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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대지옥비전.
이는 무림개사 이래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온 세 개의 전설을 일컫는 말이었다. 소위
악마의 무학이라 불리는 한 가지의 무공과 하나의 병기, 그리고 지옥의 저주를 타고
태어난다는 한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첫째로 무공에 대해 이르자면 그것은 고금미증유의 마공(魔功)이었다. 이름하여 지옥
잔결(地獄殘訣)이라던가?
삼 초의 무적도법(武敵刀法)과 이 초의 장법(掌法), 오 초의 지법(指法) 등을 말하는
데 행인지 불행인지 그 중 세간에 알려진 것은 도법 가운데서도 단 일 초뿐이었다.
일명 지옥잔륜도가 그것이었으니, 일 초식에 무려 삼백육십 개의 도흔을 남긴다는 절
대무상의 도법이었다.
이 도법의 특징은 밖으로 피를 한 방울도 뿌려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도 일
시에 상대에게 삼백육십 줄기의 치명상을 입히고 만다는 쾌도(快刀)이다.
지금으로부터 일천 년 전, 지옥혼마제(地獄魂魔帝)라 불리우는 대마종(大魔宗)에 의해
꼭 한 차례 시전된 바 있으며 그 후로 그것을 능가하는 도법은 인세에 존재하지 않는
다고 한다.
두 번째로 악마지병(惡魔之兵)을 논하자면 일명 혈옥마번(血玉魔幡)으로 정의된다. 전
면은 남옥색으로 되어 있으며, 후면은 섬뜩한 핏빛을 띤 깃발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혈옥마번에 대해서는 그 이상 알 길이 없다. 이미 실전되어 무엇
도 남아 있는 바가 없었고, 단지 그 이름만이 현세에까지 사람들을 위협할 따름이었다
마지막으로 악마의 화신이라는 지옥천룡(地獄天龍).
앞서도 언급했듯 지옥의 저주를 안고 태어난다는 인간이다. 그의 앞에는 언제나 암흑
과 혈류(血流)만이 존재한다.
그가 탄생하는 날에 천중의 성군(星群)이 붉게 변하며 자정(子正)을 기해 서천이 온통
핏빛으로 물든다고 했다.
이 일 편의 경구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지
만.
어쨌든 지옥천룡의 곁에는 지옥삼혈좌라 일컫는 혈미성(血眉星), 혈혼성(血魂星), 혈
인성(血人星)의 정기를 타고난 세 명의 인물이 언제나 따르며 보좌한다고 알려져 있었
다.
삼대지옥비전 중 지옥잔륜도를 망망대해의 한 난파선상에서 우연히 목도하게 된 북리
무해는 안색이 납덩이처럼 굳어진 채 고개를 흔들었다.
'평생 이토록 섬뜩한 느낌을 받기는 처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나를 지켜보
고 있는 것 같군.'
정녕 그답지 않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암흑 속에서 무엇인가 소리 없이
튀어나와 등판을 후려치기라도 할 듯한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물론 그는 그런 기분을 내색하지는 않았으며 곁에 있는 제룡도 어느 새 무표정으로 되
돌아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눈에서는 똑같이 묘한 빛이 출렁였고,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침묵 또한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들의 가슴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팽팽한 긴장감이 연줄 인 양 계속 감겨들고 있었던
것이다.
북리무해의 낮은 음성이 그 침묵을 갈랐다.
"배를 태워 버려라."
"네."
제룡은 간단히 대답한 후, 걸음을 옮기고자 몸을 돌렸다.
쿵!
마음의 동요로 인해 부주의했던 탓일까? 그의 몸이 침상 가에 부딪치며 가벼운 진동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곤룡포 인물의 시체가 앞으로 쓰러졌다.
"음......."
제룡은 침음성을 흘렸다. 이 한 번의 실수는 그에게 심적인 충격을 주었다.
"아니?"
북리무해의 눈이 크게 부릅떠진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그르르르.......
시체가 쓰러지며 어느 곳을 어떻게 건드렸는지 침상이 요동했다. 잠시 후, 의외의 사
태가 도래했다.
