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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요4:1-42)-주석논문
- 오선택목사
Ⅰ.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에서는 11회의 대화형식의 말씀전도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로기온(λόγιον)이라고 한다.
본문인 4장에서도 예수는 다시 한번 대화를 시작 하시는데 3장에 등장하는 사람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상대와 대화를 나누신다. 3장에서 예수의 대화 상대자로 등장하고 있는 니고데모는 유대인 남성으로 매우 학식이 있는 교사였으며, 율법의 모든 교의를 면밀하게 고수하는 바리새인이자 공회의 회원으로서 상당한 공적 평판과 권세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새로운 대화 상대자는 한 사마리아의 여성으로서 무학이었으며, D. A. Carson에 의하면 “시대적으로 여성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음을 ” 설명하고 있다.
율법에는 완전히 어긋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요4:16-18절에 의하면 사마리아 여인은 이미 다섯 남편이 있었으며, 지금 현재에도 한 남자와 살고 있기는 하지만 합법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공적으로 경멸받고 배척당하는 여인이었다. Gerald L. Borchert, "The New American Commentary": volume 25A,(Broadman & Holman Publishers,1996),p.202. "Concerning a woman's place in the Jewish social scale, cf. the Jewish Mishna, which refers specifically to a Samaritan woman as being in a continuous state of ritual uncleanness"(Nid.4:1)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두 사람 모두 다 예수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본문은 요한복음서에서 가장 긴 설화의 하나를 제공 한다. V. C. Pfitzner,"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south Australia: Lutheran Publishing House,1988), p.95.
이 설화는 복음서 기자의 화술을 잘 보여준다. 해설과 대화가 잘 융합되어 있으며 괄목할만한 움직임이 있다. 또한 진리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 길을 열기 위해서, 역설(Irony)이 끊임없는 오해(misunderstanding)와 더불어 함께 표현되고 있다.
Ⅱ. 양 식(form)
요한복음4장 1-42절은 분명히 독립적인 단위를 이루고 있지만, 2장의 사건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가나에서의 표적이 유대교의 정결을 위한 물과 예수에 의해 초래되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포도주간의 대비를 수반하는 것과 같이, 야곱의 우물은 예수에 의해 제공되는 생수와 대비된다. 가나의 포도주가 하나님 나라의 수여(授與)를 상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주시는 물은 그 나라의 생명과 구원을 상징한다(14-15). 또한 성전 사건이 옛 성전과 그리스도의 몸된 새 성전 사이의 대비를 가져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과 그리심산의 예배가 그리스도와 그가 보내신 성령에 의해 시작되는 새 시대의 예배로 대체될 것이라고 밝혀진다. 그런데 그 사건은 동시에 예배의 옛 체계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개시되는 새 시대의 예배 체계간의 대비를 수반하고 있다. G. R. Beasley-Murray, "Word Biblical Commentary", volume 36, John1-21,(Texas: word Book, Publisher, 1987), p.206.
Ⅲ. 구 조(structure)
본문은 예수의 두 가지 대화로 지배되는 분명한 구조를 가진다. 1-6절의 서문 뒤에 이어지는 7-26절의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본다. 그 대화는 두 가지 별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즉 6-18절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수와, 19-26절의 성부께서 원하시는 예배로 구성된다. 또한 31-38절에서 예수와 제자들과의 대화는 두 단락, 곧 사마리아 여인이 수가인 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27-30절의 내용과 그들의 회심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39-42절 사이에 놓여진다. 그 두 번째 삽화의 극적인 특성이 자주 지적된다. G. R. Beasley-Murray, "Word Biblical Commentary", volume 36, John1-21,(Texas: word Book, Publisher, 1987), p.207.
C. H. Dodd는 그것을 앞뒤 두 가지 무대 위에서 발생하는 행위를 가진 drama에 비유한다. 앞무대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과 대화를 나눈다(31-38절). 반면에, 뒷 무대에서 여인은 수가인 들에게 말하며, 예수께 와보라고 그들을 설득한다(28-30,39절). 그리고 나서 두 무리들이 함께 가며 수가성으로 이동한다.
