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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7-12 야곱이
제가 여러분들에게 비교적 자주 말씀드렸던 이야기 중에 함께 가는 방식에 관하여 비교적 느슨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또는 필연적으로 가야 하는 방식에서부터 가장 엄밀한 방식으로 함께 가는 일에 대하여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런 말에 대하여 혹 어떤 사람은 ‘당신 복음주의자 아닌가?’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되묻기를 ‘그러면 너는 재세례파이냐?’ 라고 할 것입니다. 본문은 야곱이 에서 만나기를 두려워하여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두 떼로 나누어 보내고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1. 본문 7-8절은
“⑦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⑧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입니다.
모세는 야곱이 당시 사태에 대비하여 계획을 세웠다고 기술합니다. 야곱은 자기 가족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자기 여종들을 제일 먼저 둡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경우 그들로 첫 공격을 받게 하려는 의도에서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자유로운 아내들은 위험에서 보다 멀리 배치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야곱이 계획을 짜놓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공포에 사로잡히면 분별심을 잃으며 마땅히 제 일을 돌보아야 할 자들도 멍청해져서 무력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둘로 나눈 자기 가족들 사이에 어떤 공간을 설정한 것은 믿음의 영에서 유출된 것입니다. 이것은 만일 파멸이 다가오는 경우 교회 자손 전체가 멸종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도 한참은 가족 전체가 물에 빠졌을 경우를 대비해서 계획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그는 자기 가족 절반을 살육에 내어 놓으려 했는데 이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결국 살아남는 자들이나마 약속된 기업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지략의 출처는 과연 어디이겠습니까?
2. 본문 9절은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입니다.
야곱은 불가피한 경우에 대비하여 일을 처리해 놓고 자신은 이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야곱이 승리할 믿음을 증명하지 못할 만큼 두려움에 짓눌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주저하는 태도로 하나님의 호의를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과 그 가족을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은혜에다 맡기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걱정과 환난을 하늘 아버지의 품에 맡깁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기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자기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릅니다. 그런 용어가 뜻하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멀리 소외되어 있어서 인간 자기 힘으로는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신실한 자들에게로 내려오십니다. 그들에게 자신을 명확하게 알리십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주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칭하심으로써 그들의 자손 야곱을 자신께로 은혜롭게 초대하십니다. 성자 야곱에게는 자기 조상의 하나님께 접근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은 미신 아래 놓여서 거기 깊이 잠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자기 언약 속에 보유하시기 위하여 스스로를 모든 우상과 구별을 짓고자 하셨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하나님을 자기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밝히 말합니다. 이로서 그는 자기 조상들이 그에게 준 약속을 완전히 자기 앞에 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고 확신으로 의지하여 기도합니다.
그가 의지하려는 것은 약속된 복을 상속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진정한 기도 규칙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것은 경솔히 하나님께 돌진하지 않고 그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방법대로 그분에게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그 다음 문맥에서 한층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야곱은 하나님 명령과 약속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를 지탱시키는 두 개의 기둥과 같습니다. 여기서 합법적으로 기도하는 방법은 확실합니다.
신자는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께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 말씀과 신자들 서약 사이에는 상호간의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보다 감미롭고 조화된 교향악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 여호와여 나는 주의 명령으로 돌아오나이다 또한 주께서는 내가 돌아올 때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 여행의 인도자가 되시는 것은 정당하나이다.” 이것은 거룩하면서 대담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우리의 의무를 다 이행해 놓고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이면 무엇이든 흉허물 없이 그분에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서 어느 의미에서 자발적으로 우리에게 채무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명령이나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약속에 의지하지 않고서 기도를 드리는 자는 누구든지 헛되고 공허한 말만 공중에 던질 뿐입니다. 이 구절은 앞에 나온 말을 더욱 강하게 확증시켜 줍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돌아오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을 자기 아내들에게 거짓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야곱이 그 때에 거짓으로 말했다면 이제 그에게는 소망을 품을 근거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손길에 보호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하늘 법정에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3. 본문 10절은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배나 이루었나이다” 입니다.
1) 본문 10절 전반에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표현은 많은(라틴) 사람의 귀에 어색하게 들리지만 그 의미는 모호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감히 바라던 것 이상으로 많은 은총이 자기에게 쌓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요구하는 것을 획득할 목적으로 위신이나 공로 따위를 결코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은총보다 작다고 말합니다. 이런 경우가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아래서 자기 전부 혹은 자기 의지를 보는 경우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아래서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섬광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훌륭한 선물들을 조금도 아끼시지 않으시고 그에게 내리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을 그런 은사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자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거룩한 족장의 의도를 더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 우리는 사단의 간계를 주목합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 무가치성을 의식하게 하여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이런 생각을 우리 마음에 들게 하려 합니다. 즉 “너는 누구길래 감히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려는가?” 라고 하면서 끌어 내립니다.
