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전쟁1.
십자군 전쟁(1095~1291)1000년경 유럽에는 크리스트교를 믿었고, 서아이사에서는 이슬람교를 믿었다.
이슬람교도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슬람교도 셀주크 튀르크족이 예루살렘 통행을 막고 동로마제국을 위협하자 동로마제국 황제 알렉시우스1세는 로마교황 우르바누스2세에 구원을 요청하고
이에 교황은 1095년 프랑스 클레르몽 회의에서 이슬람교도와의 전쟁을 주장하고,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죄사함을 받으리라 허언으로 당시 유럽인들을 선동했다.
어제 한국에 입국하여 세월호유가족과 생존학생들 만남, 위안부 피해 할머니 방문, 쌍용차 해고자 만남, 북한 사목 수녀 만남, 음성 꽃동네 장애우 만남, 밀양 송전탑 건설 예정지 주민 방문의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현 교황과 참으로 비교되는 인간..
하여간 우둔한 대중들은 교황의 뻥에 감동하여 모두 전쟁 참가에 지원,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힌 기사들과 평민들로 제1차 십자군을 결성, 1099년 예수살렘을 점령하고 소아시아와 이스라엘에 이르는 넓은 땅에 네 개의 십자군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1147년 결성된 제2차 십자군은 이슬람 군대에 패하고 유럽으로 돌아갔다. 그 뒤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이 되어 팔레스타인, 시리아를 장악, 아랍세계를 통일하고 아이유브 왕조르 세운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은 '이슬람교의 성스러운 전쟁' "지하드"를 선언하고 1187년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이에 1189년 영국 리처드1세, 프랑스 필리프2세,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1세가 직접 참가하는 유럽최강 제3차 십자군이 조직된다.
그런데 막상 원정길에서 프리드리히1세가 소아시아 가던 길에 익사하고 리처드와 필리프간 내분으로 1191년 필리프2세가 프랑스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할 수 없이 리처드1세는 살라딘에게 협상을 제의, 예루살렘은 살라딘이 갖되 크리스트교도이 자유로이 성지순례를 할 수 있게 해주기로 하는 조건으로 돌아간다.
제1차 십자군 전쟁 때와 달리 왕과 기사, 교황이 서로 권력을 강화하고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고 모였기 때문에 이런 갈등과 분열이 일어난 것!!
이후 유럽국가들은 다섯차례나 더 십자군을 파견했으나 이들 병사들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잊고, 가는 곳마다 파괴와 약탈을 일삼았으며 결국 모조리 실패!! 예루살렘은 그 후로 오랫동안 이슬람교도들이 지배했다. 십자군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기사들은 전쟁 물자를 대느라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고, 결국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간의 사이가 나빠졌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서양과 동양간 경제교류가 활발해지고 이탈리아 여러 도시들은 십자군의 보급품을 나르거나 점령지 동양 물자를 가져와 부유해졌고, 새로운 인간 중심 시대인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기초가 되었다.
2. 몽고 제국의 정복 전쟁(1204~1281)
몽골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아홉살에 아비를 잃고, 힘을 키워 1204년 몽골고원을 통일!! 1209년 서북부 서하를 정복하고 1211~1215년, 만리장성을 넘어 금나라 수도 연경(베이징)을 상상초월 민간인 대학살을 펼치며 함락,
1221년 중앙아시아 호라즘 정복하고 러시아와 크림반도를 거쳐 유럽 볼가강까지 진출하여 동으로는 베이징, 서로는 볼가강, 북으로는 시베리아, 남으로 이란에 이르는 드넓은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 칸은 1227년에 66세로 별세!! 그를 계승한 셋째 아들 오고타이 칸은 1231년 고려 침략하여 대 학살극을 펼침!! 몽고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닭 한마리, 개 한마리의 생명도 남기지 않았다고 함!! 1241년 헝가리까지 정복했지만 오고타이 칸의 사망으로 유럽정복을 포기하고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와 오고타이한국, 킵차크한국, 차가타이한국, 일한국으로 갈라졌다.
1271년 세워진 원나라는 1279년 중국을 통일하여 북방유목민족이 세운 최초의 중국왕조가 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지역을 정벌하고 고려를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1274년,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공격했으나 태풍으로 모두 실패하고 1294년 사망..
