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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한제국 순종황제는 한일합방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http://cafe.daum.net/coreahistech/M4l4/58
일제는 한일합방이 대한제국 순종황제와 당시 일왕에 의해 '정상적 조약'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순종황제는 한일합방 조약에 서명한 적이 없다는 것이 확인 됐다.
한일합방 조약문서는 승인과 공표의 2단계(2가지)가 있다.
1. 한일합방 조약을 승인하는 순종황제의 서명이 담긴 대한제국 내부문서.
2. 한일합방 조약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조서.
이 중 1번 대한제국 내부문서의 순종의 서명은 어느 일본인 통감부 직원의 날조였고,
2번 조칙(조서)에는 아예 순종황제의 서명도 없고 국새도 찍히지 않은 것이 밝혀졌다.
즉 순종황제는 '한일합방 조약문서 2가지'에 모두 서명하지 않은 것이고
이로써 '한일합방'은 국제법상으로도 무효인 것이다.
당시 상황은 순종황제가 서명하고 국새를 찍었더라도 이는 강압에 의한 것이므로
법적으로 무효가 되는 것이다.
한·일병합이 국제법상 무효임을 입증하는 조약문건이 처음으로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로부터 입수했다.
'일본 측 한·일병합 조서' 사진자료에 따르면 1910년 8월29일 일왕(천황)이
한일병합을 공포한 조서에 국새(天皇御璽)를 찍고 '睦仁'이라는 이름을
서명한 사실이 확인됐다.
반면 대한제국 순종황제가 같은 날 반포한 조서(칙유) 원본에는
국새가 찍히지 않았고 '李拓'이라는 이름도 서명되지 않았다.
그 대신 행정적 결재에만 사용하는 '勅命之寶'라는 어새가 날인돼있다.
한일합방 조서에 순종황제는 서명하지 않았고 국새도 찍지 않았다.
행정적 결재에만 사용하는 어새가 찍혔는데 이는 당시 대한제국 관리(신하) 중
누군가나 일제 통감부의 누군가가 그 도장을 찍었다고 볼 수 있겠다.
한일 양국의 지식인들은 앞서 지난 5월 각국의 수도에서
‘1910년 체결된 한일병합 조약은 무효’란 내용의 성명을 동시에 발표한 바 있다.
성명은
"한국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다."라고
선언했으며, "조약의 전문(前文)도 거짓이고 본문도 거짓이다.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이 보이고 있다.
한국병합에 이른 과정이 불의부당 하듯이 한일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하다."고 밝혔다.
1번문서(한일합방 조약을 승인하는 순종황제의 서명이 담긴 대한제국 내부문서)의
순종의 서명은 당시 일제 통감부 어느 직원이 가짜로 날조해서 쓴 것 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2번문서(한일합방 조약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조서)에
대한제국 국새와 순종황제의 서명이 없다는 것은 순종황제가
이를 끝까지 거부했다 는 뜻이다.
-경술국치 100년,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인터뷰
“15년 전 순종황제 날인 날조확인 순간 日人들도 탄식”
일이 벌어진 것은 1995년 어느 여름날, 일본 주오대(中央大) 강당에서 열린
을사늑약 90주년 학술대회장이었다.
연단에 자리한 수십 명의 한·일 양국 학자들과 강당을 가득 메운 수백 명의
일본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일본 통감부 직원 마에마 교사쿠가 남긴 글에서 따와 합자한
‘척(坧)’자가 제시됐다. 조금 뒤 순종 황제가 일본과의 외교문서에 서명한
‘척(坧)’자를 겹쳐 보였다. 딱 맞아떨어졌다.
대한제국 문서에 있는 순종 황제의 날인 서명이 실은 일본인 통감부 직원의
날조였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강당은 ‘아~’ 하는 낮고도 무거운 탄식으로 가득 찼다.
학술대회 뒷자리를 떠나는 학자와 청중은 물론 신문·방송 기자들까지
훌륭한 연구 성과라며 악수를 청해 왔다. 건네받은 명함만 수백 장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어느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이 얘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경술국치 100년(29일)을 맞아 27일 서울 의주로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당시 기억을 이렇게 더듬었다.
이때의 주장은 차츰차츰 불어나 15년 만인 2010년 한·일병합 조약은 원천무효라는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을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마에마 교사쿠의 필체라고 확신했습니까?
-말하자면 ‘표적 수사’였어요. 근거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마에마가 쓰시마 출신으로 한국어에 능통했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그가 일본의 한국사 연구 1세대라는 점이었습니다.
