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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璽. 나라를 상징하는 도장. 주로 아시아권에서 나라를 상징하는 목적으로 제조된 도장을 뜻한다.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장으로, 외교조약문을 체결하는 일과 같은 국가의 중대사에 사용된다.
국새는 보통 전문 장인에게 의뢰하여 제작된다. 국새가 제작될 때 '일정한 재료를 얼마 만큼 사용하라'는 제약이 붙는다. 만일 그 내용이 준수되지 못하면, 의뢰를 받은 도장 장인은 파면되고 국새는 폐기되며, 국가는 다른 장인에게 국새 제작을 의뢰한다. 국새의 규격과 형태, 재질에 관한 관련 규정은 이곳을 참고하라.
한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국새는 <증보문헌비고> 예고새인조(禮考璽印條)에 부여의 예왕(濊王)이 예왕지인(濊王之印)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는 기록이 없으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금·요·원·명·청나라에서 만들어 보낸 국인(國印, 大寶로 통칭)을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는 소유자와 용도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어보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어명을 내릴 때 국서에 찍히는 실무용과 종묘에 모셔진 선왕들에게 바쳐지는 의례용 등 다양한 도장이 만들어졌다. 국왕이 중국 황제로부터 수여받은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은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사용되었고 즉위식에서 후계왕에게 승계되었다. 또한 일본과의 외교 실무에는 위정이덕(爲政以德)이 사용되었으며, 어명 반포나 왕세자 책봉 등의 실무에는 유서지보(諭書之寶), 국왕행보(國王行寶), 그리고 준명지보 등의 국새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어보들은 왕이 사용하는 물건이기에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졌고,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옥으로 만든 황제지보와 대한국새 등의 옥새들도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보존된 어보들은 수백 점에 이르며, 국립고궁박물관이 이 어보들을 소장하고 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국새는 대한제국에서 주조한 대한국새(大韓國璽)라고 할 수 있다. 1910년 강제병합 당시 일본에게 강탈되었다가 45년 광복과 동시에 반환되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분실되었다. 후술한 국새 제작 사기사건에 연루됐던 민홍규에 의해 복원된 적이 있다.
대한국새의 복원품.
사용 기간: 1949년 5월 ~ 1962년 12월 31일
인뉴[1]는 용 혹은 삽살개 모양. 재질은 은이며 크기는 인면[2] 부분이 정사각형으로 한 면이 2치(약 6cm)이다. 인면에는 대한민국지새大韓民國之璽라고 전서체로 새겼다. 국가기록원이 보관한 기록에는 1948년에 서울 충무로에 있는 천상당(天賞堂)이라는 곳에서 제작했다고 돼 있다.
현재 분실된 상태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국새실종사건' 문단 참고.
사용 기간: 1963년 1월 1일 ~ 1999년 1월 31일
인뉴는 거북이. 재질은 은이며 크기는 인면 부분이 7 * 7cm이다. 인면에는 한글 전서체로 '대한민국'이라고 새겨져있다. 3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사용되어 인면이 닳았고, 더불어 몇 가지 비판을 받는 점이 있어 3대 국새를 제작하기로 했다. 2대 국새는 인뉴가 거북이 모양인데, 거북이는 제후국의 옥새에 사용되기 때문에 격이 낮게 여겨진다는 점과 함께 인면에 새긴 글씨가 한글 전서체인데 반해 한글을 한문 전서체와 비슷하게 디자인하려고 억지로 획을 구부리고 왜곡시켰다는 점이 비판받았다. 국새의 재질이 은이라는 점도 비판대상이었는데, 금보다 격이 낮게 여겨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현재 국가기록원이 이를 보관하고 있다.
