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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5. 묵상글 ( 부활 제5주일. - 새로운 사랑법.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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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5. 부활 제5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새로운 사랑법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고 하시며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계명이란 서로 사랑하는 것인데
주님의 사랑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에 따라 살던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기는 했고,
주님의 새 계명을 모르는 사람도 서로 사랑하기는 합니다.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원수는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너희는 율법에서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그렇습니다.
원수가 아닌 사람끼리는 누구나 서로 사랑합니다.
문제는 주님의 새 계명을 배우기 전에는 원수 아닌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방인들도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에게는 잘해준다는 주님 말씀처럼
나한테 잘해줘야만 원수가 안 되는데 대댜수가 나한테 잘해주지 않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들도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되받을 생각으로 사랑을 했는데
많은 경우 되받지 못하거나 원하는만큼 되받지 못하기 때문에 원수가 되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원수가 아니라 이처럼 서로 사랑하다가 원수가 되었는데
한마디로 서로 바라는 사랑을 했기에 서로 사랑하다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바라는 사랑,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하느님 사랑에 머물거나 받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사랑을 하면 이렇게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을 살고자 하는 우리는
"너희는 이웃에게 등대지 말고 하느님께 바라라"는 말씀처럼
인간에게 등을 기대면 그 사랑은 이웃 때문에 무너질 것이니
바라기는 하늘 바라기를 할 것이고, 하기는 내리 사랑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바라고 이웃에게 바라는 것이 없을 때 원수가 없고,
바라는 것이 있을 때 원수였던 사람까지 이제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사랑법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새로운 사랑에 따라 살게 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됩니다.
오늘 묵시록에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하고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고도 하는데
신천지는 죽어서 가는 곳이거나 다른 어디가 아니고,
지금, 여기 주님의 사랑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저는 부럽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부러울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는 요한이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계명을 받은 오늘 우리는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시작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조선족 동포 공동체와 함께 성모의 밤과 피정을 하기 위해
홍천 '여기 피정의 집'에 와 있는 바람에 묵상을 충분히 못하고
강론을 올렸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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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5. 부활 제5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제자들에게 발을 씻기는 세족례와 마지막 만찬에서 비롯된 고별예식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배경은 주님의 사랑이 어떻하셨는지 보여줍니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13,1)
이 구절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며 마지막 까지 남기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마지막 유언을 제자들에게 알리는 삶의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은 그분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또한 그 사랑은 가능한 모든 사랑을 뛰어넘는 최고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유언인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기전 예수님은 사랑의 행동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함께하기 전에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른 뒤에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어주십니다. 이러한 행위는 온전한 사랑을 나타내는 하인의 자세입니다. 고대 팔레스티나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맨발로 다녔고 그들에게는 발이 몸에서 가장 더러운 부분이었습다. 따라서 발을 씻어주는 것은 노예나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발 씻김의 행위는 가장 낮은 자로서의 봉사요 사랑의 내어줌입니다. 다른 한편 남의 가장 더러운 부분을 씻어주는 일은 친밀함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다시 식탁에 돌아온 예수님은 세족례의 참된 의미를 밝혀주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13,14-15).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사랑을 그대로 살아가라는 사랑의 실천을 말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함께 만찬을 하면서 몹시 번민하십니다. 당신의 제자에게 배반을 당할 것을 미리 아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팔아 넘길 가리옷 사람 유다도 만찬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친히 포도주에 빵을 적셔 그에게 주십니다. 자신을 배반하는 사람까지도 사랑으로 품어안으시는 그 큰 사랑을 우리에게 남겨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면서 마지막 유언으로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거나 당신이 사랑한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 안에는 이미 당신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당연히 포함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방법은 당신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끝까지’,곧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온 힘을 다해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옛날부터 있던 계명이지만,예수님께서 사랑하신것과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 이것이 새로운 계명입니다. 이민의 날인 오늘 이러한 사랑이 더욱 요구됩니다.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5월 영적 수련 성월 3주간 감사/찬양 ✝️
금주간 성서 읽기 에페 1-6장
✝️ 1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다로카(Daroca)의 피묻은 여섯 개의 성체
스페인 - 1939년 2월 23일
스페인의 황금시대의 유명한 작가이자 도미니크 수도원의 수사인 프라이 루이스 드 그라나다 (Fray Luis de Granada)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서기 1239년 발렌치아 왕국에서는 무어족의 대군이 성 안에 있는 천 명밖에 되지 않는 적은 수의 그리스도교 군대를 습격했다.
