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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최송설당" 제23장 동상 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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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최송설당" 제23장 동상 제막
식민 시대의 신문사는 사회부 중심이었다. 조선에는 국회나 정당이 없었다. 따라서 정치부는 일본 통신사에서 보내오는 기사 번역이 전부였다. 경제부 역시 식민 수탈을 비판할 여지가 없었다. 자연히 사회면 기사로 채워졌다. 따라서 기자실도 정치부와 경제부는 최소한의 인원만 배치했다. 사회부만 십여 명의 기자를 두고 있었다.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의 관심은 매일 무사히 검열을 통과하여 신문이 배포되는지에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편집국장은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검열관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윤전기를 멈추시오.”
“오늘은 또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제2면 기사 모두가 불순하오. 모두 삭제하시오.”

1927년 신축 직후 동아일보 사옥(출처 : 동아일보)
수화기를 내려놓은 편집국장은 온몸이 천근만근 내려앉았다. 구릿빛 피부가 더 검어 보였다. 조금 있으면 경찰이 들이닥칠 것이다. 경찰이 오기 전에 눈치껏 일부를 가판 본으로 빼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해 동안 스무 번 넘게 압수되는 것은 보통이었다. 압수된 신문 부수만도 30만 부가 넘었다. 제작하는 신문에는 전날 신문이 압수되어 재발행 되었다는 사고(社告)가 빠질 날이 없었다.
검열관과 실랑이를 마친 편집국장은 김천 지국장 이정득이 보낸 기획기사 문구를 들고 송진우 사장실로 들어왔다. 이정득 지국장은 철저한 항일 민족주의자로 1924년부터 김천의 동아일보 지국장을 맡아왔다. 대쪽 같은 성품으로 언론, 육영, 청년, 식산 운동에 앞장선 언론인이었다.
“사장님! 상의할 일이 있어 왔습니다.”
“뭡니까?”
“예, 김천 이정득(李正得) 지국장이 보내온 정보입니다.”
“무슨 내용인데요?”
“김천고등보통학교에서 한 달 후에 설립자 동상을 세운다고 합니다.”
“설립자라면 최송설당 여사일 텐데요.”
“예,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도 아니고 산 사람의 동상을 세운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모금에 참여했나요?”
“전국에서 10전에서 50원에 이르는 성금을 502명이 5,945원을 희사하였답니다. 신의주고등보통학교, 동래 신일여학교 등 교직원들이 보내온 것도 있고, 울릉도 도사도 보내왔답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에서도 성금을 보내왔답니다. 저명인사로는 조만식 선생, 윤치오선생도 보냈답니다. 동상을 건립하고도 100원이 남았고요.”
“그게 바로 조선 민중들의 열망입니다. 더러는 돈으로 더러는 자손들의 힘으로 동상을 세우지요. 김천고보 이사들이 동상을 세웠다면 의미가 없겠지요. 전국적으로 모금이 된 것은 자기 지역에도 최송설당과 같은 교육자가 나타나길바라는 마음이겠지요."
“그렇다면 우리 신문사도 민중의 뜻을 살리도록 해야겠습니다.”
“맞아요, 바로 그거에요. 동상 제막식 때 나도 참석한다고 지국장에게 통보하세요.”
이런 소식은 삽시간에 김천 지역에 소문이 났다.
며칠 후, 가을 햇살이 서늘한 듯 따스한 기운을 뿜어내는 오후였다. 조선중앙일보 여운형 사장은 옥고를 치르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날도 어깻죽지가 욱신거렸다. 그때 편집국에 근무하는 김복진이 들어왔다.

최송설당 동상을 제작한 김복진 작가(출처 : 블로그 푸른 솔)
“언제 올라왔소? 아직 김천에 있는 줄 알고 있는데.”
“예, 지금 올라오는 길에 바로 사무실로 들렸습니다.”
“좀 쉬지 않고, 동상 제작은 마무리되었소?”
“예, 사장님께서 추천해 주셔서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었습니다.”
“고맙소. 김작가가 만들었으니 훌륭하겠지요. 그건 그렇고 동상은 얼마만 하게 만들었나요?”
“예, 173×79×66㎝ 크기로 아담합니다. 리벳(rivet)으로 청동판을 연결해 만들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가족들이 기다릴 텐데 일찍 들어가세요. 나도 최송설당 동상 제막식에 참석해야지요.”
“사장님께서 참석해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김작가를 봐서 가는 것도 있지만 최송설당은 내가 어려울 때마다 도와준 분이에요.”
