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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청와대는 계급사회가 아니라, 신분사회를 유지했다. 조선사회, 사회주의, 공산주의에서나 있을 법만 일이 대한민국 공화주의 헌법 하에서 일어났다. 공신록(功臣錄) 때문 역사의 제물이 된 정암 조광조를 자시 끄집어 내 국회와 공기업, 어공 등을 조망한다. 선관위는 공신을 주는 창구로 역할을 했다. 그게 밝혀졌으면, 부정선거를 자행한 명단을 밝혀 그 사람들 제외시키고, ‘검수완박’ 논의를 하고, 법을 만들 필요가 있다.
국가·민족을 중시한 푸틴이 세계 경제를 망치고 있다. ‘지구촌’은 개인의 생명, 자유, 재산 기본 코드가 있다. 그걸 무시하고, 푸틴은 국가·민족·공동체 코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조선일보 정석우 기자(2022.04.20), 〈푸틴이 갉아먹은 세계 경제 성장률..., 143개국 전망치 낮춰〉, 세계(4.4→3.6%), 국내 3.0→2.5%라는 경제지표이다.
조선일보 손진석·정석우 기자(04.20), 〈이창용 “한국 장기 저성장 우려”〉, 공신록을 얼마나 지불했기에 물가는 4%이고, 고용률은 바닥이고, 불평등은 점점 심해진다. 문재인 정권은 국민의 흡혈귀임에 틀림이 없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는 19일 “한국 경제가 장기 저성장(secular stagnation)을 초래할 우려가 커졌다”고 말했다. 이 후보자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청년 실업과 노인 빈곤, 소득 양극화, 고령화와 같은 구조적 문제가 성장 잠재력을 훼손하고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장기 저성장’이란 만성적인 수요 부족과 기업들의 투자 회피에 의해 구조적으로 긴 경기 침체에 빠지는 현상이다.
이 후보자는 물가 상승세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3월에 4% 넘게 오른 소비자 물가가 앞으로도 원유, 곡물 등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상당 기간 오름세를 이어갈 전망”이라며 “물가 상승 국면이 적어도 1~2년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가계 부채에 대해서는 “최근 증가세가 일부 둔화됐다고 하지만 그 수준이 높아 금융 안정은 물론 성장에도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가계 부채는 1860조원을 넘어 국내총생산(GDP·약 1900조원)에 육박하는 상태다.“
공신록을 공급한 선관위가 문제꺼리로 등장한다. 5·9대선, 4·15 부정선거, 3·9 대선 등 각종 선거가 다 공신록 배부로 끝났다. 그들이 법을 만들려고, 온 나라가 소란스럽다. 조선일보 사설(04.20), 〈노정희 체제 선관위 참사, 정권 방패용 선관위 더는 안 돼〉, 선관위는 양심언하고, 부정으로 된 국회의원은 전부 사퇴하도록 해야 한다. 그 사람들이 무슨 법을 만드는가? 제대로 된 법 만든다면 소가 웃을 일이다. 그들 신분 지키는 법만 양산할 것은 뻔하다. “노정희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대선 확진자 사전 투표 관리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노 위원장은 중앙선관위 전체회의에서 “국민께 심려를 끼친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린다”고도 했다. 논란이 불거진 지 44일 만이다. 대선 사전 투표는 투표 용지를 소쿠리나 라면 박스에 담아 옮기고 이미 기표한 용지를 다시 유권자에게 나눠 주는 등 총체적 혼돈 속에 진행되면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직접·비밀투표 원칙이 아무렇지도 않게 훼손되는 상황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면서 ‘충격적인 선거 참사’라는 탄식이 쏟아졌다. 게다가 선거 관리의 최종 책임자인 노 위원장은 사전 투표 대란이 벌어진 날 휴일이라는 이유로 출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공직자로서 최소한의 책임감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비난과 사퇴 요구에 직면했다.“
공기업 공신록도 문제가 된다. SkyeDaily 사설(04.20), 〈文정부 5년간 공공기관 임직원 35%나 급증〉, “공공기관 개혁이 시급하다. 외환위기 이후 지속돼온 공공기관 혁신 노력이 문재인정부의 ‘공공성 강화’로 흐지부지되면서 공공기관은 ‘감시받지 않는 공룡’이 됐다. 천문학적 부채, 낙제 수준의 경영, 사내 복지 천국을 만든 도덕적 해이, 전문성 부족한 이사장(사장)과 이를 견제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낙하산 감사’ 등 공공기관의 난맥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지난해 4분기 기준 시장형·준시장형 등 공기업과 준정부기관, 기타 공공기관 350곳의 임직원 정원은 44만3570명이다. 문 정부 출범 전인 2016년 말 32만8479명에 비해 35%나 급증했다. 지난 5년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코로나19 고용 충격 대응을 핑계로 공공부문 일자리를 대거 늘린 결과다.”