그리스도교 군인들은 자기틀 숫자가 이렇듯 적고, 또 발렌치아로부터 야곱 왕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에는 너무 멸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하느님께서 특별한 기적과 특별한 은총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시지 않는다면 이 수많은 적군에게 틀림없이 패배할 것이라고 믿었다. 여섯 명의 중대장들은 고백성사를 보고 영성체 함으로써 하느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단지 몇 명의 신부들만이 병사들과 함께 있었고 적들이 이미 접근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병사틀이 영성체를 할 시간이 없었다. 여섯 명의 지휘관들이 그들 병사들의 대리자로서 고해를 하고 미사에 참례했는데, 사제는 이 미사 때에 그들에게 분배해 주기 위해 여섯 개의 성체를 축성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갑자기 적이 공격을 개시했다는 전갈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여섯 명의 지휘관들은 부득이 영성체를 나중으로 미루고 즉시 무기를 잡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주넘께서는 이 지휘관들이 뜻을 갖고 애써서 당신플 맞은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을 홉족하게 보셨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주님께 간청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서, 주님께서는 짧은 시간 내에 무어족을 격파시킬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을 강건하게 해 주셨다. 이 전투의 소용돌이에서 달아난 적군은 불과 몇 명 뿐이었다. 그러나 여섯 명의 중대장들은 자기들이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성체를 영하기를 원했다.(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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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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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5. 부활 제5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길을 가다가 주인 잃은 지갑을 주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다음의 보기에서 선택해보세요.
1) 가까운 경찰서나 경비실에 맡긴다.
2) 모른 척 그냥 간다.
3) 지갑 속 현금 액수에 따라 1번 또는 2번을 선택한다.
아마 대부분 1번을 선택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1번을 선택했다가 곤란한 상황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지갑을 주어 경비실에 맡겼는데 경찰서에서 연락이 온 것입니다. 지갑 주인이 지갑 안에 130만 원이 사라졌다고 주장하니 조사받으러 출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선행을 베풀었는데 오히려 도둑으로 취급받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로, 이 사람은 법정까지 가게 되면서 1,300만 원을 변호사비로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 여러분에게는 오지 않을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위의 질문에 이제 몇 번을 선택하시겠습니까?
1번이 정답이라는 것은 분명한데, 2번을 선택해야만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사실 이런 곤란을 겪을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어쩌다 생겼던 단 한 번의 일을 기억하면서 선행을 포기해야 할까요? 어쩌면 선행을 하기 싫은 것이 아닐까요?
손해를 보더라도 사랑 실천에 적극적인 모습,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여라.’를 실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 하신 고별사 부분입니다. 당신의 떠남은 육신의 작별일 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때이며, 하느님의 사랑이 널리 퍼지는 세상을 맞게 된다고 하시지요. 이로써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이 모든 말씀에 주님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얘들아”(요한 13,33)라는 호칭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아들을 정겹게 부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사랑하는 제자들이 더 좋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작별하고 나면 지금 당장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 없는 동안 주님과 함께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사랑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구원받게 됩니다.
사랑 실천에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계속해서 만드는 우리입니다. 사랑과 멀어질수록 주님과도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를 이루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커다란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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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을 배우려 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O.메러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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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5. 부활 제5주일. 키엣 대주교님.
항상 넘치는 순례객으로 기도소리와 성경,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도사들은 물론 순례객의 발길도 끊어져 텅비고 황폐한 수도원이 되어버렸습니다. 수도원장은 현자를 찾아갔습니다. 왜 수도원이 이렇게 되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물었습니다. 현자가 답했습니다
“당신의 공동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는 무관심입니다. 수도사들 중 한 명이 위장한 주님이었지만 주변에 관심없는 이기적인 사람들은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현자로부터 답을 들은 수도원장은 황급히 산을 내려와 물었습니다. “우리 공동체에 위장한 주님이계시다고 하는데 그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수도사들은 누가 위장한 주님이신지 서로의 얼굴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위장을 하고 우리 곁에 계시다면 우리는 과연 그 분을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그 후 수도원에서는 서로를 주님대하듯 이웃에 관심을 갖고 서로를 존경하고 돌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은 주님의 사랑과 기쁨, 삶의 활력이 넘치는 곳으로 변했습니다. 그러자 전국에서 순례자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고 성경 소리와 노래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성령의 기쁨이 충만하자 전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수도원에 들어오기를 원했습니다.
