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울(뛰어나다, 훌륭하다, 기쁘다)자로, 자신의 이름 길(吉) 자가 20개가 더해진(十, 十) 글자이며, “좋은 일이 많으면 아름답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천(泉)
원천이나 생명의 근원, 여성을 상징하는 글자이고 “길하고 아름다움이 샘솟는 인생 또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가천은 이길여의 호 이다
'가천 대학교'는 끊임없이 솟아 오르는 샘처럼 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이다
유튜브
KBS 아침마당 (시간 60분)
MBC (시간 50분)
이길여 회장 KBS 한국 한국선 (시간 50분)
이길여 회장 KBS 아침마당 전북편(시간 50분)
시간 나누어 보면 상당히 유익할 겁니다
이길여총장은 서울대학교 의대 (학부)를 졸업한 후,
1958년 인천에서 이길여산부인과를 개원 해 운영하다
1964년 뉴욕 Mary Immaculate Hospital에서 인턴 과정을 수료한 뒤 마찬가지로
뉴욕시의 퀸즈 지역에 있는 Queens General Hospital에서 레지던트를 수료하였다.
수료 후 귀국해 1968년 10월 산부인과를 재 개원 한 후 다시 일본으로 가
1977년 일본 니혼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후 1979년 3월 전 재산을 출연해 종합병원인 인천길병원'을 개원 한다.
여의사로서 전국에서 처음으로 의료법인화한 것이다.
이후 돈이 없어 치료 받지 못하고 숨지는 환자는 없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1991년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를 발족 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1993년 한국을 방문한 미국 레이건 대통령 부부가 귀국 길에 오르면서 우리나라의 심장병 어린이 두 명을 데리고 출국하는 모습 방송 뉴스를 보고 1996년부터 아시아 저 개발 국의 심장병 어린이를 초청해 무료로 치료하고 있다.
이길여총장은 세계 수준의 임상 연구 인프라를 갖추기 위해
2000년대 초반부터 뇌과학연구원, 암당뇨연구원, 바이오나노연구원 등을 설립해 뇌신경지도를 세계 최로로 제작하는 등 기초의과학 분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2년에는 4개 대학을 통합해 가천대학교를 출범 시키고 총장으로 취임해,
명문 대학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길여총장은 '인공지능이 미래'라는 판단아래 2020년 국내 대학 학부에서는 최초로 인공지능학과를 신설해, 인공지능교육을 선도하고 있다,
이에 앞서 길병원은 2016년 국내 최초 인공지능
'왓슨 포 온콜리지'를 도입했으며 인공지능암센터를 개소, 선진 의학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길여 총장의 신념은 박애․봉사․애국이다.
그의 모든 삶의 궤적에 이 정신이 녹아 있다. 국내외 환자들을 위한 무료 진료,
의료 취약지와 소외된 계층에 대한 봉사, 인재 양성과 기초의과학 발전에 헌신해온 것은 모두 박애와 봉사, 그리고 애국이 근간이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이길여 총장은 어려서부터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제대로 된 치료 한 번 못 받고 죽어가는 것을 보며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여자는 많이 배울 필요 없다’는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오직 의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에 매진하여 의사가 되었다.
이 총장은 의대 졸업 후 수련 생활 내내 선진 의료에 대한 열망이 컸다.
1964년 32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해 뉴욕으로 갔다.
당시 유학이나 이민을 가면 좀처럼 돌아오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한국을 떠날 때 꼭 돌아오라 던 조국의 환자들을 한시도 잊지 않은 그는
4년 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이길여 산부인과를 열고,
돈이 없어 치료를 포기하는 환자들을 위해 ‘보증금 없는 병원’을 도입했다.
당시는 형편이 어려워 병원비를 못 내는 환자가 많아 병원마다 보증금을 받고 입원
시키던 시절이었다.
그는 돈이 없는 환자들은 무료로 진료를 해주었고,
의료보험제도가 정착될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서해 섬에는 의사가 없어 전염병이 돌면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는 틈 날 때마다 통통배를 타고 섬을 돌아다니며 무료 진료와 질병 예방 교육을 했다. 자 궁암으로 죽는 여성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궁 암 무료 검진도 도입해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다.