그게 문재인 청와대만 그런 게 아니란다. 공신록이 나라를 망치게 생겼다. 중앙일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총장(04.20), 〈윤석열정부와 27년 체제의 탄생〉, 박근혜 대통령 외에 공신록에 자유로울 수 없다. 박 대통령은 비교적 여기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 87년 체제는 386 운동권 공신록으로 좌우된 시대라고 봐야 한다. “87년체제로 민주화를 이룬 우리나라는 좌우양당의 정권교체를 통해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된 나라 중 하나로 여겨진다. 하지만 양당 체제에 의한 정치구조는 승자독식의 심각한 정치적 폐해를 낳았다. 집권당이 되면 정치권력을 독점하여 야당과 이를 지지한 국민들의 의견은 묵살한 채 독주하곤 했다. 좌우를 막론하고 승리하면 관직과 관변단체, 그리고 공기업 등에서 전리품을 나눠 갖는 엽관제의 폐해를 보여주고 국민의 뜻을 앞세워 독선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바로 이런 실망 때문에 유권자들은 수시로 정권을 교체해왔다. 그런데 이런 정권교체만을 보고 민주주의가 선진화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번 대선 패배로 586세대 용퇴론이 나오는 가운데 더불어민주당의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과 최재성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당의 중진인 김영춘 전 장관은 “이제 민주주의, 통일, 기득권 타파 등 거대담론의 시대가 아니라 생활정치의 시대가 되었다”고 은퇴의 변을 이야기했다. 최재성 전 정무수석도 “새 시대엔 새 소명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정치세력의 이념갈등의 한계를 토로했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협치를 강조하지만 승자독식의 양대 정당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하다. “
3·9 대선의 양상을 보자. 동아일보 사설(2021.11.08), 〈양대정당 후보 모두 ‘의정경험無’ ‘수사리스크’ 초유의 대선〉, 국민들은 공신록에 신물이 나 있었다. “집권 여당과 제1야당 대선 후보가 둘 다 국회의원 경험이 없는 ‘0선’으로 확정됐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초유의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국회의장이나 총리, 당 대표 등을 역임한 다선 정치인들을 제친 것은 한국 정치의 씁쓸한 역설이다. 기성 정치권이 오랫동안 ‘4류’ 비판을 받으면서도 국익은 뒷전이고 당리당략 싸움에만 골몰해온 결과다. 물론 이들이 각종 의혹과 자질 논란 등에도 불구하고 본선 티켓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정권 재창출’ ‘정권 교체’로 쫙 갈린 지지층의 전략적 판단이 결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이 후보는 전 국민 재난지원금 요구 등 당정 협의나 국회 예산심의 절차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정치적) 결단의 문제”라며 “국민 여론이 형성되면 따르는 게 관료와 정치인”이라는 말도 했다. 윤 후보는 검찰총장 퇴임 8개월, 출마 선언 4개월여 만에 대선후보가 됐다. “위임의 정치” 등을 강조했을 뿐 국정 운영 비전을 딱히 내놓은 게 없다. 두 후보에 대해 “행정독재 우려” “국정 준비 부족”등의 비판(정의당 심상정 후보)이 나오는 이유다. 두 후보가 ‘대장동 의혹’과 ‘고발 사주’ 의혹 등 리스크를 안은 채 본선 링에 오른 것도 대선 판도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큰 변수다. 사법 당국의 수사 과정 및 결과에 대선 국면이 좌우되는 것 자체가 초유의 일이 아닐 수 없다....이제 후보자 등록 신청일까지 98일, 투표일까지 122일 남았다. 두 후보는 치열한 내전을 거쳐 본선에 올랐지만 찜찜한 승리이기도 했다. 이 후보는 마지막 선거인단 투표에선 이낙연 전 대표에게 ‘28% 대 62%’로 뒤졌다. 윤 후보는 국민 여론조사에서 홍준표 의원에게 10%포인트 뒤졌다. 비호감 대선이란 평가 속에 부동층이 30∼40%에 이른다는 분석이 나온다. 두 후보의 틈새를 노리는 제3주자들도 완주 의지를 다지고 있다.“
3·9대선은 벌써 혼탁해 있었다. 그 문화에는 벌써 4·15 부정선거의 연장으로 봐야 한다. 그것도 부정선거였다. 국회의원, 공기업, 어공 등 공신록(功臣錄)을 받은 사람들은 자진 사퇴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조선일보 선우정 논설위원(04.20), 〈‘국회의원 특권 완전 박탈’을 요구함〉이라고 했다. 그게 시대정신이다.