이전의 수도사들은 자기자신만 생각하고, 서로에게 무관심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았기에 수도원은 활력을 잃었지만 지금은 서로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고 봉사함으로써 활력과 기쁨이 충만한 곳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수도사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성심이 없었기에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수도사들의 모습에서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없으므로 수도원에 입회하려는 젊은이는 줄어들었고 순례객의 발길조차 끊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은 주님의 모습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늘나라의 참 행복을 알려주는 진실된 주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주님의 새 계명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세상의 사랑이 아닙니다. 본래 사람들은 이기적이기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며, 자신에게 이익이 있을 때만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주님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겸손하게 형제에게 봉사하고 희생하라는 뜻입니다. 작고 나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해치는 사람, 그리고 가난으로 상처를 받고 있는 모두를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주님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끝없이 용서하고 서로 화합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입니다. 주님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 아름다움이 바로 주님의 모습이며, 사람들을 교회로 이끄는 힘의 원천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저희도 형제를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의 공동체는 어떤 모습입니까?
2. ‘주님과 같이 사랑하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말씀의 실천
1. 주님의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를 실천하는 한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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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5. 부활 제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오늘 <복음>은 흔히 말하는 예수님의 ‘고별담화’의 첫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유언이라 할 수 있는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난 다음 이스가리옷 유다가 나가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영광스럽게 되셨음을 선언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 안에서 하느님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3,31-32)
이는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이 아들의 죽음에서 드러난다니 말입니다. 곧 아들을 죽게 하여 아버지가 영광을 받게 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신 결과입니다.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이 사랑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가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선언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선언하십니다. 여기에는 자신을 비워, 아버지를 드러내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십자가에서의 ‘비움의 사랑’을 제자들에게 ‘새 계명’으로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 말씀은 계명 이상의 것입니다. 곧 선물임을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당신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선물하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이나 공로도 없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의 선물인 그 ‘사랑’을 우리도 형제들에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그리고 이 ‘새 계명’의 실천이 바로 당신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표지가 됩니다.
이 계명이 ‘새 계명’이 되는 까닭은 이처럼, 그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하느님의 사랑을 눈으로 볼 수 있게 온전히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 자신을 비움으로써 자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형상을 드러내십니다. 그렇게 십자가 죽음의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증언하게 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곧 자신이 비워지면 자신 안에 계시던 그리스도의 형상이 드러나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인 <요한 묵시록>에서 말합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요묵 21,3)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거처를 마련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사랑은 관계능력이요 공존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유대와 공존은 다름 아닌 자신을 비워줌으로써, 타인이 흘러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타인을 사랑하되, ‘먼저’ 자신을 건네주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비워낼 때 타인은 비워진 그 자리로 들어 와, 바로 나 자신이 될 것입니다.
결국, 비워진 바로 그 자리가 형제들이 들어서는 자리요, 하느님이 드러나는 영광의 자리가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삼위일체 관계의 공존의 사랑에서 봅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자기 비움, 자기 죽음의 사랑으로 관계의 사랑, 공존의 사랑을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인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주신 이 사랑의 힘이 흐르고 있습니다. 바로 이 힘으로 우리들 사이에 사랑의 유대가 드러나는 곳에서, 사람들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영광은 형제 사랑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 거처하시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형제들에게 바로 이 사랑을 선물해야 할 일입니다. 선물로 받은 그 사랑을 선물로 건네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선물로 건넨 그 자리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이 드러나게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처하시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기 전에, ‘먼저’ 저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토록 당신께서는 사랑으로 저희 안에 거처하십니다.
당신께서 ‘먼저’ 주신 그 사랑을 깨닫게 하소서!
그 사랑에 흠뻑 젖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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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5. 부활 제5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서로 사랑 하여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에페소서 5장2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 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 놓으신 주님께서는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4-35).