마침 제가 학부 시절에 마에마가 남긴 서얼 제도나 훈민정음 연구논문을 많이 봤어요.
때문에 순종 황제의 위조된 친필 서명을 봤을 때 마에마 글씨 같다는 감이
확 오더라고요. 그래서 넌지시 마에마 유품을 볼 수 있는 곳이 어디냐고
일본인들에게 수소문해 보니 규슈대학에 있다는 거예요.
바로 날아가서 척(坧)자를 합자해 만들어본 뒤 비교했지요.
그 뒤 수사결과를 발표한 겁니다.
→일본 반응에 변화가 있었나요.
-주오대 때 반응이 워낙 열광적이었는데 다음날 언론보도가 하나도 없어서
이게 뭔가 했습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우익 테러 같은 걸 두려워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요즘에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난해 10월 시민단체 초청으로 교토에 가서 설명했더니 모두들
“어떻게 이렇게 억지 조약을 맺을 수 있나? 부끄럽다.”고 하더군요.
→그런 변화의 기미가 언제 감지됐나요.
-2000년대 들어 8년 동안 을사늑약 원천무효 주장을 펼쳤습니다.
관련해서 국제학술대회를 열고 그 결과를 2008년 ‘한국병합과 현대’라는 책으로
일본에 내놨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나왔고요. 일본어판이 나오면서부터
일본 학자들 사이에 “이제 우리도 양심적으로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들이 나왔다고들 합니다.
→변화 원인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탈아론(脫亞論)에 대한 반성이지요.
일본은 뭔가 특별한 존재니까 아시아를 벗어났고, 미개한 한국과 중국은 우리가
이끌어 줘야 한다는 게 탈아론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과 중국이 눈부시게 성장하면서 일본만 특별히 우월하다는 얘기를
하기 어렵게 된 것이지요.
결국 예전 탈아론은 침략주의에 불과하지 않았느냐는 반성이 나오게 된 겁니다.
이 같은 반성은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특히 광범위하게 공감대를 얻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논쟁을 하다 보면 지식인들이 더 답답해서 뭔가 큰 정치적 계기가 없으면
일본의 변화가 힘든 게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지금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더 앞장서 주고 있습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code=seoul&id=20100828006003&keyword=순종황제%20날인%20
5. 19세기 말의 여행길(아시아=조선카페 최두환 박사 글 정리)
(가) 민영환의 1896년 세계 일주
대륙 횡단 철도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철도로 시베리아의 대륙횡단철도와
미국 대륙횡단철도가 있다. 미국횡단철도를 보자.
(ㄱ) 1893년 제임스 힐(James J. Hill)은 대 북부 철도(Great Northern Railroad)를
자비로 놓았다. 그 철도는 세인트폴에서 시애틀까지였다.
1909년에 완성된 시카고와 밀워키, 세인트폴 철도(밀워키 철도)는
개인 자금으로 지어진 태평양 철도를 시애틀까지 연장하였다.
이 철도는 완성하자마자 시카고, 밀워키, 세인트폴과 태평양 철도로
이름이 바뀌었다.[http://enc.daum.net]
1893년-1909년 사이에 놓인 이 대륙횡단철도는 세인트폴에서 시애틀까지,
시카고와 밀워키, 세인트폴까지의 연결일 뿐이다.
이곳은 미네소타주 세인트폴까지 1893년에 완공하였다고 할지라도,
동쪽으로 이동은 철도가 연결된 1909년이며, 북위 42도 선상에서 미시간 호 남쪽
시카고에서 서북쪽 끝 워싱턴 주 시애틀까지인데,
이 북쪽은 캐나다의 밴쿠버가 있다.
(ㄴ) 민영환의 기행문은 1896년 4월 1일부터 그해 10월 21까지,
6개월 21일 총 204일간 아시아와 태평양을 넘고 북아메리카, 대서양을 건너
영국, 도버해협을 거친 유럽횡단, 러시아 전 지역 일주 등
총 11개국을 망라함으로서 기간과 지역을 방대하게 아울렀다.
[민영환 지음『海天秋帆 1896년 민영환의 세계일주』(책과함께, 2007), p.10]
위에서 보듯이 민영환의 세계 일주는 말 그대로 방대한 규모이다.
목차의 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러시아를 향해: 3월 19일-4월 28일
북미대륙을 지나: 4월 29일-5월 14일
유럽에 도착하다: 5월 15일-5월 18일
이것을 보면, 민영환은 분명 그 일정에 따라 이동했다고 본다.
그런데 의문이 나는 것이 있다.
