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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깊고 푸른 섬☆]의 앞표지(우)와 뒤표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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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섬]
문현미 시집 / 한국의서정시 097 / 도서출판 시와시학(2016.05.10)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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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섬
문현미
한 순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거나
사랑이라는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뇌관을
수직으로 전율하게 하는 것이 있다
뜨거운 내면의 힘으로
꾸욱 눌러 쓰는 손의 근육으로
하얀 묵음의 바다에서 무채색 노를 저어
그 섬으로 간다
그 섬으로 간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아무도 찾지 못하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가시투성이 슬픔과 애써 감춘 아픔과
배신의 등 뒤에서 머뭇거리던 분노와
분홍 나팔꽃의 추억을 녹이고 걸러
한 땀, 한 땀씩
애벌레가 품은 꿈의 날개가 연필심에 닿으면
가만, 가만히 먹빛으로 꿈틀거리다가
기어이 한 마리 흑룡으로 날아오른다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새 하늘이 보인다
깊고 푸른 그곳, 그 섬으로 간다
소금꽃 제단
문현미
세상의 모든 울음 이 멈추는 곳
세상의 모든 아픔이 머물고 깊은 곳
마르지도 썩지도 않을 그곳에서
마냥 놀고 싶고, 기대고, 잠자고 싶다
남으로, 북으로 떠 나간 아들들이
마침내 서로 두 눈 부릅뜨고
총질로, 대포질로 마구 쏘아대던 그때
아득한 천길 심장의 기둥을 움켜 쥐고
겨울 알을 온몸으로 건너시던 어머니
언제나 애절한 감탄사호 돌아오는
소리 없는 눈물, 소금꽃 계단
두 손 오롯이 모아
공손히 경배드리고 싶다
그날
문현미
그저 서성거리며 마침표가 있는 그날을
꿈을 꿉니다, 차마
불멸이란 단어는 머무를 수 없습니다
크고 작은 군화들이 구름 속으로 날아간 곳에
뜨겁게 설레는 영원이란 말, 디딜 틈이 없습니다
짐승 같은 울음이 뚝뚝 떨어지던 여기에
어둑한 한숨이 불꽃으로 타오르며 출렁입니다
눈 속에 깃든 어둠이, 입 속에 쌓인 어둠이
골수 깊숙이 고이는 어둠이
발목부터 머리까지 차 오르고 있습니다
먼 훗날 긴 밤을 깨치는 새벽의 불덩이처럼
그날이 환하게 솟아오르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생피를 찍어 황홀의 시를 쓰겠습니다
목마른 탄성 끝에 무릎을 꿇는 임진강가에서
기적으로 찾아올지 모를 그날을 기다리며
비무장의 유산을, 완전한 소멸을
오랜 열병처럼 앓으며
부끄러운 느낌표가 묵념이 되는 저녁답
서서히 철조망을 덮은 노을 길 따라
우두커니 나, 저물어 갑니다
고비와 낙타
문현미
마침내 흙먼지와 함께 고비에 비가 내린다
내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물웅덩이를 만들고
비가 오면 고비는 숨을 죽인다
독수리들이 돌아오고 늑대가 으르렁거린다
살아 잇는 살 냄새와 죽은 피의 흔적이 섞이고
어미 낙타는 며칠 째 사막을 떠 돌아 다닌다
두 개의 혹에 바람의 돌기가 짓이겨지고
부글거리는 거품 아래로 붉은 인내가 흐른다
혹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초식의 낙타들
사막에서 두 발가락으로 끝없이 떠 돌며
누군가의 느리고 먼 동행이 되어 준다
날마다 되풀이 되는 무릎의 한 생을 이어가며
상아서나 죽어서나 모래의 길을 유랑해야 한다
낙타 젖을 두 번 짜면 하루가 저무는 곳
눈물마자 모래가 되는 사막의 끝에 바다가 기다린다
고비는 낙타를 타고 그 바다를 묵묵히 건너가고
슬픔은 진행형이다
문현미
시에는 슬픔 따위는 쓰지 않는 게 좋다고 한다
감정의 촉이 시들시들하면 시의 매력이 바랜다고
때 아닌 풍문만 들어도 서둘러 단추를 앞당겨
감정의 소란을 잠재워야 한다고
간이역 게시판에서 쿨룩거리는 낡은 포스터처럼
마음대로 떼어낼 수 있는 슬픔이라면 슬픔보다
더 슬픈 생의 곡조를 자진모리로 조율할 수 있다고
껍질을 망치로 탁 - 치면 레몬빛으로 흩어지는 속살에
어둠에서 몸서리치는 호두의 내력이 쓰여 있다고
이유 없이 돋아나는 슬픔이 어디 있으랴
바람의 가시에 찔려 영혼의 날개가 파닥거릴 때
고독한 피의 향기가 파란 정맥을 타고 진동하는 때
슬픔이 가난한 종족의 눈부신 유산이라고 말하는
감정의 결은 붉은 진행형이라고 한다
소리 속으로
문현미
달이 하늘을 지나가는 소리가 있다
별과 별 캄캄한 허공 사이로
있다, 찰나의 빛이 지나가는 소리가
까마득히 멀리서, 가까이에서
가슴에서 가슴으로
가만, 가만히 흐르는 소리가 있다
끝이 없는 아득한 파동의 소리여
나뭇잎 설레는 소리, 바람이 머뭇거리는
소리, 뿌리가 기지개 켜는 소리, 꿈꾸듯
너에게로 흐르는 강물 소리의
길 없는 무한 질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소리가 있다
백두대간에 뭉게뭉게 눈부신 소리가
눈꽃에서 눈물이 배어나오는 소리가
엄동을 견딘 봄이 되어서ㅇ야
눈녹이물 흐르고
아래로
아래로…
산길
문현미
청빛 바람 그득한 흙길을 걸으면
생각의 잎사귀들이 파파파 넓어진다
그림자가 가벼워지는 시간
영혼에 풀물이 스미는 시간
내 속의 어지러운 나, 우수수 흩어지고
파릇한 정맥에 새 길이 나는 걸 예감할 때
호젓이 야생으로 점화되어
온몸에 속잎이 자라고 꽃이 피어
마침내 나
멀고 가까운 초록 풍경이 된다
바람이 불고 있다
문현미
빗방울을 수직으로 받는 총부리에
쓸쓸한 고요가 노숙하고 있다
정물 같은 경계병의 수척한 눈동자에
고이는 익숙한 불안의 냄새
오랜 시간 되풀이해 온
습관의 배후가 몹시 궁금하다
한 걸음도 더는 나아갈 수 없다면?