왜 새 계명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19,18). 그런데 그 중심을 보면 ‘내 중심’입니다. ‘너 자신처럼’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 중심’으로 사랑을 시작 하였다면, 이제부터는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예수님의 시대에 옛 계명이 다시 주어졌으니 새 계명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새 시대가 주어졌는데 새롭게 살아가라. 알고 있는 것이 앎 자체가 아니라 아는 바를 이웃을 향한 구체적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서로 사랑하여라.” 는 말씀 중에 ‘것처럼’을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으로’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은 결국 희생을 동반한 사랑입니다. 젊은이들의 혼인을 준비하면서 사랑이 무엇이냐? 고 묻게 됩니다. 그 대답은 다양하지만 ‘주는 것이다. 베푸는 것이다. 주어도 주어도 더 주고 싶은 것, 주어도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라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 베품’에 대한 대답이 주를 이룹니다. 그런데 사랑은 일방통행일가요? 쌍방통행일까요? 하면 대부분은 “상방통행”이라고 답합니다. 모순되는 대답을 합니다. 이 답에는‘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갈려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자체가 보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은 일방통행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거룩해서, 큰 공로를 세워서 사랑하시고 은총을 주시는 것입니까? 우리의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은 바로 그분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족함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부족함 때문에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13절1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가 되는 필요충분조건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많은 지식, 교양이 있고, 거룩한 체험을 하고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여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해야”제자가 됩니다. 결국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의 휘장을 달고 다녀야 합니다.
익명의 성인은“우리가 사랑하는 성인들과 함께 천국에서 사는 것, 그것은 가장 순수한 영광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성인들과 함께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그것은 매일 같이 백색순교를 요구하는 인내의 삶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웃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우리가 천상을 갈망하는 만큼 이 세상에서 인내를 가지고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아우구스티누스). 사랑하는 곳에 하늘의 문은 이미 지상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노래는 그 노래가 불리어질 때까지 노래가 아니다. 종은 그 소리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요, 사랑은 사랑이 나누어질 때까지 사랑이 아니다”(송봉모). 라고 했습니다. 입술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움직이는 사랑을 갈망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13,1).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 사랑의 길을 걸으셨으니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입니다.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치매의 마지막 단계의 증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치매의 마지막 단계의 증상은 ‘부부사이’ 가 갑자기 좋아지는 것이랍니다. 자기 남편이, 자기 아내가 다른 사람인줄 알고 좋아진답니다. 서로 끝까지 사랑 안에, 주님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항구하게 주님 안에 머물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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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5. 부활 제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1년 통계를 보았습니다. 26억 명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32%였습니다. 처음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사람들은 20명가량이었다고 합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열심히 선교하였고 50년이 지났을 때는 1,000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복음 선포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였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개종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업적은 유대교의 한 분파였던 나자렛 예수님의 공동체를 독립된 교회로 만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대교에서 요구하는 할례와 율법준수의 의무를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이방인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3번에 걸쳐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기에 300년이 되었을 무렵에 신자 수는 3,000,000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20명이 시작했는데 150,000배가 늘었습니다.
나자렛에서 시작한 교회가 세계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의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는 313년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로 인정하였습니다. 박해받던 교회는 황제의 명령으로 자유롭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가장 강대한 제국이었던 로마의 법, 제도, 문화, 정치는 교회의 조직, 제도, 전례, 법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교회는 로마가 깔아놓은 길을 따라서 로마의 보호를 받으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회를 인정하는 데는 한 가지 전설이 있습니다. 꼭 이겨야하는 전쟁에서 콘스탄티누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에서 십자가를 상징하는 깃발을 만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꿈에서 본 깃발을 만들었고,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갔었고, 거기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았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믿음과 아들인 황제의 체험으로 교회는 성장하였고 400년에 신자의 수는 30,000,000만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20명이 시작하였는데 1,500,000배로 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이 전한 복음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 바오로와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같은 걸출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오늘날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복음을 전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유다교도, 이슬람교도 선교와 전도를 사명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불교도 선교와 전도를 사명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박해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순교한 사람들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들이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둘째는 20명에서 시작한 교회 공동체가 오늘날 26억 명으로 성장한 것은 커다란 기적은 아니라고 합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개종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통계적으로 가능한 성장이라고 합니다. 10년에 30%씩 성장하면, 1년에 3%씩 성장하면 오늘날과 같은 교회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100명이 1년에 3명을 전도하면 가능한 숫자라고 합니다.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 때문에 변화된 사람이,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구전으로 그 기쁨과 행복을 이웃에게 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전해진 복음은 봄이 되면 이곳저곳에 꽃이 피듯이 복음의 꽃으로 피어났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주변에서 보았습니다. 마을의 굿은 일을 도맡아서 하는 프란치스코 형제님,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던 마태오 형제님, 잘못한 이웃을 예수님 때문에 용서해 주었던 마르코 형제님, 물난리 난 현장으로 달려가서 손자를 등에 업고 청소해 주셨던 아가다 자매님, 17년 동안 정성을 다해서 가족들을 돌보며 결혼 선물로 남편으로부터 예비자 교리 신청서를 받았던 안나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능력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놀라운 표징과 업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삶이 변한 사람들이 말과 행동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계명을 실천할 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예수님께서 아무조건 없이 사랑했던 것처럼 사랑한다면, 나에게 잘못한 이웃까지 사랑한다면, 사랑 때문에 고통과 수난을 기꺼이 감수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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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5. 부활 제5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조건없이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사랑♣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예수님께서는 이제껏 세상을 향하여 설교를 하셨으나 아무 결실 없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12,36-43). 이제 그분께서는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13,1), 당신 자신을 내어주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리고는 제자들과 최후만찬을 하시며 그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13,1-30).
