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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장도 있던 자리에 다이아몬드 액세서리
은장도와 액세서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미당 서정주의 시 귀촉도의 일절이다. 먼 길 떠나는 임을 위하여 가슴에 차고 있는 은장도(銀粧刀)로 자기의 머리를 잘라 신을 삼아 엮어 드리겠다는 것이다. 이 시의 내면에 흐르는 시 정신이야 어떻든 간에 우선 여기에 등장하는 소재의 하나인 은장도의 새파란 칼날이 우리를 압도한다.
은장도는 우리 선대 여인들의 가슴에 차고 있던 칼이다. 세침(細針)으로 공그린 미려한 섶 앞에 찼던 노리개이자, 그것은 말 그대로 칼날 같은 정절의 상징이었다. 정절을 생명보다 더 귀중히 여기던 이 땅의 여인들은, 자기의 신변에 위험을 느꼈을 땐 그것으로써 자신을 방어하는 무기로 삼았으며, 가신 임을 못 잊어 임의 뒤를 따르고자 한 여인에겐 마지막 한을 씻는 정화기(淨化器)로 삼았다.
이 땅의 여인들은 남존여비와 칠거지악과 삼종지의, 불경이부 등의 엄청난 계율에도, 하찮은 불평 없이 인고의 세월을 오직 미덕으로 가늠하면서, 이 은장도와 더불어 무던히도 자기를 다져 왔던 게 아니었던가?
세상이 변함에 따라 노리개는 액세서리라는 외래어로 바뀐 지 오래 되었다. 은장도가 차여졌던 가슴에는 금이다, 옥이다, 혹은 이름도 외우기 힘든 각종 서양식 이름의 보석 목걸이들이 대신 드리워졌다.
은장도보다 몇 배나 값진 패물들이다. 그러나 왠지 나름대로의 허전한 생각이 든다. 선인들이 지녔던, 매서우리만큼 앙칼진 정절의 표상, 은장도를 잃어버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부질없는 한 사람만의 생각이런가?
금 목걸이도 좋고, 은 목걸이도 좋고,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좋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하더라도, 깊은 가슴 속 심장에 지닌 마음의 은장도만은 잃어서야 되겠는가?
초가삼간과 아파트
달아달아 밝은달아
이태백이 놀던달아
저기저기 저달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금도끼로 찍어내어
은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지어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우리나라 전래 동요의 하나로,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잘 아는, 입에 익은 노래이다. 무릇 동요나 설화는 그 시대의 민심과 세태와 생활상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으로, 이른바 현실의 반영이요 시대의 소산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여론을 파악하기 위하여 조정에서는 동요와 여항(閭巷)에 떠돌아다니는 일화, 기담 등을 수집 채록하였던 것이다. 중국 고대의 패관이나 채시관(採詩官)은 모두가 이런 직무를 수행하던 관직의 하나였다.
이 짤막한 ‘달아달아’의 노래에도 조상들의 그러한 생활관과 가치관이 담뿍 스며 있다. 소박한 흥겨움과 서정성이 내포된 가운데, 가멸찬 효심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런데, 세태는 많이 달라졌다. 요즈음 유행하는 어느 대중가요의 가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우리 조상들이 지었던 초라한 초가삼간 대신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지만 양친 부모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임과 함께’ 살기만을 바라며 ‘천년만년 살고지고’가 아니라, ‘한 백년’쯤 현실적으로 살고 말겠다고 하니, 엄청난 거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모르긴 하지만, 아마도 우리 조상들은 초가삼간 중에서도 가장 좋은 방을 ‘양친 부모’께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삼간이 아니라, 수십 평의 넓은 맨션아파트가 임립(林立)하는 세태가 되었지만, 거기에 ‘양친 부모’는 고사하고 ‘늙으신 할머니’ 한 분도 들어갈 곳이 없어 자살했다는 소식마저 들리는 오늘이 되었다.
‘천년만년’이 아니라도 좋다. 어버이날 하루만이라도 고향의 어버이를 찾는 아들딸이 되었으면 한다.
두레상과 테이블
식사는 방바닥에서 수 인치의 높은 밥상 위에 올려놓고 먹는다. 식단에는 쌀, 콩 또는 국수 이외에도 국물, 생선, 고기 그리고 조미료가 있다. 그러나 야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금에 절인 배추와 둥근 무이다.
이 글은 1884년에 우리나라에 입국해서, 주한 미국 공사, 총영사, 전권공사를 역임한 미국의 알렌(Horace N. Allen)이 쓴 조선기행(Things Korea)의 일부분이다.
여기에 기록된 ‘소금에 절인 배추와 둥근 무’는 김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겠는데, ‘둥근 무’는 통무 김치를 가리킴도 쉬 알 수 있겠다.
