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애 결코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들
석 홍(법학박사. 수성대학교수 및 교목실장 역임)
1. 머리말
인생을 살아오면서 지나온 날들 중에는 잘한 일과 후회되는 일, 기쁜 일과 슬픈 일, 자랑스러운 일과 부끄러운 일, 미움의 일과 감사한 일, 행복한 기억과 아픈 기억이 있다. 지나온 날들을 정리하면서 좋은 일들, 잘 한일 자랑스런 일, 감사한일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일들도 너무 많았었던 반면에 슬퍼고, 부끄럽고, 후회스럽고, 아픈 기억들도 많다.
인생은 고해요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이라고 하였는데 그 가운데 나의 생애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들을 몇 가지 정리해보고 싶다.
2. 할머니의 자살소동
국교 5학년 추운 겨울로 생각 된다. 경주 북부리 모자원 뒤편 가까이에 셋방을 살 때다.
큰고모는 수예를 놓고, 할머니는 밀주를 해서 팔아 생계를 어렵게 이어 나갈 때 였다. 어느 날 할머니와 딸인 고모 둘과 다투더니 할머니가 집을 빠져 나가셨다. 큰고모가 나보고 “할머니 뒤를 따라 가보라”고 하였다. 소복 입은 할머니는 북천냇가로 향하고 있었다. 허허벌판 북천냇가에서 뒤 딸아 가다가 “할매요!”하고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가 나를 부둥켜안고는 “호야, 호야", 하고, 6.25사변 때 행방불명된 장남인 아버지 이름을 한없이 부러 시며 우시더니 나보고 ”집에 가서 마후라를 좀 갖고 오라“고 하셨다.
나는 죽으라고 달려가서 고모들에게 "할머니가 북천냇가에 계신다"고 "마후라 가지러 왔다"고 하니 고모들이 “왜, 왔느냐?.”고 하며 같이 셋이서 북천냇가로 달려갔다. 할머니가 멀리 <애기청소>라는 아주 깊은 저수지가 있는 곳 가까이에 닦아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고모들과의 다툼으로 속이 상하여 자살을 결심하셨던 것이다.
할머니를 부르며 달려갔다. 할머니를 붙잡고는 고모들도 나도 모두 울었다. 고모들이 “잘못했다“며 용서를 빌고 함께 돌아오고 있었다. 북천냇가 벌판에 심어진 자그마한 무우를 몇 개 뽑아 보면서 ”심었다“고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난 때문에 일어난 할머니의 자살 소동 이였다.
그 당시에 만호삼촌이 군대서 휴가를 나왔는데 집에 양식이 떨어 저서 큰고모 친구 집에서 밥을 갖고 온 기억도 있다.
3. 월사금과 봉황대
월성 초교 6학년을 다닐 때였다. 평소에는 한 달에 20원하는 월사금을 큰고모에게 달라고 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독촉을 받을 때라야 할 수없이 문밖에 나와서는 이야기하곤 했다.
한번은 학교에서 독촉을 받았지만 도저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학교서는 독촉하고 집에서는 입이 열리지 않고, 할 수 없이 가방과 도시락을 들고 월성국교 앞에 있는 봉황대에 올라가서 학교도 안가고 도시락 먹고 혼자 놀다가 집에 가곤 했다.
1주일이 지나서 강성수 담임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가정방문을 오셔서 학교에 간 적이 있었다. 졸업비를 내지 못하여 졸업식에 참석도 못하였다가 후에 복지시설에 입소하여 문화중학교 입학 후에 우연히 반월성에서 월성 국교 강성수 담임선생님 만나서 "학교에 오라"고 하셔서 졸업장을 받았다.
대구에서 달성군청에 공직에 근무하며 영대 대학원을 다닐 때 우연히 길에서 강성수 선생님 만나서 "집에 오라"고 하셔서 갔더니 내가 졸업한 <월성국교 35회 앨범>을 주셨다,
그 후 1990년 9월 29일 날 신일대학의 전임교수(경영학과장)로 재임 시의 신진수이사장님이 배려한 {석홍교수 법학박사학위취득 및 목사안수축하연]에 초빙하여 내가 눈시울을 적시며 강성수 선생님에 대한 감사를 소개드렸다.