그리고는 유다가 떠나가 버린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3,34) 사랑하되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새 계명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어떠했는지 회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새 계명은 형제를 미워하거나 동포에게 앙갚음하지 않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레위 19,17-18)는 유다교 전통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곧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소극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자신을 사랑의 기준으로 삼는 것과도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계명은 사랑의 출발점과 기준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 두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 계명은 예수님의 조건없는 자기 봉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의 새로운 척도와 본질을 제시해줍니다. 그 사랑은 매우 적극적이며 모두를 사랑으로 아우르는 포괄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철저히 하느님의 뜻, 곧 자비와 선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오직 인간의 행복과 생명 공동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위한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신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자기 봉헌이야말로 제자들과 세상에 대한 그분 사랑의 절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타자'에게 전부를 내어주는, ‘철저히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그래서 늘 자신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과 차별을 겪고 소외당하는 이들에게로 향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돈과 명예, 권력의 추구, 이해득실을 따지는 계산, 경쟁의 추구와는 무관합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공동선을 위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우선 선택하셨으며,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온갖 차별과 불평등을 철폐하는데 목숨을 거셨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자신이 아닌 하느님의 자비와 선이 드러나도록 자신을 희생제물로 봉헌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감성적인 분노의 폭발이나 인간의 힘에 기댄 저항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실현하기 위해 '낮추고', '비우고', '작아지는' 철저한 가난을 통해서만 가능한 십자가의 사랑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가요. 이제 자기만 알고 손해보지 않으려 하며, 오해받고 무시당하면 발끈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잘해주는 행동을 그만두어야 할 때입니다. 자존심이나 이익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 때문에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지...
오늘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예수님의 최후의 말씀을 나의 사랑의 궁극적인 근거로 삼아, 서로 앞을 다투어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15,13) 거룩한 바보의 사랑을 하는 우리이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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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5. 부활 제5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1. 하느님께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과 모든 역사를 새롭게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바야흐로 이룩될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질서로서 인류에게 사랑의 새 계명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기준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이로써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성령의 힘을 드러내게 됩니다.
2. 원래 유다교에서 신봉해 오던 사랑의 옛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신명 6,5)는 말씀으로서, 하느님 사랑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다교에서 잊혀져 온 이웃 사랑의 계명 즉,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는 말씀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실제로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시려 애를 쓰셨는데,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당신의 이웃으로 삼으셨음은 물론 이들을 마치 하느님을 섬기듯이 돌보셨습니다. 게다가 이 사랑을 계승하도록 부르신 당신 제자들이 믿음이 약하고 깨달음이 굼뜬 모습을 보시면서도 할 수 있는 한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기도 하고, 거룩하게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확신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러한 당신의 생애를 거울삼아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5)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3. 그런데 이 계명을 제자들이 정작 알아듣게 된 때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발현하시어 공생활 동안에 가르쳐주신 당신의 말씀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임을 확인해 주시고, 성령을 보내주시어 이 진리를 위해 살 수 있는 기운까지 내려주신 후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부활 신앙을 지닌 사도들이 되었고, 사도들의 가르침과 행적에 따라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공동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거룩하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도들과 신자들은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 양식을 전함으로써 선교활동을 벌였습니다.
4. 이미 조상 대대로 하느님을 믿어 온 유다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구약성경에 예비된 모든 계약과 언약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비로소 성취되었음을 확인해 준 것입니다. 예언자들과 아나빔들이 기다려온 메시아가 예수님이시라는 것, 그리고 그분이 행하신 사랑의 행적과 가르침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실제적인 내용이라는 것, 그 결과가 바로 공동생활 양식임을 논증하는 것으로 사도들과 신자들은 유다인들에게 선교할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에서 가장 어려웠고 또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시고 또 하느님과 같으신 분임을 믿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올바른 신성의 확인입니다.