수 인치의 높은 밥상은, 머슴들이 먹던 ‘낮은 판’이었던지 ‘책상반’이었던지 ‘모판’이었던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근래에까지도 일반 서민 가정에 가장 많이 쓰이던 ‘두레상’이 아니었던가 생각해 본다.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서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이다. 두레상의 ‘두레’는 우리 조상들이 모내기, 김매기를 공동으로 협력하기 위하여 이룬 모임인 ‘두레’와 어원을 같이 하며, ‘두레 먹다’라는 말도 이와 같다.
그런데, 근자에 이르러 이 두레판이 점차 자취를 감추고 직사각형에 다리 달린 판들이 우리의 식탁이 되고 있다. 두레판은 모양이 둥글다. 둥근 것은 원만함을 나타내며, 중심에서 원주까지는 어느 곳이나 등거리에 있다는, 초보적인 산수 이론을 꺼내지 않더라도 모두가 평등하다. 원탁회의란 말도 여기에서 연유함은 모두가 잘 아는 바다.
이에 비하면 직사각형은 너무나 불평등하다. 직사각형의 모서리에 앉아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사전에 찾아보니 두레판을 ‘a round dining table’이라 번역하여 놓았다. 두레판이 어찌 서양식 테이블과 같으랴?
몇 가지 안 되는 반찬으로 끼니를 이어 왔던 우리들의 식생활이었기에, 함께 먹을 수 있는 등거리 두레상을 고안해 낸 것이리라. 어쩌다 된장찌개에 고깃점이라도 들어갈라치면, 며느리는 그것을 연만하신 노모에게 권하고, 할머니는 이가 빠져 입 기운이 없는 입김으로 호호 불어서, 그걸 다시 손자에게 떠먹이는 인정도 이 두레상 가에서 펼쳐졌다. 평등한 두레판 속에서의 ‘장유유서’랄까, ‘부자유친’이랄까, 그런 따뜻함이 있었다.
사각판의 등장과 함께 이런 온기도 점차 식어 가는 것 같은 요즘이다. 세상인심도 점차 각이 져 가는 것 같다. 현대적 두레판을 개발하자. 그리하여 할머니와 며느리와 손자를 한 두레판에 앉게 하자. 늙은 할머니를 외롭게 하지 말자. 모가 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두레판 같은 사회가 되어 따뜻한 된장찌개 같은 온기가 넘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가위 소리와 스피커
찰가닥 찰가닥 엿장수 가위 소리
우는 아이 달래고 노는 아이 울리네.
나는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냈다. 새 소리에 날이 새고, 갖가지 짐승 소리와 더불어 해가 지는, 그런 산골에서 자랐다. 어쩌다 드나드는 나무꾼이 아니면, 외부의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그런 깊디깊은 외딴 산골이었다. 이곳에 어쩌다 한 번씩 오는 엿장수는 이 마을 꼬마들의 반가운 외래객이었다. 동구 밖 못 둑 아래에서 울려오던 ‘찰가닥 찰가닥’ 가위 소리는, 이 산골 아이에게는 단순한 파블로브의 조건반사 이상의 많은 꿈과 기대를 불러 일으켰었다.
그런데 문명 발달의 덕분으로 엿장수의 가위 소리는 사라지고, 대신 엿판 위에 조그만 스피커가 그 임무를 대신하더니, 이제 그것마저 듣기 어려워졌다.
참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뭔가 꿈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아쉬움이 들고, 엿 대신 맛 좋은 고급 과자를 먹는 요새 아이들이 행복하긴 하지만, ‘소리’를 잃고 ‘맛’만 가지는 단편적 시대에 살고 있다 싶어 일면 씁쓸한 맛을 금할 수 없다.
어찌 잃어버린 소리가 이뿐이랴!
불빛 빤한 봉창 사이로 흘러나와 무한한 밤의 정취를 돋우어 주던 다듬이 소리, 작은설날 담 밖으로 새어 나오던 떡치는 떡메 소리, 가족들의 옷을 짜는 경쾌한 베틀 소리…….
그러나,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잊지 못하는 소리가 있다.
밤중에, 방 윗목에 놓인 요강 단지를 두드리는 할머니의 사랑의 소리가 그것이다.
어린 손자가 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요강을 찾으려면, 할머니는 어둠 속에서 요강의 위치를 알려 주기 위하여 손으로 동동 두드려 주셨다. ‘요기 요기…’하시는 음성과 함께 세지도 약하지도 않던 그 소리는 이제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가옥 구조의 변화로 요새는 실내 변소가 생기게 되고, 또 손자도 할머니와 떨어져 각기 제 방을 갖는 세상이 되어, 요즘엔 이와 같은 요강단지 소리는 없어진 지 오래다.