2004년 창당한 기독당의 권유로 (내라도)하며 용감하게 출마한 대구 수성갑구의 17대 총선 때 강성수 선생님이 아시고 편지가 왔었는데 <제자 중에 가장 자랑스런 제자>라고 하시며 선거구내에 거주하고 있기에 적극 성원 하겠다는 격려의 편지를 끝으로 수소문해도 지금까지 찾지를 못하고 있다.
4.가출결심
어린 시절부터 특히 초교시절은 할머니와 고모들과 생활했다.
그 중에 큰 고모의 생계수단인 수예를 바느질하는 옆에서 지시하는대로 색깔별로 바늘에 실을 꿰어서 옆에 두어야 빨리 수예의 작품을 만들어서 수공비를 받아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큰고모는 성격이 깔끔하고, 철저히 원칙주의라서 내가 조금만 잘못하면 매질 이였다.
초교 6학년 무렵에 경주 모자원 바로 뒷집에 살 때는 고모와 같이 있는 게 불안하고, 나를 해치지는 않을까, 밥에 약을 타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 두려움이 있었다. 혼자서 집을 가출해서 서울 가서 구두닦이 라도 해서 내가 성공해야지! 하는 등의 생각을 할 때다.
어느 날 저녁에 동래아이들과 어울려서 농담하고, 장난치며 놀고 있던 중에 내가 휘바람을 불면서 여자를 꼬시는 흉내를 내며 친구들과 웃고 장난치고 있으니, 큰고모가 불렀다. 갑자기 큰 돌을 나에게 던지는 것이다. 나는 깜작 놀라서 “잘못하면 죽겠구나, 집을 나가야겠다,”하고 책 보따리를 들고 나와서 경주역전으로 갔다. 밤에 대합실 의자에 자고 이튿날 서울 가는 기차를 탔다. 가다가 고생하는 할머니 생각에 떠날 수 가없었다. 건천에서 내려서는 돌아오니 할머니가 내 먹으라고 보리밥 한 그릇을 담아두셨다.
고생하시는 할머니를 위해서 길에서 담배 공초를 주워 다가 모아서 드리곤 했는데 학교에서 담배 피운다고 소문이 났었다.
5. 오트바이 사고
73년도 9월에 울릉군청에서 대구 달성군청으로 이동 후에 당시 차가 귀할 때 [산림경찰]이라고 팻말이 붙어있는 군청산림과의 빨간 오트바이가 타고 싶었다. 대충 배워서는 어느 날 고향 경주로 향했다. 기어도 잘 몰랐는데 가다가 물어서 잘 나가기에 영천을 지나서 속력을 좀 내어서 국도를 주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꺽어진 도로를 바꾸자 바로 좌편의 다리가 나오는 것이다. 놀라서 속도를 줄이고, 브레이크를 눌러야하는데 속도를 더 높이고 말았다. 다리는 좌편에 있는데 직진으로 오트바이와 함께 날아서 마침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나는 나무에 부딪쳐서 떨어지고, 오트바이는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이 “오트바이 사고 났다 ‘고 하면서 달려왔다. 아마도 이곳은 오트바이 등 교통사고가 많이 나는 곳인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바닥 등에 찰과상을 입고 멀쩡하여 약국에서 약을 사서 바르고 오트바이는 마침 대구 가는 빈 트럭을 멈추어서 실고 갔다. 요행 이었고 주님의 돌보심이였다.