그그그긍!
괴이한 음향과 함께 침상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밀려나오며 그 곳에서 하나의 작은 밀
실(密室)의 출입구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 상황에 북리무해조차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도 경악으로 인해 다소 일그러
져 있었다.
"무엇인가? 이것은."
제룡이 놀란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오오! 어찌 이런......."
밀실은 사면이 밀폐된 장방형의 공간이었다.
어슴푸레한 화섭자의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물체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 아니
죽어 가는 한 소년(少年)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년은 이제 열 살 가량 되어 보였는데 이미 살아 있는 자의 몰골
이 아니었다.
아직 다 발달하지도 못한 가슴에는 앞에 보았던 곤룡포의 노인처럼 삼백육십 줄기의
도흔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심장부에는 따로 한 자루의 엽도가 깊숙이 박혀 있었으며, 그 주위로 흥
건하게 핏물이 고여 있었다.
그것은 어린 생명을 상대로는 도저히 연출될 수 없는 극단의 상황이었다. 소년은 누군
가에 의해 지옥잔륜도에 당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심장에 관통상까지 입었다.
다시 말해 두 번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소년의 모습에서 북리무해와 제룡은 충격을 받
았다.
이는 단지 그 모습이 처참해서가 아니라 그런 상태가 되어 있으면서도 소년의 안면에
떠올라 있는 표정 때문이었다.
소년의 얼굴에는 핏기라곤 한 점도 없었으며, 창백한 안색에 못지않게 입술도 파리하
게 질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고통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입가에 한 줄기 기이
한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그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불신과 의혹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것은 마치 죽
음을 희롱하는 듯한, 혹은 자신을 해친 누군가를 비웃는 듯한 웃음이었다.
따라서 그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대체 무엇
이 나이 어린 소년에게 이렇듯 죽음을 초월한 웃음을 머금도록 했단 말인가?
더구나 소년의 외관은 신비하리 만치 아름다웠다. 죽음보다도 섬뜩한 아름다움을 소년
은 보여 주고 있었다.
덕분에 북리무해와 제룡은 한동안 믿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그 자리에 굳어진 채 움
직이지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 여.
제룡이 먼저 소년에게서 눈길을 떼고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이마에서는 은
연중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쯧!"
북리무해는 혀를 차며 시선을 틀었다. 그는 밀실 안의 정경을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
고, 그의 눈빛은 원래의 무심을 회복한 듯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정작 불가해한 사태는 그 때부터 벌어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른 곳에 머무는 동안 죽은 듯 미동도 없던 소년에게서 놀라운 변
화가 일어났다.
스스스.......
삼백육십 개에 달하는 도흔이 핏물을 떨구어 내는가 싶더니 곧 소년의 가슴에서 흔적
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환상처럼 전개되는 그 광경을 북리무해는 곁눈으로 얼핏 보았고, 그의 입에서는 절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설마....... 내가 잘못 본 것은......!"
북리무해는 신음에 가까운 음성으로 제룡을 불렀다.
"보았는가?"
"네."
짧게 대답하는 제룡의 표정도 거의 넋이 나간 자의 그것이었다. 그도 역시 북리무해가
본 장면을 목도했으며, 그 때문에 놀란 나머지 망연해져 있는 것이었다.
북리무해가 그를 보며 나직히 읊조렸다.
"결국 이 아이에게는 전설의 지옥잔륜도도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이 이 아이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어 기적을 창출해 내고 있는 모양이다."
"과연 무엇일까요? 그 힘의 정체는......?"
제룡의 물음에 북리무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쓰러져 있는 소년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손을 뻗어 소년의 가슴에 박혀 있는 엽도를 잡았다.
"잘 보아 두도록 하라. 우리는 지금 또 하나의 전설과 만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네, 총사."
제룡은 각오를 다지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촤아아!
마침내 엽도가 뽑혀 나왔다. 솟구쳐 오른 피화살에 이어 북리무해는 무엇을 보았는지
눈을 크게 떴다.
"오오, 이럴 수가!"