Ⅳ. 배 경(context)
본문의 배경은 1-6절의 서론적 단락에서 제공된다. 특히 이 부분은 3:22-26절의 내용을 전제한다. 요한의 제자 중 한 사람이 한 유대인과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 하던 중에,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곳 보다 예수께서 세례를 요한복음 4:2절에서 저자는 세례를 베푼 것이 예수가 아니라 그의 제자들임을 상기 시켜준다.
베푸는 곳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가는 사실에 대해 요한에게 보고한다. 이것은 단지 요한의 제자들만이 아는 사실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에게 까지 알려진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시기를 피해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퇴각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때 이른 종국을 가져올지도 모를 분쟁의 요소를 피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Schnackenburg는 이 부분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성부께서 그를 위해 정해 놓은 시간의 법칙”하에 계신다 라고 주장한다.
이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 지나 가셔야만 했다”(4절). 그것은 요세푸스의 진술과 일치점이 존재한다. ⋄ Josephus는 4:4절에 대해 이렇게 덧붙여 설명한다. “급히 가려고 하는 자들은 그 지역을 통과하여 가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길을 통과하여 간다면 삼 일 안에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갈수 있기 때문이다”
⋄ C. K. Barrett는 그의 註釋書 p.193에서 여기에 표시된 필요성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지름길을 선택하기 원하는 여행자의 소행으로 보아야 하며, 그러므로 다른 神學的 의도가 아니라고 주장 한다.
⋄ Moegan은 “유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사마리아를 지나 갈릴리로 여행하는 일이 없다” 하였고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이 길을 택하신 이유가“그들의 禁忌行爲에 대한 일종의 抵抗”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함은 길을 빠르게 가기위함이나,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부에 의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완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선교는 예수에 의해 계획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의도 되었다. 사도행전 1:8절에서 저자 누가는 선교사역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으로 가서 증인이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께서 야곱의 우물에 도착한 것(5-6절)은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과 후속되는 이야기의 무대가 된다.
Ⅴ. 주 석(Commentary)
◉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4:7-42절)
A. 생 수(4:7-18)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에 대화의 무대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시작된다. 예수와 함께 여행하던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Gerald L. Borchert, "The New American Commentary": volume 25A,(Broadman & Holman Publishers,1996),p.202. “They could of course have obtained fruit and bread, but their task would not have been easy.
위해 잠시 예수의 곁을 떠난다. 이것은 요한이 선호하는 문학적 기법이라 할 수 있는데, 제자들의 퇴장은 소위 “이인 대역”의 기법(the use of the "rule of two")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구연에 의한 이야기 전개(the folk-tale)에서 연유된다고 하며, 무대 위에 두 사람씩만 등장시켜 그들의 대화를 진행하는 동안에는 다른 역할자들은 퇴장하여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게 하는 테크닉이다. 4:8절에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등장을 위해 제자들의 퇴장, 4:27-28절에는 제자들이 돌아 왔을 때에 제자들과 예수와의 대화를 위해 여인이 동네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현장에서 퇴장하고 있다.
예수는 홀로 야곱의 우물가에서 여행으로 지친 피곤한 육체의 피로를 풀기위해 쉬고 계셨다. Gerald L. Borchert, "The New American Commentary": volume 25A,(Broadman & Holman Publishers,1996),p.202.
⋄케제만(Testament)은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6절)라고 할 때 예수의 인간성을 나타내는 이러한 표현들을 인위적이고 무리한 것으로 본다. 이것은 복음서 저자가 서투르게나마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하려고 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 한다.
그 현장(on stage)에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나오게 되는데 그 시간이 제 육시임을 밝히고 있다. 제 육시라 유대인들의 시간 계산법의 제 육시는 현대의 시간 계산법으로 이해될 때에 정오(12시)의 시간임을 알 수 있다.