5. 새로이 하느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알게 된 이방인들에게는 로마제국이 강요하는 황제숭배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깨우쳐 주는 한편, 구약성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지는 않았어도 그 결론에 해당되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하여 알려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부활 신앙에 따른 공동생활 양식을 가르쳐줌으로써 이방인들에게 선교할 수 있었습니다. 박해 속에서 이루어진 이 선교활동의 결과로 로마제국 내에서 수많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공동체들이 늘어날 수 있었습니다.
6. 이를 두고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나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묵시 21,1). 더 이상 우스꽝스럽게 신격화된 황제나 사람이 만든 이교신을 섬김으로써 따라오는 타락하고 부패한 생활 풍습을 버리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라고 가르친 결과에 대해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탄복한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권세가 막강하고 세상의 유혹이 화려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신다는 것을 사도 요한은 새로이 신앙을 갖게 된 이방인 출신 신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그리스나 로마 출신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에서 가장 어렵고 또 제일 중요한 것은 헛된 신을 버리게 하는 일과 우상숭배 풍습으로 말미암은 악습 대신에 선행을 실천하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신성을 믿게 하는 일입니다.
7. 초대교회 시절 이후에는 유다인 출신이건 이방인 출신이건 상관없이 모든 민족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해야 했으므로,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어 믿는 이들 안에 현존하시는 양식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세 가지로 정리하였습니다, 말씀과 성찬과 사랑의 섬김.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오시고, 성찬으로 예수님과 한 몸이 되며, 사랑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8. 말씀은 신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 특히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 본래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모든 말씀은 예수님 안에서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예언자들의 예언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심으로써 실현되었고, 사도들의 증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체험한 증언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예언과 사도들의 증언이 모두 서로 사랑하는 공동생활 양식으로 귀결됩니다.
9. 성찬은 예수님께서 생애 마지막 때에 당신의 삶과 가르침을 총집약하여 제자들에게 물려주신 유산입니다. 부활하신 당신은 성찬에서 거룩하게 변화되는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신자들에게 생명의 기운으로 전해질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영성체를 하는 신자들의 의지나 지향 그리고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기복적인 마술이 아닙니다. 성체성사는 신자들도 예수님처럼 변화될 것을 지향하며 노력할 수 있도록 거룩한 기운을 주는 인격적인 성사입니다. 예수님을 닮고 따르겠다는 지향과 후속 실천이 없이 성사적 변화의 거룩함에만 열광하는 감정은 별로 실속이 없습니다.
10. 사랑의 섬김은 말씀과 성찬이 가리키는 목표입니다. 이 목표가 얼마나 엄중한지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서 누구나 예외 없이 이 기준으로 심판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희생을 각오하고 섬기지 않으면 말씀도 성찬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말씀에 충실한지, 또 우리가 얼마나 성찬에 충실한지가 결국 이 사랑의 섬김에서 드러납니다.
11. 이상 말씀과 성찬과 사랑의 섬김이라는 세 가지 행동양식은 예수님의 재림과 현존의 표지로서, 우리가 이 표지를 충실히 따라가면 우리도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부활 신앙으로 공동생활 양식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공의회가 끝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이 표지가 뜻하는 열매가 맺어지지 않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새 복음화’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위의 세 표지는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 주는 살과 같습니다. 인체에서도 살에는 오장육부가 들어 있습니다. 몸이 건강하려면 오장육부의 장기에 피가 잘 돌아야 합니다. 그래서 ‘새 복음화’의 기치를 이어 받은 프란치스코 현 교황은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에 피가 잘 돌게 하는 기능에 비유할 수 있는 이 두 가지 추가적인 표지가 ‘신앙 감각’과 ‘공동합의성’임을 일깨웠습니다. 이는 신자들이 세상을 향하여 서로 사랑함을 증거하고 실천하기 위한 사도직 활동에 있어 매우 중요한 표지입니다.