또 차가운 청진기에 임산부와 태아가 놀랄까 봐,
청진기를 늘 가슴에 품어 체온으로 따뜻하게 데웠다.
청진기는 환자들에게 체온 뿐 아니라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까지 전해주는 의미였다.
이길여 총장은 가천 의대 졸업생 모두에게 해마다 가슴에 품는 청진기를 하나씩 선물하고 있다.
이길여 총장은 산부인과 만으로는 환자에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없다고 생각,
1978년 300병상 종합병원인 ‘의료법인 인천길병원’을 출범 시켰다.
의료 법인 설립은 개인 재산을 사회에 헌납한다는 의미였고,
국내 최초로 여의사가 세운 의료 법인으로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수익을 위해 대도시 중심으로 병원이 세워지던 시절, 이길여 총장은 의료 취약지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1980년대 초, 의료취약지인 농어촌 주민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양평, 철원, 백령도에 길병원을 운영했다. 어린 시절 농촌에서 의사도 없고 병원도 없어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매년 수억의 적자가 나도 운영을 포기할 수 없었다.
1987년에는 산업 재해로 고통 받는 공단 근로자들을 위해 부평과 주안, 반월, 시화, 남동 공단이 인접한 인천 남동구 구월동에 지금의 본원인 중앙길병원(현 가천대 길병원)을 설립했다. 이들을 위해 야간 병원을 도입하고 24시간 진료하면서 의료보험으로 진료해 주었다.
길병원에는 일관된 원칙이 있다.
바로 봉사다. ‘첫째도 봉사, 둘째도 봉사, 셋째도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환자를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길여 총장은 공익에 부합한다면
손해를 보더라도 책임 있는 자세로 역할과 소임을 다해야 한다는 소신이 확고하다.
길병원은 서해권역응급의료센터, 권역외상센터, 정신건강복지센터, 자살예방센터,
장애인구강진료센터, 해바라기센터(아동), 인천지역암센터, 광역치매센터,
고위험산모신생아통합치료센터 등 공공 의료를 위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섬 지역 무료 진료를 다닐 때 병원선(船)을 운영해서라도 생명을 살리고 싶었던 이 총장의 열망은 닥터헬기(응급의료전용헬기)로 결실을 맺었다.
이길여 총장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길병원 내에 장애인 고용 사업장인 ‘가천누리’가 바로 그것인데,
이곳에서는 35명의 중증 장애인들이 근무를 하고 있고, 앞으로 10여명을 더 채용할 계획이다. 장애인 고용이 활발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천누리를 탄생 시켰다.
가천누리 소속 장애인들과 가족들은 이곳에서 꿈과 희망을 찾았다고 얘기하며,
이 총장에게는 보람 그 자체이다.
1990년엔 ‘돈이 없어 치료 받지 못해 숨지는 환자는 없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를 설립하여, 중증 환자들을 무료로 수술해주고 있고,
약 5천 여명이 이곳을 통해 새 생명을 찾았다.
이 같은 의료를 통한 봉사는 국경의 장벽을 뛰어 넘었다.
국내는 물론 몽골, 캄보디아, 카자흐스탄 등 해외로 범위를 넓혀
지금까지 전 세계 17개국 432명의 어린이들이 무료 심장 수술 혜택을 받았다.
이 같은 해외 심장병 무료 진료는
1983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 부부가 방한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갈 때
한국의 심장병 어린이 두 명을 데리고 가서 수술해 주었던 기억,
그 때의 안타깝고 감동적인 사건이 영향을 주었다.
2001년에는 한센국제후원회장을 하면서
베트남에 한센병 환자들의 자활을 위한 직업훈련원을 세웠고,
이런 박애 정신을 인정받아 몽골과 키르키스스탄 정부로부터 최고 의료 훈장을 받았다. 아울러 국내 의과 대학 최초로 우즈베키스탄에 의대 설립과 의학 교육 프로그램을 전수해 주고 있으며, 페루 정부와 공동으로 길병원의 원격 의료 기술을 전수하는 시범 사업도 하고 있다.