함은 나그네에게 있어서는 목마름의 시간이요 쉴 곳을 찾는 시간일 것이며,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어서는 타인의 시선을 피해 물을 길러 오기 좋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관례적으로 볼 때 여성들은 물을 길러 올 때에 여럿이 무리를 지어 오며, 정오보다는 시원한 시간대에 맞추어 온다. 그러나 이 여인은 혼자서 그것도 사막의 무더운 정오시간대에 물을 길러 왔다고 하는 것은 다른 이웃 여인들과의 융합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이유는 도덕적으로 비 율법적인 여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4:17-18)
예수께서는 여인을 향해 물을 좀 달라고 청원 한다. 예수께서 스스로 물을 긷지 않은 이유는 당시의 여행자들은 의례히 “ ἄντλημα ” 즉 가죽제의 물통을 가지고 다니며 그것으로 물을 긷게 마련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4장의 경우에는 제자들이 그 가죽제 물통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께서 스스로 물을 긷지 않았던 것이며, 이것 또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니까?라고 동문서답으로 반문 한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으로서는 당연한 질문일 것이다. 당시의 社會的 풍조는 남편과 아내사이 외에는 남녀의 대화가 금기시 되어 있었고, 유대랍비들은 “여인과 오랫동안 이야기 하지 말라, 누구든지 심지어 자기 아내하고도 거리에서 이야기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R. H. Lightfoot는 주장한다.
품행이 방정치 못한 여인에게 있어서 유대인 남자가 물을 청함은 놀라운 사건이기 때문이며, 더 중요한 것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반감인 것이다. 그 역사는 앗수르 왕에 의해 북 이스라엘 왕국이 정복되고 그곳에 정착한 혼혈인종인 사마리아인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참조; 왕하 17:24-41절). Josephus, Ant Ⅸ, pp., 277-292. Ⅺ, pp,.297-347.에 의하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증오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B.C722년에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이후, 정복자 앗수르는 많은 사람들을 그 지역에서 내쫓고 대신 여러 인종들을 그곳으로 이주 시켰다.(왕하17:23-34) 비록 이 혼합된 주민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를 예배하는 것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남쪽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들의 신앙을 순수하지 못하고 완전치 못한 것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들은 5경(모세의 다섯 책들)이외의 것은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에스라 4서는, 예루살렘 도시를 재건 하려는 유대 귀향민과 사마리아인들 간의 함악한 관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 할 것을 거부하고 그들 나름대로의 성소를 그리심 산에 세웠다. 그런데 그것을 B.C 126-128년에 유대와 요하네스 히르카누스가 파괴 시킴으로서 두 백성들 간의 적대감은 배로 증폭되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 어떤 사마리아인들도 人種的, 宗敎的으로 비합법적 이었다.
이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동문서답에도 불구하고 대화자로서의 높은 지적 인격과 차원으로서 사마리아 여인을 향하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는 좀더 깊은 화제로 대화를 끌고 들어간다. 여기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말씀과 “생수”라고 하는 말씀에 注目해야 한다. 이 선물 요한복음 4장 10절에 기록된 “선물”이라는 예수님의 언어 δωρεά. 目的格의 δωρεάν은 다른 곳에서 “자유롭게”를 의미하는 부사로 나오고 있으나 명사의 꼴로 “자유로 주시는 선물”의 의미로 나오는 경우는 복음서 중에서 이곳 밖에는 없다.
은 무엇인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인 아들과 그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3:16)을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이란 함축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낸다. 그러나 예수는 더 나아가서, 생수를 말씀 하신다. 보통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말할 때나, 문자적인 의미로 볼 때 이것은 연못에 고여 있는 물에 대칭되는, 신선한 흐르는 물을 의미한다. 생명을 위한 물의 절대적인 필요성은 그것을 종교적 사고체계에 있어 광범위한 상징으로 사용하게 만들었다. 랍비들은 “물”을 상징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하나 랍비들이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SBK, Ⅱ, pp.,433-36을 참조, 랍비들이 상징적으로 성령을 지적하여 말하는 때가 있기는 하나 그러나 흔히는 토라(Torah)를 뜻하여 사용 한다.