당시 조선중앙일보 편집국에는 이태준(소설가), 윤석중(아동문학가), 노천명(시인), 김복진(조각가) 등 9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김복진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 근대조각의 거장인 다카무라 고우운 교수로부터 조각 기법을 배웠다. 최송설당 동상 제작은 여운형의 추천에 의해 김복진이 조각을 담당했었다.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비슷한 시각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은 사회부장과 담소하고 있었다.
"사장님께서도 최송설당 동상 건립 기금을 내셨네요."
다소 못마땅하다는 말투였다.
"예, 나도 냈지요. 뭐가 잘 못되었나요?"
"살아있는 사람 동상 건립이라서 그렇습니다."
"5년 전에 학교 설립 인가가 나고 최송설당이 감사 인사차 우리 신문사를 방문한 일이
있었지요. 그때 최여사는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입해 학교를 건립할 것'이라고 했고, 실제 그렇게 했지요. 조선에는 최여사 보다 더 큰 사회사업을 하는 분도 있어요. 그러나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입한 사회사업가는 없습니다. 기껏해야 자기 재산의 일부나 남으로부터 기금을 출연 받아서 하지요. "
"전재산을 투입했다면 존경받을 만하시네요."
"이참에 저도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다고 전해 주세요."
"사장님께서 직접 가시게요?"
"최여사는 한 일에 비하면 사회적으로 너무 적은 평가를 받고 있어요. 최여사가 경성이나 평양에 학교를 세웠다면 엄청난 주목을 받았을 거에요. 그래서 참석하고자 합니다."
"사장님 존경합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사장 3명이 최송설당 동상 제막식에 참석하는 일정이 잡혔다. 조선의 거물 세 사람이 참석함에 따라 동상 제막식은 김천 지역의 행사 범위를 벗어났다. 전국적인 행사가 될 조짐을 보였다. 심기가 불편한 곳이 있었다. 바로 경상북도 학무국과 김천 경찰서는 비상이 걸렸다. 비상이 걸릴만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는 전국적으로 고등보통학교 설립 신청이 쇄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학교 설립을 불허해 왔다. 동상 건립 기념식은 불에 기름을 붓는 상황을 발생시킬지 몰랐다. 경북도지사 오카자키는 대책 회의를 열었다.
“한 달 후에 최송설당 동상 제막식이 있다는데 어떻게 할지 대책을 말해보세요.”
“행사 자체를 못하도록 하는 것은 명분이 없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시위라도 벌이면 어떻게 할 건가요?”
“김천 경찰서에 지시하여 행사 당일 경찰 전원을 배치하겠습니다. 인근 상주 경찰서도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학교에도 공문을 보내 동상 제막식 외의 일체의 부대행사는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축사도 최소한의 인원으로 제한하도록 하겠습니다.”
“나한테도 초청장이 왔는데 가야 되는 거요 말아야 되는 거요?”
“도지사님께서는 임석 상관으로 참석하시지요. 그러면 축사를 하는 사람들이 발언에 신중을 기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알았어요. 그러면 나도 참석한다고 통보하시오.”
이렇게 하여 일개 학교의 교내 행사에 조선총독부가 긴장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최송설당 동상건립지(출처 : 송설 역사관)
1935년 11월 30일
새벽 벽두부터 김천 읍내는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김천역이 생긴 이래 가장 분주한 하루였다. 김천고등보통학교 교직원과 학생들, 재단 관계자 들은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하였다. 시간이 가까워오자 하객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이정득 동아일보 지국장과 김단야(金丹冶) 조선일보 기자도 취재에 정신이 없었다. 김단야 기자는 조선일보 초창기부터 사회부 기자로 출발하여 김준연, 박헌영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정예 기자였다. 훗날 항일투쟁에 투신하였다.
“이 국장 한복 입은 최송설당이 오늘따라 더 고와 보이는데”
“김기자는 역시 예리하단 말이야. 황금색 두루마기가 너무 어울려.”
“이 국장. 오늘 온 사람이 얼마나 되겠소?”
“재단 관계자, 교직원 37명, 전교생 250명, 하객 700여 명, 합하면 1,000여 명은 족히 되겠지.”
“나도 그렇게 보이는데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왔지?”
“김천 사람뿐 아니라 전국에서 온 것 같은데.”
“단상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요?”