부재가 농울치는 도라산역 출경구 앞에서
누구도 겨냥하지 않는 총을 들고
이쪽 저쪽의 탄알을 계속 장전하고
비릿한 쇳내가 스멀스멀 배어나는
철책선 가까이에 가까스로 다다른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낯선 민간인
아무리 꾸욱 눌러 써도 터지지 않는
낡은 탄피 같은 자음과 모음으로
비무장의 시를 바람결에 작두 타듯이 갈기며
내용도 없이 형식도 없이
자꾸만 비틀, 비틀거리며
고비에서 고비를
문현미
여름 밤 몽골 초원에서 빗소리를 듣는다
게르의 천장위로 떨어지는 저 빗방울
은하와 은하를 건너온 별 이야기를 품고 있다
눈표범의 먹이 사냥처럼 날카로운 속도로
화산 잿더미에서 피어난 야생초 군락을
기웃거리며 느린 평화의 속도로
거친 자갈 고비, 가시풀 고비, 양들이 풀 뜯는 고비,
겹겹 붉은 바위층 고비. 모래 바람이 부는 고비
인생의 고비를 한 고비 넘어 갈 때마다
짓누르고, 무너뜨리고, 다시 일으켜 세우고
모래길에서 헛바퀴 돌며 끝없이 되풀이되던
불면의 고지를 지나 신기루를 만나듯
유목민의 양탄자에 누워 원시의 빗소리를 듣는다
빠르고 느리게 변주하는 비의 음악에 젖어들며
귀가 순해지고 눈이 맑아지는 시간에 빠져들며
온몸의 세포가 일제히 일어서는 마법의
황홀한 시간, 가파른 준령의 아찔한 시간 너머
광활한 초원에서 말발굽 달리는 시간이다
서투르고, 어리석어 철철 피 흘리던 날들 사라지고
마침내 싱싱한 심장의 불을 환히 켜고
영혼의 갈기 휘날리는 생의 새벽을 찾아 달려간다
가젤떼가 질주하는 초원으로 마구, 마구…
아무런 날의 신화
문현미
초록의 땅, 비무장의 사람들이 길을 간다
신발 뒤축에 두려움과 호기심이 딸각거리고
현기증이 뒤섞인 먼지들이 바투 일어나고
허공의 비늘이 사뭇 흩날리는 오후
눈을 감을지도 뜨지도 못하는 시퍼런 절규가
비틀거리는 기억의 저편에서 스멀거린다
피 냄새 흥건한 폭풍이 몰아친 어제를 이끌고
우루루 불안한 수평을 이루는 여기
노동의 손과 발이 한껏 그리운 들판에
위험한 벙어리 평화, 홀로 무성하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하늘 저 멀리
재두루미들이 맨살, 맨몸의 힘으로
바람의 문장을 그리며 희끗 여운을 남긴다
점점 멀어져가는 남방한계선 너머
보이지 않는 칼날 위 신전을 밀어내며
아무런 날의 멀고 먼 신화처럼
사랑의 법칙
문현미
사랑의 순간은
늘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은
진실이 아니라고 느끼고 싶다
하지만 사랑에 목젖 타오르는 우리는
오직 순수의 호젓한 이름으로
눈 먼 마법의 힘에 붙들려
사랑을 다만 사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아름답도록 슬픈 아우라에 숨어 있는
위선이나 가식을 믿고 싶지 않을 뿐
우리 모두는 짐짓 귀를 덮고 있다
늪처럼 빠져드는 오래된 모반에 대하여
그것은
문현미
어떤 상처도 아물게 하는
그것은
누구나 언제라도
마냥
돌아가고 싶은
하늘이 내리신 포근한
그것은
어린 마음
새근새근 둥지 틀고픈
그것은
젖 냄새 향긋한
장미에게 묻다
문현미
불편한 진실이 타고 있는 걸까
바람의 시간을 꽃몸으로 견디며
화려한 한 때를 자랑하던
배후에 치명적인 내력이 숨어 있다면
스스로 배경이 되고, 시작이 되고
마침내 끝이 되어야 하는
붉은 열정을 혼자 지키고 있다
누군가 아름답다는 것은
한 떨기 순간의 향기일 뿐이라는데
언제 다시 돋아나는 걸까
맹목의 순결이 흐르는 고혹의 가시는
한창
문현미
바람이 나무를 흔들고 지나가자
바통을 이어 받은 햇살이
가지마다 투명 문신을 새기고 있다
밑둥에서 우듬지까지
나무에서 나무로 확- 번지는 불곷
불에 데인 상처에 봄 꽃 한창이다
물의 비망록
문현미
그날 아찔한 수장을 지켜 본 벼랑은
아스라이 품고 있다, 단단한 비애를
오직 목숨을 던질 사랑을 위하여
선홍의 물보라, 허공 벽에
온몸으로 쓴 초서의 기록들
어느 빛나는 왕조의 전설이 되었다
반짝- 꽃몸 뒤집어, 마지막 탄성 너머
수천 개의 물꽃으로 피어난 저 황홀…
한 번도 무거운 적 없던 강바닥은
서슬 푸른 무게를 침묵으로 끌어 안고
무심히 흐르는 강물, 온새미로
투명한 손으로 쓰고 있다, 천 년 기억,
낙하의 내력을
가장 뜨거운 가슴으로
가장 슬프고도 찬란한 숨결로
첫
문현미
레몬향이 살짝 스치는 이른 아침에
복도를 오가는 신발들이 멜랑코리한 여운을
지하 모퉁이에서 낭만적 미래를 꿈꾸며
오렌지 메니큐어를 칠한 바리스타의 에스프레소를
초여름 그날 로마는 안개비에 젖고
변두리 구석진 카페, 반질하게 빗질한 머리칼에
검은 대리석 눈썹, 낯선 청년의 유쾌한 입술로
두근거리는 사랑의 맛이 돋아나는
첫 만남, 첫 향기, 첫 눈빛
첫, 첫, 첫…
모든 첫이 눈 내린 평원에 뿌려진
연둣빛 페인트라면?