6. 꿈의 소녀가 떠나는 상상에 몸부림
나는 내 자신이 외롭게 자라서인지 누굴 좋아하면 늪에 빠지듯 헤어 나오질 못했다. 고교3학년 때의 모교회인 경주 중앙교회에서 본 중2년의 어린 나이에 유치부 선생을 하는 예쁜 소녀를 보고 예쁘게 본 것이 외로운 울릉에서의 삶에 간직했었고, 간호사인 언니와 친구처럼 그리던 간호부 엄마의 모성애도 느낄 만큼 다정, 다감함도 있었고 언니의 결혼이후의 소녀가 대학 졸업 때 서울까지 올라가서 졸업식에 참석 축하해주었고 우연한 느낌에 그 소녀의 부친의 소천과 장례식에도 달려가서 참석하고 그 언니와 형부와는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리던 소복 입은 그 소녀와는 외면해 버린 후에 오는 후회감과 영영 떠났다는 절박감에 세벽 기도회를 찾아 몸부림치며 잠 오지 않는 아픔에 어느 분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 소녀가 근무하는 여중학교 앞에서 아침부터 저녁 어두울대까지 서승이다가 경찰의 심문도 받고 집을 찾아서 어머니께 솔직하게 이야기 드리니 못 마땅해 하시고 그 소녀가 들어와서는 별 인사도 없이 밥을먹으며 운을 띠니 냉정한 태도로 대하는 싸늘한 모습에 내가 10여년 동안 꿈에 그리며 홀로 사랑했던 그 꿈의 소녀가 아니라는 상상의 꿈에서 깨어났다 갖고 간 편지를 마루에 두고 왔는데 내가 얼마나 소녀를 사랑해왔는지를 고백하는 내용과 자료였다. 오랜만에 북천 냇가 철길 넘어 약국 하는 재선이란 중학 동기 친구를 만나서 막걸리 한잔 나누고 오랜만에 자유인이 되어 맛있는 잠을 잘 잤다.후에 대학전임교수 사표 후에 교회담임 할 때에 후원하는 강남의 서울교회 모임에 갔다가 대치동에서 자매를 만나서 서울시립대학에 교수로 있는 성애원장 장남인 철주형과 자매와 망년회 겸 식사와 노래방에 가서 늦게까지 노래하는 기회도 있었다.
2010년12월의 대장암 수술 후에 이듬해 봄에 항암 치료받을 때 서울에서 자매가 초청하여 야외에서 점심대접을 했다. 편하게 남매처럼 친하게 대해주어서 고마웠다.(지금은 그 어머님도 살아계시고 형제들도 남다른 친한 이웃일 뿐이다.)
7. 영주 갈본 기도원의 회개
대구에서 달성청에 근무하며 대학원에 다닐 때 경북대 법대출신인 교회 다니는 맹수가 여동생의 영대 음대졸업 패스티발의 파트너로 초대했다. 수성호텔에서의 페스티발은 즐거웠고 마치고 둘은 야간 통행금지 가까운 시간까지 행복하게 걸었다.
마침 성탄절 전야의 음악회에 교회를 찾아서 발표도 보고 밖에서 기다렸다가 만나서 즐거운 대화의 시간과 약속하여 둘은 1월 연휴 어느 날 열차를 타고 부산 가서 송도의 오륙도 배를 타고 관광도하고 둘이서 다정하게 사진도 촬영하고, 사진을 인화하는 곳에서 둘이 너무 잘 어울리고 너무 복스럽게 생겼으니 놓치지 말라고....
상상에서 [꿈의 소녀]를 날려버린 공간에 또 쉽게 이성이 자리를 차지했다. 종종 만나서 정겨운 시간을 가지다가 안동으로 발령 나고 그 후 얼마지 않아서 나에게 몇 가지를 나무라며 “그만 만나자고”했다. 갖고 있던 양산을 내게 마지막 선물로 줬다. “이렇게 해여 지면 큰 아픔이 되는데!” 사실 그 때부터 안동에서의 홀로의 삶은 아픔 이였다.
