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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시 - 한韓의 역사, 태동에서 최근세까지
http://cafe.daum.net/coreahistech/M4l4/54
1. 자신을 찾아서 (p4)
1. 역사 들어가기(4)
2. 우리 역사가 소멸, 변조, 축소된 사건들(6)
3. 광개토태황의 비문(9)
4. 한국, 한국인(25)
2. 최근세의 상황 (p39)
1. 일본제국주의의 다른 점(39)
2. 2차 대전이 대륙의 조선을 무너뜨리다(42)
3. 한국사의 역사왜곡(47)
4. 대한제국 순종황제는 한일합방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53)
5. 19세기 말의 미국 여행길은(55)
6. 대륙조선의 지배층들이 한반도로 이주한 이유(60)
7. 손문은 대륙조선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60)
8. 이승만은 일본국적자(67)
9. 독립문의 진실(70)
10. 독립신문의 실체(76)
11. 마오쩌둥(모택동)은 누구인가?(84)
12. 독재자들은 권력을 잡기위해 대기근을 만들었다(87)
13. 한국의 ‘45 ~’48년의 기간(88)
14. 절과 궁궐의 건축양식에 대하여(89)
3. 근세와 중세의 기록 (p90)
1. 조선왕조실록의 진실을 찾아서(90)
2. 조선왕조실록의 내용들(104)
3. 조선왕조실록은 편년체, 친일파와 일제에 의해 조작됐다(114)
4. 임진왜란의 상황적 이해(127)
5. 임진왜란의 선봉엔 천주교가 있었다(129)
6. 왜(倭)는 누구인가?(136)
7. 하멜은 한반도에 오지 않았다(137)
8. 한반도 한국의 비밀(140)
9. 지나 바로알기(164)
10. 대륙조선의 대항해시대가 중단된 이유(167)
11. 실크로드는 조선으로 올라오는 조공 길(168)
12. 몽고족의 정체(173)
13. 여일인(予一人)과 여소자(予小子)(176)
4. 고대의 기록 (p181)
1. 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181)
2. 단군과 조선(196)
3. 개천과 단군(207)
4. 돌궐 트르쿠비문(碑文)의 단군(208)
5. 백제의 멸망(214)
6. 수메르(215)
7. 아눈나키(222)
5. 지리적 위치의 기록 (p227)
1. 임진왜란의 지리적 문헌(227)
2. 조선에는 가스전이 있었다(237)
3. 왜의 활동근거지(240)
4. 조선의 서해는 지중해(244)
5. 진실의 총령 찾아가기(249)
6. 만주의 위치는 어디?(270)
7. 정약용이 말한 조선 8도(271)
8. 조선지역 특산품들(272)
9. 탐라국은 제주도가 아닌 대만(275)
6. 천문 기록 (p281)
1. 천문으로 역사를 말하다(281)
2. 조선왕조실록의 비행체들(291)
7. 문자와 언어 (p297)
1. 세계 공용어로 가장 적합한 한글(297)
2. 한글과 영어의 유사성(298)
3. 한자와 영어의 유사성(304)
4. 아메리카 원주민의 언어(306)
5. 본래의 영어단어에 사족(蛇足)이 쓰이다(313)
6. 영어 윤활자음(r,ㅣ)은 본래 없었다(314)
8. 관련기록들 (p315)
1. 미국 세계사속의 한국(315)
2. 친일파 바로알기(319)
3. 빨치산과 남부군(320)
4. 고려장은 일본문화다(321)
5. 뿌리를 찾아서(책)(322)
6. 역사에 반역(책)(325)
<참고, 인용 서적>
규원사화 (북애자)
부도지 (박제상, 또는 그의 아들 박문량?)
샤먼제국 (박용숙)
신의 지문-사라진 문명을 찾아서 (그레이엄 핸콕)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제카리아 시친)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 되었다 (샤뮤얼 노아 크레이머)
역사에 반역 (박인수)
이야기 세계사-고대오리엔트에서 중세까지 (김경묵, 우종익)
유럽 이전의 아시아 (쵸두리)
참전계경
친일파는 살아있다 (정윤현)
태백일사 (이맥 엮음)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이덕일)
한국 속의 세계 (정수일)
한단고기 (계연수 엮음)
해동역사 (한치윤)
<참고, 인용 사이트>
구리 넷(Coo2.net)-우리역사의 진실
대륙조선사연구회 카페(이원재)
박석재 박사 블로그
아시아=조선 카페 (최두환, 천상희)
조선왕조실록
한국 고전 번역원
한브랜드(한스타일) 전략연구소 카페 (우리역사)
1. 자신을 찾아서
1. 역사 들어가기
천하만사 가운데 먼저 할 일은 나를 아는 것이다.
역사를 학습하는 목적은 자기를 인식하기 위함이다.
역사를 알려 하지 않는 자와는 말을 섞지 말라.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고
좋은 것은 취하여 발전시키고
아픈 과거는 그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여
내일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한국사 왜곡의 특이성은
영토를 빼앗기 위함보다 우리의 혼(魂)을 노렸다.
세계 속에서의 한민족의 위대성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침략은 영토를 빼앗아 경제적인 이익을 도모하지만
한국사만큼은 이것과 너무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에 반역歷史於反逆’ 저자 박인수는 그의 책에서,
“역사를 바꾸어 버린 20세기 세계경제를 지배했던
다국적 독점 자본주의의 폐해는 무산자 사회계급혁명을 만들었다.
