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항공유로”… 美, 630조원 보조금 무기로 에너지전쟁
[美 주도 에너지 패권 경쟁]〈상〉 美 미래 에너지 공장 가보니
펄크럼, 폐기물로 합성 원유 생산… 탄소 80% 줄여 미래 에너지 부상
보조금 지원 15년만에 시장 선점
韓 ‘합성 항공유’ 법적 근거도 없어
입구에 들어서자 시큼한 쓰레기 냄새가 물씬 났다. 근처 매립지에서 가져온 폐기물 더미 위로 똥파리들이 날아다녔다. 쓰레기는 폭넓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이동하며 금속은 걸러지고 불에 타는 종이나 나무류로 모아져 3cm 크기로 잘렸다. 미국 네바다주 리노시 인근 스토리 카운티에 있는 펄크럼 바이오에너지 공급원료처리시설(FPF)이다.
“이제 매우 가치 있는 연료가 됐어요.”
13일(현지 시간) 이곳에서 만난 짐 스톤시퍼 엔지니어링 담당 부사장이 잘게 잘린 쓰레기를 손에 들고 말했다. 아직 파리가 꼬이는 쓰레기가 어떻게 연료가 되는지 물었다. 그는 “수분을 완전히 빼고 가스 처리를 하면 일반 원유와 화학적으로 유사한 합성 원유를 만들 수 있다”고 답했다.
이곳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타호-리노 산업단지의 펄크럼 시에라 정유 공장에 가서 쓰레기의 ‘변신’을 확인했다. 수분 90%를 뺀 쓰레기 더미에 산소 스팀을 주입하여 분해시키면 투명한 액체가 됐다. 이 합성 원유는 후처리 과정을 거쳐 실제 비행기 연료인 항공유가 된다. 에릭 프라이어 펄크럼 최고경영자(CEO)는 투명한 합성 원유 샘플을 들어 보이며 “지금이 바로 미래 에너지 산업의 전환점”이라고 말했다.
● 美 정부 보조금으로 버틴 15년
‘쓰레기에서 연료로’를 좌우명으로 2007년 창립한 펄크럼은 지난해 시에라 공장의 합성 원유를 정제한 항공유로 실제 비행기를 띄우는 데 성공했다. 창업 15년 만이었다. 기존 원유는 시추와 생산, 정제 과정에서 화석연료를 에너지원으로 하는 장비를 가동시켜야 한다. 반면 시추할 필요가 없는 펄크럼 합성 원유는 기존 원유로 항공유를 생산할 때보다 탄소 배출을 80%까지 줄일 수 있다.
합성 원유 같은 지속가능항공유(SAF)는 최근 항공업계의 새로운 에너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자동차는 전기, 배는 수소가 화석연료를 대체할 것으로 기대되지만 항공유는 2차전지로는 동력이 부족해 날 수가 없다. SAF가 미래 에너지원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다.
올 4월 유럽연합(EU)은 모든 항공기가 역내 운항할 때는 반드시 SAF를 연료에 섞도록 했고 미국은 SAF 1갤런(약 3.8L)당 1.25∼1.75달러의 세액공제 혜택을 주고 있다. 펄크럼 측은 “최근 SAF를 찾는 항공사가 많고 앞으로 정유 시설을 3배 이상 늘릴 예정이어서 12개월 안에 이익을 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SAF가 대세가 되기 전인 2007년부터 사실상 매출이 제로(0)에 가깝던 펄크럼이 15년을 버틸 수 있었던 기반은 무엇일까. 프라이어 CEO는 “시에라 정유 공장은 미 국방부 보조금이 기반이 됐다”며 친환경 에너지 산업 등에 약 4330억 달러(약 545조 원)가 보조금 등으로 지급되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14년 국방부 바이오 연료 생산 프로젝트에 연속 선정된 펄크럼은 약 7000만 달러(약 885억 원) 등을 지원받아 실험실에서 검증한 합성 원유 제조 기술을 실현할 수 있었다.
펄크럼은 첫 번째 ‘죽음의 계곡’을 넘은 뒤 유나이티드항공, 캐세이퍼시픽 같은 항공사, SK이노베이션 및 SK㈜,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을 비롯한 정유사 등이 투자해 대량 생산 체제를 갖췄다. 시에라 공장은 연간 쓰레기 50만 t을 처리해 합성 원유 26만 배럴을 만든다.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을 항공기로 약 180회 왕복하는 데 드는 연료에 해당한다.
● 시동 걸린 美 주도 에너지 패권 전쟁
펄크럼은 미국이 주도하는 미래 에너지 패권 전쟁의 일단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연방정부의 보조금과 친환경 규제, 시장성을 확인한 글로벌 기업의 투자와 이를 바탕으로 한 선도적 기술 개발로 미래 에너지 시장을 선점한다는 전략이다. 합성 원유로 만든 SAF는 기존 항공유보다 비싸지만 미 정부는 계속 보조금을 지급하며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과 EU가 주도하는 친환경 규제는 특히 미국 친환경 기업의 시장성을 높여 투자 유치로 이어진다.
