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따각, 따각......!
회강을 등진 채 한 대의 마차가 어둠 속을 지나고 있었다.
어느 때고 유유자적 속도를 내지 않고 움직이는 그 마차에는 북리뇌우가 타고 있었다.
마부석에 앉아 말을 몰고 있는 인물은 소악이다. 그는 아까부터 못마땅한 듯 투덜거리
고 있는 중이었다.
"제길! 하마터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 뻔했군. 아이구, 아무래도 왼쪽 발목이 부
러진 것 같은데?"
그는 몸을 구부려 한 손으로 발목을 쓰다듬으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실상 그의 왼쪽
발목은 삐끗했을 뿐 부러지지 않았다. 그의 불평이란 엄살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그의 얼굴에도 갈대에 긁힌 상처가 있었지만 가벼운 찰과상일 뿐이었다. 요컨대 그는
매우 갑갑했던 것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언제나 멋진 활약상은 북리뇌우의 몫이고 그는 항상 곁에서 구경
이나 하는 것이 고작이지 않은가?
물론 그에게도 나름대로 주요 사업(?)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무림을 종횡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무공을 배우고 싶은 욕심이 무럭무럭 일었
고, 그 때문에 간간이 북리뇌우를 졸랐으나 도통 먹혀들지 않아 아직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차를 멈추어라."
북리뇌우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와 소악의 불평불만을 일소시켰다. 늘 그랬듯 그의 명
령 한마디면 사태는 급전된다.
소악은 거의 기계적으로 말고삐를 잡아채 마차를 세웠다.
덜컹!
북리뇌우가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는 마차의 전방에서 기이한 모양으로 꺾여진 나뭇가
지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러더니 소악을 향해 그것을 내밀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넌 이 곳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어딜 가시려고?"
"손님이 근처에 오셨다. 맞이하러 가야지."
소악은 그런 일에 익숙해져 있으면서도 이번만큼은 굳이 토를 달아본다.
"저도 따라가면 안될까요?"
"쯧, 그래 봐야 새우처럼 등만 터질 텐데도?"
"쳇! 심심하단 말이에요."
"그럼 주머니에 한 번 손을 넣어 보아라."
북리뇌우의 말에 소악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거기에 네 장난감이 들어 있지 않느냐? 은자 두 닢. 그거면 시간 때우기론 그만이라
면서?"
"알았어요, 씨!"
소악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머니 속의 은자를 꺼내 특유의 손장
난을 하기 시작했다.
"다녀오세요. 소인은 명대로 이 짓이나 하고 있습지요."
"잘 생각했다. 후후후......."
슉!
북리뇌우의 신형은 위로 떠오르기가 무섭게 곧장 길 옆의 수림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
졌다.
수림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공지(空地)였다.
그 곳에 이르기 위해 숲을 지나는 동안 낙엽 썩는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밤 부엉이
의 기괴한 울음소리도 함께 전해졌다.
어둠은 어느 곳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점령하고 있었다. 덕분에 사방에는 스산하고 살
벌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공지의 중앙에 한 대의 마차가 서 있었다. 지붕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전체가 온통
검은빛 일색인.
게다가 어둠을 흡수한 듯 먹물 같은 고요를 뿌리고 있는 마차는 사면이 모조리 검은빛
휘장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때문에 은밀하고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마저 자아내는가 하면 그 주위로도 기이한 압박
감을 형성시켜 놓고 있었다.
북리뇌우는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때마침 마차의 휘장이 열리며 한 인물이 걸어 나왔다.
일신에 묵의(墨衣)를 걸친 그는 대략 삼십대로 보였다. 아무런 표정도 깃들여 있지 않
은 절대무심(絶代無心)의 눈빛과 목각처럼 딱딱한 얼굴, 얄팍한 입술 등이 특징인 자
였다.
그의 분위기는 짙은 어둠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정제된 침묵도 칠
흑같이 검은 마차가 보여 주는 정적과 기막힌 조화를 이루었다.
북리뇌우가 아는 그의 이름은 제룡(帝龍)이었다.
오래 전에 깊은 인연을 맺었으되, 그는 과거 그 시점에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모습
으로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항상 똑같은 그의 분위기를 북리뇌우는 무척이나 좋아했
다.
여간해서는 열리지 않는 제룡의 입술이 떨어졌다.
"승리를 축하한다."
북리뇌우는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쯧! 인사법을 좀 바꾸시면 안되겠소? 벌써 백팔십이 번이나 같은 소리를 듣자니 지겨
워 죽겠소."
제룡은 웃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앞으로도 그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끙! 농담도 못하겠군."
북리뇌우는 신음 뒤로 물었다.
"다음 상대는?"
"다라도황(陀羅刀皇) 선우강(鮮宇剛)."
제룡은 짤막하게 대꾸한 후 덧붙여 말해 주었다.
"그는 연경의 북천만도장(北天萬刀莊)에 있다."
북천만도장이라면 신주구대명가(神州九大名家)의 하나다.
장주는 다라도황 선우강이었다. 그는 일명 도(刀)의 황제(皇帝)로도 불리는 쟁쟁한 고
수다.
그가 관장하는 북천만도장은 하북 일대를 장악하고 있으며 그 위세가 갈수록 상승하고
있었다.