이후 내분으로 몽골 지배력이 약해져 1368년 원나라 반란 도적인 홍건적 두목 주원장(일설에 고려 출신이라는 설이 있음)이 몽골족을 몰아내고 1368년 명나라를 세웠다. 몽고 제국의 정복전쟁을 통해 동서양을 잇는 안전한 교통로가 마련되어 동서무역이 활발해져 서양의 천문학, 지리학, 크리스트교등이 전해지고 중국의 인쇄술, 종이, 화약, 나침반 등이 서양에 전해졌다. http://blog.daum.net/cjsn1004/7630601-----
3. 백년전쟁(1337~1453)
지금의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에 걸친 유럽북부 플랑드르라는 양모산업(양털로 옷 만드는 산업)지역은 프랑스 영토안에 있는 영국지배 지역이었는데
프랑스가 이 지역을 탐내면서 갈등이 시작됨.. 프랑스 왕 샤를4세가 자손없이 떠나고 사촌동생 필리프6세가 왕위를 받으려 하자,
영국 왕 에드워드3세는 샤를4세가 자신의 외삼촌이었음을 들어 자신이 프랑스 왕이 돼야 한다고 주장.. 프랑스 의회가 이를 무시하고 필리프6세를 프랑스왕으로 인정.. 이후 왕이 된 필리프6세는 플랑드르를 공격하고 에드워드3세가 대 프랑스 전쟁 선포!! 1346년 크레시란 곳에 적은 수의 영국군이 대승을 거두고 칼레까지 빼앗음.. 흑사병과 내부반란 등으로 양국의 전쟁이 중단되다가 1415년 둘로 나뉜 프랑스귀족 중 정권에 반대하는 부르고뉴파와 손을 잡은 영국왕 헨리5세가 다시 전쟁을 시작하여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하고 프랑스왕위계승권을 받았다. (트루아 조약)그러나 샤를6세 사후 황태자 샤를은 정권을 지지하는 아르마냐크파의 지원을 받아 트루아 조약을 무효라 선언한다.
영국의 침략으로 샤를 황태자가 파리에서 오를레앙으로 줄행랑.. 이런 위기에서 신의 계시를 듣고 나타난 17세의 잔다르크라는 소녀영웅!!
1429년 샤를 황태자를 찾아가 군대를 얻어 영국군을 무찌르고 오를레앙을 구하고 오를레앙 성당에서 샤를 황태자를 왕위에 오르게 함... 그러나 1430년 부르고뉴파 군사에게 사로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져 종교재판 후 마녀 누명을 쓰고 화형당함..1450년 노르망디에서 프랑스가 승리하고 1453년 칼레를 제외한 영국 점령지 대부분을 수복하며 백년전쟁을 맺는다.. 백년전쟁으로 왕 중심으로 귀족들이 뭉치게 되어 왕권이 강해지고, 영국은 왕위 계승 문제로 랭커스터가와 요크가 간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를 장미전쟁이라 한다. 두 나라 국민들은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지고 민족의식이 성장하게 된다.
4. 오스만 제국과 동로마 제국 전쟁(1300~1453)
중앙아시아 튀르크 족 족장 셀주크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고 서아시아로 이동하여 세력을 키우고 그의 손자 토크릴베그가 셀주크 튀르크 왕조를 세워 이슬람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어 십자군과 대항했는데, 이후 몽골 침입으로 무너지고 튀르크 족 장군이던 오스만1세에 의해 오스만 제국이 세워진다..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30년에 서쪽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에서 개명)로 수도를 옮기고 395년 동서로 갈리는데,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 족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고 동로마는 이후 천년이상 지속된다. 이 동로마가 약해진 틈을 타 오스만제국은 1300년경부터 150년간 동로마를 공격한다. 유럽과 동로마는 같은 크리스트 교도이지만 이해관계에 따라 돕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13세기말 제4차 십자군 때는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오스만이 공격할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 중으로 동로마를 도울 여유가 없었다. 상업발달로 부는 축적했지만 군사력은 강하지 않았던 동로마는 결국 오스만에게 땅을 모두 빼앗기고 수도 콘스탄티노플만 남게 된다..
