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韓國的)”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 알맞고 고유한. 또는 우리나라의 특성이 드러난’의 뜻을 가집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 들은 말이 ‘한국적 민주주의’였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데 갑자기 학도호국단 임원들 다 교무실로 오라고 방송이 나오더니 우리를 교감 선생님이 데리고 홍성 군청으로 갔습니다. 가서 보니 서울에서 온 분이 홍성의 소위 유지들과 고등학교 학생 임원을 모아놓고 ‘한국적 민주주의’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습니다.
그 분 성함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와이셔츠를 만드는데 굳이 미국식으로 따를 필요가 없다. 우리 몸에 맞게 재단해서 만들면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토착화해야 한다는 생뚱맞은 소리를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 그게 유신헌법으로 개헌하려고 그런 황당한 얘기들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50년 가까이 지난 현재에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한국적 민주주의’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서로 상대를 배려할 줄 모르고, 선출된 권력 운운하고, 무슨 일이든 다수결로 밀어붙이는 정말 민주주의의 개념조차 모르는 무리들의 입에서 항상 나오는 소리가 ‘민주주의’니 우리나라 어린들이 다 ‘한국적 민주주의’에 물들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국가 이미지 변화는 개인의 이미지 변화와 비슷한 곡선을 그린다.
활기차게 뻗어갈 땐 모든 게 장점처럼 빛나 보인다. 그러다 기세가 고꾸라지면 장점은 하찮고 시들해지며 단점은 확대돼 눈앞에 다가선다. K팝·K시네마·K드라마·K클래식 등이 세계무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자 한국 단점조차 장점인 양 몸값이 올랐다.
무법(無法)과 무질서를 활기(活氣)로, 무례(無禮)를 친근감으로, 기초(基礎) 다지기를 건너뛰는 건성 건성과 대충 대충을 한국식 속도감으로 예찬하는 외국인의 입발림 칭찬에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습이 드물지 않다.
대문자 ‘K’는 ‘한국적’이란 단어로 바꿔 낄 수 있다. 사실 ‘한국적’이란 낱말은 오랜 세월 ‘불명예스럽고’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독재를, ‘한국적 시장경제’는 정치와 기업이 결탁한 천민(賤民) 자본주의를, ‘한국적 시간관념’은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코리안 타임(Korean time)이란 뜻이었다. 정치 행사, 각종 관청의 민원 처리 과정에서 밥값·떡값 명목으로 돈 봉투를 호주머니에 찔러주는 행태도 ‘한국적 관행’으로 여겨졌다.
지금 한국 구청과 동사무소 민원서류 발급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투명하다. 심지어 시골 고등학교 졸업증명서까지 떼 준다. IT 기기의 광범위한 보급이 속도를 세계 최고로 높였다. 그럼 그곳의 돈 봉투는 언제 어떻게 사라지고 투명성을 확보하게 됐을까. 부정을 적발하는 검사와 경찰과 감사원 인원을 몇 배 늘렸기 때문일까.
천지개벽(天地開闢)은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된 경제 발전의 열매가 열리면서 찾아왔다. 이 대목에선 경제라는 하부(下部) 구조가 의식과 행동이란 상부 구조를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지적이 정확했다.
경제 발전으로 공무원들에게 안정된 중산층 생활이 가능한 급여를 주자 돈 봉투가 뜸해졌다. 퇴직자를 위한 공무원 연금 제도가 정비되면서 돈 봉투의 유혹에 넘어가 노후를 망치는 경우는 급감(急減)했다. ‘한국적’이란 단어에 붙어 다니던 100년 묵은 불명예(不名譽)는 이렇게 떨어져 나갔다. 피겨스케이팅에서 김연아가 보여준 공중 도약(跳躍)보다 더 기적 같은 도약이었다.