제룡도 충격을 받고 신형을 가늘게 떨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소년의 심장을 꿰뚫었다고 여겨졌던 엽도는 그 끝 부분이 엿가락처
럼 구부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 그렇다면 역시......?"
북리무해는 현사태를 어느 정도 예상했으면서도 엽도를 손에 든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경직된 얼굴에서 제룡은 생전 처음으로 공포의 기색을 읽어낼 수 있었다
[4]
북리무해의 입술 사이로 침중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엽도는 애당초 이 아이의 심장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제룡, 너는 이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느냐?"
제룡의 목각 같은 얼굴에 미미한 떨림이 일었다.
"직접 봤으니 믿어야겠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군요."
북리무해는 검미를 모았다.
"나도 실은 그렇다."
그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곤룡포 인물과 이 아이는 똑같이 지옥잔륜도를 가슴에 맞았지. 그러나 두 사람의 도
흔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제룡의 눈이 반짝하고 이채를 발했다.
"위치가 다르다는 말씀입니까?"
"맞다."
북리무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설명했다.
"지옥잔륜도는 관통상을 입게 되므로 가슴에 맞으면 등뒤에 도흔이 남아야 마땅하지.
그런데 이 아이의 상처는 가슴어림에서 그쳤으니 지옥잔륜도도 엽도와 마찬가지로 처
음부터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었다는 얘기가 된다."
"아! 그럼 이 아이는 살아 있을 수도......?"
제룡의 물음에 북리무해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드리웠다. 그는 몸을 굽혀 쓰러져 있는
소년의 맥문을 잡았다.
"필경 네 짐작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확신이 느껴지는 음성을 들으며 제룡은 북리무해의 하는 양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으음!"
소년의 맥문을 거머쥔 북리무해의 안면에는 형언키 어려운 격동의 빛이 떠올랐다.
"역시 심맥이 끊기지 않았다. 이 아이는 죽지 않았다."
제룡은 그와 소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면, 어쩌시려고?"
"어찌할 것 같으냐?"
북리무해의 음성은 어느덧 침착해져 있었다. 이는 그의 심중에 이미 모종의 결정이 자
리잡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극히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소년을 쓸어보더니 아무런 망설임 없
이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이 아이가 마음에 든다. 이처럼 강인한 녀석을 내 어디 가서 또 만날 수 있겠느
냐?"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아이를 거두어 내 분신으로 만들겠다."
제룡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북리무해가 하는 일에 이의를 가져 본
적이 없기도 했지만 지금도 그는 상대의 판단이 현재로선 가장 현명한 것이라 느끼고
있었다.
사실 제룡은 이제껏 북리무해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거역하지 않고 따랐다. 심지어 스
스로를 북리무해와 한 몸이나 마찬가지로 취급하여 통상 그의 그림자를 자처하는 위인
이었다.
물론 절대적인 신뢰가 이 두 사람이 가진 관계의 배경이 되어 주었다는 점은 더 논할
나위도 없었다.
북리무해는 두 손으로 소년을 안아 들었다.
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소년이 쓰러져 있던 밀실의 바닥에서 무엇인가 검은 물체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은 한 권의 책자였는데, 표지는 단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을 뿐 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 아이에 대한 기록인가?"
북리무해는 책자를 집어들며 팔에 안고 있던 소년을 제룡에게 넘겨 주었다.
"가서 이 아이를 깨끗이 씻기도록 하라."
"네, 총사."
제룡도 싫지 않은 기색으로 소년을 받아 안았다.
뚜벅, 뚜벅......!
밀실의 한쪽 옆으로 옮겨 가는 그의 발소리도 방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사위에 경쾌한
울림을 전했다.
경위야 어찌 되었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인연을 맺는 일이란 소중한 법이다. 제룡도
이를 인정하는지 의식이 되돌아오지 않은 소년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보았다.
이어 그는 밀실 벽에 매달린 백색의 휘장을 뜯어내 소년의 얼굴과 몸에 묻어 있는 핏
자국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흐음!"