러시아와 중국에서 일어난 수차례의 충격적인 사회혁명은
러시아 제국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고
대륙조선(대한제국)을 한반도로 밀어 넣었다.
산스크리트어는 범어와 다름이 아니므로
영국인들이 만든 산스크리트어 사전은 조선말 사전임을 밝혔다.
조선 팔도 사투리가 범어이며,
영국인이 조선의 각 지방 방언을 모아 편찬한 ‘산스크리트어 사전’이
바로 범어 사전으로 영국인은 조선 정복을 위해
조선말 사전인 ‘산스크리트어 영어사전’을 만든 것이고,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조선사와 조선말 사전을 만든 것이다.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산주의 혁명을 신봉했던 모택동은
1948년부터 지주계급을 본격적으로 탄압, 1950년 6.25 전쟁 때에는
조선인을 전선으로 보내 그들을 제거하였다.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이 실패하자 문화혁명이라는 기치를 내세워
국민들의 의식구조를 완전히 바꾸려고 광분하였다.
러일전쟁은 러시아가 아시아의 유일한 황제국인 대한제국을 대신하여
대의명분상 싸운 것이며 일본은 중국(조선)의 자원을 노리는
영국과 미국을 대신하여 러시아와 한판 승부를 벌여 서로 대리전쟁을 한 것으로,
일본의 승리로 인해 대한제국은 멸망한 것이다.
곧이어 미국 태프트장관과 상·하원 의원 일행 및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대한제국을 방문하여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의 한양이었다.
조선의 양반들이 살기위해 한반도로 대탈출하는 상황은
동양척식회사에서 발행한 ‘조선이주수인초’라는 한반도로의 이주를 독려한
안내책자의 증거가 있다.
또한 친일파 인명록으로 알고 있었던 ‘조선신사대동보’와 족보 책을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여 대륙의 양반들이 한반도로 이주해오는
결정적인 증거자료로 제시하였다.
아직도 조선사가 밝혀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서구열강들이 지난 100년간의 과오를 제대로 반성할 수 있는
배경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것이고,
일본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대륙 역사를 감추려는데 급급하고
대륙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반성하지 못하는데서 기인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조선의 지배층이었던 양반들이 조선말에 일시에
대거 한반도로 이주해온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대륙의 조선사가 우리의 진정한 역사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일본이 만든 조선사와 조선말 사전을 그대로 배우고 있고,
일제 강점기 때 편찬한 교육과정을 미군정이 그대로 답습하여
지금도 우리에게 가르쳐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 모든 교육과정을 과감히 바꾸어 진정한 역사를 정립하면
민족적 자긍심과 자신감은 바로 되살아날 것이다.”라고 했다.
토인비는
“어떤 민족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 '나라의 역사를 말살'시키는 것이 식민주의자들의 철학이다.”라고 말했다.
일제는 28년간(1915~1943) 한국역사를 철저히 파괴했다.
1919년 3월 2대 조선총독 사이토의 대 한국인 교육시책의 내용이다.
'한인은 조선의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조상을 멸시하게 하여 무능한 조상으로 만들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배워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하라.
그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인물, 문화를 소개하면
동화된 반 일본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망언을 했다.
프랑스의 신부들이 코리아에 와서 자국에 보낸 선교보고서를 책으로 정리(1741년)한
프랑스 신부 P. 뒤 알드가 쓴(조선통사-최두환 역주해) 글에는
코리아이면서 그 지명과 인명은 현재의 중국을 말하고 있다.
한국사의 역사왜곡은 크게 조선 초 명에 의한 변조와
조선말 일제에 의해 왜곡된 가공의 역사이다.
명과 일제가 다른 나라의 역사를 왜곡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면
그 모든 실마리가 풀어진다.
한(韓)민족의 유래는 시원이 하늘에서 시작된 사람들이다.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한민족으로 기록된 역사는 1만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감추어졌던 이러한 내용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근본을 회복하는 것이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사명이며 본분이리라.
우리가 배운 역사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우리조상들이 기록한 역사서를 해석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한자를 배우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는 조상들의 역사를 해석할 수가 없다.
단지 권력을 장악한자들과 그들과 한 패인
매국노 언론세력들에게 세뇌당하는 수밖에 없다.
일제 후 해방된 후에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일제가 조작한 날조된 역사를 가르치는 식민사관의 후예들에게 장악되어
있다는 것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자들은 절대로 우리들이 한자를 익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만약 한자를 익혀서 조상들의 숨겨진 역사서를 해석할 수 있다면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역사가 신라의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배웠다.
과연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삼국사기나
그 외 역사책의 원본 한문을 학교에서 가르쳐준 적이 있는가?
전부가 이러했고 저러했다는 식으로 한글로 써 있었을 뿐이다.
결국 우리는 조상들이 쓴 한문의 원본을 본적이 거의 없이 역사를 배워온 것이다.
이런 상태로는 역사교육이 제대로 될 수가 없다.
나라는 올바른 역사를 가지고 있어야 그 나라가 존립할 수 있다.
개인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 인간이랄 수 있다.
자신을 모르면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다. 작금 한국의 사회가
오명의 기록(자살, 이혼 등)을 가지고 있는 근본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금권최고지상주의가 왜 사람위에 서 있는가?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배우고 답습하여 주체성을 상실하면
그 나라나 개인이나 미래란 없다.
