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11신]56년 전에 학교를 1년여 같이 다닌 친구에게
56년 전에 ‘국민핵교’를 1년이 넘게 같이 다닌 친구야.
솔직히 ‘그 사실’을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우리 모두 몰랐었지. 어느 때 어느 자리에서 우연히 ‘민증’을 까면서 알게 된 사실에 놀랐던 게 몇 년이나 됐을까? 그후부터 우리의 친근함은 그전보다 훨씬 더했지.
이곳 임실은 어제 밤부터 눈이 제법 내려 쌓이고, 기온도 엄청 떨어졌다. 오전에 우리 동네 뒷산 ‘신작로’(동네앞 17번 일반국도가 생기기 전까지 남원에서 전주로 가는 유일한 일반국도. 한국전쟁때에는 남부군南部軍이 성수산聖壽山으로 대피하며 걷던 길. 지금은 긴급상황시 이용하려는 소방도로이다)를 1시간여 걸었다. 전인미답前人未踏, 아무도 첫걸음을 떼지 않은,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는 맛은 표현하기가 어렵구나. 산자락을 끼고 도는 굽이굽이 신작로 위에서 들판 한가운데 자리잡은, 오래전에 폐교가 되어 유적처럼 남아있는 우리의 모교인 봉천국민학교를 바라보다 네가 떠올랐구나. 하여, 난생 처음 너에게 편지를 쓴다. 이 편지를 받으면 제법 당혹스러울 것이다.
우리의 기억에 까마득히 잊혀진 초등학교 1∼2학년. 아무리 그래도 어찌 교장선생님의 아들이자 동창생인 너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 없을까? 너는 학교 건물 뒤편에 있는 교장관사에서 살았다고 했지?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 담배가게로 아버지 담배 심부름을 다닌 기억이 있다고 했지. 담배가게 아들이 우리 동창이어서 간신히 그 친구 이름만 기억하는 것말고는 어떤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그 세월이 벌써 56년이 되었단 말이지. 초딩 동창회에서 네 이름을 대면서 친구들에게 물어보니까 아무도 모르는데, 몇몇 여자동창들만이 너를 기억하더구나. 얼굴이 하얀 도시 출신이자 교장선생님 아들이니, 여자들로선 ‘선망처럼’ 유난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리라. 내가 확실히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교장선생님, 그러니까 너희 돌아가신 아버님 성함이다. 그러니 일단 알리바이는 성립되는 셈이지. 흐흐.
아무튼, 들판 눈속에 잠긴 그 학교를 사진으로라도 한번 보라는 뜻으로 이 편지를 쓴다. 보이냐? 우리가 56년 전에 1년여 동안 같이 다녔던 들판 가운데의 봉천국민학교. 우리들의 그 학교는 교가校歌에도 있듯이, 인근 여섯 마을에서 십시일반, 경비를 갹출하여 땅을 사 학교를 세웠다고 하더라. 1939년 임실군 오수면 봉천리(봉산·냉천마을)·군평리(종동·평당마을)·오암리(오촌마을)와 성수면 대판리, 여섯 개 마을(거리라 해봤자 3km 안팎이다)의 어른들이 힘을 모아 들판 한 가운데에 세운 ‘봉천간이학교’. 44년 초등학교로 승격되어 98년 49회 졸업을 끝으로 안타깝게 폐교가 되었다. 96년까지 졸업생 수가 1554명. 60회 졸업생조차 내지 못하고 폐교가 됐을 뿐 아니라, 학교부지가 지금껏 활용도 되지 못하고 흉물처럼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어, 볼 때마다 속이 상하는 우리의 모교母校. 우리는 1965년 코흘리개로 입학하여 70년 제법 의젓해져 21회로 교문을 나섰다. 기껏해야 한 반班 40여명. 이미 세상을 뜬 친구들도 열 손가락을 헤아린다. 하지만 동네마다 깨복쟁이 친구 한 명씩은 이제껏 고향을 지키고 있어, 지난해 귀향한 내가 외롭지는 않다.
친구야, 너는 까마득히 잊고 살았지만, 나는 내 고향이자 부모가 계셨기에 지금껏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정년퇴직하자마자 꿈꾸듯 내려온 고향, 벌써 1년반이 되었구나. 인근 읍면소재지 등을 다니려면‘발’이 있어야겠기에 중고차를 알아봐 달라는 나의 부탁을 마다않고 선뜻 알선해준 너의 친절과 배려가 무척 고마웠다. 나의 애마愛馬를 이용할 때마다 너를 생각하며, 친구들에게 네 얘기를 한다. 너는 얼마나 재주가 좋으면 자동차 딜러로 그 오랜 세월을 활동하고, 퇴직을 한 후에도 딜러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지 신통방통하더구나. 너의 고운 심성과 고객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너의 사회적 관계망의 승리이겠지. 일흔이 되어도 액티브한 딜러로 활약하기를 비는 마음이다.
담배가게집 아들은 지방신문(전북일보)에서만 30년도 넘게 근무한 후 얼마 전 퇴직하여 전북YMCA 상근 이사장으로 전주에서 사회적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 친구도 다행히 네가 기억난다는구나. 언제 한번 우리 셋이라도 만나 회포를 풀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이놈의 코로나’ 때문에 사람 노릇하기도 힘들게 됐고, 정말로 그 이전 세상이 올지 안올지 아무도 모를 정도로 암담한 세월을 겪는구나.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어느 해였던가, 오십견으로 고생하다 친구가 원장인 장안동의 코리아병원 물리치료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데, 너도 같은 증상으로 옆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 모양’이라며 웃었던 적도 기억하니? 꽃 피는 봄이 되면 백신을 맞을지 못맞을지 모르지만, 코로나도 고개를 숙이며 웬만해지겠지? 그때 함 내려와라. ‘서울쥐’들은 상상도 못하는 현란한 안주와 함께 대포 한잔 했으면 좋겠다. 가성비 최고의 중고차(19만km 주행의 2005년산 소나타)를 알선해준 수수료라 치고 대접 한번 해야 하겠지. 흐흐.
너무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부업’하지 않으면 좋겠구나. 골치가 지끈거리면 언제든 힐링차 다녀가도 좋다. 때 낀 마음을 부단히 씻어내는 게 ‘세심洗心’이다. 이곳은 청정지역으로, 나와 1박을 함께 한다면 마음부자가 될 것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날이 오기를 빌며 줄인다. 내일모레 새해구나. 2021년, 건강과 함께 네가 뜻하는 일 모두 순조로이 풀리는 한 해가 되기를 빈다.
임실 고향 '구경재' 우거에서
'56년 전의 친구'가 회억回憶에 잠기며 일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