“오카자키(岡崎) 경상북도 도지사, 와타나베(渡邊) 학무국장,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조선중앙일보사장 여운형, 조선일보사장 방응모, 변호사 이인이 보이는데”
이날 팔십 일세의 최송설당은 영하의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다소곳이 앉아 밝은 얼굴로 하객을 맞았다.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에서 최고의 기쁨을 누리는 순간이었다. 행사가 거행될 김천고보 운동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에는 경찰서 순사도 삼삼오오 외각에 모여 심상치 않은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당일 오전 10시 반부터 개교 기념식과 신축 교사 낙성식, 설립자 동상 제막식 등 세 가지 행사가 차례로 진행되었다. 정열모 교장의 개식사가 끝나자 이한기의 식사에 이어 고덕환의 설립자 약력 소개가 있었다. 권상집의 경과보고에 이어 선응수가 동상 헌납 증서를 전했다. 이어서 각계 인사의 축사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도지사와 학무국장의 고사가 있었다. 다음은 여운형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등단하여 연설하였다.
“조선중앙일보를 운영하는 여운형이외다. 최송설당 부인 동상 제막식에 초청받아 축사를 드리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경성을 떠나 남으로 내려오는 동안 쓸쓸하고 적막한 지방 상태가 눈에 띄는 것이 마치 저 광활한 사막을 밟는 감상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김천에 들어와서 우리의 생명탑이라 할 만한 이 고등보통학교가 뚜렷이 서 있음을 발견함에 오아시스를 만남과 같아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이렇듯 큰 사막 가운데 이러한 오아시스가 일개 부인의 피땀으로 말미암아 건설된 것을 보니 동서고금 역사에서 그 유례가 극히 적은 줄로 생각합니다.”
그렇다. ‘영남의 오아시스’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되거나 미화된 표현이 아니었다. 개교 당시 1학년이 5학년이 되었을 때 재교생 현황을 보면 알 수 있다. 재교생의 출신 지역은 김천, 대구, 달성,군위, 의성, 안동, 영덕, 영일, 영천, 경산, 청도, 성주, 칠곡, 선산,상주, 문경, 예천, 영주, 봉화, 울산, 동래, 하동, 밀양, 거창, 합천,청주, 보은, 옥천, 영동, 충주, 단양, 대전, 홍성, 옥구, 경성의 35개 지역이었다. 경북지역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인문계 학교는 중등교육 수혜라는 ‘희망봉’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이 단상에 올랐다.
“최송설당의 공덕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따라서 사업을 찬양하거나 이름을 오래 전하기 위해서는 동상 건립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다만 위대한 사업을 해놓은 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질 줄 안다는 표적으로써만 저 동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땅에는 위인이 나지 않는다는 법을 우리는 굳세게 깨달을 것입니다.”
다음은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의 연설이 있었다.
“현재 조선사회는 한 개의 교육기관이 창설되었다는 것을 결코 그 양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그 질로서 논할 것입니다. 이는 학교 창설에 허다한 난관이 있음을 생각함과 동시에 조선 사회에 대한 기대가 그렇게 큰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인 변호사도 등단하여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나는 수십 년 전에 김천에서 살았습니다. 지금 저 낙락장송이 울창한 학교림은 그때는 벌겋게 벗겨진 흙산이었습니다. 그 붉은 땅에 최송설당이 나무를 심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에야 최송설당이 벗겨진 산에 나무를 심은 이유를 알겠습니다.”
이인의 축사를 끝으로 사회자는 추운 날씨로 인하여 이만 축사를 마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스님이 단상으로 올라왔다.
“나는 금강산 유점사에 있는 김청암이라는 중인데, 최송설당 여사에게 축사를 한 마디 드리기 위해 일천사백 리 길을 일부러 왔으니, 여러분 용서하시오”
라며 양해를 구하였다. 일순간 행사장은 환희의 물결로 넘쳐났다.

최송설당 (출처 : 김천고등학교)
(이 사진은 김천고등학교 교장실에 있는 사진이다.)
다음은 최송설당의 답사 차례였다.
“오늘 이 추운 날씨에도 성황을 이루어주심에 감사의 뜻을 어떻게 여쭐 길이 없습니다. 저의 동상 건설에 대해여서는 꿈에도 바라지 못한 영광이므로 두려운 마음, 고마운 마음, 부끄러운 마음 두루 합하여 동상이 썩기 전에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생전에 동상을 세워주심에 아직 정신적 감각이 있는 저의 얼굴이 저 동상 이상으로 붉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일에 기념하는 물품으로 이러한 열성이 더욱더욱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이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로 저의 마지막 재산 3만 원을 학교에 기부하겠습니다. 이 돈은 재단에서 매달 저에게 지급한 생활비로 아껴 두었던 것입니다. 이 기부금은 현재 5학급이 있는데 10학급으로 증설하기 위해서는 과학관 설립이 필요하므로 여기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지만 완전히 빈손으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이었다. 3만 원은 동상 건립비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돈이었다.장내에는 숙연함과 함께 최송설당에 대한 경건함이 저절로 샘솟고 있었다. 하객들은 행사장이 떠나갈 듯 환호성과 박수갈채를 보냈다. 영하의 날씨 속에 장장 3시간에 걸쳐 치러진 행사였지만 그 누구도 짜증 내거나 한눈팔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동상 제막이 있었다.제막은 최규동과 백남훈이 맡았다. 아담한 최송설당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환희의 박수 물결이 일었다. 동상 뒷면에 새긴 정열모 교장의 명문도 모습을 드러냈다.