염소 똥 같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베르사이유궁에 갇힌 왕비의 손가락으로
한 끼 생명의 빵을 들고
보봐르나 사강에게서 엿본 눈길로
젊은 시인의 시를 마신다
처음의 첫과 마지막 첫
그 입술의 떨림은?
어머니의 우물
문현미
한 번도 살얼음이 낀 적이 없다
언제 마ㅓ중물을 부을 때가 있을까
도무지 수심을 알 수 없다
가끔씩
깊고도 맑은 나이테가 스치고
숱한 협곡을 건너온 구름이 지나가고
누구나 두레박줄 내려
목마른 생의 노숙
푹-
적시고 싶은
세상 지도에 없는
단 하나의 희망, 천길 심연의
달항아리
문현미
가난한 풍요의 물레 손길로
경결 고운 곡선의 기억을 따라
붉은 흙, 꽃불이 닿으면 닿을수록
하얀 울음으로 깊어가는
간절한 인내의 미로 까마득히
달항아리 한 점 덩그러니
아무런 흔적도 없이
둥근 우주 속으로 하나가 되는
긴 고요의 눈빛 그림자
저녁눈
문현미
캄캄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그늘, 어둑어둑 깊어진다
눈이 내리시기 시작하고, 아스라이 멀리서
흩날리다가, 머뭇거리다가, 다시 쏟아지고
눈이 내리는 고요의 속도만큼
하얗게 쌓이는 위태로운 침묵
사륵사륵 뿌리도 없이
지상의 모든 것을 사뿐히 덮는
무반주의 눈부신 역습
이별, 그 후
문현미
급브레이크처럼
아스팔트를 날카롭게 긁으며 치솟는
결렬과 비열의 파동 그렇게…
추적추적 장맛비 오는 날
장터 순대국밥을 혼자 떠 먹는
숟갈의 느낌만큼
국물과 들개가루가 섞이는
그런 속도로, 속도로
바람의 길
문현미
완성을 향한 미로미완의 숨결이
마침내 터져 나오는 붉은 먹빛으로
높고 낮은 것이 수평이 되고
많고 적은 것도 수평이 되는
시간의 바다를 헤쳐 나온 無等의 시간들
누가 타는 듯한 눈빛 잠재우게 하는가
누가 막힘 없는 손짓 멈추게 하는가
채운 듯 비어 있는 바람의 울림
묵향의 여운이 영혼의 촉수를 두드린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필법의 아득함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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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지구별 어디선가 누가 울고 있다.
그대도 울고 나도 울고
눈물 없이 울고 있다.
소리 없는 울음을 녹이고 걸러서
깊고 푸른 섬으로 간다.
보이지 않는 율律을 따라 흐르고…
시를 읽는 그대와 손 잡고 싶다.
빛으로 오신 분께 감사드리며…
2016년 봄
천안 태조산 기슭에서
문현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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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미 詩集 [※깊고 푸른 섬※]
[ 작품 해설 ] -
은은한 내면의 파동으로 번져가는 심미적 서정
― 문현미의 시세계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1.
문현미文賢美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깊고 푸른 섬(시학, 2016)』은, 성스러운 세계를 향하여 간절한 목소리를 발화해온 시인이 이제 자신의 내면과 상응相應하는 세계로 전이해가는 순간들을 담아낸 뚜렷한 결실이다. 그동안 시인은 『기다림은 얼굴이 없다』『수직으로 내리는 비는 둥글다』『칼 또는 꽃』『가산리 희망발전소로 오세요』『아버지의 만물상 트럭』『그날이 멀지 않다』 등의 시집을 통해 가장 숭고하고 높은 세계를 희원하면서 그것의 지상적 실현으로서의 ‘사랑의 시학’을 집중적으로 노래해왔다. 그러한 축적과 점층漸層의 시간을 바탕으로 하여 그녀는 스스로 말한 것처럼 “소리 없는 울음을 녹이고 걸러”, 그리고 “보이지 않는 율律을 따라”(「시인의 말」) 자신의 시를 정성스레 써가고 있다. 한결같이 본원적이고 궁극적인 세계로 가고자 하는 그녀의 열망과 적공積功을 느끼게 해주는 전언傳言들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두루 아는 바지만, 우리는 그동안 어렵게 축적해왔던 ‘사랑’이나 ‘평화’ 같은 커다란 가치들이 폐기되면서 그 빈자리를 자본의 효율성이 메워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적극 대응하여 서정시가 사물과 사람과 기억을 찾아 나서면서 일종의 생명 옹호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서정시의 중요한 태도 가운데 하나가 언어의 다양한 문양을 통한 대안적 질서 구축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쓰는 언어는 직접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지칭할 수 없다. 오히려 언어는 우리가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에 곧장 다가서지 못하고 그 주위를 서성이는 안간힘을 보여줄 뿐이고, 그 영속적 미끄러짐과 안간힘이야말로 언어가 가지는 화용론적 숙명일 것이다. 더구나 ‘시적 언어’는 대상의 외연을 직접적으로 ‘적시摘示’하지 않고 내포를 간접적으로 ‘암시暗示’함으로써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언어의 속성과 운명을 심미적으로 수용하면서, 문현미 시집은 은은한 내면의 파동으로 번져가는 심미적 서정을 통해 일종의 상상적 질서를 구축해간다. 이제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 보자.
