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말하기를 6?25전쟁은 국내전(Internal war)이라 일컫는다. 그런 견해는 이 전쟁의 본질을 모르고 내리는 평가이다. 본질적으로 6.25는 국제전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계사의 흐름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돌려놓은 뜻 깊은 전쟁이었다. 우리 겨레가 6.25 전쟁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이런 희생을 통하여 일류 역사에 큰 공로를 세우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큰 긍지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
만약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전쟁에서 세계적화(世界赤化)의 설계를 품고 한 단계 한 단 계씩 그 계획을 실천하여 나가던 국제 공산주의를 가로 막지 못하였더라면 지금의 세계는 심히 어려운 처지에 처하여 있을 것이다.
1848년 2월 런던에서 마르크스-엥겔스에 의하여 공산당선언이 발표된 이래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트로츠키 등의 주도 아래 첫 공산당 정권이 탄생하였다. 그로부터 30여 년 후인 1949년 10월에 중국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 군대가 국민당의 장개석 군대를 물리치게 된 데에는 러시아가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일본군으로부터 압수한 대량의 무기지원이 밑받침되었다.
그런데 중국이 공산화 된지 불과 8개월 여 만에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6.25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빠른 시일 안에 전 세계를 공산화하려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세계 전략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공산주의의 세계 적화 계획이 6.25전쟁을 통하여 막아진 것이다. 6.25전쟁이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유엔군의 이름으로 이 땅의 공산화가 막아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16개국이 유엔의 깃발 아래 참전하여 이 땅의 공산화를 막아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6.25전쟁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6.25 오십육 주년을 맞으며 ③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로부터 한참 떨어진 한적한 곳에 1950년 6월 25일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군인들의 묘지가 있다. 그 묘지 입구에 다음의 글귀가 새겨져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 준다.
“여기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누군지도 모를 나라의 사람들의 자유를 지키려 싸우다가 전사한 젊은이들이 묻혀 있다”
우리는 6?25 전쟁을 잊고 있다. 그 전쟁에서 치른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깡그리 잊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우리의 자유를 지켜 주기 위하여 외국의 숱한 젊은이들이 죽고 다치며 목숨을 던지며 싸웠는지를 잊고 있다. 6?25 전쟁에서 미군을 위시한 21개 나라에서 사람들과 물자를 보내어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는 북한 동포들과 함게 최악의 굶주림을 겪으며 살고 있을 것임을 잊고 있다.
그래서 지난 해 여름에는 동국대학의 한 교수가 “지난 6.25 전쟁 때에 공산화가 못된 것이 심히 아쉽다”는 말을 하기까지 할 정도로 6.25 전쟁에 대한 그릇된 시각이 퍼지게까지 되었다. 그리고 6.25 전쟁에서 유엔군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무너뜨리는 운동에 5천여 명이나 모여들어 기성을 부린 나라로 변질되고 있다.
올해로 56년째 6.25를 맞으며 우리는 이 전쟁의 의미를 가슴 깊이 되새기며 이 전쟁에서 희생된 숱한 젊은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다.
6.15 민족통일대축제
지난 주 전남 광주에서 6년 전에 열렸던 남북정상회담을 기리며 ‘6.15 민족통일 대축제’가 열렸다. 이 대회의 북측 대표로 참석한 인사는 열차시험운동을 무산으로 만든 안경호 조평통 서기국장이다. ‘조평통’이란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줄여 쓰는 말이다. ‘조평통’의 대표인 그가 평양에서 지난 6월 10일에 남한의 정치에 대하여 언급한 말이 있다.
이런 말까지 한 그가 이번 행사에 북측 대표로 온 것이다. 그가 광주에 온 후에 김지하, 이부영, 윤여준 등의 지식인들이 그에게 다음 같은 내용을 담은 서신을 보냈다.
“다음에 어떤 분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남북의 교류협력, 평화공존으로 나갈 수 있도록 협력해 주십시오.”
그러나 이런 말에 대하여 안경호는 완강하게 다음같이 답하였다.