조선식민의 역사는 영토를 노린 침략이 아니다.
한민족의 역사를 탐낸 변종의 제국주의자들이
혼(정신)을 빼앗고 지배하기 위한 침략이었다.
감춰진 역사의 한 부분이나마 밝혀 적는다.
그 누구라도 이 글을 읽고
자신의 참모습 그대로
정체성을 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하다.
2. 우리역사가 소멸, 변조, 축소된 사건들
(가) 사건들
우리의 역사서와 유물, 사적이
외적의 방화와 침탈과 왜곡에 의하여 소멸, 축소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스스로의 역사 왜곡에 의한 역사의식의 상실로 한민족의 혈통,
문화와 고유의 사상, 철학, 신앙의 무관심 및 배척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역사와 정신을 상실한 우리는 급기야 주체성 없는 세계인으로 자처하며
스스로 한민족 해체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문제점의 모든 근원은 잘못된 역사 왜곡과 그것을 그대로 학습한 결과에 있다.
과거의 이러한 이유가 된 사건들이다.
1. 고구려 동천왕 18년(A.D. 244) 위장 모구검(관구검)의 환도성함락과
많은 전적이 약탈, 고구려 유기 100권이 소실되었다.
2.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에 의한 사비성의 함락으로 초토화 되었다.
3. 고구려 보장왕 27년(668) 당나라 장수 이적의 평양성 함락과 일체 전적이 수거 당했다.
4. 신라 경순왕 원년(927) 후백제주 견훤이 신라왕도에 들어가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세운 다음 신라의 전적을 그 국도 전주에 이관하였다가
44년(935) 고려국조 왕건에게 섬멸당할 때에 병화로 소진되었다.
5. 고려 인종 7년(1129) 금나라에 속하여 서표를 바친 후
금제의 압제 하에 수많은 고적들이 사라졌다.
6. 고려 고종 20년(1233) 몽고에 패한 고려조에
홀필열(1285년 지원 22년-원세조)의 위풍이 떨치자 지금까지 사용해왔던
황경 제궁 등의 이름이 없어지고 동해천자의 팔관악부가 금지되고
삼한고기 해동고기 삼국사 등이 사라졌다.
7. 1392년 한양조선이 성립되자 태종이 오부학당을 송나라 제도에 의거하여
설치하는 등 유교를 크게 장려할 때에
유학도가 이단시하는 일체의 문헌들을 소각했다.
8. 선조 25년(1592) 5월 임진왜란으로 도성이 함락되자
이 때 수많은 전적이 난민들의 방화로 인하여 소실되고
또한 왜장들이 약탈 수거하여 오늘날까지 일본이 보관하고 있다.
9. 이괄의 난(1624)과 병자호란(1636) 때에 무수히 소실되었다.
10.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한 군국일본이 군경을 동원하여
이 나라 전적을 불사르고 탈거, 삭탈 및 조작해 놓았다.
(이상은 문정창의 고조선사 연구문이다.)
11. 일제 강점기에는 이계복이 개작한 것을 아예 동경대학으로 가져갔다.
조작된 일본서기에 꿰어 맞추기에 유리하도록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중요부분마다 한자 한자 왜인답게 변조했다.
결국 본래의 내용은 엉뚱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왜곡, 식민통치의 구실을 마련하고
한일역사에 비추어 일본에 유리하도록 개작했다.
일제는 광개토태왕의 비문을 조작, 삼국사기까지 ‘역사 왜곡’을 자행했다.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역사왜곡에 참여한
이병도와 그 아류인 신석호, 이기백, 김철준 등이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의 주요 대학 역사학과 주임교수의 위치에 임명된 후,
그 아류 및 제자들이 대한민국 학술원, 국사편찬위원회 등을 설립함으로서
모든 대한민국의 역사를 크게 왜곡시키고,
고구려 역사재단을 점거함으로서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적극 협력하고 있는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 삼국유사의 누락된 240자에 대한 실증
-일본이 변조 전 삼국유사 고본을 발견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일제로부터 넘겨받은 영인본인데
이미 상당부분이 일제에 의해서 조작되었음이 증명되었다.
왜식 강단사학자들이 실증사학 표본의 유일한 정사(正史)로 여기어왔던
삼국사기, 삼국유사마저 변조라는 파란만장한 과거사를 지닌 것이다.
따라서 몇 차례 개작된 사실과 왜곡된 내용이라는 것 자체를 알 수 없었던
후손들은 원저자인 김부식과 일연이 모화사상가라며
부당하게 비난과 원망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90년 12월 16일 경북대학교 도서관학 교수 남권희씨가 삼국유사 고본을 발견하였다.
이 고본은 1394년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서 정도전의 지휘아래
진의귀, 김거두 등이 개작 편찬한 삼국유사 권2와
중종 때에 이계복이 재판한 권3
그리고 같은 시기의 것으로서
필사본 왕역(王歷) 권1·권2로서 현존하는 최고의 고본(古本)이다.
-변조과정을 보면
고리(高麗)황조를 무너뜨리고 왕조로 격하시킨 이성계장군은
고리권지국사(高麗權知國事)로 있을 당시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기로 하는 신하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고리까지 이어온 황실역사를 왕실역사로 격하시켜야 한다는 조건이 제기되었다.
조선 초 ‘신하나라’역사로 격하한 이성계는 사대주의 통치자를 자처하였으나
고명금인(誥命金印)을 받지 못하여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고려권지국사로 죽었다.