“생수”는 그렇게 광범위하게 적용하는 일이 없다. 실제적으로 매우 근사한 의미가 구약 성서에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라”(잠13:14). 또는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잠18:4)등이다. Macdonald는 사마리아 사람의 저술이라고 보는 요한복음에 보면(Op. cit.p.425), "생수“를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가 자주 나오고 있다고 말해 준다.
그러나 1세기 랍비들의 말에는 때로 율법(토라)과 성령이 이러한 표상을 사용하여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본문에 나오는 의미를 정립하기 위하여 흘러내리는 물이라고 儀典的 淨潔의 목적에서 본다는 해석은 큰 의의가 있다. 부정한 사람을 깨끗하게 씻고 예배에 합당하도록 하는 물이 생수, 즉 흘러내리는 물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보다 깊은 의미를 그 표현에 부여하고 있다. 요한복음 7:38절 이하에 보면 믿는 자들 안에서 흐르는 생수는 성령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유사한 해석법이 여기에서도 요구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주실 새 생명에 대하여 성령의 활동과 관련 있는 생명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다(6:35).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서 생수라고 언급하지 않는다. 생수는 예수께서 보내실 성령을 상징한다. Qumran 교훈에 보면 “깨끗게 하는 물과 같이 그는 진리의 영을 자신위에 뿌리는도다.”(1QS,ⅳ,21)라고 하였음을 참조.
벵겔 또한 생수는 곧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 하면서 “성령을 받고도 그냥 목마름을 느낀다면 그것은 물 때문이 아니고 우리 편에 무슨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Odeberg은 몇 편의 유대 문헌에 의하면 “물”은 교훈과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고 설파한다. 그러나 본문에 있는 본질적인 의미는 성령이라고 함이 적절할 것이다. 여인의 오해는 매우 어리석게 된다. 그녀는 일반적인 물을 위하여 매일 올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가지신 마법의 물을 요구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남편을 데려오라고 요청함으로서 그녀의 부도덕한 삶에 대한 계시로 이어진다. 여기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를 당시의 이교가 이야기하던 사마리아 여인이 가졌던 것을 말함.
“신적인 인간”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서 기자는 에스겔의 사역을 특징지었던 예언자적인 통찰력이 그 계시자에게 특별히 존재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요한복음 1:48, 2:25, 11:14, 13:38절을 참조.
◉ 참된 예배(4:19-26)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에 대하여 표시하고 있는 존경이 점차로 높아지고 있음은, 그녀가 연속적으로 사용하는 “당신은 유대인”(9), “주여”(11), “선지자”(19), “그리스도”(29)가 보여주는 호칭의 변화로 이해 할 수 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를 가리켜 선지자라고 부른 것은 그 여자의 수치스러운 혼인관계의 진상을 폭로시킨 예수의 초자연적인 지식에 관한 입증이며, 그 칭호는 뒤이을 예배에 관한 논의를 불러들이는 열쇠가 된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오면 진정한 예배를 판단해 준다고 하는 일반의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수를 선지자로 인식함에 따라 그동안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 시비되어온 중요한 논쟁거리인 예배의 장소문제에 대해 질문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실 마땅한 장소가 어디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도록 만든다. 신명기12:1-14절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실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명령은 그리심산에서의 축복과 에발산에서의 저주를 선언하는 명령(신11:29)이 뒤 따른다. 신명기 27:3의 사마리아 오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도착하여 세울 제단이 위치할 곳은 마소라 사본에서의 에발이 아니라 그리심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에게 있어서는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라는 구약의 후대 책들에서의 언급은 권위를 얻지 못한다.왜냐하면 사마리아인들은 단지 오경만이 구속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시대에 한 성전이 그리심에 건축되었으며, 그것은 주전 128년경에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계속해서 그 성지에서 예배를 드렸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도 말고 그리심도 말고 라고 주장하신다. G. S. Hendry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는 장소가 어디든지 상관없으며, 어디에서든지 예배할 수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예배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예배 하느냐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함.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를 여는 종말론적 시간, 곧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어떤 특정한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 “바로 그때가 올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계21:22) 특히 R. H. Lightfoot은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 첫머리 부분과 끝 부분에 옛 질서와 지금 바야흐로 대두되는 새로운 질서가 맞서 비교된다고 주장 하면서, 야곱의 우물에서 길은 물과 주께서 주실 생수와는 비교할 수 없으며, 예루살렘의 유대인 성전이나 사마리아인들의 그리심 산 성전의 자리가 아닌 진정한 예배에 의하여 대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R. H. Lightfoot, st. John's Gospel, p.120.