“우리는 진실을 말하였을 뿐이며 한나라당이 꼭 먹어야 할 약을 주었을 뿐이다. 급소를 찔리고 추악한 정체가 드러난 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그는 17일에 북한으로 떠나는 자리에서도 악담을 되풀이하고 떠났다. 이번 북한측이 타고 온 고려 항공 전세기 연료비도 우리가 6천만 원을 지원하였다. 결국 우리는 기름 값까지 대주고 악담만 실컷 들은 셈이다.
이런 밑지는 장사를 언제까지 되풀이 해야할까?
6.15 민족통일대축제 ②
지난 6월 14일에서 17일 간에 전남 광주에서 열렸던 민족 축제는 6년 전에 있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의 남북 정상회담을 기념하여 민족화해를 촉구한다는 뜻으로 개최된 대회였다. 그러나 이런 귀한 명분과는 달리 그 기간에 광주에서 일어났던 실제 상황은 민족 화해가 아닌 민족 분열을 강조하는 듯한 축제가 되고 말았다.
대회 기간 중에 참여하였던 남과 북의 참가자들이 계속하여 한 목소리로 외친 구호가 “몰아내자, 몰아내자. 미국 놈들 몰아내자”는 구호였다. 결국은 한국 땅에서 미군을 몰아내고 남과 북이 하나가 되자는 구호였다. 일견 매우 그럴듯한 말 같지만 그 말 뒤에 숨겨져 있는 의도는 달랐다. 대회 기간 중 남측 참가단체들 중의 하나였던 남한 대학생 모임에서 다음 같은 글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이 대회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게 된다.
“6.15 공동선언의 탄생은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의 조국통일 유훈을 기어이 실현하여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의 철의 신념과 비범한 예지, 뛰어난 영도력이 낳은 빛나는 결실이며 그 고귀한 결정체이다. 미국의 횡포한 간섭과 방해책동을 저지, 파탄시키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은 화해와 단합, 통일은 고사하고 돌이킬 수없는 핵전쟁의 참화를 면할 수 없다”
이 글을 쓴 젊은이들은 북한의 젊은이들이 아니다. 엄연히 남한의 대학생들이다. 물론 남한 젊은이들 중에 소수인 숫자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 나라가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구호를 외치던 남한의 대학생들이 최근 들어 현저하게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6년 6월 24일 (토) 13:26 문화일보
‘北에 충성’ 문건 전달 범민련 간부 구속
(::6·15 축전서 디스켓 건네…‘헌신할 기회달라’::)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 맹세’를 담은 문건을 6·15 민족통일 대축전 북측 참가자에게 전달한 남파간첩 출신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간부가 구속됐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송찬엽 부장검사)는 지난 15일 광주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 행사에서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는 문건과 북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등 A4용지 109장 분 량의 문서가 담긴 디스켓 3장을 북측 참가자에게 전달한 범민련 서울시연합 우모(77) 부의장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고 24일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우씨는 조선대 대운동장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발표 6돌 기념 축하공연’ 행사장에서 미리 준비한 디스켓을 행사 팸플릿에 감싸 “중앙당에 꼭 전해달라”며 북측 대표단 참가자에게 건넸다.
디스켓에는 우씨의 범민련 명함이 붙어 있었으며 수신자는 북한 노동당 중앙당 연락부로 돼있었다. 우씨는 그러나 행사장을 빠져나가기 전 디스켓 전달 장면을 목격한 국정원 관계자에 의해 현 장에서 검거됐다.
검찰이 확인한 디스켓에는 “나는 전향한 게 아니라 장군님의 전사로 살아왔다. 장군님에게 헌신할 무장이 돼있는 만큼 활동할 기회를 달라. 사상적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다”, “기회가 되면 만나서 해명도 하고 이야기도 하겠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의용군에 입대해 월북했던 우씨는 1961년 남파된 직후 검거돼 전향서를 쓰고 풀려나 경기도 광주에서 살아왔다.