2..
먼저 이번 시집은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충일하게 견지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가령 그녀는 자신이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사물, 사람, 순간의 파상波狀 속에서 온전히 ‘시詩’에 관한 생각을 메타적으로 펼쳐간다. 오랜 시간 ‘시’를 통해 자신의 삶을 회억回憶하고 구성해온 과정을 스스로 고백하고 형상화하는 것이다. 이때 시인에게 이러한 고백과 기억이란, 시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철저한 자의식에 의해 형성되고 보존되는 것이다. 그렇게 문현미 시인은 낱낱의 사물, 사람, 기억을 일일이 안아 들이면서 예술적 자의식의 심층을 형성해간다.
한순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거나
사랑이라는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뇌관을
수직으로 전율하게 하는 것이 있다
뜨거운 내면의 힘으로
꾸욱 눌러 쓰는 손의 근육으로
하얀 묵음의 바다에서 무채색 노를 저어
그 섬으로 간다
그 섬으로 간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아무도 찾지 못하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가시투성이 슬픔과 애써 감춘 아픔과
배신의 등 뒤에서 머뭇거리던 분노와
분홍 나팔꽃의 추억을 녹이고 걸러
한 땀, 한 땀씩
애벌레가 품은 꿈의 날개가 연필심에 닿으면
가만, 가만히 먹빛으로 꿈틀거리다가
기어이 한 마리 흑룡으로 날아오른다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새 하늘이 보인다
깊고 푸른 그곳, 그 섬으로 간다
― 「깊고 푸른 섬」 전문
시집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편은, 시인이 가 닿기를 갈망하는 ‘깊고 푸른 섬’이 궁극적으로는 시인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비유하는 것임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사라짐’과 ‘가물거림’과 ‘전율’의 힘을 모아 시인은 그 섬으로 가고자 한다. 이때 “뜨거운 내면의 힘”은 “묵음의 바다”를 저어 가는 원천적 에너지로 작동한다. 그렇게 시인의 내면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아무도 찾지 못하는/아무도 알 수 없는” 곳을 향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그녀는 ‘슬픔’과 ‘아픔’과 ‘분노’와 ‘추억’을 모두 녹이고 걸러 한 땀 한 땀 자신의 생을 이어간다. “가만히 먹빛으로” 비상하는 꿈은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새 하늘”이 보이는 “깊고 푸른” 섬에 가 닿고자 하는 소망을 함의한다. 물론 이러한 이상향으로서의 ‘섬’이 정치적, 종교적 대상代償으로서의 함의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녀가 뜨거운 내면의 힘으로 신비롭고 알 수 없는 절대자유의 예술적 지경地境을 꿈꾸는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이제 그녀는 “세상의 모든 울음이 멈추는 곳/세상의 모든 아픔이 머물고 싶은 곳”(「소금꽃 제단」)에서 ‘바람의 길’을 불러온다.
완성을 향한 미완의 숨결이
마침내 터져 나오는 붉은 먹빛으로
높고 낮은 것이 수평이 되고
많고 적은 것도 수평이 되는
시간의 바다를 헤쳐 나온 無等의 시간들
누가 타는 듯한 눈빛 잠재우게 하는가
누가 막힘 없는 손짓 멈추게 하는가
채운 듯 비어 있는 바람의 울림
묵향의 여운이 영혼의 촉수를 두드린다
뜬 구름 따라 먼 길 떠나간 그대여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필법의 아득함이여
― 「바람의 길」 전문
여기서 ‘바람의 길’은 예술가가 걷는 숙명적 길을 상징하는 비유체가 된다. 그 길에는 “완성을 향한 미완의 숨결”과 “마침내 터져 나오는 붉은 먹빛”의 시간이 든든하게 배어 있다. 그래서인지 그 길은, 높고 낮고 많고 적은 것이 모두 수평으로 수렴되면서 “無等의 시간”에 이르는 과정을 열어준다. 그렇게 시간의 바다를 헤쳐 나오는 움직임은 ‘깊고 푸른 섬’을 향하는 몸짓과 고스란히 겹치면서, “채운 듯 비어 있는 바람의 울림”을 통해 “묵향의 여운”을 생성시키는 과정을 연이어 파생시킨다. 문현미 시인은 이처럼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필법의 아득함”에 정성을 다해 도달함으로써, 시인으로서 꿈꾸는 필법筆法이 “끝이 없는 아득한 파동의 소리”(「소리 속으로」)를 담아내는 미학적 방법임을 고백한다. 이 또한 ‘바람의 길’이 곧 ‘시인의 길’임을 알려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문현미 시인은 ‘묵음의 바다’를 건너 가 닿는 ‘깊고 푸른 섬’에서, 어디에도 머물지 않은 필법으로 시를 써간다. 어쩌면 그것은 신성神聖의 목소리에서 내면의 목소리로 서서히 이월해가는 시인의 개성적 시법詩法일지도 모르겠다. 이때 문현미 시인은 ‘시詩’에 대한 자의식, 곧 궁극적 자아 탐구와 심미적 축약을 욕망하는 ‘시’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주게 된다. 그 점에서 그녀에게 ‘시’는, 언어를 통해 혹은 언어를 우회하면서 일종의 ‘궁극적 언어’에 가 닿는 역설적 예술이 된다. 참으로 중중하고 융융한 흐름이다.