제룡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눈앞에 환하게 드러나게 된 소년의 용모가 무
척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지저분할 당시에도 소년은 충분히 반듯하고 단아해 보였지만 막상 말끔하게 닦아놓고
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이목구비가 얼음으로 깎은 듯 정교하고 섬세했으며, 피부 빛은 태어난 이래 한 번도
햇빛을 보지 못한 듯 창백했다.
미추(美醜)를 떠나 어쩌면 속기(俗氣)를 엿볼 수 없는 그 얼굴에서 제룡은 기이한 감
동과 만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여러 모로 특별한 놈이다, 넌!'
제룡은 심중으로 겨우 그 한마디를 읊조리고 말았으나 그 정도면 그로서는 최대한의
찬사를 갖다 붙인 것이었다.
한편.
북리무해는 그 시각 소년의 등 밑에 깔려 있던 검은 표지의 책자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후군(後君)께서 깨어나실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 탑륵패륭(塔 勒貝隆)은 후
군을 위한 구십구밀류개혼세수대법(九十九密流蓋魂洗手大 法)에 성공하고 기쁜 마음
으로 궁에 돌아간다. ...... 중략 ...... 십 년에 걸 친 밀류개혼세수대법은 후군이
깨어나는 순간부터 무적(無敵)의 인간으 로 만들어 줄 테고, 그리 되면 본궁의 오
랜 비원(悲願)도 이룩되리라.
책자의 첫장에 기술되어 있는 문구를 보자 북리무해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는 어떤 대법의 시술을 위해 이 아이가 태어난 후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깨어나
지 않았다는 말인데......!'
그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후군이란 아이의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고, 탑륵패륭은 침상 위의 곤룡포 노인을 뜻하
는 것이겠지?'
추리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아이를 밀실에 숨겨 둔 것은 추적자가 있을 시를 대비해서였을 텐데, 그 일은 현실화
되었다. 배 안에 있던 인물들이 모조리 죽고 아이마저 공격을 당했으니.......'
그의 생각을 입증시켜 주듯 책자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늘이여! 그 자가 기어이 추적해 왔다. 궁까지는 고작 한 달의 일 정이 남았을
뿐이거늘...... 중략 ...... 만일 후군께서 요행히 화를 면하시게 된다면...... 그
후로 익히실 수 있도록 본궁의 비전(秘傳)을 남기니.......>
그 뒤로는 책자의 뒷부분에 이르기까지 무공구결(武功口訣)과 도해들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북리무해는 표정을 고치며 담담히 읊조렸다.
"음, 어쨌거나 이건 내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로군."
그의 말 속에는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소년의 내력에 대해 굳이 연연해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처음부터 그가 작정했
던 바이기도 했다.
그는 다만 소년의 기질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며 거둔 이상 자신의 방식대로 키워 가리
라 생각을 굳히고 있는 터였다.
북리무해는 특유의 자광이 감도는 눈으로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탑륵패륭이 지칭한 추적자들도 누군가에게 쫓기는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그 자들은 확인사살까지 하면서도 끝내 아이를 죽이는데는 실패했다. 다른 시체들 역
시 시간을 끌지 않기 위해 모두 일 초에 살해했고.......'
이때 제룡이 휘장에서 찢어낸 흰 천으로 소년을 감싸 안은 채 다가왔다.
"명대로 이행했습니다."
북리무해가 그를 향해 말했다.
"그 아이를 숨겨야겠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해라. 공주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제룡의 짤막한 답을 들으며 북리무해는 몸을 일으켰다.
"먼저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 있거라. 나는 이 배에 불을 지른 후 가겠다."
"그 일을 꼭 직접 하셔야 합니까?"
"그렇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룡은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밀실을 빠져 나갔다.
잠시 후.
화륵! 화르륵―!
괴선박은 맹렬한 화염에 휩싸여 타오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안 심해의 밤을 불꽃으로 마구 뒤흔들어 놓더니 괴선은 서서히 침몰했다.
검푸른 물결은 침몰하는 거선을 소리 없이 품어 안았다. 그렇게 심야의 망망대해에서
벌어진 신비한 사건은 흔적조차 완벽하게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쏴아아아.......
밀려왔다 부서지는 파도만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그 비화를 속삭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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