명나라의 사신이 감독하고 정도전이 총 지휘하는 가운데
진의귀, 김거두 등 사학자 8명이 참가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모화사상에 입각하여 신하나라가 황제나라의 역사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명나라의 신하나라가 되기로 한 이상,
신하나라로서 왕조역사로 상대(上代:고대조선에서 고려)의 모든 역사를
개작(1393~1394)한 다음 각각 3부씩 만들어 명나라에 1부를 개작증거로 진상하고
왕조조선이 2부를 보관하는 것으로 하였으며,
명나라 사신의 입회하에 김부식과 보각국사 일연스님이 지었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원본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계복이 개작한 것을 아예 동경대학으로 가져갔다.
조작된 일본서기에 꿰어 맞추기에 유리하도록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중요부분마다 한자 한자 왜인답게 변조했다.
결국 본래의 내용을 바꾸어 엉뚱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왜곡한 것이다.
일제는 식민통치의 구실을 마련하고
한일역사에 비추어 일본에 유리하도록 개작한 것이다.
일제는 광개토태왕의 비문을 조작 하였듯이
삼국사기까지 날조한 ‘역사의 왜곡’을 자행, 변조한 것을 조선으로 가져왔다.
-누락된 사실 확인의 의의에 있어
이번 발견된 고본(古本)은 사대주의 원칙을 기본으로 개작하였기 때문에
원작과는 달리 크게 비하(卑下)된 점은 있겠으나,
일제의 손을 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주목을 끌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일제가 변조 후 공수된 삼국유사에는 빠지고 없었던 가락국의 기록이
여기에는 있는 사실이다. 삼국유사에서 제외되어
그동안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던 제4의 제국(帝國)인
가야사(伽倻史)에 대해서도 상당부분에 대한 재조명을 할 수 있게 됐다.
국립중앙도서관에 귀중본으로 보관중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옥산서당의 것을 일제가 동경대학으로 가져갔었던 것이며,
일본 현지에서 변조하고 조작한 후에 등사(謄寫)본으로 우리나라에 보내왔었다는
것이 확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일제가 고의적으로
탈자, 오자, 이자(전혀 다른)로 조작하고 문질러서 보이지 않게 한 것 등
240여 자를 다시 복원함으로서
일제시대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역사해석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일제의 날조방법을 보면, 전쟁사의 경우 기본 줄거리는 그대로 놔두고
‘이겼다’를 ‘졌다’ 즉 ‘승전(勝戰)’에서 ‘패전(敗戰)’으로 그러니까
“승”자를 “패”자로 1자만 바꿔치기 하는 식으로
하나의 사건을 왜곡시켜버리기 때문에
문자의 수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일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엄청난 승전의 전과를 올릴 수 있게 된 작업을 했던 것이다.
3. 광개토태황 비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광개토태황비(碑)는 서기 414년 호태왕의 장례 때
태왕릉에서 동북쪽 200m되는 곳에 비석을 세워진 후
1,600여 년간 한민족의 역사적 진실을 품고 지금까지 남아있다.
비석은 한 덩어리의 각력응회암을 쪼아 만든 것으로 불규칙한 방주형이다.
비석 매 행마다 41자, 전부 1,775자이며
현재 1,590여 글자는 판별하여 해독이 가능하다.
비문의 내용은 고구려 건국, 호태왕 일생의 업적,
묘를 지키는 제도와 관련법령으로 나누어 있다.
호태왕비는 당시의 역사를 알아 볼 수 있는 훌륭한 서법 예술품으로서
‘한민족의 보물’이다.
우리나라는 성인이 개국하여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전승하였으나
고대사는 일제식민지 시대에 일본인들이 전국 각처에서 수거하여
무려 20만권 이상을 분서, 일본으로 반출을 했기 때문에
그나마도 일본이 지리적 역사핵심부분을 변조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권과
근세에 알려진 ‘환단고기’ 등에는 별로 없다.
그러므로 이 비문은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성인의 행적을 증빙함에
다른 사서와 더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일본인들은 광개토왕(廣開土王) 비문(碑文)도 왜곡하였다.
이 비(碑)의 발견은 1876년 청인에 의해서이다.
이 비(碑)을 현지 답사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만주인 영자평(英子平)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비가 오랫동안 풀숲에 묻혔다가 최근에 영희(榮禧)가 이를 발견하였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주몽)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중국인들이 모두 도부(刀斧)로 쪼아 내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도리어 생겨나서 진적(眞的)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된 사실이 첨가된 것 같다.”라고
일본인들이 비문(碑文)을 변조한 사실을 지적했다.
계연수(桂延壽)가 비문(碑文)의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을 보았을 때
새겨져 있던 글자들이 그 후 갑자기 결락되었다는 것은
왜가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정복당한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일본인 누군가가 고의로 비문(碑文)을 훼손한 것이다.
[광개토왕비의 왜 관련 부분을 훼손한 일본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일에 일본군 참모본부가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1884-1885년경에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의
酒내景信(어떤 책에는 酒勾景信 또는 酒勾景明으로 적혀 있다) 대위가
집안(輯安)에서 만들어 일본으로 가지고 온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
1889년 6월에 會餘錄 제5집에 게재되어 외부에 발표되었는데,
그 쌍구가묵본에는 왜(倭) 관련 부분이 집중적으로 결락되어 있었다.