이길여 총장은 ‘인재 양성이 곧 애국’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나 같은 의사, 가슴이 따듯한 의사’를 키우기 위해
1997년 국내 41번째로 ‘가천의과대학교’를 설립했다.
글로벌 인재 양성을 위해 1998년 경원대를 인수하여,
2005년에는 가천의대와 가천길대학을, 2006년에는 경원대와 경원전문대를 통합하고, 2012년에는 이들 4개 대학을 모두 통합해 지금의 가천대학교를 탄생시켰다.
가천대는 입학 정원 3750여명, 의대, 한의대, 약대, 간호대를 갖춘 수도권 명문 대학이 됐으며, 발전 가능성이 가장 큰 대학으로 평가 받으며 비약적인 성장을 해나가고 있다. 2020년에는 국내 대학 학부 최초로 인공지능학과를 신설해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인공지능 인재 육성에 앞장서고 있다.
이길여 총장의 열정은 기초 의학 발전으로도 뻗어갔다.
2006년 뇌과학 연구원, 2007년 바이오나노연구원,
2008년 이길여암·당뇨연구원을 설립하였고,
이들 연구소는 정부가 세계적 수준의 대학을 육성하기 위해 추진하는
WCU(World Class University, 세계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에 선정됐다.
인천 송도경제자유구역에 위치한 ‘가천브레인밸리'(Gachon Brain Vally)에서
미국에 이어 세계 두번째 뇌전용 11.7T MRI과 중성자 암치료기 ‘A-BNCT’를 개발중이며, 뇌영상과 진단분야의 세계 특허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이런 세계적 수준의 기초의과학 연구는 그 규모나 내용 면에서
국가 차원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이길여 총장은 기초과학의 발전이 곧 국가의 발전이라는 믿음으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어난 6.25 전쟁 시
이길여 총장과 함께 공부하던 남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나가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이 총장은 그들의 몫까지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늘 생각했고,
자신은 조국에 빚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것을 갚기 위해 미국 유학에서 돌아왔고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일생을 환자와 학생, 이웃과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해왔고,
그것이 그의 철학인 ‘박애 봉사 애국’이다. 이제는 그 몫을 자라나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이 총장의 꿈이다.
우리나라는 1960년, 1970년대 가난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한 번 받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의료보험제도가 없어 생계가 어려운 서민들은 병원비 부담이 컸다.
이길여는 보증금 없는 병원임을 병원 안팎에 알리고 이를 병원 입구와 수납 창구에 써 붙였다.
당시에는 책값, 술값은 떼 먹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묘한 인식이 만연해 있던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병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보증금을 받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이길여는 입원할 때나 수술할 때 받던 보증금을 과감히 없앴다.
환자에게 보증금을 받지 않는 방식의 병원 운영은 1977년 시작된 의료보험이 정착될 때까지 계속됐다.
이길여는 따뜻한 청진기로 유명하다. 이길여는 산부인과 의사 시절, 항상 청진기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
차가운 금속 체가 몸에 닿을 때 깜짝 놀라거나 움찔하는 환자들을 위해 청진기를 체온으로 덥혔던 것이다.
또한 차가운 고무장갑에 산모가 놀라지 않도록 내진 전에 항상 따뜻한 소독물에 담가 놓았다.
불안해 하는 환자와 가족들을 위해 항상 손을 잡으며 '치료가 잘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안심 시켰다.
의사의 말 한마디가 환자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진료 방식은 약자를 배려하는 따스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다.
이길여는 젊은 수련의들과 예비 의사들에게도 항상 '가슴으로 진료하라'고 가르친다.
얼굴이 엄청난 동안이다. 50대 초반 정도의 외모와는 달리 실제 나이는 90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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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여 어머니(차데레사·세례명)는 1910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열여섯 나이에 옥구군(현 군산시) 대야면으로 시집왔다.
차순녀 여사(데레사·1909∼1998)는 딸만 둘 낳았다.
손이 귀한 전주 이씨 집안에서
차 여사와 딸들(이귀례·85·한국차문화협회이사장과 이길여 회장)은 천덕꾸러기나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미운 오리새끼였다.
둘째 이길여는 더 심한 구박덩어리였다. 온 집안이 잔뜩 아들을 기대했다가 한순간 초상집분위기로 변했다.