4월 28일 오후 4시에 빅토리아(Victoria)의 조그만 포구에 타는 사람이 있어
잠시 배를 멈추었다. …오후 10시에 다시 배가 떠났다.
4월 29일 오후5시에 밴쿠버(Vancouver) 항구에 배를 대었다.
4월 30일 화륜차(기차)를 타고 동쪽의 뉴욕으로 간다고 한다.
오후 2시에 정거장에 도착하여 기차가 출발하였다.
5월 3일 지나는 길에 위니펙(Winnipeg) 땅에 기차를 세웠다가 오후 3시에
또 산길로 들어갔다.
5월 4일 슈피리어(Superior)라는 호수가 있는데 온종일 끼고 달렸다.
5월 5일 오후 8시에 몬트리올에 도착했다.
5월 6일 오전 9시에 기차를 바꿔 타고 뉴욕으로 향했다.
오후 9시에 뉴욕에 도착했다.
미국의 서쪽 끝 밴쿠버에서 동쪽 끝 뉴욕까지 7일 걸렸다.
그 기차의 이동은 밴쿠버에서 위니펙을 거쳐 뉴욕까지다.
위니펙까지는 캐나다 땅이다.
그런데 이 철도는 위의 (가)에 들어 있지 않다. 그러면 미국의 이
위니펙을 지나는 대륙횡단철도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ㄷ) 1881년 최초의 캐나다 대륙횡단 철도인 캐나디안퍼시픽
철도가 들어섬으로써 위니펙은 프레리 주들(매니토바·서스캐처원·앨버타 주)을
상대로 한 주요곡물시장이자 보관소 및 유통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http://enc.daum.net]
-캐나다의 첫 대륙 횡단 철도의 완공은 1881년에서 1885년 사이에
캐나다 태평양 철도(CPR)이 완성되었고, 1871년 브리티시컬럼비아가
캐나다 연방에 참가한 상태였기에, 그 노선은 온타리오 주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연결되었다. 이 철도의 서쪽 종착역은 1886년에 합병한
벵쿠버 시이다. 캐나다 태평양 철도는 1889년에 북아메리카에 있는
첫 대륙 횡단 철도 회사가 되었고, 메인 주의 국제 철도 회의가 열린 뒤
캐나다 태평양 철도는 대서양 연안까지 이어졌다.[http://enc.daum.net]
위의 내용을 보면 캐나다에서는 1886년-1889년에 캐나다
횡단철도가 완성된 셈이다. 그렇다면 민영환의 철도 이동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국경의 문제가 있음에도 1896년에는 캐나다와 미국 사이에
함께 타고 이동될 수 있는 체제가 협정되었다면 말이다.
-The Grand Trunk Pacific Railway (GTPR) was a historical Canadian railway. A wholly owned subsidiary of the Grand Trunk Railway (GTR), the GTPR was constructed by GTR using loans provided by the Government of Canada. The company was formed in 1903 with a mandate to build west from Winnipeg, Manitoba to the Pacific coast at Prince Rupert, British Columbia. … Turning of the first sod for the construction of the GTPR, took place at an official ceremony, September 11, 1905 at Fort William, Ontario, by Prime Minister Wilfrid Laurier. From there a 190 mile section of track was built by the Grand Trunk Pacific Construction Company, connecting with the NTR, near Sioux Lookout.
[http://enc.daum.net]
이 말은 태평양 대간철도(Grand Trunk Pacific)가 위니펙에서 1903년에
만들어졌으니, 철도는 이보다 늦은 시기인데, 1905년 9월이다.
그렇다면 민영환이 이동한 철도는 밴쿠버에서 위니펙을 거치니
캐나다 태평양 대간철도이며, 이것은 1905년에야 완성되는데,
민영환은 1896년 5월에 어떻게 이동할 수 있었을까?
조선에서 러시아 황제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은 말이 유럽이지 아시아의
서쪽일 다름인데 태평양을 건너, 미 대륙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가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하다.
의심의 여지가 있으니 다음의 글을 보자.
(ㄹ) 5월 5일, 서양 사람의 말을 들으니 페르시아 국왕이 얼마 전 자객에게
시해 당했다 한다. 이 때문에 나라 안에 당(黨)이 나뉘어 영국과 러시아에 붙어
서로 사이가 나빠져 도무지 개명(開明)하고 새로워질 방책이 없이
결국에는 이러한 변고가 일어난 것이다. 큰아들이 병이 있어 둘째아들을
당연히 임금으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나라는 제(齊)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 끼어 능히 스스로 닦지 못하고
내란이 진정되지 않으니 형세가 장차 호랑이가 노리는 속으로 딸려가
먹이가 될 것이니 참으로 통탄스럽고 슬프다.[위의 책, p. 46]
민영환이 기차를 타고 수피리어호를 지나간 날에 들은 소식이다.