더 나아가서 사마리아인들은 예배의 대상을 하나님에 대해 중성형을 사용함(schlatter,125).
알지 못하는 반면에, 유대인들은 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그들 가운데서 나신 메시아로 말미암아 세상의 구원을 가져올 백성으로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신앙적 정통성을 인정한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예배가 시작되는데 첫째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배드리는 것이며, 둘째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의 예배에 대한 권위 있는 선언은 여인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최후 수단을 사용하도록 만든다. 즉 “그(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이것은 사마리아인들의 메시아적 기대에 사마리아인들은 Taheb를 기대하는데 그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과 참된 예배를 회복시키는 책무를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러한 목적으로 진리를 밝힐 것이다” 라고 믿는다.
대한 충실한 숙고로, 그것은 선지서들이 아니라 오경, 특히 신명기18:15-18절에서 정의 된다. 내심을 들킨 사마리라 여인은 다시금 전략을 바꾼다. 예수가 위대한 예언자일수는 있지만 이 모든 논쟁들을 해결하려면 메시아가 오셔야만 하는 것이다. 토론의 주제가 도덕에서 예배로 바뀐 후 그녀는 이제 종말(미래의 소망)에 대해 토론의 주제를 전환 시키고 있다. 이러한 여인의 메시아에 대한 희망어린 주장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그녀에게 드러낸다. “내가 그로라” 이 표현은 Έγω έιμί용법으로 요한복음에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서 신 현현구인 것이다.
고 선포한다. 이것은 “내가 바로 네가 말하는 메시아다”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 수가 여인의 증거(4:27-30)
음식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다시 등장한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한 여인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이상히 여기며 놀란다. Gerald L. Borchert, "The New American Commentary": volume 25A,(Broadman & Holman Publishers,1996),p.202. Concerning Jesus' Speaking with "a woman"(especially this woman), note the disciples' reaction at John 4:27. They clearly were bogged down in Jewish views of women. The Jewish tradition about the public speaking of women may be involved in the difficult text of 1 cor 14:33b-35 since1 corinthians is a dialogical book and there reference is made to "the law" for support rather than to Christ. Paul may there have been quoting from the Corinthians as he did at 7:1-2; 8:1,4-6; 10:23.
왜냐하면 그 대화의 상대자가 여자이며, 사마리아인이었기 때문이다. 랍비의 교훈에 따르면 “여자와 대화를 오래 하는 자는 자기를 해롭게 하는 자요, 한 여자와 대화를 오래하지 말라, 여자와 길거리에서 대화하지 말라” 랍비들은 여인이 여러 가지로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취급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이유에 대해서 예수께, 혹은 여인에게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제 여인은 자신의 동네를 향하여 퇴장한다. 이것은 요한이 선호하는 문학적 기법이라 할 수 있는데, 제자들의 퇴장은 소위 “이인 대역”의 기법(the use of the "rule of two")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구연에 의한 이야기 전개(the folk-tale)에서 연유된다고 하며, 무대 위에 두 사람씩만 등장시켜 그들의 대화를 진행하는 동안에는 다른 역할자들은 퇴장하여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게 하는 테크닉이다. 4:8절에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등장을 위해 제자들의 퇴장, 4:27-28절에는 제자들이 돌아 왔을 때에 제자들과 예수와의 대화를 위해 여인이 동네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현장에서 퇴장하고 있다.
