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을 보이다 / 권예자
그들이 가까이 있다
앞에도 뒤에도 있다
나를 철저히 맛보려는 그들
시어의 이랑과 이랑 사이에서
행적과 사상을 찾아
잘근잘근 씹어보려는 이들 있다
삽쌀한지 달콤한지
질기거나 부드러운지
맵고 짭짤한지 뼈없는 맹탕인지
간을 쉽게 내주지 않으려고
무심한 척
냉정한 척
시치밀 딱 떼었어도
나를 읽어내는 송곳 같은 눈빛이 있다
읽히기는 싫으면서
잘 읽히면 부끄러울 줄 알면서
제발 많이 읽어달라고 간을 내보이는
안팍 다른 시인이 있다
욕심껏 숨겨놓고
철저히 들키기를 바라는
거스른 시간의 무늬 / 박현숙
할머니
- 나 할머니 아니야
그럼 아주머니
- 나 아주머니 아니야
그럼 뭐지요
- 색시야
몇 살인데요
- 열여섯 살
거스른 시간의 무늬
바스러질 것 같은 쾌쾌 묵은 빵 조각
검은 곰팡이꽃
새털 같은 기억
백 살이 코앞인 할머니
새우 같은 눈을 뜨고 방긋방긋 웃는다
구름은 / 백경화
대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선물
드넓은 하늘에 그려놓은 화가의 작품이고
시인의 다양한 언어다
유유자적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가 되기도 하고
새빨간 옷으로 치장한 요부가 되었다가
잔뜩 찌푸린 성난 모습도 되었다가
귀여운 동물들의 왕국이 되기도 하고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고 포근한
어머니 품속
구름은 향수를 가득 담은 행복한 여정이다
단단한 씨앗 / 손중숙
동서로 뚫린
대전역 관통도로 부근
잡초 무성한 공터
한 구석에서
고향을 지키는
대추나무 한 그루
거센 바람이 키질 해도
어금니로 콱 깨물어도
결코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씨앗
하늘을 찌르는
고층건물들 사이에서
날마다 아슬아슬하다
한 장의 밤 / 오유정
안녕
재개발지구의 옛 모습은 자주
밤과 함께 찾아들곤 했어
기차가 다소곳이 지나가길 바라는 몇몇의 어둠 속 헤드폰
음악은 주변 소음을 의식하지 않았어
다행히도 사람들은
21세기의 소음과 주변에 집중하느라 내가 드리운 음악엔 무관심이야
그게 즐거워
밤을 잊으면 내일이 쉬이 올까
가벼운 리듬은 언제나 하수구 구멍에 걸려 발목을 잃곤 했어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간 거기
아직 머물고 있는 숲에 나는 안도하고
어둠이 컴컴해진 색깔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는 동안
나는 또 밤을 한 장 완성했어
그렇고 그런 시 / 이영순
어림없다
가늘고 흐린 연필로
새빨간 동그라미 다섯 개 받기는
굵은 붓이나 진한 펜이거나
알록달록 색연필
가지각색의 색상과 굵기로 쓴
글들을 내보인다
말의 뼈로 세우는 탑들
그 사이에
흐린 연필심에 침 발라가며
꼭꼭 눌러 쓰다가
주름 속에 고인 눈물
마분지 공책의 상처 많은 숙제다
구멍 난 숙제 앞에 울던 날처럼
또 그렇고 그런 시 쓸 때
잡기장 같은 얼굴 위에
하나 더 늘어가는 주름이 붉어진다
손님 / 이형자
창문을 두드리는 이 누구신가요
창가 몰래 접어 두었던 옷깃
밤새 저벅이는 소리
나는 잠을 살치는데
바람 따라 밤비 젖어 익힌 눈매
창문을 두드리는 이 누구신가요
종달새 / 정금윤
옹기종기 조약돌
물결이 넘나드는
4월 개울가
보일 듯 커도 작은 새
끼리끼리 날렵하게
요리조리 폴짝폴짝
알 같은 돌 사이에
알 낳을 자리 놓고
익숙한 게
가까우면 더 생소해
펼치거나 오그려도
변함없는 대칭 무늬
첫댓글
봄비, 권예자작성자 23.12.08 07:38 새글
아름다운 시를 쓰시는 박 시인님,
축하 댓글 감사합니다
제28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큰 상 수상하심도 축하드려요.
제28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아름다운 송년, 행복한 신년 맞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