사코오 대위가 쌍구가묵본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올 당시
사코오 대위의 신분은 은밀하게 활동해야 하는 밀정이었다.
또 사코오 대위가 만들어 가지고 온 쌍구가묵본을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학자들을 동원하여 해독하는데 약 5년 정도 걸렸는데,
사코오 대위가 아무리 유능하였다고 하더라도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학자들을 동원하여 해독하는데 약 5년 정도 걸린 일을
사코오 대위가 비문을 본 즉시 바로 해독하여
청국인 모르게 비문 중 일본에 불리한 문구를 훼손하고
쌍구가묵본을 만들어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사코오 대위는 비문의 왜 관련 부분을 훼손하지 않고
원 비문대로 쌍구가묵본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왔을 것이다.]
이는 사코오 대위가 쌍구가묵본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 온지 약 10년이 지난
1895년(會餘錄 제5집에 게재되어 발표 된지 6년 후)
계연수가 광개토왕비를 보았을 때 會餘錄 제5집에 게재되어 발표된
쌍구가묵본과는 달리 왜(倭) 관련 부분이
거의 손상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코오 대위는 원 비문 그대로 쌍구가묵본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왔고,
1889년 6월에 會餘錄 제5집에 게재되어 외부에 발표된 쌍구가묵본은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변조한 것이 확실하다.
또 1895년에 계연수가 광개토왕비를 보았을 때
비문의 왜 관련 부분이 거의 손상되지 않고 있었는데도,
그 이후에 변조된 쌍구가묵본대로 비문의 왜 관련 부분이 훼손 되었다는 것은,
1895년에 계연수가 광개토왕비를 본 이후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집안으로 사람을 보내어 쌍구가묵본대로
광개토왕비의 왜 관련 부분을 훼손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문의 왜 관련부분이 훼손된 시기는 1895년에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겨
집안에 있는 광개토왕비를 장악한 직후로 추정된다.
그 뒤 일본인들은 1899-1900년경에 비문의 전면에
석회를 발라서 글자를 만든 후 內藤 탁본 등을 만들었다.
북경의 금석학자 楊守敬이 1902년에 입수한 탁본에는 새카만 바탕에
자형이 뚜렷하고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는데,
이는 1902년 이전에 일본인들이 비의 전면에 석회를 칠하여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뒤 1907년 4월에 프랑스의 동양학자 사반누가 입수한 탁본에는
양수경 탁본에도 없던 글자가 나타나고, 다른 글자로 바뀐 것도 있었다.
이는 일본인들이 內藤 탁본을 만든 후
비에 다시 석회를 발라 일부 글자를 만들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때 ‘安羅人戍兵’ 뒤에 ‘滿’자 등을 만들어 넣었는데,
이는 전에 집안으로 파견된 참모본부 편찬과 장교들이
변조된 쌍구가 묵본대로 왜(倭) 관련 부분을 훼손하였다가
나중에 학자들의 연구로 ‘滿’자 등이 임나일본부 학설을 뒷받침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알고 ‘滿’자 등을 만들어 넣었기 때문이다.
1883-1884년경에 사코오 대위가 쌍구가묵본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지고 온 때로부터 10여년 내에
비문에 관한 글을 지은 일본인들은
모두 1889년 6월에 會餘錄 제5집에 게재된 쌍구가묵본을 인용하였고,
그들은 모두 사코오 대위의 신분을 극구 감추고 ‘某人’ ‘某 日本人’ 등으로 적었다.
사코오 대위의 신분이 노출된 시기는 그로부터 30여년 후
참모본부에서 퇴역한 장교가 술기운에 입을 경솔하게 놀렸을 때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사코오 대위의 신분을 수십 년 동안이나 극구 감춘 것은
사코오 대위가 만들어 일본으로 가지고 온 쌍구가묵본을
일본군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변조한 사실이 사꼬오 대위의 신분이 노출됨으로써
들통 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진희 씨는 수 종류의 비문(碑文)을 비교, 연구하여
일본인들이 비에 석회를 발라 비문(碑文)을 조작한 사실을 밝혀내었다.
비문(碑文)은 4면으로 나누어 새겨져 있는데,
서문(序文) 및 대비려(對碑麗) 관계 기사(記事)가 318자,
대백제(對百濟) 관계 366자,
대왜(對倭) 관계 382자,
대부여(對夫餘) 관계 95자,
능 수묘(守墓) 기사(記事)가 641자이다.
비문(碑文)에는 왜(倭) 관련 기사(記事)에 결락자가 집중되어 있고
왜 관련 기사(記事) 중에서도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에 결락자가 집중되어 있다.
(제2면9행)00000000來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戌兵拔新羅城0城倭滿倭潰城六(제2면10행)00000000000000000九盡臣0來安羅人戍兵滿0000000000000
(제3면1행)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潰
(제3면2행)0000安羅人戍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000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00新羅寐錦00僕勾
비문(碑文)에서 결락자가 집중되어 있는 부분은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보기(步騎) 5만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한 왜(倭)를 물리치고 왜(倭)를 추격하여
왜(倭)의 근거지인 임나가라(任那加羅: 대마도)를 점령하고
이어서 대화왜(大和倭)와 구주왜(九州倭)로부터 항복을 받은 부분이다.