그 여인은 본래 물을 긷기 위해서 우물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갔다는 것은 그녀가 받은 깊은 감동의 표시인 것이다. Barrett은 그 이유에 대해 “예수께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 주장한다. Hoskyns는 “제자들이 행동과 대조적으로 그 여인의 행동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자신이 경험한 놀라운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해 물 긷는 것을 망각했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라고 본다”
여인은 자신이 경험하고 만난 메시아를 소개하기 위해 동네로 들어간다. 전에는 자기 동네 사람들을 피하였던 여인이 이제 생수를 경험한 후로는 동네의 이웃을 찾아 직접 나섰다. 그리고 그들(사마리아인들)에게 예수를 소개하며 그들을 예수께로 초대한다.
◉ 예수와 제자들과의 대화(4:31-38)
요한복음 4장 31-34절은 한 독립된 단락을 이루는데, 제자들은 자신들이 선생을 위해 구해 온 양식을 예수께 권하나 그 기회가 오히려 예수께 있어서 무엇이 제일 소중한가를 보여주는 기회가 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예수의 잡수실 양식이요, 마실 것이며 이 긴급사항을 다음으로 미루어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화 속에서는 오해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은 제자들의 요청에 대한 예수의 대답으로 야기된 오해에서 시작된다. Barrett는 여기서 “여인이 예수께서 생수에 대해 말씀 하신 것을 오해했으며, 제자들은 그가 양식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오해했다”고 지적 한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음을 주목하라. 즉 여인은 예수께서 그녀에게 주셔야만 했던 것을 파악하지 못한 반면에, 제자들은 예수 자신의 생계수단, 곧 성부의 뜻을 행하시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최후까지 수행하는 일에서 얻는 만족을 파악하지 못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마태복음 4:1-4절에 기록된 첫 번째 시험에 대한 예수의 답변과 병행구절을 발견 할 수 있다. Dodd, Historical Tadition, pp.,325-26.
요한복음 기자에 의해 예수의 전체사역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순종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그 순종은 예수를 결국죽음에 내어주는 일로 이끈다. 예수께서는 참 양식에 대해 설명하면서 추수에 관련된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런데 그것은 명백히 해설을 지닌 한 격언으로 구성된다.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라는 어구는 말하고 있는 정확한 시점과 관련될 수 있거나, 또는 파종과 추수의 간격에 대한 일반적인 관찰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Lightfoot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의 農事年歷은 두달씩 6부분으로 분활 된다. 즉 파종의 때, 겨울, 봄, 수확의 시기, 여름, 그리고 극도로 건조의 시기이다. 그러므로 파종기가 끝나면서 그 중간에 있는 넉 달이 지나면 수확기가 시작 된다”고 한다. 이러한 農作의 규범이, 무슨 일이건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하는 의미의 격언이 생겨나게 했는지도 모른다. 파종을 한번 한 후에는 이 “기다림의 달”을 지름길로 건너갈 방법은 없는 것이다. 성장은 완만하고 속성재배란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Calvin은 “인간의 마음과 정성이 하늘의 것보다 이 땅에 속한 것에 대하여 얼마나 지극한 것인가?, 왜냐하면 그들이 수확을 간절히 기다리며 날과 달을 헤어보지 않는가? 그러나 그들이 하늘의 보리 수확에 관해서는 그처럼 무관심한데 경악할 뿐이다”라고 말함.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것이 당시 유행하던 격언이라고 여긴다. Argyle는 그리스 서술문의 短長格 운율이 격언으로서의 특성과 결합되어 있으며, 그것은 다른 많 은 그리스 전통과 마찬가지로 갈릴리 지역에 스며들었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A Note on John 4:35," ExpTim82, pp., 247-48.)
또한 고대의 것으로 확인되는, 또 하나의 격언이 37절에서 인용되지만, 이는 고대 용법과는 매우 다르게 사용된다. 그 격언은 일반적으로 ,예를 들면 미가6:15절 “네가 씨를 뿌리거나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미가서26:16; 신28:30; 마25:26절 참조.