3.
이번 시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지배소支配素 공간은 ‘사막’이다. ‘사막’이란 원래 불모의 땅이요 모든 생명이 절멸된 죽음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현미 시편에서 그것은 새로운 상상의 진원지로 거듭 태어난다. 그리고 이는 결핍과 불모를 견디는 내구耐久의 이미지로도 활력 있게 살아 나온다. 그러고 보니 문현미 시학의 중요한 정서적 원천은 결핍과 부재를 견디는 힘에서 생겨난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의 부재, 한때 분명하게 존재했던 것들의 확연한 결핍, 이러한 모든 결여 형식에 대한 원형적 반응이 바로 그녀에게는 ‘시’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에게 ‘사막’이란, 인간 존재 파악이 이성적으로만이 아니라 감각적 현존으로도 가능하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매개물임을 알게 된다. 또한 삶의 복합성에 대한 추인을 통해 스스로의 근원적 존재론을 설파하는 시인의 감각과 만나게 된다. 문현미 시인은 그러한 미학적 근본주의를 통해 마음의 생태학을 섬세하게 일구어간다. 사막에서의 유적遺跡을 통해 미학적 심층을 열어가는 것이다.
사막의 봄은 모래 폭풍의 방울 소리로 찾아온다
혹독한 바람의 계절이 모래 사원의 문을 열고
숨쉬는 모든 것들은 숨죽이며 내일을 기다린다
바람이 마두금을 켜기 시작하고 말발굽 아래
마방의 유언 같은 선율 따라 모래가 윙윙거리고
바람의 칼날에 낙타가 울부짖는다
애써 모은 걸 모두 잃어버리는
분분히 허공에 흘림체로 사라지는
그게 바로 사막의 하루, 모래살이다
눈 깜박할 사이
바람의 회오리가 전신을 파고 들어 바람이 되는
길 없는 길이 끝없이 고비를 넘나들고
모래와 바람이 서로 부둥켜 안지 못하는
해와 달이 서로 심장을 마주하지 못하는
소유불가침의 모래 제단 앞에서
누구도 붙들지도 않고 붙들 수도 없는
유목의 시간을 까마득히 지나가고 있다
― 「유목의 시간을 지나가다」 전문
문현미 시인은 사막에서의 시간을 ‘유목’으로 명명한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삶에 대한 적실한 은유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모래 폭풍의 방울 소리로 찾아오는 봄을 맞고 있다. 사막에서 겪는 ‘유목’의 과정에는 혹독한 바람과 낙타의 울부짖음, 그리고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이 사라져가는 가파른 “모래살이”가 개입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시인으로서는 “바람이 되는/길 없는 길”의 고비를 넘어 “누구도 붙들지도 않고 붙들 수도 없는/유목의 시간”을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비유컨대 ‘사막’은 “누군가의 느리고 먼 동행”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자 “날마다 되풀이되는 무릎의 한 생”(「고비와 낙타」)을 이끌어가는 더없는 토양이기도 할 것이다.
시간의 무덤인 거대한 사막을 바라보며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모래의 전언을 듣는다
유랑의 발자국들이 모래로 덮이고
피라미드 모래탑이 쌓였다가 사라지는 사이
수많은 나를 번제물로 바치게 한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내일이 없는 길을 가고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벌판에서
누군가는 모래알 같은 나를 안고 돌아가고
누군가는 바람보다 더 바람 같은 나를 만나리라
기둥 하나 없는 이방의 신전 너머
꿈꾸듯 청라 한 필이 주욱 펼쳐진다
아무 곳에도 다다르지 못한 채
사막의 열기가 아득하게 번지고 있다
바람의 뼈로 현을 켜는 광야의 시간이 돌아오고
― 「사막에서」 전문
시인은 “시간의 무덤인 거대한 사막”을 바라보고 있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모래의 전언”은 신성한 음성이 되어 “유랑의 발자국들”을 덮고, 시인은 끝없는 모래벌판에서 모래와 바람을 만난다. 그렇게 시인은 “아무 곳에도 다다르지 못한 채/사막의 열기가 아득하게 번지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바람의 뼈로 현을 켜는 광야의 시간”을 맞는다. 그 광야의 시간이 ‘유목’의 시간과 등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은 “내 속의 어지러운 나, 우수수 흩어지고/파릇한 정맥에 새 길이 나는 걸 예감할 때”(「산길」)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사막’은 문현미 시인에게 “은하와 은하를 건너온 별이야기를 품고” 있는 장소이자, “귀가 순해지고 눈이 맑아지는 시간”(「고비에서 고비를」)을 허락하는 역설의 공간이다.
결국 문현미 시편에서 ‘모래(사막)’의 이미지군群은, 그녀에게 자유와 생명의 역설적 진원지가 되고 있다. 이러한 은유적 상관물은, 불모와 폐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심미적이고 근원적인 생명을 찾아 나서려는 그녀만의 충동을 감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문현미 시편이 삶의 고유한 실존을 아름답게 표상하면서도, 그것을 빡빡한 현실의 시간으로 되돌리지 않는 것은, 이러한 균형 잡힌 미학적 자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모래의 상형문자가 제 무늬로 빛나는 때” 시인은 “바람의 붓으로 모래의 책을 쓰는 시간”(「아주 뜨거운 고독」)을 가지면서 ‘사막’이라는 공간을 전유하고 배열해가는 것이다.
4.