사용 기간 : 1999년 2월 1일~2008년 2월 21일, 2010년 12월 1일~2011년 10월 3일(5대 국새를 제작하는 동안 임시로 사용)
인뉴는 봉황.[3] 재질은 금과 아연 등을 섞은 합금이다. (순금과 순은은 다른 금속보다 무른 성질이 있어 보통 다른 금속을 합금하여 그 강도를 높인다. 보통 금목걸이나 금반지도 금 이외의 다른 금속도 포함하고 있다.) 인면에는 훈민정음체로 '대한민국'이 새겨져 있다. 크기는 인면이 10.1*10.1 cm이다.
3대 국새 제작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맡았는데, 외환위기 직후라서 제작기간이 단축되었고 더불어 예산도 삭감되었다. 당시 제작에 참여했던 도정만 박사는 3대 국새 제작이 부실했다고 인정하였다.[4] 부실 제작 때문인지 사용되는 도중 국새에 금이 생겨 이는 폐기되었고 녹여지는 대신 국가기록원에서 이를 보관하게 되었다.
4대 국새와 관련된 사단이 일어나 4대 국새는 폐기되었고 5대 국새를 새로 제작하기로 하였다. 제작하는 동안 임시로 3대 국새를 보강하여 사용하였다. 오늘날은 국가기록원에서 이를 보관 하고 있다.
사용 기간 : 2008년 2월 22일 ~ 2010년 11월 30일
인뉴는 제작 이전에 삼족오 모양으로 만들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논의 끝에 3대와 마찬가지로 봉황으로 만들어졌다. 재질은 금 합금이며 크기는 인면이 10.1*10.1 cm. 그리고 아래 사건으로 폐기되었다. 이 4대 국새는 인면이 닳거나 금이 가는 등 손상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다. 이 말 많고 탈 많은 4대 국새는 현재 국가기록원에서 보관 중이다. 만약 국새가 순금이어서 너무 꾹 누르면 무른 순금이 찌그러들지 않았을까
사용 기간 : 2011년 10월 4일~(현재 사용 중)
인뉴는 역시 봉황이지만 이전 국새 인뉴와 달리 봉황 두 마리가 큰 무궁화를 등에 짊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재질은 금, 은, 구리, 아연에 3대 국새처럼 균열이 생기는 일이 없도록 이리듐을 추가로 첨가했다. 크기는 인면이 10.4*10.4 cm. 제작은 3대 때와 마찬가지로 KIST에서 맡았다. 3대 국새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던 도정만 박사가 제작단장이다. 인뉴와 인면을 따로 제작하여 붙이지 않고, 처음부터 일체형으로 제작했다. 제작비는 2억 1500만 원 상당이다.
2005년 감사원 감사 결과 1대 국새가 분실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국새뿐만 아니라 제헌헌법 원문도 분실되어 국가기록물 관리가 그동안 허술했음이 드러났다.
국가기록원에서는 대략 1965-66년 사이에 분실된 것으로 추정한다. 2대 국새를 새로 제작한 뒤 1대 국새를 금고에 넣어두었는데, 국새 관리부처가 바뀌는 와중에 사라졌다고 생각된다. 연합뉴스 기사
1대 국새와 관련해서는 이상한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록에 남아 있는 사진에는 1대 국새의 인뉴가 삽살개 모양이다. 하지만 1대 국새를 실제로 다루었던 당시 공무원은 인뉴가 삽살개가 아니라 용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전각장 정기호 선생[5]은 생전에 자기가 1대 국새를 만들었다면서 도면을 남겼는데, 이 도면에도 인뉴가 용 모양이다. 국새는 나라를 상징하는 도장인 만큼 인뉴 모양으로 특별히 상서로운 상징을 고르는 법이다. 비록 삽살개가 민간에서 영험한 동물로 여겨진다고 하나, 나라를 상징하기에는 그것이 지닌 격이 너무 낮다. 또한 위 사진에도 보이듯이 삽살개가 인면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다. 인면에 새기는 글자와 평행하게 똑바로 있음이 통례인 만큼, 삽살개의 이런 자세는 여간 이상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잘 쓰던 1대 국새를 왜 폐기하고 2대 국새를 새로 제작했는지도 의문인데, 제5대 국새 백서에는 "국새는 한글을 사용해야 한다는 이유로 1962년 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이 때문에 누군가 고위층이 1대 국새를 작정하고 빼돌린 게 아니냐는 의혹이 생겼다. 국가기록원에서 현상금을 걸어 수배했으나 1년이 넘도록 행방을 알 수 없었다.
