삼각급수론으로 방향을 바꾸어 실수의 개념을 확장했다. 삼각급수와 1854년 독일의 수학자 B. 리만의 복소함수 연구에서 출발해 1870년 이런 함수는 삼각급수로 유일하게 나타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1872년 그는 이 표현과 모순되지 않는 수들의 모임으로써 수렴하는 유리수 수열로 된 무리수를 정의했고, 그뒤 일생 동안의 연구였던 집합론과 초한수 개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873년 칸토어는 유리수는 무한이지만 셀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리수는 자연수(1, 2, 3,……의 정수)와 1대1 대응이 되기 때문이었다. 실수 집합(유리수와 무리수의 합집합)은 무한이며 셀 수 없는 집합임을 보였다. 대수적 수의 집합은 정수집합과 원소의 수가 같으며 초월수들(π와 같이 대수적 수가 아닌 수들)은 무리수의 부분집합인데 무한인 정수보다 더 많은 셀 수 없는 수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들을 수록한 칸토어의 논문은 〈크렐레 저널 Crelle's Journal〉 심사원 중 하나이며 그후로 강렬히 그의 연구를 반대한 크로네커에 의해 발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데데킨트의 중재로 1874년 〈대수적 실수의 특성 Über eine Eigenschaft des Inbegriffes aller reellen algebraischen Zahlen〉으로 출판되었다. 같은 해 그의 신부 V. 구트만과 스위스 인터라켄에서의 신혼여행 기간 동안 칸토어는 데데킨트를 만나 그의 새 이론에 대해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보수가 적었던 그는 1863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재산으로 아내와 5명의 아이들을 위한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초기에 그의 능력을 인정했던 사람 중 하나인 G. 미타그 레플러가 창간·편집했던 스웨덴의 새 수학계 잡지 〈악타 마테마티카 Acta Mathematica〉에 그가 쓴 많은 논문이 실렸다.
칸토어 이론은 수학의 무한(1, 2, 3,……과 같은 끝없는 수열)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연구주제가 되었다. 그의 이론은 1대1 대응법에 많이 의존했다. 연속과 무한에 대한 의문점에 새 방법을 전개하는 데도 칸토어는 즉시 논쟁에 뛰어들었다. 무한수의 실제 존재에 대해 논쟁할 때 그는 실제적·잠재적인 무한에 대해 고대·중세 철학과 어릴 때 부모님에게서 받은 종교교육을 이용했다. 집합에 관한 저서 〈집합체의 일반론 기초 Grundlagen einer allgemeinen Mannigfaltigkeitslehre〉에서 칸토어는 1883년 자신의 이론을 플라톤 철학과 결합시켰다 . 반면 크로네커는 정수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으며 "신은 정수를 만들었고 나머지는 모두 인간의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칸토어의 추론을 반대했고 베를린대학교 교수직 임명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