광개토왕(廣開土王) 비문(碑文)은 1883-1884년경에 일본군 참모본부의 장교인
酒내景信(사코오 카케아키: 어떤 책에는 酒勾景信 또는 酒勾景明으로도 적혀 있으나,
참모본부의 인사대장에는 酒내景信으로 적혀 있다) 중위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왔고,
그 뒤 약 5년 동안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연구하였으며,
청일전쟁( 1894-1895년)을 전후하여 참모본부의 장교들이 수차에 걸쳐
현지에 가서 비문(碑文)을 조사하였고,
노일전쟁이 끝난 1905년에는 비(碑)의 일본 운반을 계획하였다.
그 후 1913년에 이 비(碑)를 답사한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은
그 결과를 ‘大日本時代史’ 부록에 실으면서
"제2면 말행(10행)은 문자를 넣을 만한 여지가 없고,
제3면 제1행은 탁본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비문(碑文)에는 제2면 10행에 문자가 새겨져 있고,
제3면 1행에도 결락되지 않은 글자가 일부 보인다.
그렇다면 금서룡은 왜 "문자를 넣을 만한 여지가 없었다.",
"탁(拓)하지 않았다."는 등 구구한 변명을 하며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을 탁본하지 않았을까?
또는 탁본하고서도 탁본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을까?
1895년 5월 계연수(桂延壽)가 광개토왕(廣開土王) 비문(碑文)을 답사(踏査)한 후
그 내용을 적어 둔 것이 있었는데,
그 후 1912년에 다시 답사하였을 때 비문(碑文)이 일부 훼손되어
전과 다른 것을 보고 전에 적어 두었던 내용을 참고하여
비문징실(碑文徵實)을 만든 것이 있다.
비문징실에 적혀 있는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 내용을 보고
위 2면 3면 결락자와 비교한다.
(제2면9행)官兵섭跡而越來攻來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拔新羅城0城倭滿倭潰城六
(제2면10행)被我攻탕滅無遺倭遂擧國降死者十之八九盡臣率來安羅人戌兵滿假00倭欲敢戰與훼己呑卓淳
(제3면1행)諸賊謀00官兵制先直取卓淳而佐軍由淡路島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斯諸賊悉自潰
(제3면2행)遂分爲郡安羅人戌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000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00新羅寐錦00僕勾
(제3면3행)0000朝貢
‘관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 하였다. 아라인 수병이 신라성을 발하였다.
0성에 왜가 가득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아라인 수병이 가00에 가득 차 있었다.
왜가 훼기탄, 탁순의 제적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00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이어 좌군은 담로도(瀨戶內海 동부에 있는 섬, 兵庫縣에 속함)를 경유하여
단마(兵庫縣의 북부)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大阪)를 경유하여 무장(那良의 春日野)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北九州)에 도착하니, 제적이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이를 군으로 삼았다.
아라인 수병, 예전에는 신라 매금(임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고주몽)고구려에 복속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천황기(欽明天皇紀) 2년조에는
훼己呑이 록己呑으로 적혀 있다.]
비문징실(碑文徵實)에 의하면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에 적혀 있는 문구는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대마도 왜, 구주 왜, 대화 왜를 정복한 내용이다.
이 비문징실(碑文徵實)을 만든 계연수(桂延壽)는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몸이 절단된 채 시신(屍身)이 압록강에 던져진 애국지사이다.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은 桂延壽가 항일투쟁을 하다가 죽은
애국지사임에 주목하여 애국심이 지나쳐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
비문징실(碑文徵實)을 위작(僞作)하였으며,
광개토왕(廣開土王)은 왜를 정복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비문징실(碑文徵實)의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광개토왕(廣開土王)이 A.D. 400년에 왜를 정복하였다는
비문징실(碑文徵實)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살펴본다.
앞에 나온 "관병이 급히 쫓아 임나가라(任那加羅)에 이르러..."
문구 중 임나가라(任那加羅)는 대마도(對馬島)라는 뜻이다.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은
임나가라(任那加羅)라는 문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가라(加羅)를 경상도 지역으로 이해하고 임나(任那)와 가라(加羅)가 붙어 있자
임나를 경상도 가야(加耶) 지역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나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임나(任那)는
대마도(對馬島)라고 적혀 있으므로,
임나가라(任那加羅)는 대마도(對馬島)이지 경상도 가야(加耶) 지역이 아니다.
고대에는 경상도, 대마도, 왜를 변두리에 있어 모두 가라(加羅)라 불렀다.
그리고 "관병(官兵)이 급히 쫓아 임나가라(任那加羅)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이 귀복(歸服) 하였다."는 문구는
대마도 왜(對馬島倭)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다는 뜻이고,
"왜가 거국(擧國)으로 항복하였다."는 문구는
대마도 왜(對馬島倭)에 이어 구주 왜(九州倭)와 대화 왜(大和倭)도 모두
광개토왕에게 항복했다는 뜻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도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영락(永樂) 10년(A.D. 400년)에 대마도(對馬島)를 점령하고
구주 왜(九州倭)와 대화 왜(大和倭)로부터 항복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倭)를 격파하였다.
왜인은 백제(구태백제)의 보좌였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密通)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
광개토왕의 정벌이 끝난 후에
백제(百濟), 신라, 가라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契丹), 평양(平凉)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任那)와 이(伊), 왜(倭)의 무리는 신하로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一自渡海所至擊破倭人倭人百濟之介也百濟先與倭密通使之聯侵新羅之境..中略..以環時則百濟新羅駕洛諸國皆入貢不絶契丹平凉皆平服任那伊倭之屬莫不稱臣
위에 나오는 임나(任那)는 대마도 왜를, 이(伊)는 이세(伊勢),
대화(大和) 등지의 대화 왜(大和倭)를, 왜(倭)는 구주 왜(九州倭)를 지칭한 말이다.