2010년 4대 국새에 관련된 조사에서 4대 국새 제작단장 민홍규[6]가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작태가 드러났다. 국새 제작과정에서 황당한 짓들을 벌인 것이다.
우선 국새를 만들 때 생긴 잔여 금(金)을 반환해야 함에도 본인이 몰래 빼돌려서 횡령했다고 한다. 무슨 아르키메데스가 적발한 세공사도 아니고... 거기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방식대로 제작하겠다고 계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계를 사용하는 현대방식으로 국새를 제작했다. 수사과정에서 그는 아예 전통적 제작방식을 배운 적이 없는 등[7] 그가 주장하던 그의 경력이 모두 가짜임이 드러났다.
민홍규는 그동안 스스로를 전각장 석불 정기호 선생의 수제자로 자처해 왔다. 하지만 검찰 조사결과 석불 정기호 선생 생전에 두어 번 선생을 찾아왔었을 뿐, 제자로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거니와 주물 자체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실제로 4대 국새 제작 때에도 주물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시켰다고 한다. 4대 국새 제작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사기였던 셈이다. 이러한 행각이 발각되기 전까지 경상남도 산청군에 민홍규를 중심으로 국새문화원을 세우기로 하고 산청군이 예산을 지원할 계획이었다. 산청군에서는 관광명소로 만들 생각으로 예산을 지원해왔는데 민홍규가 잡혀들어가면서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듯 허망하게 되었다.
제일 황당한 것은 국새에 본인의 이름을 새겼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인뉴에 있는 봉황 부리 밑에 자신의 성인 '閔'을 새겼으며 대한민홍규국 도장 인면에 새긴 '대한민국' 글자 중 '대'자의 ㄷ자 안쪽에 閔弘圭作 二千七年(민홍규 작 2007년)이라고 한자로 새겨넣었다. 이스터 에그 그 외에도 봉황 꼬리에 太平年(태평년), 萬歲璽(만세새)[8]라는 글자를, 인뉴 받침대에는 太平萬年(태평만년)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원래 이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금 횡령 사실이 불거지면서 확인차 국새를 살피던 중에 발견되었다.
그리고 4대 국새 제작단장으로 선정되려고 언론사에 로비를 했다고 한다. 그가 본인의 이름 값을 높여서 제작단장으로 선정되기 쉽게 하려고 한 공작이다. 횡령한 금으로 도장을 만들어 국회의원 등 유력인사들에게 로비 용도로 제공했다는 혐의도 있었으나, 금 도장 로비 혐의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여겨져 검찰에서 이에 대해 그를 기소하지 않았다. 처음 횡령 사실이 알려졌을 때 민홍규는 찾아온 신문기자에게 "국새를 제작하고 남는 금을 사용하면 이롭지 않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고 금을 태워 없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금이 태워져서 재가 될 수 있는 물질이던가?
게다가 자칭 국새 장인 민홍규는 백금으로 장식된 다이아몬드 국새를 만들어서 돈벌이를 노리고 있었는데 이것의 가격이 40억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나 이 국새는 팔리기는커녕 그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다. 나아가 이 초호화 국새의 성분을 조사한 결과 가짜였는데, 니켈과 황동 합금으로 도장을 만들고 공업용 인조 다이아몬드로 도장에 장식을 한 것이었다.[9]였다고 한다.