그 문화에서 정암 조광조가 등장했다. 중앙일보 유성운 문화팀 기자(04.20), 〈공신〉, “『중종실록』에 기록된 박원종의 졸기 중 일부다. 박원종은 중종반정을 주도한 대표적 공신이다. 전 국왕인 연산군의 사치와 학정에 질려있던 조선 사회는 반정 이후 들어선 새 정권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일부 공신들이 보여준 행태는 이전 정권의 특권을 자신의 것으로 챙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선명한 차별화를 통해 새 정권의 정당성을 획득했어야 할 처지에 구태를 재연했으니 반정의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중종은 그의 능력과 공로를 평가해 공신으로 영의정에 오르고 평성부원군에 봉했다. 이러한 국정 운영은 중종 치세 중반에 조광조와 기묘사림(己卯士林)이라는 급진적인 성리학 원리주의자들이 정계에서 급부상하는 토양을 제공했다. 이들은 공신 세력의 특권을 비판하고 선명한 도덕정치를 주창해 여론의 호응을 얻었다. 새 정권에 걸었던 기대감이 조광조 세력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고려치 않은 기묘사림의 개혁은 조선에 적잖은 혼란을 빚었고 기묘사화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중종은 재위 초반 반정의 정당성과 새 시대의 청사진을 확실하게 보여주지 못한 탓에 꽤 비싼 정치적 비용을 치러야 했다. 왕정에서도 민심이 이렇게 움직이는데, 국민이 주권자인 공화정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4·15 총선에서 정암이 등장한 것이다. 당시 조씨 문중에서 성명서를 발표했다. 정암은 개국 공신의 후손으로, 중종 반정의 공신들이 설치니, 줄 녹봉과 더불어 토지가 없었던 것이다. 공신들에게 빼앗아야 하는 데, 반대 세력은 거품을 입에 거품을 품은 것은 당연했다. 그게 신분사회의 난제였다. 민주공화제는 그것을 하지 말자는 것인데, 1987년 체제는 더욱 공고화의 역사를 걷고 있었다. 당시 조씨 문중의 성명서를 다시 소개한다.
“조선시대 개혁 인물로 정치 제물이 되었던 정암 조광조가 4·15 총선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등장했다. 황희석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후보이며, 전 법무부 인권국장이 재등장시킨 것이다. 그 이틀 후(2020년 3월 24일) 약속이나 한 듯 동아일보 김순덕 대기자는 정암을 반개혁 인사로 폄하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35만 한양 조가(趙家))의 문중에 정중히 사과하고, 그런 불행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근신해야 한다. 만약 이 엄중한 사실을 묵살하고 계속 ‘사자 명예훼손’을 자행하면, 한양조씨대총회는 모든 합법 수단을 강구할 것임을 본인들에게 알린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중종 14년(1519년 12월) 기묘사화의 희생 제물로 역사에서 사라진 인물이었으나,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더불어 사림의 영수로 자리 잡았다. 그는 전라도 능주(지금의 화순)에 유배되어 중종이 내린 사약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그는 “愛君如愛父 憂國若憂家 白日任下土 昭昭照丹衷(임금을 아버지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집안처럼 걱정하였네 밝은 해가 위에서 굽어보노니 나의 충심을 환히 비춰주리라.)”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37세 나이로 요절을 했다.
그 후 정암은 조선의 동방 5(賢)으로 성균관 문묘와 전국 향교에 배향되어 유림들의 추앙을 받았다. 정암은 정치적 민감한 문제를 당면할 때 성리학의 이념을 우선시했고, 끝까지 도덕적 순수성을 간직했었다.
