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계에는 수많은 신학과 사상, 운동들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기독교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근대 교회사의 가장 중요한 현상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이하 ‘세계관’) 운동은 칼뱅(J. Calvin)의 사상에 근거하고 있지만, 현대적 의미의 ‘세계관’ 운동의 기초는 장로교 신학자 오르(J. Orr)와 신칼뱅주의 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등에 의해 놓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살던 19세기 후반 유럽은 계몽주의 사상이 사회 전 영역에 퍼지고 있었고, 이는 여러 방면에서 기독교 신앙과 충돌하고 있었다. 이에 기독교는 종래와는 달리 총체적인 신앙의 변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사물에 대한 총체적인 기독교적 관점을 드러내고 변호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고, 이것이 ‘세계관’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세계관’ 운동은 이와는 다른 이유로 시작되었다. 1980년대 초에 시작된 한국에서의 ‘세계관’ 운동은 한국 교회의 근본적인 병폐가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이원론이라는 자각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은 우주적인데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살아가는 신자의 삶에서 어떻게 탈피할 수 있을까? 성경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의 차이는 왜 생기는가? 그리고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등등이었다. 이런 이원론적 행습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세계관’ 운동이었다.
이원론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어떤 한 부분에서만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구속의 삶이 관련되어 있고 다른 영역은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삶의 어떤 한 부분에서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온전한 신자의 삶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앙과 삶의 괴리로 고민하는 한국 교회에 ‘세계관’ 운동은 이원론의 극복을 모토로 내어놓았고, 이로부터 ‘세계관’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세계관’ 운동은 준비 단계까지 포함한다면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이 운동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학술교육동역회와 기독교학문연구회가 단체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세계관’ 운동을 시작한 것은 1984년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 두 단체는 2009년에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란 이름으로 통합하였다.
이제 한국에서 본격적인 ‘세계관’ 운동이 시작된 지도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과 단체들이 ‘세계관’이란 이름으로 모이고, 학회지를 내고, 교회와 선교회 및 신학교와 대학 등에서 강연을 했다. 초기에는 주로 영어권 저자들의 책을 번역하는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한국 저자들의 깊이 있는 저술들도 여럿 출간되었다. 1998년, 캐나다에 설립한 VIEW(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는 600여 명의 동문을 배출하였는데 이들 중 일부는 아예 ‘세계관’ 사역을 전문으로 하고 있기도 하다.
‘세계관’ 운동은 대학원 학생들이나 젊은 교수들의 학문 운동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운동의 외연이 크게 확장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운동은 모든 학문 분야에 대한 기독교적 조망이 가능하고 또한 가능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 학자들의 학문적 소명을 확장하는 데는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신자들이 학교, 직장, 가정, 사회, 교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는 문제를 진지하게 반성하게 만들었고, 이는 양적으로 부흥하는 한국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래서 ‘세계관’ 운동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운동과 단체들이 여럿 생겨났다. 아무래도 눈에 띄는 영향은 과학기술, 환경, 경영, 경제 등 학문과 직접 관련된 영역에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유치원, 초중등 교육에서도 기독교 세계관적 ‘교수-학습’을 시도하는 운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나타났다. 그 외에도 법조, 기업(직장 사역), 윤리, 예술 분야 등에서도 기독교 세계관적 적용을 하려는 노력들이 비교적 활발하게 나타났다. 조용하지만 각 분야에서 기독교 세계관적 적용과 삶을 실천하려는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지난 40여 년의 ‘세계관’ 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40여 년의 세월은 운동의 노화 현상이 나타나기에 충분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근래 ‘세계관’ 운동과 더불어 다음 세대를 생각할 때 다소 염려가 되는 측면들도 나타나고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세계관’ 운동의 보수화이다. 1980년대 초반, 처음 ‘세계관’ 운동을 시작하던 세대는 당시로는 비교적 진보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나이가 들고 상당수가 국내외 주요한 대학의 교수 등으로 옮겨감에 따라 점차 ‘세계관’ 운동은 가진 자의 운동, 식자의 운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세계관’ 운동은 흔히 말하는 성공한 엘리트 운동으로 비치고 있는 것이다.
‘세계관’ 운동의 보수화 배경에는 ‘세계관’ 운동의 세대교체 문제가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현재 한국 교계에서 ‘세계관’ 운동을 시작한 주역들은 1980년대 초, 20대 중반에 있던 대학원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60대 중·후반을 지나고 있다. 한국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베이비 부머로서 보릿고개를 경험했고, 학생 시절의 대부분을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시대를 살았다. 지금 이 세대는 소위 민주화 세대, 촛불 세대인 50대 이하 세대들과 소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다만 ‘세계관’ 운동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세계관동역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북미주에서도 ‘세계관’ 운동의 지도자들이 보수화되면서 젊은 세대들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어쩌면 이제는 1세대 지도자들의 보수화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진 게 아닌가 생각된다. 조심스럽지만 가능하면 빨리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들을 세워서 새로운 시대에 도전하는 ‘세계관’ 운동을 펼쳐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