어머니는 출산 후 곧바로 밭일을 나가야 했다.
할머니는 “무슨 벼슬을 했다고 미역국이냐”며 미역가닥을 마당으로 내던져버렸다.
이길여는 그렇게 태어났다.
누구 하나 축하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때 이 아이를 이 세상 그 어느 아들보다 훌륭하게 키우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고 한다. 나도 커가면서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 되고야 말 것’이라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뭔가 가슴에 쌓여서 그랬을까. 난 여섯 살 될 때까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말문이 터졌다. 청산유수가 따로 없었다.
어머니는 오빠들의 어깨너머로 글을 깨칠 정도로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추수가 끝나면 밤마다 우리 집에서는 ‘안방극장’이 펼쳐졌다.
글을 몰랐던 동네 아낙들과 나는 어머니가 읽어주는 장화홍련전, 흥부전, 심청전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어머니의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배움에 대한 열망을 키울 수 있었다.
어머니는 여자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초등학교 6년간 내리 1등을 한 나는 호남의 명문인 이리여고(6년제)에 합격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여자가 공부해 뭐 하냐”며 진학을 반대했다.
이때 어머니는 처음으로 할머니의 뜻을 거슬렀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이리 여고 최초로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다.
고교 때 맞이한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는 논을 팔아 학비를 보내주셨다.
방학이 돼 고향에 내려갔을 때 한 번은 동네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터졌다.
가방에 넣어간 사람 뼈가 문제였다.
방안에 인골(人骨)을 펼쳐 놓고 공부하는 나를 보고서
마을 사람들이 “부정 타서 동네가 망한다”며 야단법석이었다.
어머니는 “의사가 사람 뼈를 알아야 정확히 치료할 게 아니냐?”며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셨다.
1958년 동인천역 앞에 개업한 병원은 번성했다.
그러나 선진의료에 대한 나의 꿈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새우잠을 자면서 공부해 1964년 32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해 뉴욕으로 갔다.
당시 미국으로 간다는 것은 생이별을 의미했다.
유학이나 이민을 한 번 가면 좀체 돌아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내내 담담했던 어머니는 비행기가 이륙하자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나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 마흔이 넘은 나이에 또 일본으로 박사과정 유학을 떠났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나의 열정은 모두 어머니로부터 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1930년대 말에 중국 만주의 봉천(현 선양)에 다녀오셨다.
이때 어머니는 상하이까지 다녀오지 못한 것을 평생 아쉬워할 정도로 진취적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넓은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거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바가지에 동냥을 주지 않고 꼭 개다리소반에 밥과 반찬, 국까지 챙겨 귀한 손님 대접하듯 했다.
그러고는 그 밥상을 나르도록 시키며 “사람은 다 똑같다.
거지라도 내 집에 찾아온 사람을 홀대하는 법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나에게 평등정신과 나눔의 실천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 같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병원이 보증금을 받았다.
치료비를 안 내고 도망을 가는 환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 나는 정문 앞에 ‘보증금 없는 병원’이라고 크게 써 붙였다.
보증금이 없어 치료를 포기하는 환자들이 쉽게 병원을 찾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서해 섬에는 의사가 없어 전염병이 돌면 많은 사람이 죽었다.
매년 통통배를 타고 섬을 돌아다니며 무료진료와 질병 예방교육을 했다.
또 차가운 청진기에 임산부와 태아가 놀랄까 봐 청진기를 늘 가슴에 품어 내 체온으로 따뜻하게 데웠다.
어머니는 마을 부녀회장을 하면서 30, 40명이 넘는 주부를 모아서 봉사와 자선활동을 주도했다.
어머니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5000명이 넘는 가천길재단 임직원을 이끄는 나의 리더십은 이런 어머니에게서 비롯됐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젊은 시절 농사짓던 농촌을 그리워하셨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인천 청량산 밑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텃밭도 딸려 있는 집에서 어머니를 1년만이라도 모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집이 완성되기 전인 1998년 89세의 일기로 내 곁을 떠나셨다.
그 집에서 지금도 눈을 감고 있으면 텃밭에 고추를 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그리움에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