북리뇌우는 비교적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양보다 두 배는 어려운 상대구려."
"그 건이 끝나면 정말로 중대한 일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 일을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했다."
제룡의 침중한 기색에도 그는 장난스럽게 싱긋 웃었다.
"공연히 겁주지 마시오. 어깨에 힘을 주고 엄숙하게 나오시니 무섭지 않소?"
"녀석......!"
제룡의 목각 같은 얼굴에 미미한 웃음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것은 그에게서는 실로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대사부께서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시오?"
"네가 염려하지 않아도 잘 지내신다. 가끔은 네 놈 걱정도 하시니 가능하면 몸조심하
는 것도 잊지 말고."
"흠! 어투가 왠지 꼬이셨구려?"
북리뇌우는 제룡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건 결례요만, 혹시 소사부(少師父)께서는 대사부와 나 사이를 질투
하시는 것 아니오?"
그의 익살에는 제룡도 기어이 실소를 발하고 만다.
"훗, 좋을 대로 생각해라."
"크크, 시인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구려."
대화가 길어지자 제룡은 정색을 했다.
"다른 할 말은 없느냐?"
"벌써 갈 채비를 하시는 게요? 섭섭하게스리."
북리뇌우는 너스레 뒤에 지나치는 말처럼 물었다.
"내가 비무할 때면 언제고 지켜 보는 자들이 있었소. 그 수상쩍은 작자들은 대사부께
서 보내신 위인들이오? 나는 그 점이 무척이나 궁금했었소."
"언제부터 그 사실을 알았지?"
"처음부터외다. 첫 번째부터 백팔십이 번째까지 그들은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나를 감
시했었소."
"감시라......."
제룡은 나직이 읊조리더니 감정이 조금도 깃들여 있지 않은 듯 건조한 음성으로 대답
했다.
"그건 모종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 그 비밀이 밝혀져야만 대사부
가 세우신 최후의 계획이 실행에 옮겨질 수가 있으니까."
"으음!"
"실은 십 년 전부터 착수했어야 할 대사가 어떤 일로 인해 아직도 실행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네 덕분에 약간의 단서가 드러나고 있기는 하지."
북리뇌우는 무엇을 느꼈는지 안면을 굳혔다.
"가만, 십 년 전이라면?"
제룡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 일은 대사부와 내가 바다에 표류하는 배 안에서 너를 구출했던 때부터 이
미 구도가 잡혀 있던 일이다."
"나는 어떤 역(役)이오?"
"물론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하지.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대사부께서는 너를
구출한 직후에 계획 자체를 수정하신 것이다. 결국 이 일의 성패는 너에게 달려 있다.
북리뇌우는 쓴 입맛을 다셨다.
"별로 반가운 소리가 아니구려. 아무래도 소사부는 나에게 부담을 안겨 주는 것이 취
미인 듯하오."
"어쩌면."
제룡은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확신이 담긴 어조로 부
언했다.
"내가 너에게 부담을 주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소사부는 아무에게나 그런 짓
을 하지는 않는다."
"무슨 뜻이오? 그 말은."
"그만큼 널 신뢰한다는 의미지."
"쯧! 눈물나게 고맙구려."
북리뇌우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말했다.
"내 소사부께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무엇이냐?"
그의 입가에는 그만의 치기어린 웃음이 매달렸다.
"제발 장가 좀 가시오. 그래야 나에 대한 그 무지막지한 관심도 줄어들 게 아니오?"
"안되었다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딱 잘라 말하는 제룡의 입가에도 희미하나마 미소가 그어졌다. 아울러 그 무심한 눈
속에는 뜨거운 감정이 일렁였다.
기실 제룡도 북리뇌우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이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성된 감정으로 변화를 모르는 제룡에게 있어 역시 불변에 해당되는 것이었
다.
하지만 제룡은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지는 않았다.
"이번 수궁보(水宮堡)의 일도 자신 있겠지?"
북리뇌우는 대답 대신 그에게 물었다.
"그들의 배후는?"
"천라대성부. 그것도 대어급이 나서서 조종한다는 정보가 최근에 입수되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네 비중도 그들에 못지않으니까. 바꾸어 말하면 그들도 필경 너에게서 무슨 냄새를
맡았으리라는 얘기다.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을 만족시켜 주는 것도 좋겠지."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소."
"어쨌든 신중을 기하도록 해라. 너와 우리의 관계는 아직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북리뇌우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소사부는 내 인생에 보탬이 안되오. 만나 봐야 늘 좋은 소리는 한마디도 안하고 부담
스런 말만 해 대시니......."
"운명이다."
"흐음?"
"나도 네 놈에게서는 얻어지는 게 없다. 항상 너무 많은 말을 하고 뒤에 가서 후회나
하고 있게 되지."
"후후, 알만 하오."
"가 보아라."
"알겠소. 그럼......."
북리뇌우는 빙글 몸을 돌려 세웠다. 그는 이 곳에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어
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숲 속은 다시 괴괴한 정적 속에 잠겨 들었다. 그 가운
데 제룡은 우뚝 선 채 북리뇌우가 사라진 방향을 오래도록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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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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