미국 비영리 연구단체 로키마운틴인스티튜트(RMI)에 따르면 미국은 향후 10년간 5000억 달러(약 632조 원) 이상을 에너지 전환에 쏟아부을 채비를 마쳤다. EU와 아시아 주요국 정부도 보조금을 늘리고 있지만 주로 에너지 가격 방어에 주력해 미 정부 보조금 규모를 따라잡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은 SAF에 대한 법적 근거도 없다. 현행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사업법에 따르면 정유사는 석유가 아닌 원료를 사용해 제품을 생산하지 못한다. 국내 정유사 관계자는 “미국은 막대한 보조금과 시장, 기술력, 글로벌 규제 영향력을 바탕으로 미래 에너지 패권전을 선도하고 있다”며 “한국도 미래 에너지 공급망에서 주요 역할을 하기 위해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고 말했다.
리노(네바다)=김현수 특파원
카지노 도시가 ‘클린테크 메카’로… 10년 세액공제로 테슬라 유치
[美 주도 에너지 패권 경쟁]
네바다주 사막도시 리노의 변신
빠른 인허가에 첨단기업 입주
실업률 크게 줄고 청년들 돌아와
13일(현지 시간) 미국 네바다주 리노시(市)에서 동쪽으로 약 30km를 달리니 사막 한복판에 테슬라 기가팩토리가 웅장하게 서 있다. 테슬라 전기차뿐 아니라 에너지저장장치(ESS), 배터리까지 만드는 테슬라의 가장 큰 공장이다. 공장 주변에는 테슬라와 배터리 파트너십을 맺은 파나소닉, 블록체인 구글 등 테크(정보기술) 기업 관련 시설이 늘어서 있다. 월마트나 페덱스 대형 물류창고도 눈에 띄었다.
2014년 네바다 주정부와 리노 외곽 스토리카운티가 10년 세액공제라는 파격적 조건을 제시해 테슬라 공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이곳은 인구 약 5000명으로 미국에서 세 번째로 사는 사람이 적은 사막지대에 불과했다. 카운티 전체 면적의 절반가량이 허허벌판이었다. 인구 20여만 명의 리노도 ‘세계에서 작은 도시 중 가장 큰 도시’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사실상 소도시였다. 과거 흥했던 탄광 산업이 쇠퇴하며 지역 전체가 카지노에 의지했다.
하지만 테슬라가 62억 달러(약 7조8000억 원)를 투자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자동차 부품을 비롯해 테슬라에 각종 부품을 공급하는 업체들이 따라왔다. 세계 최초로 쓰레기로 합성 원유를 만드는 펄크럼바이오에너지 같은 화학 기업들도 둥지를 틀었다. 타호-리노 산업단지가 스토리 카운티 허허벌판을 클린 에너지 중심지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천지개벽에 가까운 이 변화의 가장 큰 요인은 클린 에너지 산업에 대한 연방정부 주도의 투자다. 전기차나 친환경 합성 원유 같은 신사업에 대한 정부 투자가 끌고 네바다주의 파격적 세액공제가 밀고 있는 것이다. 테슬라는 최근 36억 달러(약 4조4000억 원)를 투자해 기가팩토리에 전기 트럭 ‘세미’ 생산시설을 새로 짓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네바다주는 이에 대해 약 3억3000만 달러(약 4200억 원) 규모의 세금공제 혜택을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타호-리노 산업단지는 테크 산업 요충지 캘리포니아주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에 ‘가장 빠른 인허가’라는 행정적 장점까지 갖췄다.
릭 바라자 펄크럼바이오에너지 경영부사장은 “본사는 캘리포니아에 있지만 네바다에 합성 원유 생산시설을 뒀다”며 “원유 원료가 되는 쓰레기 매립지와 가까운 점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비즈니스 프렌들리’(친기업)라는 점이 끌렸다”고 말했다.
스토리카운티는 평일 낮 산업단지 근무자만 약 3만 명이 상주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미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2014년 이 지역 실업률은 9.3%에 달했지만 지난해 4%로 떨어졌다. 스토리 카운티 측은 ‘테슬라 효과’에 대해 지역 매체에 “과거 지역 젊은이들은 카지노나 건설 현장에서 일하거나 네바다를 떠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며 “지금은 테크 일자리가 늘어나 주를 떠날 필요가 없어졌다”고 강조했다.
미 연방정부는 전기차 배터리 핵심 광물인 리튬의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네바다 리튬 채굴에도 보조금을 쏟아붓고 있다. 올 초 에너지부는 리노와 라스베이거스 사이 사막의 리튬 광산 채굴을 위해 호주 광산 업체 아이어니어에 7억 달러(약 8820억 원) 조건부 대출을 승인했다. 연간 전기차 37만 대에 필요한 리튬 생산을 지원할 것으로 기대한다. 에너지부는 “미국 내 배터리 공급망을 강화하고 화석연료 및 해외 광물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라고 밝혔다.
리노(네바다)=김현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