에서 와 같이 냉소, 의기소침, 혹은 심지어 심판의 협박을 표현하는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이라는 배경에서 “노력한 다른 사람들”이란 먼저 세례요한과 예수, 그리고 수가 여인과 같이 그들의 메시지를 전파한 여타의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G. R. Beasley-Murray, "Word Biblical Commentary", volume 36, John1-21,(Texas: word Book, Publisher, 1987), p.214.
◉ 수가 사람들의 회심(4:39-42)
이 부분은 에필로그(Epilogue), 즉 후기이다. 예수와의 대화를 마치고 메시야를 발견한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로 뛰어 들어가서 “내가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라고 했는데 그 여인의 그러한 증거를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냐 하는 것이다. 34절에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은지라”라고 했다. 여기서 저자는 이 여인이 전도한 결과가 많은 사마리아인들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간결하게 설명하고, 또 예수께서 몇일 동안 거기에 유하셨음을 말함으로 결말을 짓고 있다. 여인의 증거를 통해 많은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께서 “세상에 구주”이심을 믿음으로 주께 나아왔다. Barrett가 지적하듯이 그것이 바로 제자의 사명인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으시고, 단지 이틀만 유하신다. 그러나 이틀은 수가 사람들 스스로 여인의 증거가 옳다는 사실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기간이었으며, 그들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우리가·····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그것은 1장의 예수에 대한 선언들과 나란히 놓일만한 가치가 있는 주목할 만한 고백이다. 사마리아인들이 “구주”라는 용어를 실제로 사용했는지, 또는 저자가 저자가 요한복음 4:25, 29절에서 "Taheb"라는 용어 대신 메시야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과 같이.
동의어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확신하기가 어렵다. 유대인들은 “구주”라는 용어를 메시야에 적용하지 않았다. G. R. Beasley-Murray, "Word Biblical Commentary", volume 36, John1-21,(Texas: word Book, Publisher, 1987), p.215.
즉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남겨 두었다. 신적인 명칭으로서 그것은 이사야서 후반부에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사야 43:3,11; 63:8-9절 참조.
왜냐 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주 하나님의 대리인, 그리고 구원과 생명을 의미하는 하나님 나라의 중재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들의 전승들은 42절 나오는 그들의 메시야 이해를 준비시켰다. 사마리아인들의 용어인 "Taheb"는 일반적으로 오실 또는 돌아 오실자로 정의된다.
Ⅵ. 나가는 말
수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삽화의 관심사는 다음과 같이 삼중적이다. 즉 “생수”의 수여,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 그리고 비유대인들에 대한 선교,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통해 연결되는데, 그 행위는 계시자, 구원자, 그리고 신적 주권의 중재자의 사명을 포함한다. 요한복음 4장은 다음과 같은 점들에 대한 묘사에 있어 요한복음서 가운데서도 독특하다. 즉 사마리아 여인을 대하시는 일에 있어 예수의 동정심과 인내심, 사마리아 사역에 대한예수의 동의, 그리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시다”라는 예수에 대한 그들의 경험적 고백, 그 고백은 비록 신분은 미천했지만 그들이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거의 확실히 요한복음서 저자는, 누가가 빌립의 사마이아 전도를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의 시각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장벽을 무너뜨린 이 사건을 교회의 세계선교에 있어서 결정적인 한 단계의 진전을 가져오게 한 일로 보았을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의 정체에 대해 처음에는 단지 목마른 사람, 다음으로는 유대인, 이어서 랍비, 그 후에 선지자, 마지막으로는 메시야로 파악해 냈다. 그녀는 목마른 자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려고 노력했으며, 유대인을 싫어한다는 표시를 했고, 그 랍비에 대하여 질문공세를 펼쳤으며, 그 선지자를 존경했으며, 그리고 그 그리스도에 대해서 경배를 했다. J. A. Findlay에 의하면 바로 이 상상력을 발휘한 해설은 그 자의 핵심적 요지, 즉 행동하시는 그리스도와 계시에 응답할 때 성장하는 신앙에 대해 밝히려는 의도를 잘 파악하고 있다. 예수의 모범에 따라 우리도 복음을 모르는 자에게 먼저 다가갈 줄 아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결23동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