따라서 "임나(任那)와 이(伊), 왜(倭)의 무리는 신하로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문구는 대마도 왜(對馬島倭), 대화 왜(大和倭), 구주 왜(九州倭)가 모두
광개토왕에게 복속하였다는 뜻이다.
송서(宋書) 왜전(倭傳)을 보면 임나연정(任那聯政)의 마지막 왕 무(武)는
"동으로 모인(毛人) 55개국을, 서로 66개국을, 북으로 95개국을 복속시켰다."고 하고,
자칭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라고 주장하였다.
興死弟武立自稱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왜왕 흥이 죽고 동생 무가 왕이 되어 자칭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 왕이라 하였다.
위 왜국 왕은 임나연정왕(任那聯政王)이고,
왜왕 무(武)가 주장한 영역은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해역, 대마도, 대륙신라, 대륙백제, 가야 지역이다.
위 문구에는 왜왕 무(武)가 마치 자기가 이 지역을 복속시킨 듯이 주장하였으나,
임나연정(任那聯政)을 설치한 사람은 광개토왕(廣開土王)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송서(宋書) 왜전(倭傳),
광개토왕(廣開土王) 비문(碑文)을 종합하면 광개토왕(廣開土王)은
영락(永樂) 10년에 왜(倭)를 평정하였다는 비문징실(碑文徵實)에
적혀 있는 내용과 일치한다.
따라서 광개토왕(廣開土王) 비문(碑文)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에서 결락된 글자는
비문징실(碑文徵實)에 적혀 있는 글자와 같은 글자, 같은 내용이다.
廣開土太皇陵碑(광개토태황능비)
[1]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剖卵降世, 生而有聖
[2]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3] 爲我連 浮龜. 應聲卽爲連 浮龜.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4] 不樂世位, 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 爾興治.
[5] 大朱留王紹承基業. □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 太王 恩澤 洽于皇天 威武 橫披 四海 掃除 □□庶寧 其業 國富 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州有九宴 駕葉國以甲寅年九月二十九日乙酉 遷就山 陵於 是立碑銘 記勳績 以永後世焉
[6] 其辭曰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碑麗不息□ 叉躬率住討 □富山 負山 至鹽水上破其丘部洛 六七百當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平道 東來 □城 力城 北豊五□ 遊觀土境田獵而還
[7] 百殘 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而以倭以 辛卯年 來渡海破 百殘新羅以 爲臣民以
[8] 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軍□□首攻 取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 利城, □□城,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舍 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 □□城, □而耶羅城, 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 □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巖門□城, 林城, □□□, □□□,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曾□城,□□盧城, 仇天城, □□□□, □
[9] 其國城賊不服氣敢 土百戰王威赫怒渡阿利水遺刺迫城橫 □使國城百殘王困逼獻出男女生白一千人細布□歸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 □迷之御錄其後順之誠於是□五十八城村七百將殘王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
[10] 八年戊戌敎遣偏師觀 帛진土谷因便抄得莫新羅城加 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朝貢論事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 和通王巡下平穰而新羅 遣使白王云 倭人滿 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 王請命 太王恩後 稱其忠□□違使還吉以□
[11]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從 男居城至 新羅城 倭滿其中官兵方至 倭賊退□來 背急追至任那加羅從 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拔
[12] 新羅城 □城倭滿 倭潰城 六 □□盡吏能來安羅人戌兵□□□□□□□□□□□□□□□安羅人戌兵 昔新羅寐錦未有身來朝□開土境好太□□新羅寐錦□□僕勾□□□□朝貢
[13] 十四年甲辰而 倭不軌 侵入帶方界□石城 □連船 □平穰□ 相遇王 幢要截 蕩刺 倭寇潰 敗斬 煞無數
[14] 十七年丁未敎遣出騎五萬□師□合戰 斬煞湯盡所稚鎧鉀一萬餘領 軍資 器械不可稱數 還破沙□城 婁城城
[15] 卄年 庚戌 東夫餘 舊是鄒牟王 屬民中 叛不貢王躬率往 討軍到 餘城而 餘城國변 □王恩 普處於是旋還 叉其慕化隋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社婁鴨盧 肅斯舍鴨盧□立婁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
[16] 守墓人 烟戶 賣句余民國 烟二 看烟三 東海賈國 烟三 看烟五 敦城( ) 四家盡爲看烟 ( )城一家 爲看烟碑利城 二家爲國 烟 平穰城 民國 烟一 看烟十( )連二家爲看烟 住 婁人國 烟一 看烟십二梁谷 二家爲看烟 梁城 二家爲看烟 安連 卄二家 爲看烟 改谷 三家爲看烟 新城三 家爲看烟南蘇城 一家爲國烟 新來 韓穢 沙水城國烟一 看烟一 牟婁城 二家爲看烟 豆比鴨 岑韓五家爲看( )句牟客頭二家爲看烟永底韓一家爲看烟舍조城韓穢國烟三看烟卄一古家耶羅城一家爲看烟炅古城國烟一看烟三客賢韓一家爲看烟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巴奴城韓九家爲看烟各模盧城四家爲看烟各模盧城二家爲看烟牟水城三家爲看烟幹弓利城國烟二看烟( )( )( )城國烟六看烟<11字缺>三家爲看烟豆奴城國烟一看烟二奧利城國烟二看烟八須鄒城國烟二看烟五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大山韓城六家爲看烟農賣城國烟一看烟一閏奴城國烟二都烟卄二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전城國烟一看烟八味城六家爲看烟就咨城五家爲看烟三穰城卄四家爲看烟( )那城一家爲國烟那旦城一家爲看烟句牟城一家爲看烟於利城八家爲看宴比利城三家爲看烟細城三家爲看烟
[17]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 敎言祖王先王 但敎取遠近舊民守墓酒掃 吾로慮舊民轉當리劣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率所略來韓穢令備酒掃言 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卄家慮其不知法則復取舊民一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烟삽看烟三百都合三百家
[18] 自上祖先王以來墓上不安石碑致使守墓人烟戶羌錯 惟國 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 其烟戶 不合羌錯 又制守墓人 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亦不得천買其有違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廣開土太皇陵碑(광개토태황능비)
<비문 1>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옛날 시조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나와 나라를 창업하여 기반을 마련하셨다.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며 알을 깨고 탄강하시여
세상에 출생 때부터 聖德(성덕)을 갖고 태어났다.