12. 모든 예비자는 세례 성사를 받음과 동시에 성령의 이끄심을 느낄 수 있는 신앙 감각을 부여받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는 성직자건, 수도자건, 평신도이건 교회 직분에 상관없이 성령으로 평등한 하느님 백성입니다. 이 평등함과 동등함을 기반으로 해서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성직 엘리트들 위주로 교회를 운영하던 중세와 근세 시절에는 교회 안에서 이 ‘신앙 감각’이라는 피가 잘 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경 마비 증세와도 같이 평신도들이 수동적으로 머물기도 했고, 성직자들이 그 몫을 떠맡겠다고 지나친 권위주의 처신을 하기도 했습니다. 21세기 한국교회 안에는 이런 그림자가 아직도 짙게 남아 있습니다.
13. 신앙 감각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라야 서로 경청할 수 있고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충분한 경청과 원활한 소통의 과정이 지루할 정도로 진행되고 나서야 공동 합의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지내신 공생활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진리를 다 알고 계시면서도 제자들이 알아들을 때까지 가르치시며 기다려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는 당신 부활에 대한 증언을 헛소리로 치부하며 믿지 않자 일부러 여러 차례 발현하셔서 믿음이 생겨나도록 보충 수업도 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사도로 변화시키기 위한 예수님의 이러한 노력과 자세가 바로 공동합의성, 즉 시노달리타스의 기준입니다. 교황청이나 교구청뿐만 아니라 실제 사도직 활동이 이루어지는 현장과 신자들의 가정에서 이를 얼마나 잘 알아듣고 실천하느냐에 21세기 한국교회의 명운이 달려 있습니다.
14. 이로써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고, 세상에 대해서도 서로 사랑하는 빛을 비추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유다인들에게 선교할 때 그러했듯이 이미 세례받은 신자들에게는 올바른 신성을 분별하게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과, 그분의 부활을 드러낼 수 있는 공동생활 양식을 실천하도록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다인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15. 또한 초대교회 시절에 그리스인이나 로마인 같은 이방인들에게 선교할 때 그러했듯이 아직 하느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과 신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자들에게는 과연 신은 인간이 만든 개념에 불과한지 물어야 합니다. 또 실용적 필요와 기복적 대상으로만 신을 찾는 이들에게도 제대로 된 신성을 증거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태양신과 파라오를 숭배하던 이집트인들이나, 영웅이 죽으면 신으로 경배하던 그리스인들이나, 황제를 숭배하던 로마인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공동선을 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는 줄을 세상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우리도 사도 요한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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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5. 부활 제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승리의 삶
-꿈, 사랑, 선교-
궁극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성서는 결국 하느님의 승리에 대해 말합니다. 시종여일, 철두철미 하느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영적 승리의 삶을 삽니다. 이런 영적 승리의 삶을 살았던, 증언하는 무수한 성서의 사람들이요 우리 교회의 성인들입니다. 이 믿음의 후예인 우리들 역시 영적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즐겨 인용해 왔던, 앞으로도 죽는 그날까지 인용할 주제는 영적전쟁에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승리의 삶일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라는 좌우명시 한 연을 인용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주님의 전사로서의 전우애, 주님의 학인으로서의 학우애, 주님의 형제로서의 형제애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를 이룹니다. 혼자서의 구원은 불가능하듯이 혼자서의 영적승리도 불가능합니다. 하느님 말씀과 기도의 무기와 더불어 공동체 형제들의 도움으로 비로소 가능한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가 주님의 전사입니다. 믿음의 전사, 말씀의 전사,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 희망의 전사등 끝이 없습니다. 죽어야 제대인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영적 전투를 수행해 가야할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지난 번 금요강론 공부시 나눴던 내용이 생각납니다. 왜 영적전쟁의 삶이냐에 대한 좋은 이유를 밝혀 주는 내용입니다.
“베네딕도는 인간을 ‘내리막 경사길(a downward slope)’ 도상에 있는 존재로 보는 것 같다. 우리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둘 때, 우리는 마냥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무너져 버린다. 죄는 어떤 것을 행하는 것뿐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베네딕도는 본래 좋게 타고난 것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상적 낙관적 이상의 비전을 갖지 않은 듯 하다. 그는 사람이 듣기를, 순종하기를 원치 않는 경우를 통해서 인간의 악한 경향의 현실을 알았다.”
참 날카로운 성인의 인간성에 대한 통찰입니다. 오늘은 성 파코미오 아빠스 축일이자 우리 요셉수도원의 최종근 파코미오 원장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작년에는 토요일이라 기념미사를 봉헌했는데 이번은 주일미사라 주례는 파코미오 원장이, 강론은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세상 나라의 군인들과 주님의 전사인 성인들이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군인이었다가 회심하여 주님의 군인이 된 성인이 참 많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파코미오는 물론이고, 성 마르티노, 성 프란치스코,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세상의 군인이었다가 회심하여 주님의 전사가 된 분들입니다.
