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룡은 명을 받자 민첩하게 신형을 움직였다.
거선은 어둠 속에서 부서지는 파랑을 뒤로 하고 쾌속하게 맞은편의 괴선을 향해 접근
해 갔다.
그 속도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으며, 움직임 또한 빙판 위를 미끄러져 가는 것처
럼 유연했다.
그러나 기이한 일이었다. 그들의 접근에도 불구하고 괴선은 여전히 고요 속에 잠겨 있
을 뿐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북리무해의 얼굴에 한 가닥 의혹이 떠올랐다.
"제룡, 적이라면 무슨 반응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제룡의 목각 같은 얼굴에도 곤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아마도 난파선인 모양입니다. 배 안에서 사람의 움직임이 전혀 감지되지 않고 있습니
다."
그는 말하는 중에도 예리하게 빛나는 눈으로 괴선의 선체를 살피고 있었다. 북리무해
는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본좌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만 난파선이라면 선체가 너무 깨끗하지 않
느냐?"
"그렇군요."
제룡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괴선은 어느 부분을 살펴봐도 파손된 흔적이라곤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두 사람의 안면은 더욱 굳어졌다. 아무래도 불안했던 것이다.
"아! 저것......."
제룡이 그답지 않게 놀란 음성을 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세히 보니 괴선박의 주위로는 괴이한 형상의 어족(魚族)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쏴아아아......!
와중에서도 배는 어둠을 밀치며 물결의 흐름을 따라 전진해 오고 있었다. 그 모습만으
로도 괴선박이 전하는 느낌은 기괴하고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괴선을 계속 응시하고 있던 제룡이 말을 이었다.
"한 번 조사를 해 보는 편이 나을 듯 합니다. 배 주위를 맴도는 어류들은 주로 시체를
뜯어먹는 어종들입니다."
"좋다! 가 보도록 하자."
제룡이 신호하자 그들이 타고 있는 거선에는 어둠을 소멸시키듯 도처에서 일제히 불이
밝혀졌다. 그 불빛에 의해 괴선의 부유하는 모습도 비로소 확실하게 잡혔다.
하지만 정체불명인 괴선박의 선체에서는 소속을 짐작하게 할 만한 표식 따위조차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저 처음과 마찬가지로 괴괴한 정적에 휩싸여 있을 뿐이었다.
북리무해는 궁장녀를 힐끗 돌아보았다.
"공주도 함께 가시겠소?"
궁장녀는 고개를 저었다.
"전 사양하겠어요. 강호에서의 첫사건은 유쾌한 것으로 기억하고 싶으니까요."
'유쾌한?'
북리무해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으나 이내 몸을 돌렸다.
"가자, 제룡!"
휙! 휙―!
두 사람은 야조처럼 비쾌하게 신형을 날려 괴선박의 선상으로 날아갔다.
북리무해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갑판과 선실의 중간에 쓰러져 있는 한 구의 시체였
다. 더구나 그 시체는 끔찍하게도 새들에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뜯겨 형체조차 온전치
못했다.
제룡의 무심한 눈에 기광이 번뜩 떠올랐다.
"반항할 새도 없이 즉사했습니다."
"음, 심장을 관통 당했군. 사용된 무기는 부피가 작은 엽도(葉刀)인 것 같다."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경황 중에도 침착을 잃기는커
녕 명확한 사인(死因)을 밝혀 내고 있었다.
제룡이 시체를 발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심장이 관통된 후에도 한동안 심맥이 끊어지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 자는 상당한
무공을 소유했던 듯합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북리무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그들은 걸음을 옮겨 선실로 다가갔다. 선실의 문은 쉽게 열렸으나 그 안에서도 인기척
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뭔가 전해 오는 섬뜩한 느낌이 있어 양 인은 흠칫했다.
그것은 문을 열자마자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부터 후각에 확 끼쳐 온 비릿한 혈향(血
香)이었다.
제룡이 품에서 화섭자를 꺼내 불을 당겼다.
팍!
"혈흔(血痕)이 굳어진 정도로 보아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약 삼 일 전쯤으로 추정됩니다
."
불이 밝혀지자 선실 안의 풍경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입구에는 나무계단이 수직으로 뻗어 있었는데, 그 밑에는 또 다른 세 구의 시체가 쓰
러져 있었다.
북리무해는 자광이 감도는 눈으로 시체를 주시했다.
"앞서의 시체와 똑같이 엽도에 심장을 관통 당했군."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곳의 시체들은 비교적 온전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점이었다.
그들은 모두 삼십 전후의 장한들이었다. 제룡이 곁에서 그들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
정을 살피고 있었다.