한편 우씨는 전날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 “북에 남은 가족이 나 때문에 힘들게 살까봐 그런 것”이라고 소명했다.
노윤정기자
* 6.25의 기적
① 북한군의 소련식 공격선언
② 산까지 소탕전을 벌이며 천천히 내려옴
③ 빨리 전진하는 팀이 기다리고,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오는 것 지체
④ 소련 유엔대사가 거부권행사하려고 가는 것 차량의 문제로 안됨.
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⑥ 38선 넘는 B52 폭격기 조종사가 찍은 예수님의 사진
⑦ 유엔의 참여와 도움으로 전쟁을 치룸.
- 의문 ; ① 6.25 전에 북한군의 침략 준비 움직임을 알고도 대규모의 휴가와 외출을 6.25전에 보냈다는 사실.
② 6.25 일어난 사건에 대한 대비체제의 미비와 의혹 청산이 제대로 안된 점.
③ 맥아더의 주장에 중국에 대한 핵공격을 멈춘 미국
④ 도쿄 폭격이 안되었고, 일본 교황을 전범으로 세우지 않은 점 등
⑤ 서울을 탈취하라 그곳에는 아가씨도 부인도 있다. 3일 동안 서울은 제군의 것으로 될 것이다. -1950년 9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의 말
⑥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이미 또 다른 전쟁을 계획하고 있었다.
2년 일찍 끝난 2차세계대전 때문에 군산복합체 시설의 군수물자, 무기들의 제고가 남아 장기불황에 처해져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 맥아더 장군의 회고록에서 의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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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시 의원의 1950년 9월 23일에 한 연설中
"당시 남한은 38선을 따라 4개 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군인들은 훈련이 잘되어 있었으며 매우 용감했고 애국심도 투철했다. 그러나 그들은 장비와 조직 면에서 전투 가능한 군대가 아니라 전투경찰대 정도의 무력밖에 없었다. 공중이나 해상의 지원은 전혀 없었고, 장비는 모두 경장비 뿐이었으며, 탱크나 포대 등 기본적으로 필요한 장비 역시 너무나 초라한 상태였다. 이렇게 남한군을 초라하게 만들기로 결정한 것은 미 국무성이었다. 이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자 그들은 "남한이 북한을 침공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재미있는 근시안적인 이유로 북한이 남한을 침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그림자 정부의 작품이라 할수가 있다. 왜냐하면 미 국무성도 소련도 모두 그들의 꼭두각시이기 떄문이다. 그들은 군산복합체에 연결이 되어있어 오직 누가 이기기엔 관심없고 무기를 팔아먹는 데에만 고심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un군의 한국 파병에 반대하지 않은 소련과 중공의 6.25전쟁 참전을 부추긴 미국 등 여러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리고 프리메이슨의 핵심계획이 전세계에 항상 두 가지 체제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두 가지 체제를 만들어 50년 동안 무기를 팔아먹기 위한 요충지로 그들이 미리 계획했을지도 모른다. 결론지어 6.25전쟁은 프리메이슨의 작품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매카시 의원의 1950년 9월 23일에 한 연설中
1945년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스탈린은 한국에서 전쟁을 일으키기로 계획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그후 10~12년 후 베트남에서 비슷한 전쟁을 일으키기로 합의했다.
* .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부 군 원로들의 주장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당시에는 대전에 주둔하고있던 국군 제2사단의 사단장이었으며, 휴전 직후인 1956년에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였던 창군의 원로인 이형근(李亨根) 장군은 그의 자서전『軍番 1번의 외길 人生』에서 "6.25 당시 육군 지휘부에 통적분자(通敵分子)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6.25 초기의 '10대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제기하고 있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전후하여 발생하였던 일련의 문제점들이 "적과 내통하지 않았다면, 정상적인 방어태세 하에서는 결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는 인식 하에 그가 제기한 10대 불가사의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선 부대의 남침 징후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했다는 점이다.