하느님의 승리요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다음 요한복음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겨놓은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래도 우리의 평생 분투의 수행과 노력은 필수입니다. 영적승리를 위한 삶의 비결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째, 꿈입니다.
제가 참 많이 강조하는 것이 꿈이자 희망이자 비전입니다. 어제 별내성당에서의 특강도 ‘희망의 여정’, ‘희망의 순례자, 희망의 전사로 삽시다’라는 주제로 나눴습니다. 참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위해 필요한 필수 전제 조건은 꿈이자 희망, 비전입니다.
세상 꿈이나 희망이 아닌 궁극의 꿈이자 희망인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런 생생한 하느님 나라의 꿈을, 하느님의 꿈을 지닐 때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그래서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은 거의가 하느님 꿈쟁이들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요한 묵시록이 궁극의 하느님의 승리를 보여주면서 진짜 궁극의 하늘 나라 꿈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나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고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얼마나 고무적이고 아름다운, 현실감있게 느껴지는 은혜로운 하늘나라 꿈의 현실인지요! 언젠가 하늘나라의 꿈을 오늘 지금 여기서 앞당겨 사는 우리들이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로 미사은총이 우리를 날로 새롭게 하며 오늘 지금 여기서 새 하늘 새 땅의 현실을 살게 합니다.
그러니 이런 생생한 하늘 나라의 꿈을, 희망을 지녀야 절망하거나 타락하거나 변절하지 않고 한결같이 기쁘게 감사하며 행복하게 하늘 나라의 현실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하늘 나라의 꿈이자 희망을 잃어버릴 때 사람은 괴물도 되고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평생 이런 하늘나라의 꿈을 지니고 희망의 순례자로 살 때 비로소 참나의 성인이 될 것이며 이런 참나의 성인은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이자 행복이 됩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주님 사랑은 물론이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때 주님께는 영광이 되고 주님도 우리를 영광스럽게 해주십니다. 온갖 고행, 극기, 절제 잘해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헛된 노고입니다. 지난 금요강론 중 나눈 잊혀지지 않는 내용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외적 고행으로가 아닌 순종의 사랑으로 주님을 따른다. 우리는 고행보다는 사랑의 순종을 좋아해야 한다, 고행은 교만을 가르치고 사랑의 순종은 겸손을 가르친다. 사랑의 순종은 모든 덕중 최고의 덕이자 모든 덕의 어머니로, 하늘에 이르는 길이다.”
억지로, 마지못해 순종이 아니라 사랑의 순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장엄한 사랑의 명령입니다. 인생 허무와 무지에 대한 궁극의 처방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구원은, 하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습니다. 새 계명은 뭐 비상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 좋을 대로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그 아가페 순수한 사랑의 새 계명을 실천할 때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이런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고 이런 삶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셋째, 선교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관상, 사랑의 친교로 자족해선 안됩니다. 사랑의 관상은 끊임없이 사랑의 선교로 열려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선교는, 사랑의 복음화는 우리 교회공동체의 존재이유이자 사명입니다. 우리의 신원은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이자 관상가요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이자 활동가입니다.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안으로는 주님을 극진히 사랑했던 주님의 제자들이요, 밖으로는 이웃에 대한 선교열정의 사랑에 불탔던 주님의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다음 그림같은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고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그들은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선교사들은 주님의 사람들이자 철저히 교회의 사람들입니다.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이 교회에 대한 충실하고도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이들이 선교사로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 주님의 제자들이자 세상 사람들을 주님의 교회로 인도한 선교사의 롤모델이 바로 바오로와 바르나바입니다.
참으로 세상 모든 이들이 복음화의 대상이자 하늘 나라 실현의 대상이요, 우리 삶의 제자리에서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로, 밖으로는 주님 선교사로 살아감이 우리의 복된 신원임을 깨닫습니다. 궁극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하느님의 승리에 참여한 우리의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1.하늘 나라 생생한 꿈을, 희망을, 비전을 지니십시오.
2.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십시오.
3.각자 삶의 자리에서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로,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로 살아가십시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키며 늘 새롭게 살아갈 때 오늘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참 아름답고 좋고 놀라운 하느님의 꿈,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2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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