1453년 오스만 메메트2세가 황소 60마리가 끄는 커다란 대포를 동원, 수백년 지켜왔던 성을 공략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다.. 이 때 동로마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11세가 전투 중에 죽고 동로마제국은 멸망한다.... 메메트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개명하고 피정복민들을 관대하게 다스린다. 동로마인들이 세금만 내면 개종을 강요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로 인해 이스탄불은 크리스트교문화와 이슬람교문화가 어우러진 도시가 된다.. 오스만제국 1600년대 말,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으나 1800년대를 거치며 많은 지역이 독립하고 1923년에는 터키로 개명!!
5. 임진왜란(1592~1598)
백년간의 무법살육천지였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명가도'를 주장하며 1592년 4월 20만 대군으로 조선 침공!!
무식하고 협량한 희대의 머저리임금 이연(李昖)은 정세를 오판하고 전쟁준비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을 국론으로 밀어붙여 유성룡, 이순신 등 전쟁을 확신, 예견한 이들은 숨죽인 채 몰래몰래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해야 했다...
동래에서 2만여 군관백성들이 모조리 참살당하고 상주는 물론 주력 신립부대마저 조령을 버리고 배수진을 치는 머저리 같은 전략으로 대패한다..
백성보다 자신의 안위를 더 중요하게 여긴 개색휘 임금 이연(李昖)은 냅다 북쪽 의주까지 튀어 여차하면 중국으로 내뺄 궁리를 한다.
5월 한양 점령, 6월 평양 점령... 이 상황을 역전시킨 사람이 전라좌수사 이순신!! 1592년 5월4일 옥포해전에서 조선의 첫 승리를 안겨준 그는 2차 사천, 당항포, 3차 한산도, 4차 부산포에서 모두 승리한다.
적을 유인한 뒤 배들을 넓게 펼쳤다가 갑자기 간격을 좁혀 적군의 배를 집어삼키는 '학익진'을 펼쳐 대승을 거둔 한산대첩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명전투였다.
4차의 승리로 왜군의 보급로를 끊음으로써 무기와 식량공급을 차단당한 일본군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힘이 없던 왜군은 명 이여송 장군에게 뇌물을 바치고 "명 공주를 일본 왕 둘째 부인으로 보내고 조선 땅 절반을 일본에 내놓으라"는 협상을 요구....
전쟁이 중단되자 전쟁 때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던 이연(李昖)은 김덕령 등 의병장들을 사사로이 병사를 도모하여 국기를 혼란케 했다며 참수하는 데 주력했다...
가장 두려워했던 이순신을 잡아 죽이고 싶어했던 이연은... 1597년 14만 군대를 끌고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첩지를 받고서는 이순신에게 부산포로 나가 정면으로 맞서 싸우라는 어리석은 명령을 내리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이순신을 잡아 참수하려 하나, 신하들의 만류로 고문, 하옥한다..
그러나 칠천량전투에서 서인의 지원을 받아 이순신의 자리를 꿰차고 있던 등신장군 원균이 조선수군을 궤멸시키고 죽는 상황이 발생하자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풀어 권율 밑에 백의종군하게 한다...
구선 하나 없이 12척의 남은 판옥선만 가지고 극도의 두려움에 벌벌 떨던 장수들과 백성들을 현명하고 지혜로운 전략수립과 리더십으로 이끌어 12척 vs 330척의 싸움을 대승으로 이끌어낸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병사 후 후퇴하려던 왜군은 명 장군에게 뇌물을 바치고 조용히 돌아가게 해달라 부탁했지만 이순신은 협상을 물리치고 귀국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막아서서 패퇴시킨다..
패한 왜군은 남은 배 50여척을 이끌고 도망쳤지만 이순신 역시 총을 맞고 장렬히 전사.... 1592년 5월1일~1598년 10월7일까지의 <난중일기>는 조선 정조 때 <이충무공 전서>라는 책 5권~8권에 수록되어 역사적으로 귀중한 자료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이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귀와 코를 전공으로 가져가려는 왜군과 백성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살길만 찾아다닌 개같은 왕과 서인들 덕에 수없이 많은 백성들이 잔인하게 죽고 문화재가 많이 파괴되었으며 도적질당한 책과 도자기와 도공들에 의해 일본 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