임하 사소서
사뭇 사소서
사람 사람의 마음 가운데
길이길이 사소서

최송설당 동상 제막식을 마치고 (출처 : 송설 역사관)
(앞줄 왼쪽부터 백관수, 최규동, 김천여고교장, 송진우, 전성오, 오국영, 김병익, 강석준, 이창구, 선응수, 서춘, 이인, 가운뎃줄 왼쪽부터 이정택, 무명, 신상태, 정열모, 심상문, 무명, 무명, 황찬주, 고덕환, 권상집, 석태인, 뒷줄 왼쪽부터 세 번째 여운형, 최석태, 이한기, 김종호, 최동열, 김도무)
동상 제막식은 끝났다. 최송설당은 여운형 조선중앙일보 사장과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을 정걸재로 불렀다. 당시 두 사람은 국내 민족지도자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1)
1) 두 사람이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인지 여부는 해방 당시 조선 총독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1945년 8월 10일에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미국의 단파방송을 듣게 된다.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의 항복 결정을 알게 되었다. 그는 조선에 거류 중인 일본인의 신변 안전이 최우선 과제였다. 송진우에게 접근하여 행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줄 것을 의뢰했으나 거절당한다. 이어 조선총독부는 8월 14일 여운형에게 접근하였던 바 여운형은 받아들였다. 아베 노부키 총독을 만난 여운형은 해방이 공식화된 8월 15일에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송진우에게도 합류를 종용했지만 거절당한다. 이후 1945년 송진우는 자신의 경호원 출신인 한현우에게 암살당하고, 47년 여운형은 귀가 도중 청년이 쏜 총탄에 피살당한다.
두 사람은 민족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생각하는 방향이 달라 경성에서도 서로 만나기를 꺼려 했다.
먼저 최송설당이 말문을 열었다.
“두 분만 따로 만나자고 한 것은 조선의 백성들이 두 분을 쳐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송구합니다.”
송진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변하였다.
“두 분께서 합심하셔서 이 민족이 나갈 길을 열어주세요.”
“노력하겠습니다.”
여운형도 겸연쩍어 하였다.
“두 분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 주세요. 간청 드립니다.”

최송설당(가운데), 송진우(좌),여운형(우) 사진
“여사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우리가 화답하는 의미로 기념사진을 남기면 어떨까요?”
송진우가 말하자 여운형도 기꺼이 승낙하였다. 이렇게 하여 최송설당은 의자에 앉고 두 사람은 서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두 민족 지도자는 이날 악수를 한 것이었다. 이 기념사진은 신문을 타고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사진 한 장이 언론을 통해 전파됨에 따라 이천만 조선 민중에게는 훈훈한 위로가 될 수 있었다. 2)
2)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고, 송진우는 1889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다. 해방이 된지 70여 년이지났지만 두 인물에 평가는 다양하다. 흔히들 송진우는 우익의 대표적인 인물이고 여운형은 좌익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한마디로 평가한다. 그러나 해방정국 당시의 좌익과 우익은 지금의 남북과는 분명한 차별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운형과 송진우는 당대 최고의 민족지도자였다. 최송설당은 권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요 그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처지도 아니었다. 과거에 그들이 최송설당에게 신세진 것도 없었다. 단지 시골 노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원천리 스스로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최송설당의 업적과 덕망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볼 수밖에 없다.
최송설당의 동상 제막식에 조선의 3대 신문사 사장이 참석함에 따라 전국적인 여론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동상 제막식이 있은 다음날부터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는 사설을 통해 동상 제막의 의미를 앞다투어 보도했다. 최송설당을 통해 제3의 교육 투자가를 독려하는 의미의 촉구 문을 사설로 올렸다.
“아! 이 분은 자기의 전 재산을 다 기울이어 천추만대 영재를 길러낼 교육기관을 홀로 만드신 노인이다.”
“이 분 만이 당신네들도 나와 같이 자녀교육을 위해 기관을 만드시오.라고 말할 수 있다.”
“최송설당은 활교훈(活敎訓)의심벌로 보답했다.”
“앞으로 김천고보가 발전하여 다수한 인물을 낳는다면 그것은 어찌 김천의 영광일 뿐이랴, 전 조선의 행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