결국 2011년 1월 20일, 서울중앙지법 1심 재판에서 민홍규는 가짜 국새 제작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2011년 7월, 서울중앙지법 항소심에서 가짜 국새 제작 혐의뿐만 아니라 위에서 언급된 가짜 다이아몬드 국새를 판매하려 한 혐의까지 유죄로 인정되어 결국 형량에 6개월이 더해져 징역 3년을 언도받았다. 결국 그는 다시 항소했지만, 2011년 12월 4일에 대법원은 항소심 결과인 징역 3년을 확정하였다.
하지만 형을 다 살고 나온 민씨는 여론재판의 희생양이었다느니, 진실은 승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있으면 재심이라도 청구하시지 왜? 댓글들 보면 선동의 무서움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2008년에 KBS에서는 국새 제작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당시 자칭 장인이라는 그가 정작 국새 제작에는 특별히 아는 게 없어 방송될 분량이 별로 없어서인지 다큐멘터리의 내용 대부분은 외국 국새에 관한 이야기, 금을 녹이고 가마를 부수는 장면, 전통 기술을 배웠다고 사기치는 민씨의 주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해당 다큐멘터리 홈페이지. 지금 보면 꽤나 오그라들고 기분이 묘하다.
2011년 4월 29일, 대종언어연구소[10] 박대종 소장[11]은 현행 국새의 서체가 국새규정 5조의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자체로 한다'는 조항에 맞지 않다는 주장을 했다.# 동국정운에 따르면 大韓民國을 한글로 옮길때 땡ㅎ한민귁이라고 적어야 하고 지금 적은 것처럼 대한민국이라고 적으면 의미가 달라지며 특히 韓國이 아니라 漢國이라는 의미가 된다고(...)
그런데 '창제 당시의 자체(字體)로 한다'고 했지, 창제 당시의 발음으로 한다고는 안 했다. 자체(字體)란 한자 뜻 그대로 글자의 서체, 즉 글꼴, 폰트를 말하는 것이지 발음이 아니다. 더군다나 박 소장이 제시한 동국정운은 중국의 운서를 바탕으로 만든 가공의 한자음이지 현실의 한자음이 아닐 뿐더러, 인공이냐 실제의 발음이냐를 떠나서 현대의 국새를 만드는데 중세의 발음으로 표기한다는 건 최소한의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이 주장 때문에 행정안전부는 '자체라는 것은 그 시절의 글자 형태를 빌린다는 것이지 표기법을 그대로 가져온다는 의미가 아니다'라는 해석을 보도자료로 내놓았다.
일본의 국새는 금으로 되어 있으며 전서체로 새긴 대일본국새(大日本國璽)로, 1874년 이래 사용해오고 있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 국새는 청동제로 되어 있는데, 1954년에 제1차 전국인민대표자회의 이후 사용하지 않고 국가박물관에 1급 국가문물로 보관되어 있다.
<img class='wiki-image' alt='파일:중화민국지새.jpg' data-filesize='73699' src='//cdn.namuwikiusercontent.com/77/77b7df46c9ab9be7348d9bc1ec9b03fa4b4aaabeb48bffc69030b287c21f1054.jpg?e=1488819873&amp;k=km8SpQyl8gqSyzlN3_DqgA'>
대만의 국새인 중화민국지새(中華民國之璽). 다른 나라의 국새는 모두 금속으로 된 것과 달리 이 국새는 재질이 옥이다. 말 그대로 옥새다.
교황의 국새인 어부의 반지. 서양에서 자주 사용하는 반지 형태[12]의 도장이다. 어부의 반지라고 부르는 것은 초대 교황인 베드로와 관련이 있다. 예수가 어부였던 그를 제자로 삼았을 때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했던 것이다. 이 반지는 역시 금으로 되어 있으며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낚는 베드로와 교황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몇몇 서양 국가들에서도 국새를 사용한다. 사진은 영국의 국새(1953년)이다. 동양의 인장처럼 인주를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니라 녹은 봉랍 위에서 누르는 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인영뿐만 아니라 입체적인 부각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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