페르시아의 국왕이 시해당한 사건을 두고 거기에
‘제(齊)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 끼어’있다는 말이 참으로 이상하다.
그렇다면 페르시아가 조선과 어떤 관계이기에 그토록 비통한 감정을 드러냈을까?
‘민영환의 세계일주’라는 책의 진실은 무엇일까?
민영환은 1896년 4월 1일부터 그해 10월까지 제물포, 상해, 나가사키,
요코하마ㅡ 벤쿠버, 몬트리올, 뉴욕을 거쳐 런던, 베를린, 바르샤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이르쿠츠크,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태평양을 건너고, 대서양을 건너 세계 일주를 한 것이다.
(나) 민영익이 미국 뉴욕을 다녀온 길
(ㄱ) 1884년 5월 9일에 민영익은 고종에게 미국 워싱턴[華城頓]과 뉴욕[紐約]을
다녀온 것을 보고하였다.
“작년(1883) 11월 3일에 미국 뉴욕에서 배로 출발하여, 19일에 포르투갈 소속
섬에 정박하였고, 12월 1일에 영국 소속 섬에 정박하였으며,
11일에 프랑스계[佛界] 마르세유[馬塞]에 정박하여 4일을 머물렀고,
15일에 프랑스 서울 빠리[巴黎]에 도착하여 당일에 출발하였으며,
영국 서울 런던[倫敦]에 도착하여 8일을 머물렀고,
다시 빠리에 도착하여 7일을 머물렀으며,
마르세유에 도착하여 다시 배에 올랐습니다.
갑신년(1884) 1월 9일에 이탈리아[伊太利]에 정박하였고,
16일에 로마[羅馬]에 도착하여 2일을 머물렀으며,
29일에 이집트[埃及]에 정박하였고, 2월 3일에 이집트의 카이로로 들어가
4일을 머물렀으며, 13일에 영국 소속 아덴[亞丁]에 정박하여 3일을 머물렀고,
24일에 인도(印渡)에 정박하여 13일을 머물렀으며,
3월 11일에 실론[錫蘭]에 정박하여 5일을 머물렀고,
23일에 싱가포르[新加坡]에 정박하여 5일을 머물렀으며,
4월 6일에 영국 소속 홍콩[香港]에 정박하여 9일을 머물렀고,
다시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정박하였다가 지금 막 왔습니다.”
여기서 민영익은 배를 타고서는 뉴욕에서 포르투갈과 영국 관할의 섬에
들렀다가 지중해로 들어가 프랑스 마르세유에 정박했다.
이 마르세유에서 육로로, 아마 가마나 말을 타고, 프랑스의 수도 파리로 갔다.
그날에 영국 수도 런던에 도착했다가 다시 그날로 파리로 되돌아왔다.
여기서 영국이 섬이라면 배를 타고 갔다고 표현해야 옳다.
그냥 도착했다는 것은 육로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영국은 1883~4년 당시에 섬에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민영익이 프랑스 수도 파리에 갔다는 말은 이해가 되지만,
영국의 수도 런던에는 왜 갔을까? 무슨 일이 있어 갈 필요가 있었을까?
그 뒤로 이탈리아와 이집트 아라비아반도 남단 아덴과 인도와 실론과
싱가포르와 홍콩과 나가사키를 거쳐 조선의 한성에 도착했다고 했다.
(ㄴ) 그렇다면 1884년경에는 조선이 한반도였다는 말일까?
주한미국공사관의 서기관 대리공사 전권공사를 지낸 알렌(Horace N. Allen)의
이동경로를 보자.
1883년 8월 20일(월) 오하이오주 델라웨어를 출발, 중국으로 향발하다.
9월 4일(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 요코하마[橫濱]으로 향발하다.
10월 11일(목) 상해(上海)에 도착하다.
10월 15일(월) 증기선으로 남경으로 향발하다. 낮에 남경에 도착하다.
1884년 1월 7일(월) 상해로 향발하다
9월 14일(일) 나는 단신으로 상해를 떠나 남경호로 조선을 향해 출항했다.
나가사키와 부산 중간에서 태풍을 만났다.
9월 20일(토) 제물포에 도착했다.