그런가 하면 문현미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비무장지대’를 찾아가 어떤 근원을 탐색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되찾아야 할 역사적, 미학적 지표를 상상적으로 세워간다. 그녀가 바라보는 ‘비무장지대’의 제유적 상관물은 ‘철조망’이라는 단애斷崖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전쟁의 기억을 가지면서도 광활하고 원형적으로 존재하는 숱한 자연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을 배경으로 하여 시인은 우리 역사의 가장 커다란 아픔을 잉태한 공간을 미학적으로 탐사해간다. “너와 나 그리고 수많은 우리가/통곡으로도 넘어 가지 못하는 철책선”(「두근두근 그날」)을 뒤로 하여 “차마 묻지 못한 눈물”(「바람, 멈추지 않는」)들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저 서성거리며 마침표가 있는 그날을
꿈을 꿉니다, 차마
불멸이란 단어는 머무를 수 없습니다
크고 작은 군화들이 구름 속으로 날아간 곳에
뜨겁게 설레는 영원이란 말, 디딜 틈이 없습니다
짐승 같은 울음이 뚝뚝 떨어지던 여기에
어둑발 한숨이 불꽃으로 타오르며 출렁입니다
눈 속에 깃든 어둠이, 입 속에 쌓인 어둠이
골수 깊숙이 고이는 어둠이
발목부터 머리까지 차오르고 있습니다
먼 훗날 긴 밤을 깨치는 새벽의 불덩이처럼
그날이 환하게 솟아오르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생피를 찍어 황홀의 시를 쓰겠습니다
목마른 탄성 끝에 무릎 꿇는 임진강가에서
기적으로 찾아올지 모를 그날을 기다리며
비무장의 유산을, 완전한 소멸을
오랜 열병처럼 앓으며
부끄러운 느낌표가 묵념이 되는 저녁답
서서히 철조망을 덮는 노을길 따라
우두커니 나, 저물어 갑니다
― 「그날」 전문
시인은 ‘그날’이라는 역사적 명명을 통해 자신이 서 있는 공간에 유토피아적 시간성을 부여해간다. 그곳에서 “마침표가 있는 그날”을 꿈꾸며 “불멸”이라는 표상을 한껏 떠올려본다. 그 ‘불멸’의 함의는 뜨겁게 설레는 “영원”과 겹쳐지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울음과 어둠이 그치고 “먼 훗날 긴 밤을 깨치는 새벽의 불덩이처럼/그날이 환하게 솟아오르는 순간”을 희원하게끔 한다. 그때 씌어질 “황홀의 시”야말로 문현미 시인의 전全 존재가 투영된 ‘기적’의 언어가 아닐 것인가.
그리고 그 “황홀의 시”는 “죄 없는 모국어마저 숨쉴 자리가”(「울컥 묻는다」) 없었던 시간에 대한 치유의 언어가 아닐 것인가. 그렇게 우리는, 전쟁의 상흔이 완전하게 소멸되어갈 ‘그날’에 대한 오랜 열병과 부끄러움을 통해, 문현미 시인의 견결한 역사의식과 섬세한 성정性情을 동시에 알게 된다. 차츰차츰 저물어가는 시인의 내면에 “총성보다 더 무서운 고요”(「이런 고요」)가 새삼 스며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시인은 “마지막 탄성 너머/수천 개의 물꽃으로 피어난 저 황홀”(「물의 비망록」)을 마음 깊이 느끼면서, “낡은 탄피 같은 자음과 모음으로/비무장의 시를 바람결에”(「바람이 불고 있다」) 쓰고 있다. 그 품이 마냥 크고 넉넉해 보인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비무장지대 시편은 전쟁과 분단에 대한 시인의 경험을 투사投射한 결실이다. 이 시편들은 전쟁이라는 구체적 사건으로부터 출발하여, 매우 다양한 등차를 가지면서 펼쳐진 역사적 구체에 대한 시인의 독자적 해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매우 값있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역사의 한 기원을 찾아 가장 숭고한 ‘그날’을 상상하는 시인의 마음에는 개인사적 기원도 아름다운 화폭으로 들어 있는데, 다음 시편은 그 확연한 사례가 될 만하다.
한 번도 살얼음이 낀 적 없다
언제 마중물을 부을 때가 있을까
도무지 수심을 알 수 없다
가끔씩
깊고도 맑은 나이테가 스치고
숱한 협곡을 건너온 구름이 지나가고
누구나 두레박줄 내려
목마른 생의 노숙
푹-
적시고 싶은
세상 지도에 없는
단 하나의 희망, 천길 심연의
― 「어머니의 우물」 전문
대체로 기억이란 자기 조절 기능의 하나로서, 통일된 사유와 감각을 형성해주는 기능을 가진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을 통하지 않고는 동일성을 경험적으로 회복할 수 없다. 이때 기억이란 일상을 관장하고 규율하는 합리적 운동이 아니라, 현재 속에 가라앉아 있는 지나간 시간의 한순간을 정서적으로 구성해내는 힘을 뜻한다. 이처럼 동일성의 감각에 의해 구축되는 시적 언어의 한순간을 문현미 시인은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이기도 할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갈무리해간다.
도무지 수심水深을 알 수 없는 깊은 우물에는 살얼음이 낀 적이 없다. 가끔씩 스쳐가는 “깊고도 맑은 나이테”는 어머니의 세월을 말해주고, 나아가 “숱한 협곡을 건너온 구름” 역시 생의 굴곡처럼 다가온다. “목마른 생의 노숙”을 적시면서 이제는 아득해져버린 “세상 지도에 없는/단 하나의 희망”은, 언젠가 마중물을 부으면서 만나게 될 “천길 심연의” 시간일 것이다. 그때 도대체 수심愁心을 알 수 없는 어머니의 우물은, “처음의 첫과 마지막 첫”(「첫」)이기도 할 한없는 그리움으로 다가오지 않겠는가.