아픔을 이기기 위해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영주의 갈본 기도원에 갔다. 밤 세워 잠을 못 이루는데 코피가 터지기도 했다, 이른 아침에 기도원 원장권사님이 이름 석 자를 쓰 보라고 했다. “지금까지 잘못 살았고 너무 세상 적으로 욕심이 많아 징계를 받았으니 회개하라! 고했다. 비가 오는데 산에 가서 30분 정도 기도하는데 또 코피가 터지면서 오만하던 자아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정신수양환자가 혼자 있는 냉방에서 그 수양환자가 ”우리의 인생은 짧지만 천국은 영원하지 않느냐, 이 세상에서 잠시 고통이 있더라도 내세를 바라보고 참고 견뎌야 된다며, 당신은 법학을 공부했으니 루터나 칼빈 처럼 신학공부를 해보라"고, 그 환자의 말이 마음에 감동을 주어서 세상공부, 고시공부, 대학원 공부까지도 접어버리고 안동교회 철야 및 새벽 기도에 열심히 나가면서 하나님께 매달리고 통합측 총회장을 지내신 유명한 김광현 목사님도 만나서 신학진학도 물어보며 여전도사님께 기도부탁도 드리고 농협의 전경상 청년회 간부 등과 교제하며 아픔도 나누고, 청년회 임원과 성가대 등으로 신앙생활의 열심 으로 고통과 아픔을 인내하였다.(이듬해에 대구시 수성구청으로 이동발령으로 대학원 석사 논문 제출과 학위 받음)
8. 수렁에 빠진 아들과 폭행
90년에의 박사학위와 목사 안수 받은 후에 고모할머니 모신다고 어린 남매를 다리고 경주에 가서 살 때다. 아파트 회장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고 서악 무열왕릉인접한 마을에 200평 전원주택을 매입하여 4여 년 간 정신없이 꾸미며 살고 있던 중 딸 민영이는 선덕여중에, 아들 민국이는 가까운 경주국교 4학년인가? 에 다닐 때이다. 어느날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시궁창에 처박혀서 얼굴 등에 온통 시궁창 흙더미를 덮으시고 울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위로하기보다 자전거를 쓸데없이 끌고 갔다며 뽈대기를 사정없이 때렷다. 뽈때기가 벌겋게 부어서 담임선생이 물어볼 정도로, 심하게 때렸던 것이다. 그 장면이 지금도 뇌리를 떠나지 않고 아픔과 미안함과 더불어 아이들을 경주 시골 내려가서 재대로 양육하지 못하고 고생만 계속하여 시켜온 것이 너무도 미안하고 죄송한 아픈 마음뿐이다.
9. 기도의 어머니 채봉희 보모선생님의 죽음
복지시설에 있을 때, 다정한 목소리로 고아들을 돌보시며 헌신적으로 봉사하시며, 병들어서 복지시설을 떠나신 후 서울의 신길동의 모교회의 전도사로 계시면서도 우리 나이또래의 고아출신들을 챙기시던 기도의 어머니 채봉희 선생님, 고교3년 때 졸업 전 공무원 시험을 합격 후 발령을 기다리며 서울 교회를 찾아서 하루 밤을 지내면서 성경위에 손가락을 걸면서 “홍아, 이 3가지만 꼭 지키면 성공한단다"하시며, 관련 성경 귀절을 읽어주시면서 <1.십일조. 2. 술, 담배금지. 3. 여자조심.>을 당부하시던 사랑의 덩어리 채봉희보모선생님, 1973년경 울릉도에서의 공직생활 4년차에 여름방학 때 들어오셔서 3일간 지내시다 속옷을 싸주시고 떠나실 때, 떠나는 여객선을 바라보며 부두 가에서 한없이 후회와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산골자기 언덕의 전기도 없는 농가로 이사하여 가까운 기도원에 새벽 기도 다니며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가 되었을 때 보름 만에 대구 달성군청으로 4급 승진하여 발령을 받는 기쁨을 누리기도하고
미국가신 후에 목사님 사모가 되신 후에도 나를 미국으로 대리고 가려고 무척 애를 쓰셨는데 어느 날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소천 하셨다는 소식에 너무나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고 당시 내가 얼마를 먼저 기부하면서 [채봉희전도사 장학회]를 만들어 보자고 했었다.
10. 수사형사와 벌금
대구에서 2003년 말경으로 기억 된다. 수성구 범어동에서 낙원교회를 개척하여 담임 할 때이다. 개척교회의 운영상 매달 월세 60만 원 등 운영비도 적지 않을 때이라 교회차 유류 대를 한 달간에 결제하는데 젊은 직원의 책임감 때문인지 하루만 넘겨도 독촉으로 마음이 무척 상하여서 어느 날 사무실을 찾아서 좀 나무라는 와중에 50대의 좀 나이든 직원이 끼어들어서 약간의 언쟁 중에 뒤통수에 약간 미는 형태가 되었다. 직원은 얼마 전에 교회로 전화 와서 모 신용카드회원입회를 권하기에 거절 했어 좋지 않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질적으로 불량했다.
직원이 그 자리에서 112에 신고, 경찰을 부르고 출동한 파출소직원 둘은 먼저 한경찰관은 “서로 좋도록 하라고“ 화해를 종용하는데 좀 살이 찐 경찰관은 ”경찰차에 타라“며 사건 되기를 원하는 냥 권위를 행했다.
파출소를 거쳐서 본서의 수사과로 가게 되었다.