정암은 조선 개국공신 조온(趙溫)의 5대 손으로 아버지는 조원강(趙元綱)으로 사림의 선각자 김굉필(金宏弼)을 스승으로 모셨다. 정암의 아버지는 감찰(監察. 정6품), 즉 사헌부의 하부 기관으로 제도권 언론에 발을 디뎠다. 정암 또한 제도권 언론 3사(司) 사간원 정언(정6품)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중종 10년 8월 22일 알성시에서 장원급제로 수순에 따라 정언으로 발탁이 되었다. 그 40개월 후 중종 13년 11월 종2품의 대사헌으로 발탁이 되어, 1년 간 봉직했다. 그는 조선 제도권 언론이 수장이 된 것이다. 당시 사헌부는 논집시정(論執時政), 교정풍속(矯正風俗), 규찰탄핵(糾察彈劾) 등이 주요 업무였지만, 풍속을 바로잡는 주요 기관이다. 사헌부는 현대 언론기관, 검찰청 등 기능을 했다. 그렇다면 사헌부는 국가 업무를 집행하거나, 인사정책을 총괄하는 실무부서는 아니었다. 더욱이 현재 법무부 같은 검찰의 인사를 담당하는 곳은 전혀 아니다. 사헌부 관원이라야 6명, 각도의 감찰 3명씩(계 30명)있을 뿐이었다.
한편 연산군은 무오 갑자 사회를 일으키고, 중종이 등극한 나라는 거덜나있는 상태였다. 임진란이 일어날 53년 전 일이다. 세조, 성종이 탄탄하게 닦아놓은 조선의 이념적 기반은 연산군의 11년 8개월 동안 왕조는 연명이 어려울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시대의 절박함을 절감하고, 반정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중종은 사림(士林)을 등장시켜 조선의 유신을 단행코자 했다. 그 구원 투수로 제도권 언론의 수장으로 정암을 등장시킨 것이다.
그 자리에 누가 대사헌으로 임명되어도 시대의 희생물이 됨이 뻔한 일이었다. 중종은 개국 공신의 후손으로 학문적으로 원숙하고, 육체를 단련시키고, 말발이 좋은 젊은 정암을 등장시켰다. 그러나 앞일을 예측할 수 있었던 정암은 그 잔을 피하고 싶었다. 정암은 그날 5번 왕에게 대사헌 임명을 거두어 줄 것을 간청했다. 중종은 끝까지 정암의 청을 거절했다.
정두희 서강대 전 명예교수는 정암을 평하면서 “말을 바르고 하고, 행동이 경박한 사람은 아니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주시한 다음 담력 있게 밀어붙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라고 했다.
정암은 언로를 개방하여, 유림의 청음(淸音)이 묘당(廟堂)을 강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경세론(經世論)를 성리학의 원론에 가깝게 풀이했다. 여기에 경(經)은 요순시대의 정치를 원형으로 했고, 공자와 맹자 정신에 충실토록 한 것이다. 정암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정풍운동을 제시했다. 그는 도학정치(道學政治)로 윤리, 도덕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다. 이는 이성과 합리성을 찾는 기본이다. 성서의 에덴동산은 선악의 구분으로 낙원과 실낙원을 갈랐다. 그게 다름 아닌 우리의 헌법 정신인 자연법사상이다.
정암은 격물치지(格物致知)로 각자(各者)의 소양 그리고 모든 물건이 그 근본이 있으니, 그 근본대로 궁구하고, 그 이치를 삶에 적용시키도록 했다. 현대의 과학 정신이 격물치지에서 출현된다. 제도권 언론의 수장으로써 정암은 조정과 백성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삶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그의 도학정치는 공자의 주경야독(晝耕夜讀) 정신이다. 그러나 당시 역사가와 후세인들은 그를 폄하하기 시작했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역사만 기록하게 마련이다. 승자의 역사를 정암의 모든 것으로 언급한다. 짦은 식견으로 조국(曺國) 전 법무장관과 비교하고, 4·15 총선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정암을 등장시켰다. 또한 김순덕 대기자는 성리학 이념의 잣대를 무시한 채, 사회정책론으로만 정암을 폄하했다. 우려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가 왕이 된다)이라는 가짜 뉴스의 정신을 다시 현실 정치에 끌고 와 정암을 부관참시할 태세이다.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조가 가문은 분개하고, 앞으로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을 결의한다.
2020년 4월 7일
정암 조광조 폄하 사건 대책위원회 일동.
한양조씨대종회, 종로구 삼봉로 95, 02) 3572-4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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