두루 알다시피, 그리움이란 대상의 부재에 의해 생겨나는 정서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간절한 집착을 숨기고 있지만, 이제는 그 대상에 다가갈 수 없다는 안도감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리움은 그 자체로 삶의 형식을 구성할 뿐, 대상에 대한 실제적 만남을 욕망하지 않는다. 문현미 시인은 그리움 자체가 삶의 불가피한 형식이라는 점을 노래함으로써, “어떤 상처도 아물게 하는”(「그것은」)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에 대한 탐색을 지속해간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시간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거기 잠들어 있는 심층의 시간을 찾아내고 표현하는 것이다.
5.
이러한 역사의 마디와 개인적 기원의 상상을 지나서, 문현미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고요의 문양을 들여다봄으로써 더욱 새로운 목소리를 얻어간다. 이는 이번 시집의 확연한 진경進境이 아닐 수 없는데, 이때 ‘고요’를 향한 미학적 응집력은 시인으로 하여금 뭇 생명의 존재 형식을 가장 근원적인 형상으로 파악하게끔 하는 역량을 부여해준다. 그 점에서 문현미 시인이 견지하는 고요의 내면은, 서정시가 끝없이 우리의 현재형을 탈환하고 생성하는 고요한 역동의 세계임을 거듭 확인해준다.
눈 뜨는 빛이 숫눈 걸음으로
어둠을 머금은 숲의 잔등을 스친다
언뜻 비껴가는 희미한 곡선
쫑긋한 부리에 물려 흩어지는
소리의 결, 최초의 향기인 듯
풀잎과 꽃잎 겹겹이 허공의 잔물결
소리 없이 차오르는 마음 물결
나무와 새와 떨리는 심장 사이
아무런 간극이 없는
초서의 바람결이 스르르
투명한 몸빛으로 쓰는
찰나의 고요 몇 줄!
― 「새벽 고요의 문양」 전문
시인은 고요한 새벽의 기운을 자신의 내면에 서서히 각인해간다. 막 눈 뜬 빛이 숫눈 걸음으로 걸어올 때 시인은 “쫑긋한 부리에 물려 흩어지는/소리의 결”을 듣는다. 이때 듣는 소리의 결이야말로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일 터인데, 그렇게 “최초의 향기인 듯” 다가오는 ‘고요의 문양’은 그 자체로 그녀가 소망하는 ‘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소리 없이 차오르는 마음 물결”은 천천히 “나무와 새와 떨리는 심장 사이”를 지나 “투명한 몸빛으로 쓰는//찰나의 고요 몇 줄!”로 나아간다. 그 찰나의 언어야말로 ‘시적 순간’을 특권화하는 언어가 아닐 것인가. 오래도록 “하나씩, 둘씩 고요의 걸음으로/한없이 깊은 묵언에 물들어”(「능선에 들다」) 가는 바로 그 순간, 문현미 시인은 “서늘한 고요의 윤기”(「어라연 아리랑」)를 담아내면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둥근 우주 속으로 하나가 되는//긴 고요”(「달항아리」)를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W. Wordsworth)는 ‘시’를 두고 “강렬한 감정의 자연 발생적 분출”이지만, 그 기원은 “고요 속에 회상된 정서”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시인이란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에 집중하여 그 정서의 출발점이었던 ‘고요’를 처음 경험할 때와 같은 강렬한 감정으로 되살려내는 존재라는 뜻을 품고 있는 말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문현미 시인의 외관과 실질이 ‘고요의 시인’으로 물들어갈 것을 예감하게 된다.
민달팽이 기어가듯 눈 내리는 저녁의 내면을
가진 때가 있었다, 빗나간 사랑의 후유증처럼
후드득 빗방울 떨어지던 오후의 내면을 가진
때가 있었다, 어둠에 길들여진 몸을 서서히 깨우는
새벽의 푸릇한 내면을 가진 때가 있었다
한없이 텅 빈, 굴곡진 길을 따라 슬며시
뭉개지며 흩날리는 낙엽에 젖는 내면을 가진
때가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현기증 나는
허공으로 무장무장 증발해 버릴 것 같은
내면을 가진 그런 때가 있었다
우울한 그레이와 치명적 블루로 엮어진
그물에서 허우적거리던 때, 목숨을 틔우려
불안한 눈빛으로 바둥거리던 그런 때,
외나무다리에서 발바닥에 바싹 긴장을 모으고
구걸하듯 빛의 낱말을 중얼거리던 때,
그런 때를 스캔하던 때가 있었다
축축하고 답답한 살과 피의 미로에서
오래된 적막의 눈 혹은 짧은 충만의 눈으로
끝없이 떠도는 전언의 미세 먼지를 마시며
휘청거리는 내면의 때를 가까스로 견뎌 온
또 다른 나의
아주 은밀한 원시의 이름들이
무수히 동거하는
― 「그물망」 전문
이 사물들 사이의 촘촘한 ‘그물망’은, 그 자체로 문현미 시인의 몸과 마음을 배열하는 원리가 된다. 시인은 스스로 “민달팽이 기어가듯 눈 내리는 저녁의 내면”을 고백하는데, 이 점 문현미가 ‘내면의 시인’으로 일면 회귀하고 일면 나아가는 중요한 지점을 보여주는 전언이 아닐 수 없다. 연이어 시인은 자신의 내면이 ‘저녁’은 물론 ‘오후/새벽’의 시간도 가지고 있었음을 회상한다. 그리고 그 내면은 그물에서 허우적거리거나 불안한 눈빛을 띠거나 빛의 낱말을 중얼거리던 시간으로 충일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오래된 적막의 눈 혹은 짧은 충만의 눈”으로 시인은 “끝없이 떠도는 전언”을 듣고 있는데, 아마도 그 전언이 ‘시인 문현미’의 궁극적인 힘이 되어갈 것이다. “휘청거리는 내면의 때를 가까스로 견뎌온//또 다른 나의/아주 은밀한 원시의 이름”을 새삼 힘있게 불러보면서 그렇게 시인은 “종이 위 먹빛이 불안하게 희미해지는 것처럼”(「그래서」) 내면의 힘을 회복해가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문현미 시인은 비애에 감싸여 있거나 상처에 골몰할 때에도 궁극적으로는 긍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일관된 특성을 보여준다. 그렇게 환하고 밝은 세계를 지향하는 시인의 감각과 사유는, 저물어가는 기운과 새롭게 밝아오는 기운을 균형의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중용적 의지의 산물일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어둑한 세상을 지나 환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통해 사물과 사람과 기억을 향해 아득하게 퍼져가려는 마음을 보여준다.
