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9주간 수요일(2017년 6월 7일)
2021.06.0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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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토빗은 자신이 눈멀고 가세가 기울어 가난하게 되고 안나가 품삯을 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한 때 여유롭게 살아가던 그의 삶이 갑자기 바뀐 처치가 된 것입니다.
토빗기 저자는 이렇게 토빗의 심정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 나 토빗은 마음이 몹시 괴로워 탄식하며 울었다.”(토빗 3,1)
그러한 속에서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그는 먼저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 않은 조상들의 잘못을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도록 먼저 기도 하지요.
이어서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주님께 호소하며 “저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당치 않은 모욕의 말을 들어야 하고, 슬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주님, 명령을 내리시어 제가 이 곤궁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제가 이곳에서 벗어나
영원한 곳으로 들게 하소서. 주님, 저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살아서 많은 곤궁을 겪고 모욕의 말을 듣는 것보다,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낫습니다.”(6절)라고 하소연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는 신앙인이 있겠어요? 때로는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가르침은 그렇게 하는 것은 옳은 기도가 아니라고 훈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라고 가르칠 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다 살아가며 겪는 고통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토빗을 우러러 보는 것은 그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하느님께 기도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토빗기 저자는 이 기도에 이어서 메디아의 엑바타나에 사는 가루엘의 딸 사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서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시집을 갔지만 일곱 번이나 첫날 밤에 매번 신랑을 잃습니다.
그것은 아스모대오라는 악귀의 짓이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사라의 여종은 사라를 일곱 신랑을 죽인 여자로 취급하면서 그녀를
한없는 고통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아스모데오는 토빗기에서 표현되었으며 탈무드에서 솔로몬 성전의 건축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나타납니다.
아스모데오는 그리스어로는 ‘아스모다이오스(Ασμοδαίος)’하고 히브리어로는
‘아스모다이(אשמדאי)’로 발음하는데 그 뜻은 ‘사악’하고 ‘의롭지 못한 자’로
인간의 분노와 욕망을 이용하는 일종의 악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날 사라는 마음이 슬퍼 울면서 위층의 방에서 목을 매려고 합니다.
그런데 연로한 아버지가 자신을 잃고 슬퍼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차마 목숨을
끊지 못하고 그녀는 양팔을 벌려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토빗과 사라가 서로 다른 곳에서 기도하지만 둘의 기도가 하느님께 이르는
장면을 토빗기 저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에 그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그래서 라파엘이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파견되었다.(16-17절)
우리에게 언제부터인가 과거에 없었던 결혼에 관련된 신생 어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황혼이혼’, 그러다가 요즈음 부쩍 ‘졸혼’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등장하고 있습니다.
걱정되는 것은 드라마나 매스컴이 은근히 이런 유형들을 부추긴다는 것이지요.
가득이나 결혼생활의 어려움에서 갈등을 갖는 사람들에게 마치 이런 유형들이
그 속박에서 해방시키고 자기들의 권리를 되찾고 개인주의의 가치를 내세워
해결해 주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넘을 수 없는 많은 함정들이
있는 것이지요.
물론 남남인 부부가 서로 만나서 산다는 그 자체가 시작부터 쉬운 것은 아닌 것입니다.
부부간의 어려움 뿐 아니라 삶이라는 자체가 녹록치는 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아는
진리입니다.
사실은 이것을 풀어주고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 부부와 아이들의 사랑이 있는
가정이지요.
그래서 때로 힘겨워도 극복할 수 있는 서로의 사랑 힘이 보이지 않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스컴은 이런 것은 뒷전으로 하고 개인주의의 권리만을 부각시키는 것은
조화롭지 못한 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나 예수님 당시나 결혼생활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 사람 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형태들은 다양할지는 몰라도
그 기본은 같은 것 아니겠어요?
현실주의자들인 사두가이는 부활을 부정하지요. 미래의 불확실한 부활 보다는
현재 누리고 사는 확실한 것을 삶의 가치로 여기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부활을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고약한 예를 들어 질문을 합니다.
그 예도 사실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지요.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 형이 결혼해서 자식 없이 죽으면 당시 법에 따라
후사를 얻기 위해서 시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것이지요.
지금이야 그런 법을 인정하지도 않고 또 말도 되지 않는다고 법으로 다루지도 않지요.
사두가이는 일곱형제 중에 여섯이 죽어서 차례로 시도생이 형수와 살다가
마지막에는 일곱 번째인 막내가 형수가 살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다가 일곱째도 죽으면 부활 후에 그 부인은 일곱 형제 중에 과연
‘누구의 부인이 되겠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약속하시는 예수님께 부활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하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도 예상하지 못한 진리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마르 12,24-25)
후대 몇몇 구약에서 개연적인 부활의 삶에서 ‘천사와 같은 부활의 삶’이라는
구체적인 설명을 주님께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께서 그들도 잘 아는 탈출기 성경의 말씀을 예로 들려주시며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26-27절)
예수님께서도 설명하셨지만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현재 뿐 아니라 과거의 이미 죽은 성조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이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뜻은 현재 뿐 아니라 과거에도 그들의 하느님이셨지만 그들도 현재와
연결된다는 뜻이시지요.
비록 죽어서 과거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현재 살아계신 하느님과 연결되시기에
현재와 연결된 인물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의 주장대로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과 연결되어서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그들도 살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