손자를 잃어버리고 외로이 독방 생활을 하게 된 할머니는 할 일도 함께 잃게 된 것이다. 손자를 다독여 주며 사랑할 수 있는 일을 빼앗긴 할머니의 가슴에는, 요강 단지보다 더 큰 외로움이라는 커다란 덩어리가 새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여닫이와 도어
분홍색 회장저고리
남 끝동 자주 고름
긴 치맛자락을 / 살며시 치켜들고
치마 밑으로 하얀 / 외씨버선이 고와라.
멋들어진 어여머리 / 화관 몽두리
화관족두리에 / 황금 용잠 고와라.
은은한 장지 그리메 / 새 치장하고
다소 곳이 / 아침 난간에 섰다.
신석초의 ‘고풍(古風)’이란 작품이다.
예복으로 성장(盛裝)한 한국 여인의 고전미가 너무나 강렬하게 눈앞에 나타난다. 고요히 아래로 숙인 아미(蛾眉)도 보이는 듯하다. 그런데 이렇듯 아름다운 여인을, 하필이면 왜 장지문과 대비시켜 표현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장지문은 장자문(障子門)의 변한말로서, 방과 마루 사이의 여닫이를 일컫는 것인데, 우리 한옥 구조에서 볼 때 문 중에서 제일 큰 문이다.
그러므로 여인이 마루에 서자면 이 장지문을 나와야 한다는 것이 그 첫째 까닭이요, 또 장지문은 문 중에서 가장 큰, 키 만한 문이기 때문에 머리에 쓴 족두리를 다치지 않으려면 이 큰 장지문을 나와야 편할 것이란 생각도 든다.
그리고 또 이런 생각도 해 본다. 곱게 차린 이 여인의 한국미를 더한층 돋보이게 하는 격자창(格子窓)의 아름다운 문살을 그 배경으로 깔기 위해 장지문을 등장시킨 것일 거라고.
그렇다. 한국의 문살은 참으로 아름답다. 선의 절조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창조하여 물려 준 미적인 유산 중에서 가장 예찬을 받지 못한 것이 또한 이 문살이 아닌가 한다.
춘원은 다리미질할 때 움직이는 치마 주름의 유려한 선을 찬미한 적이 있지만, 문살의 미적인 구성을 어찌 나란하고 평탄한 치마선이 당해 낼 수 있으랴. 우리의 창살은 일반 여염집에서 볼 수 있는 약간 단순한 격자창 말고도, 그 무늬가 수없이 다양하여 실로 선으로 구성한 한국미의 총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성싶다.
그 창살의 형에 따라 세살문, 빗살문, 완자문, 아자문(亞子門), 꽃살문, 새김암문(暗門), 만살창[滿箭窓], 용자창(用字窓), 월창(月窓) 등이 있다.
서양 가옥의 문인 ‘도어’도 여러 가지 형이 있긴 하다. 프러시 스타일 도어(Flush style door)라든지, 패널 도어(pannel door), 웨스턴 도어(Western door), 더치 도어(dutch door)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여닫이처럼 무늬의 다양성이 없고, 다만 도어 외면의 큰 사각형의 개수를 몇 개 가감한 데 지나지 않는 이름들이다.
고래로 우리 한옥의 문은 보온방한의 필요성과, 외간 남정네에 대한 내외라는 이중의 목적에 의하여 모두 작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아름다운 우리의 창살도, 아파트가 일반화됨에 따라, 종래의 여닫이는 도어로 바뀌어 가고 있다. 생활의 편리라는 추세에 밀려나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닫이의 아름다운 창살은 언젠가는 우리 생활 주변에서 영원히 사라질지 모른다. 여닫이의 사라짐과 함께 오랜 역사 속에서 그 여닫이 문틈으로 눈물 지우며 내다보았던 숱한 외침과 절망의 동족상잔도 함께 사라졌으면 한다. 그리고 서양식 도어를 다는 건 좋지만, 서양의 향락 문화나 지나친 핵가족 중심주의의 창살만은 함께 달지 않았으면 싶다.
첫댓글 "은장도와 액세서리"
여자의 정조를 생명처럼 여기던 강인한 지조 현시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죠?
전례 동요,두레상 (원탁)미국의 알렌이 쓴 조선기행 소금에 절인 둥근 무우 두레와 같이 먹다 라는 어언을 같이 하며 두레상에서 삼강오륜도 펼쳐지는 그 옛날 가족들의 정겨웠던 생활은 요즘은 찾아 볼 수가 없죠?
할머니의 요강 단지 두드리는 소리와 제일 반가운 엿장수 가위질 소리 산촌 출신인 저에게는 내용들이 너무나 공감이갑니다.
同시대의 한 사람이라 흥미로웠으나
표현력과 모든면이 부족한 제가 감히 댓글달기가 부끄렵습니다.
박사님께 아량을 부탁드려요.
늘 고마운 맘 간직하고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며 생활했던 그때의 소중한 문화들이 아깝고 그리워 써본 졸필입니다. 늘 격려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더위에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