6.
결국 우리는 문현미 시인의 감각과 사유에 ‘고요의 내면’이 일렁이는 것을 환하게 목도한다. 밑바닥에서 반짝이는 그녀의 이러한 감각과 사유는 앞으로 그녀의 또 다른 특장特長이 되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시인은 정서의 실감이나 감각의 새로움을 매우 실감 있는 밀도와 개성으로 노래하는데, 이때 우리는 그녀 시편이 삶의 활력을 노래할 때에도 거기에는 매우 미세한 감각이 숨쉬고 있고 슬픔을 담아낼 때에도 거기에는 매우 구체적 실감들이 축약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활달한 감각과 사유는 일관되게 시인의 내면으로 향하는데, 이는 이성적 분석보다는 심미적 공감을 우선적으로 견지해야 접근 가능한 세계일 것이다. 결국 문현미 시인은 “슬픔이 가난한 종족의 눈부신 유산”(「슬픔은 진행형이다」)이며, “모든 인간은 슬퍼할 그때 사람이다”(「슬픔의 비화」)이라고 노래함으로써, 그녀에게 슬픔이 부정적이고 소모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호혜적 정서의 수원水源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그 점에서 문현미 시편은 개별성과 보편성을 결합하여 구현한 사례로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서정시가 개인 경험의 산물이자 동시에 보편적 삶의 이법을 노래하는 양식임을 알게 해준다. 이처럼 지나온 시간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에서 촉발하면서도 보편적 삶의 이법에 가 닿는 그녀의 시적 상상력은 매우 견고하고 또한 활달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천천히 읽어왔듯이, 문현미 시학의 음역音域은 이번 시집에서 수직과 수평으로 확장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감각과 정서에서도 다양성과 그 밀도를 함께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녀 시편들을 읽고 느끼는 것은, 이러한 감각과 정서에 다다르는 과정에 동참하는 긍정과 공감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깊은 성찰과 긍정의 힘으로 구성된 문현미의 이번 시집은, 은은한 내면의 파동으로 번져가는 심미적 서정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삶의 궁극적 가치인 사랑의 시학을 경험하게끔 하고, 나아가 기억 속에 있는 존재론적 그리움을 한껏 느끼게 해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보여준 시적 감동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서정시의 존재 이유가 삶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발견이라는 점에서, 문현미 시편들은 이러한 삶에 대한 성찰과 긍정에 이르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한동안 남을 것이다.
이처럼 ‘시’와 ‘사막’과 ‘기원’과 ‘고요의 내면’ 통해 슬픔과 긍정의 길을 걸어간 시인의 다음 언어는 어떤 것일까? 우리는 그녀의 언어와 감각과 사유가 더욱 깊이를 얻어, 새롭게 트인 세계로 힘있게 다시 한 번 그녀만의 상상적 질서 안으로 걸어가기를 마음 깊이 바라게 된다. 더불어 이러한 세계가 더욱 심미적 편폭篇幅을 얻어가면서 이어져가기를 희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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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문현미의 시는 장소의 체험으로 고비 사막의 감회와 분단 모습의 현장인 임진강 그리고 휴전선들이 불쑥불쑥 참을 수 없는 지하의 분노로 치솟는 동네, 그런가 하면 외할머니의 늘어진 젖가슴에의 향수가 두발점으로 시의 소재나 주제가 되고 있다. 이 극단의 의식으로 ‘… 생피를 찍어 황홀의 시를 쓰겟습니다’라고 화자는 시인의 정체를 바로 드러낸다. 아직도 ‘쇠똥 냄새 물큰 나는 추억’이나 ‘검정 고무신’이 살아 있음에도 이런 향토성의 서정과 함께 현대서 환경의 의식이 올곧은 설명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 또한 칭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 고은 시인
문현미 시인은 미학적 근본주의를 통해 마음의 생태학을 섬세하게 일구어간다. 깊은 성찰과 긍정의 힘으로 구성된 문현미의 이번 시집은 은은한 내면의 파동으로 번져가는 심미적 서정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삶의 궁극적 가치인 사랑의 시학을 경험하게 끔 하고, 나아가 기억 속에 있는 존재론적 그리움을 한껏 느끼게 해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보여준 시적 감동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 유성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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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현미文賢美 시인∥
∙ 1998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하였으며,
∙ 박인환 문학상, 한국크리스천문학상, 시와시학작품상, 한국기독시문학상, 종려나무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 시집 『가산리 희망발전소로 오세요』『아버지의 만물상 트럭』『그날이 멀지 않다』등이 있다.
∙ 번역서 안톤슈낙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라이너마리아 릴케의 『릴케문학선집』등이 있다.
∙ 부산 출생으로 경남여고,부산대학교 졸업 후 독일 아헨대학교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하였거, 독일 본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 백석대학교 학사부총장을 거쳐
∙ 현재 백석대학교,백석문화대학교도서관장 겸 山史현대시100년관장을 맡고 있으며, 백석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고, 한국시인협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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