9월22일(월) 오전 8시에 출발하여 오후 4시15분에 한강 나루터에 도착,
오후 5시에 서울 남대문에 도착했다.
(다) 1887년 1월 21일(수) 우리는 오후 9시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입항했고,
그 다음날 목요일(22일) 오전 1시30분에 샌프란시스코[桑港]로 출항했다.
1월 28일(수) 밤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할 예정이다.
1888년 1월 13일(금) 워싱턴에서 우리는 1월 28일(수)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위의 (나)(다)은 <알렌의 일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들은 태평양을 지나 다녔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조선으로 오가는 길은 대서양과 태평양의 반대방향의
두 길[해로]이 있었다. 일단 민영익은 나가사키를 거쳐 왔고,
알렌은 요코하마를 거쳐 왔다. 그러면 조선의 중심이 어디였을까?
(라) 이완용이 미국 뉴욕을 다녀온 길
이완용이 1888년 5월 8일(기미)에 다녀온 미국 길은 얼마나 걸렸을까?
"요코하마[橫濱]을 출발하여 11일 만에 하와이[布哇國]에 도착하였습니다."
“신이 작년 10월 4일에 부산항(釜山港)에서 배를 타고 11월 14일에
샌프란시스코[桑港;San Francisco]에 도착하기까지 총 40일이 걸렸으며
돌아올 때에는 금년 3월 22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로 출발하여
4월 27일에 부산항에 도착하기까지 총 36일이 걸렸습니다.”
“요코하마[횡빈]부터 샌프란시스코까지의 수로(水路)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뱃사람에게 들으니 수로가 셋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북위(北緯) 50도(度)를 통해 가는 길인데 마일[英里]로 계산해 볼 때
4600마일이고, 하나는 북위 30도를 통해 가는 길인데
이 길이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직로(直路)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중간에 수령(水嶺)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마일로 계산해 볼 때 4700마일입니다. 길은 비록 직로이지만 조금 먼 것은
수령이 높고 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북위 20도를 통해 가는 길인데 마일로 계산해 볼 때 5595마일입니다.
갈 때에 이 길을 통해 갔기에 단향산은 비록 보지 못하였지만
지나는 길에 하와이[布哇國;Hawaii]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이완용이 뱃길을 이용하여 태평양을 건넜다는 설명이다.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일정은 11일 거리라고 했는데,
알렌은 19일 거리라고 했다. 8일간의 차이가 난다.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통로가 세 곳이라고 했다.
하나는 북위 50도 선상으로, 또 하나는 북위 30도 선상으로,
다른 하나는 북위 20도 선상이다.
일본열도의 요코하마는 동경 남쪽에 있어 북위 36도에 가깝다.
이 시발점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여 가는데 북위 50도니,
북위 20도 선상으로 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 샌프란시스코는 북위 40도의 가까운 남쪽에 있다.
게다가 그 이동 거리가 4600마일과 4700마일과 5595마일의 차이가 있다.
분명 북위 30도 선상으로 가는 뱃길이 직항로에 더 가까운데
그 거리는 북위 50도 선상으로 가는 뱃길보다 100마일이나 더 멀다는 것은
둘러 가도 가깝다는 말이 참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많은 의문을 뒤로 하고, 요코하마와 샌프란시스코까지는
거리가 동경 140도와 서경 120도 사이이다.
이것은 경도의 거리가 100도로서 1도를 그냥 60마일로 간주하면 6000마일이다.
그런데 경도 선상의 1도는 60마일이 아니고, 북위 35도 선상에서는
48.6마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경도의 100도는 거리가
4860마일이 된다. 북위 50도 선상도, 북위 30도 선상도 그 거리가
그냥 직선거리 4860마일보다도 160마일에서 260마일이나 짧다는 것은
요코하마와 샌프란시스코의 지명이 현재의 지명이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한다.
배의 이동속도가 10노트라고 하면,
이 거리는 486시간으로 20.25일이 꼬박 걸린다. 그런데 알렌이 말한 대로 보면
19일이 걸렸으니, 배의 속도로는 11노트가 조금 못되어 매우 비슷하다.
그런데 조선의 부산에서 미국의 샌프란시스코까지 36일 내지 40일이 걸렸으므로,
결국 부산에서 요코하마까지 16일 내지 20일이 소요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부산에서 요코하마까지의 거리와 요코하마와 샌프란시스코까지의 거리가
거의 동일하다는 말이 된다. 이 말은 부산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첫댓글 병탄도 위조였다니! 매트릭스세상. 올바른역사가 밝혀지면 세상은 진동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