"이 자들은 죽기 직전까지 경계심을 조금도 갖지 않았던 듯 합니다. 시체의 안면근육
에 경직된 흔적이 없군요."
북리무해는 쓴 입맛을 다셨다.
"선상 반란이라도 일어났었단 말인가?"
제룡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거기까지야 어찌 알겠습니까? 선실 안의 상황을 좀더 살펴보면 확실한 답이 나오겠지
요."
"으음......."
침음성에 이어 북리무해는 제룡과 함께 선실을 가로질러 배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도합 열 개의 선실을 조사했고, 그러는 사이 백여 구에 달하는 시체들을 발
견해 낼 수 있었다.
시체들의 사인은 모두 동일했다. 하나같이 무엇인가에 의해 심장이 관통 당한 채 즉사
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호화롭게 치장된 통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어디고 발등이 푹푹 덮이는 천축산 융단이 깔려 있었다. 그들이 들여다본 열
개의 선실도 그 내부가 거창한 규모에 못지않게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단,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들이나 핏물로 인해 몹시 더럽혀져 있었으며 기물들도 파손
된 채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러한 광경은 공포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았
다. 마치 인간의 내부에 담긴 신뢰가 누군가에 의해 철저히 조롱당한 듯한.
이윽고 북리무해와 제룡은 통로의 제일 끝에 위치한 선실의 문 앞에 이르러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 선실이군."
북리무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제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특이한 문의 장식으로 미루어 이 곳은 아마도 수뇌급 인물이 머물고 있었던 장소인
듯하군요."
"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군."
문을 열자 역시 짙은 혈향이 물씬 풍겨왔다.
두 사람은 눈살을 찌푸리며 선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 내부는 지금까지 그들이 지나쳐 온 선실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화려하고 드넓
었다.
좌측에는 호사의 극치를 이룬 거대한 침상이 놓여 있었으며, 중앙에는 교의와 깨끗한
팔선탁도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주위로는 여섯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고, 침상 위에는 초로(初老)의 한
인물이 죽어 있었다.
그 자는 일신에 곤룡포를 입고 있었는데, 한 손에 검을 든 채 앞으로 뻗는 자세로 절
명해 있었다. 그의 검 끝에는 선혈이 말라붙어 있어 격전의 흔적이 여실히 엿보였다.
침상에는 그 말고도 또 다른 다섯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목이 반
쯤 잘려져 나간 모습으로 말라붙은 선혈 속에 나뒹굴고 있는 그 광경이란 실로 처참했
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물체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문제
의 엽도였던 것이다.
북리무해의 눈에서 기광이 일렁였다.
"놀랍군."
뒷말은 제룡이 이었다.
"정녕 대단하군요. 곤룡포를 입은 인물의 일검이 저들 오 인을 한꺼번에 처치한 것 같
습니다."
"그렇다. 저들은 모두 즉사했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곤룡포 인물 역시 저들과 거의 동시에 죽어 버렸군요."
북리무해는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었을 게야."
"하면?"
"저 노인의 등뒤를 봐라."
제룡은 곤룡포 노인의 등뒤로 시선을 돌렸다.
"음......."
그의 입에서 한마디 침중한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여간해서는 감정 표현이 적은 그의
안면이 일시지간 매우 흔들렸다.
곤룡포 노인의 등뒤에는 놀랍게도 심장부를 중심으로 삼백육십 줄기의 도흔(刀痕)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도 극고의 도강에 의한 상세인 듯 피 한 방울 배어 나오지 않았다. 피부에 희미한
혈흔만이 비쳐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뒤 옷자락은 갈가리 찢겨져 나가 있었
다.
'세상에 이런 도법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제룡은 그 순간 내심으로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그만큼 도법의 위력이 가공스러웠
기 때문이었다.
북리무해의 음성이 이어졌다.
"이 도법에는 이름이 있지. 그것은 지금까지 내내 전설로 여겨져 왔었다."
그는 곤룡포 노인의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했다.
노인의 부리부리한 호목은 한껏 부릅떠져 있어 일견하기에도 경악과 분노의 빛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북리무해는 이해가 된다는 듯 낮게 읊조렸다.
"필경 사자(死者)도 죽어 가면서 충격이 컸으리라. 이 도법은 삼대지옥비전(三大地獄
秘傳)으로 전해져 온 지옥잔륜도(地獄殘輪刀)가 틀림없다."
"아!"
제룡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재삼 노인의 등판
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에도 놀란 빛이 역력하게 매달려 있었다.
"도저히 믿기가 어렵군요. 삼대지옥비전의 지옥잔륜도가 당세에 나타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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