둘째, 6.25 발발 2주전에 단행된 각급 주요 지휘관의 대규모 인사이동이다.
셋째, 6월 13∼20간에 단행된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이다.
넷째, 6월 11일부터 계속되어오던 비상경계령을 6월 23일 자정에 해제하였다.
다섯째, 육본은 비상경계령 해제와 함께 전 장병의 1/2에게 휴가 및 외출·외박을 시켰다.
여섯째, 육군 장교클럽 댄스파티가 6월 24일 밤에 열렸다.
일곱째, 병력을 서울북방에 축차(逐次) 투입하여 장병들의 불필요한 희생을 강요했다.
여덟째, 6월 25∼27일 중앙방송은 국군이 반격, 북진중이라고 허위방송을 하였다.
아홉째, 우리측의 한강교 조기폭파다.
열째,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사형 집행이다.
* 일본과 미국의 비밀협약에 의한 한반도 장악 음모 이야기도 있다.
최근의 독도 장악 음모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자세한 것은 교회 카페를 보라)
* 요즘의 전쟁은 단순히 북한과의 안보전쟁이나, 에너지 전쟁, 식량 전쟁만이 아니라, 경제 전반에 대한 총체적인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하는 사회속에 가정들이, 기업들이, 개인의 삶이 흔들리는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전쟁의 시대,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개혁(변화)이다.
도매급 개혁 - 국가 지도자가 권위를 가지고 밀어붙이는 식의 개혁이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고, 안된다. 국민 전체가 함께 하는 개혁이 되어야 한다.
소매급 개혁 - 4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① 사회 인프라(기반시설)를 확장 ② 규제기관 - 규제 약화시켜야 ③ 교육을 강화시켜야 ④ 문화(글로컬라이제이션 Glocalization) - 세계화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현지국가의 기업 풍토를 존중하는 경영방식. 세계화(globalization)와 현지화(localization)를 합성한 신조어다. 예를 들어 국내 어느 기업이 독립채산제의 현지법인을 중국에 설립했을 경우 현지법인의 경영책임을 중국인 경영자에게 위임한다든지, 한국식의 노무관리가 아닌 현지 정서에 맞는 노무관리를 적용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현지 고용자들과의 사이에서 발생할 만한 마찰을 완화시킨다.
빈 라덴주의자들의 의식구조를 보면 그들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모든 외국인과 외세의 영향을 '정화'하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부족문화의 의식구조라고 한다. 이들의 구호는 "나와 나의 형제는 사촌을 적대시한다. 나와 나의 형제, 그리고 나의 사촌은 외부인을 적대시한다." / 북한 / 일본
이런 식으로 살지 말고, 협력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해야하고,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관용의 문화를 만들어야 하고, 그런 사회규범을 만들어야 모두가 번영하게 된다.
(혼혈아로서 미식축구계의 별로 등장한 하인즈 워드를 통해서 혼혈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일도 좋은 사회로 가는 길인 것처럼)
* 초대교회의 강점은 이방인이든, 아이든 여자든, 노예든 서로를 사랑과 관용으로 받아들이며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시에도 그렇지만 지금보아도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일이요, 놀라운 역사를 만드는 일이었다.
연약한 자들을 훈련시켜 일꾼을 만들고, 자발적인 헌신과 나눔을 통하여 서로를 돕고, 함께 기도하며,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갔다.
- 교회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나누는 것이 기초개혁이다.
교회공동체에 들어와서도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돕고, 나누고, 섬기는 일이 있어야 진정한 성장을 이루는 교회가 된다.
그런 교회가 우리가 꿈꾸는 교회이다.
지나친 경쟁과 전쟁은 늘 상처를 만들지만, 관용과 사랑, 나눔과 헌신, 기도와 올바른 교육은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소망을 갖게 한다.
우리 역사속의 전쟁이 우리 가정속에, 교회속에 일어나지 않도록 성령안에서 함께 나누고, 관용하고, 사랑을 베풀며, 함께 기도하고, 함께 교육하며 달려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