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활산, 힌등산 산행에 이어 명활산성 탐방을 마치고
이제부터는 인근에 산재한 경주 유적지 답사에 나선다
설총 묘
전(傳) 홍유후(弘儒候) 설총(薛聰) 묘
설총의 아버지는 원효대사이고 어머니는 태종 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다
경주 설씨 시조 호진(虎珍)의 후손으로, 설총은 경주 설씨의 중시조이다
한글 이전 고대 한국어의 표기법인 이두(吏讀)를 집대성했으며 신라에 유교를 확립시킨 뛰어난 유학자이다
상석(床石)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들이 아름답고 특이하다
경남 양산 호계리 산막동, 천성산 기슭에 가면 원효가 젊었을 때 수도하던 반고굴(磻高窟)이 있고
천성산(千聖山)의 옛 이름이 원효산(元曉山) 이있던 것 만큼
천성산에는 화엄벌을 비롯한 원효대사와 관련된 설화가 많이 전해오고 있다
산막동(山幕洞)이라는 지명도
요석공주가 설총을 안고 와서 '산에 막을 치고' 원효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던 곳이라 하여 이름이 붙었다
또, 경기도 동두천의 소요산(逍遙山)에도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에 관한 이야기가 곳곳에 스며있는 산이다
설총 묘를 나오면 보문회관이 있고
보문회관 인근에 보문사지 유적 안내판이 서 있다
보물 제910호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普門寺址 蓮華文 幢竿支柱)
보문사 터에 남아 있는 깃발의 지지대로, 제작 시기는 8세기 중엽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의 관문이 되는 명활산(明活山)과
경주분지의 중심에 있는 경주 낭산 일원(사적, 1968년 지정) 사이에 보문평야가 있으며
이 보문평야 동편으로 통일신라시대 보문사 터가 전해오고 있다
윗부분 바깥쪽면의 네모난 구획 안에는 지름 47㎝ 크기의 여덟 잎을 가진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당간지주에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장식한 사례는 이 당간지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보물 제64호 보문사지 석조(普門寺址 石槽)
연화문 당간지주 남쪽에 멀리 떨어져 있다
보문사 터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물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인 것으로 보아
이 석조도 그 규모와 돌을 다듬은 솜씨가 같은 시기에 함께 만들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보물 제123호 보문사지 당간지주(普門寺址 幢竿支柱)
당간지주는 절터 남서쪽 150m에 있으며 64㎝의 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상대하여 서 있다
남쪽 지주에는 네모난 관통공(貫通孔)이 있으며, 다시 그 밑으로 네모나게 뚫은 관통공이 두 곳에 있는데
북쪽 지주는 남쪽 지주의 관통공과 상대되는 위치마다 내측면에 장방형의 구멍이 있으나 관통되어 있지는 않다
이제 마지막으로 보문사지(普門寺址)로 간다
오래된 작은 무덤 2기 뒤로 보문사지가 있다
보문사지(普門寺址)는 흙으로 쌓은 축대 위에
건물 기단석과 초석이 배치되어 있다
세워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신라 경문왕 11년(871)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보문사지에서 보이는 석조와 멀리 보이는 연화문 당간지주
보문사지 서쪽에는 당간지주가 있는데 이 네 곳을 선으로 연결하면 엄청난 넓이의 땅이 된다
절터의 대부분은 지금 넓은 논으로 이용하고 있어
연화문 당간지주 외에는 논두렁 길을 조심스럽게 오가며 답사를 하여야 한다
이 절터에는 부처님을 모셨던 금당터(金堂址), 동서 탑지(塔址)와 석등(石燈) 받침돌, 건물기둥 받침돌(礎石),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 등의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발견되는 석재들로 미루어 당시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시대 때 ‘보문사(普門寺)’라 새긴 기와가 발견되어 절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오늘 답사의 마지막 목적지인 황복사지 삼층석탑으로 가는데
진평왕릉에서 서쪽으로 제법 떨어져 있다
진평왕릉 주차장
수문
진평왕릉 앞을 지나고
물이 철철 흘러 넘치는 잘 조성된 수로를 따라 가면 저기 낭산 기슭 아래에 석탑이 보인다
국보 제37호 황복사지 삼층석탑(皇福寺址 三層石塔)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상륜부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는 전형적인 신라의 석탑이다
황복사(皇福寺)는 낭산(狼山) 동북쪽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절로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출가하였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유물 중에
1937년경 낭산(狼山) 동쪽 기슭에서 수집한 명문(銘文)이 있는 와당편(瓦當片)이 있다
이것은 당시 부산에 거주하였던 일본사람이 소장하였던 것으로
평와편(平瓦片) 뒷면에는 ‘皇福寺(황복사)’라 음각되어 있다
이 평와편은 비록 발견지점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종래의 막연하였던 황복사지설(皇福寺址說)에 유력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으며
역시 낭산 동쪽 기슭에 황복사가 있었다는 전설의 근거를 제공하는 유물이라 하겠다 (펌)
1942년 수리공사 때 장문의 명문이 조각된 금동사리함과 함께
금제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함의 명문에 의하여 이 탑은 692년(효소왕 1)부터 706년(성덕왕 5) 사이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신라 효소왕 원년(692년)에 신문왕비인 신목태후와 그 아들인 효소왕이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탑을 세웠다고 한다
석탑 뒤로 오늘 산행한 명활산과 힌등산 능선이 길게 펼쳐쳐 있다
오늘 오후의 모임 약속만 없다면
낭산(狼山)도 오르고 또 낭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선덕여왕릉도 답사를 하겠건만
오늘은 어쩔수 없이 발길을 돌리며 훗날을 기약한다
첫댓글 요석공주가 산을 막고 원효대사를 기다렸다는 곳이 양산 산막동이라는 얘기를 들었었지..
명활산성 복원이 오래되지않아 고풍의 멋이 없을걸세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