그 기적이 무너지고 있다. ‘단어’의 운명은 때로 예언자의 계시(啓示)처럼 나라의 미래 모습을 그려준다. 요즘 ‘한국적’이란 단어는 예전의 ‘불명예스럽고’ ‘부끄럽고’ ‘감추고 싶던’ 그 감옥에 다시 수감(收監)되는 길을 걷고 있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정체(停滯)·혼란과 동의어(同義語)가 돼 간다. ‘세계 역사상 최저’라는 한국적 출산율 절벽은 사라지는 국가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총장·학장 직선제(直選制)에 오염된 대학은 하향(下向) 평준화를 향해 미끄러진다.
거짓을 꾸며 수사 기관에 고소·고발하는 무고(誣告)와 법정에서 허위 증언 하는 위증(僞證), 사기(詐欺) 유형과 건수 역시 세계 최고에 가깝다. 무고·위증·사기를 뭉뚱그리는 밑돌이 ‘거짓말’이라는 단어다. 도산(島山) 안창호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말은 말자’며 목이 쉬도록 외쳤던 100년 전 세태로 퇴보하고 있다.
국민이 가진 장점을 최대한으로 발휘시키면 나라는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선다. 잘나가던 시대에 장점에 가려 있던 단점이 무더기로 노출되면 나라는 회복(回復) 불능 상태로 주저앉는다.
정치는 장점이 발휘되도록 촉진하고, 단점이 노출되지 않도록 억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위대한 정치는 국민 단점조차 장점으로 기능(機能)하게 만든다. 아데나워와 드골은 독일과 프랑스 국민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꿔 꽃으로 피어나게 한 지도자다. 국민 단점을 정권 유지, 정권 탈취를 위해 이용하는 정치는 최악의 정치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거짓말은 이제 새 소식이 아니다. 그가 참말을 하면 ‘몇 년 만의 참말’이라고 그게 뉴스가 되는 현실이다. 민주당은 전당대회 300만 원짜리 돈 봉투는 밥값일 뿐이라며 그게 무슨 대수냐고 대놓고 떠든다.
50년 전 동사무소만도 못한 상태로 퇴행(退行)했다. 집권 세력은 구약(舊約) 속 이사야를 자칭하는 목사에게 휘둘리면서 무력(無力)하고 무대책(無對策)인 상태로 총선에서 “이재명이란 요행(僥倖)”이 작용하기만 기대하며 국민과 멀어지고 있다.
‘국민밖에 희망이 없다’는 말은 절망스럽다는 뜻이다. 혁명밖에 대안(代案)이 없는 정치는 불행한 정치다. 그러나 혁명조차 불가능한 정치는 더 불행한 나라를 만든다. 발밑이 무너지고 있다.>조선일보. 강석천 고문
출처 : 조선일보. [강천석 칼럼] ‘한국적’이란 단어는 다시 부끄러운 말이 되는가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발췌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강행하자 종군기자였던 영국 더 타임스의 한 기자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기사에 작성한 것이 오랜 시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가르키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이 문구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는지 1955년 10월 유엔 한국 재건 위원회(UNKRA)에 참여한 벤가릴 메논 인도 의원이 전후 한국을 일주일 정도 시찰하고 후일담을 증언하며 “한국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라고 이 문구를 인용했고, 1960년 4.19혁명,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에도 외신은 쓰레기통 속 장미에 빗대어 한국 소식을 전했다고 합니다.
1968년 한국이 종합 제철소를 지으려 할 때에도 세계은행 아시아 지역 실무 담당자로 자문을 하러 온 영국인 존 자페(John Jaffe) 박사가 "한국이 종합 제철소를 짓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피우는 것과 같다."라고 하며 한국의 종합 제철소 건설이 경제성이 없다는 평의 보고서를 작성하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 모두가 비웃어도 우리 대한민국은 남들이 믿을 수 없는 수많은 기적을 만들었고 보란 듯이 대한민국을 세계에 우뚝 세웠습니다. 정말 믿어지지 않게 K팝, K드라마, K푸드 등 많은 분야에 ‘K’자가 붙어 많은 나라가 대한민국을 부러워하는 것이 현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부끄러운 것은 'K민주주의'입니다.
아직도 가장 발전이 안 되어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오늘날의 정치인들입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