50대되어 보이는 좀 뚱뚱한 형사가 피의자 심문조서를 받으면서 아주 고압적인 자세로 막말하고 건방진 태도로 일관했다.“경찰관 30년에 목사가 사람 패는 것 처음 받네”하면서 빈정거렸다. 불쾌하기 짜기 없었다. “합의해서 합의서를 제출하라”고했다.
나는 얼마 전에 법대동기로 당해 경찰서장으로 부임해서 연락이 와서 경찰식당에서 서장과 같이 식사하면서 나에게 소개시켜준 방범과장을 찾아서 사건의 경위를 이야기하였다. 아내와 같이 가서 30만원주고 합의서를 받아서 제출하였다. 신일대학에서 경영학과장할 때의 제자가 같은 수사과에 형사로 있었지만 찾질 않았다. 합의서도 제출 하였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검찰에서 70만원의 벌금으로 약속기소 한다는 통보가 왔다. 황당했다. 정식재판을 접수하고 당해 경찰서장을 찾아서 항의했다.
며칠 후에 경찰서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간부회의에서 질책하였다고 하시며 관내에 목사님으로, 관내대학에 교수 지냈고 법학박사로서 억울한 실수에 대하여 합의했음에도 그렇게 벌금이 많이 나오도록 처리했느냐“고 나무라셨고 특히 내가 안다고 찾아서 만난 방범과장을 질책했다며 이해하시라”고 하셨다. 퇴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경찰서장님 이였다.
대구지법 1심 정식재판에서 벌금 70만원에서 30만으로 선고되어 항소한바 재판장이 해명서(반성문)를 제출하라고 한 걸 제출치 않았는데 1심대로 벌금 30만원으로 확정되어 유일한 전과로 기록되었다.
2004년 4월의 17대 총선 때 창당한 기독당의 권유 공천으로 출마한 수성갑구의 TBC방송국의 TV토론회시에 “현재의 검찰, 경찰의 횡포가 너무 심하다“는 발언을 한 영향도 되었다고 본다.
(10여년 동안 경기도 오산에 살면서 관내 화성동부경찰의 친절, 봉사에 너무 감동, 감사하여 경찰청장께 감사청원서를 보낸 바 있다)
11. 결론
지나온 삶들을 정리해보면서 [인생은 고해-불교]요,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모세]으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해아래 수고한 모든 것이 헛되도다-솔로몬]의 잠간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길 나그네 길을 살면서 어찌 일생동안의 애환을 다 정리할 수 있으랴!
나는 나의 인생길에서 잊을 수 없는 애환들이 위의 사실 아니고도 수도 없이 많은것 같다. 왜 남들처럼 보통사람으로 지내지 못하고 갖은 연단과 죽음의 고통과 핍박과 다툼과 어려움을 인내하고 때로는 부딪치고 살아야했는가? 내게 주어진 숙명인가?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축복의 신호, 두드림 일게다,
지금 이렇게 내가 살아서 지난날을 정리해볼 수 있음이 다행이요, 행복이요, 하나님의 축복으로 감사드릴 뿐이다.
첫댓글 파란만장한 삶, 영화같은 장면이군요. 누구나 아픔과 희열은 있는 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빕니다
잘 읽었습니다 대단한 인생이셨네요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빕니다
경상도 사람답게 성격도 호방하신 정서가 풍겨요
고맙심더 잘부탁하입시더, 재래시장에서 막걸리 곡차한잔나누며 살아가는 이야기도 한번 하입시더
@호세아 성경이야기 한번 듣고 싶어져요<좀 깊게
김선샘요 고맙습니다 거룩하지도 못한 저한테 성경이야기 듣고싶다고 하신분은 처음이거든요,
저가 체험한 진리는 (성경)그대로였습니다. 15년의 대학교수를 사표낼 정도로 (영의 세계--특히 악령)를 성경대로
체험했고요. 그 이후에는 임마누엘 나와 함께하시며 감동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지금도 늘 체험하고살지요.
하나님께서는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영광을위하여 사는삶>을 기뻐하시며 고통,실패, 질병 등의 연단을 통해서 다듬으시고 쓰시기도하시며 필요한 복도 주시기도하지요. 그래서 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살면서 결코 (내것)이 아닌 (하나님의것)으로 섬김과 나눔의 삶을 기뻐하시지요,--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