야곱은 먼저 이런 반대를 예상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이런 은사를 감당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미리 선언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은 인자를 베푸시는 행위를 계속하는데 싫증을 느끼는 인간과 같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는가 하면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토록 자주 자애로우셨다는 사실에서 신뢰의 재료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중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의 은사의 풍성함으로 인하여 자기에게 덮칠지도 모를 불신감을 떨쳐 버리고 싶어했습니다. 그런 뒤에 둘째로, 그는 그 은사들을 다른 목적으로 전용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와 동일하게 대해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은총과 진리라는 두 가지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단지 그 자신의 선하심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자기 신실성을 증명합니다. 자비와 진리의 이런 결합은 성경에 자주 나타나는데 그 목적은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을 통해서 우리에게 유입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포용할 때 그런 은총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2) 본문 10절 후반에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여러 은총과 자비를 따로 열거하지 않고 단 한가지 말로 나머지를 다 포괄시키고 있습니다. 즉 그는 가난하고 외로운 나그네로 요단을 건넜던 데 반하여 이제는 부유하고 풍족하게 되어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팡이와 두 떼 사이의 대조는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이 두 단어로 이전의 고독과 빈궁을 현재의 안정된 풍요와 비교합니다.
4. 본문 11절은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의 그토록 많은 은혜에 구속되어서 자기 공로를 자랑할 수 없노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보다 높은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런 뒤 이제 그는 마치 “여호와여 만일 주께서 그토록 많은 훌륭한 은사를 소멸하시기를 즐겨 아니하신다면 이제야말로 주께서 나를 구조하시고 나의 형으로 말미암아 내게 다가온 파멸에서 돌이키실 때입니다” 라고 말하려는 듯이 자기 궁핍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자신의 두려움을 명백히 표현하고 나자 다시 약속된 복에 대한 조항을 추가시키고 있습니다(12절).
이것은 자기가 받은 약속으로 스스로를 굳게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처자들을 친다(어미를 그 자식과 함께 죽인다)는 것은 유대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잠언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씨를 말려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조류의 생태에서 취한 은유입니다. 매는 어미와 새끼를 함께 덮쳐 온 둥지를 비워 버립니다.
5. 본문 12절은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입니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말씀을 다시 요약합니다.
1) 본문 6-8절에서 야곱은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온다는 보고를 받고 자기 일행의 구원 방침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지모(智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이런 지모를 사용한 것은 그 절박한 환경에서도 겁약에 사로잡히지 않았던 증거입니다 사람이 두려운 일을 당하여 겁약에 빠지면 당황할 뿐입니다. 신자들은 어려운 때에 믿음으로 대책을 세워야 하며 결단성 있게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만일 그런 때에 신자가 낙담하고 주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대로 바로 행함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모(智謀)를 초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2) 본문 9-12절은 몇 부분으로 나누어서 요점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라는 말씀에서 야곱은 조상 때부터 섬겨오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이 말씀으로써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자신과 자기 복을 수여하신 계약신(契約神)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여기 “여호와”란 말은 택한 백성과 계약하시고 그대로 이루시는 참되신 신이라는 뜻입니다.
(2)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야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에 매달립니다.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 약속은 그들이 얼마든지 믿을 수 있는 가장 견고 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명령과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자를 결코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3)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에서 여기 “감당할 수 없사오나” 란 말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로 개역해야 됩니다. 야곱은 여기서 자기 겸손을 하나님 앞에 표시합니다. 그는 과거에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분수에 넘치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진리”란 말이 (히브리 원어로 하에메드이니)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대하여 약속 지키신 사실을 말합니다. 야곱은 일찍 벧엘에서 그를 형통케 하여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28:15). 그리고 과연 그의 20년 동안 나그네 생활에서 이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실은 그 다음 문구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곧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라고 한 말입니다.
(4)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에서 야곱은 과거에 자기를 형통케 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업적을 이유로 하여(10절), 이제도 자기를 구원하여 주실 것을 간구 합니다.
(5)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에서는 창28장 13-22절을 참조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또 다시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근거로 하여 간구 합니다.
3) 오늘 본문 9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다.
①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그분 앞에 나아 가십니까?
② 무엇에 근거를 두고 기도하십니까? 그분의 명령과 약속을 붙잡습니까?
③ 어떤 태도로 기도하십니까? 겸비한 태도입니까?
④ 그분의 존재와 성품과 역사를 인식하면서 거기에 맞추어서 구합니까?
⑤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은혜의 혜택을 알고 나서, 자기를 그분께 드리려고 기도하십니까? (창28:16-22).
출처: 예장 서울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