무려 1,600여 년 전의 고문을 올바로 번역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현재 한국에서 번역된 대다수의 古文(고문)들은
원문에 집착하여 번역하였기 때문에 誤譯(오역)이 많아
본래의 뜻이 왜곡되어 잘못 전달될 수 있다.
고대의 원문은 많은 뜻을 간략히 표현하는 속성을 갖추고 있다.
고어는 두세 자의 단어를 한 글자로 표현하는 숙어로 문장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만약에 문자에 집착하여 해설하면 본래의 뜻과는 전연 다르게 번역된다.
즉 한국어의 어원은 모두 한문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낱말의 뜻을 풀어서 번역하여야 문맥이 상통할 수 있다.
원문에서 한자라도 加字 없이 해설하는 것이 맞는 말이나,
본문의 뜻을 올바로 전달되지 못하여
읽는 사람이 무슨 뜻인지 번역된 문장을 올바로 이해 할 수 없다면
올바른 해설이라 할 수 없다.
漢文으로 이루어진 史記나 碑銘 등의 원문은
그 시대적 배경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한문에 능통한 대 학자 일지라도
올바로 해설 할 수 없으며 본래의 뜻을 전달 할 수 없다.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은 현세의 사상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알을 깨고 탄강하셨다고 碑銘에 기록되어 그 실상을 더욱 믿기 어렵다.
그러나 한민족의 正史 ‘삼국사기의 고구려의 본기 제 1’에
그 진상이 명확히 밝혀져 있다.
따라서 ‘고구려 본기 제1의 본문’과 ‘광개토대왕비명의 원문’을
아울러 해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구려 본기 제 1 :삼국사기>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高氏며 諱(휘)는 朱蒙(주몽)이라 하며
일명 추모왕이라 한다. 조상에 대하여 해설하자면 부여왕 解夫婁(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자 後嗣(후사)를 구하고자 山川祭를 올리려 御馬(어마)를 타고
鯤淵(곤연)이라는 연못을 지나는데 큰 바윗돌이 상대를 처다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왕은 괴이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 바위를 옮기게 하였더니
황금색 빛의 어린아이가 개구리 형상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이는 곧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려 주신 아들이구나 하고는
마침내 궁실로 데리고 와 양육하고
이름을 金蛙(금와)라 하고 장성하자 태자로 옹립하였다.
그 후 재상 阿蘭弗(아란불)이 왕에게 말하기를
어느 날 하느님이 내려 오시여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설립 할 것이니 너희들은 이곳을 피하여
동쪽의 해변에 땅이 있으니 호를 迦葉原(가섭원)이라 하여라.
토양이 기름지고 비옥하여 오곡이 잘 될 것이며
도읍지로는 적당한 곳이니라.” 라고 하였다.
아란불이 권고하니 드디어 동명성왕은 도읍을 옮겨 국호를 ‘동부여’라 하였다.
그 구 도읍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자칭 천제의 아들 解慕漱(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살았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후사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이때 태백산 남쪽 優渤水(우발수)에서 어느 여인을 만나 내력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이며 이름은 柳花(유화)라고 합니다.
여러 형제들과 야유에서 유람하며 즐기고 있을 때
어떤 남자 한사람이 자신은 천제의 아들 解慕漱(해모수)라 하면서
나를 熊心山(웅심산)아래 압록강변의 密室(밀실)로 데리고 가서
私慾(사욕)을 취하고는 곧 돌아온다고 하고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나의 무모한 짓을 문책하시며 다른 사람이 알면 창피하다고 하시어
쫓겨 나와 지금 優渤水(우발수)의 강변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金蛙王(금와왕)이 듣고는 이상스럽게 느껴 궁실로 데리고 와
으슥한 방에 살도록 하였더니 방문이 닫혀 있음에도
해가 있는 것처럼 밀실은 대낮처럼 밝았다.
또 몸을 피하여도 햇빛은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그로 인하여 잉태한 날이 되어 출산하고 보니 닷 되들이 되는 알을 하나 낳았다.
금와 왕은 그 알을 버리게 하였으나 개와 돼지들이 보고도 모두 먹지를 않았다.
또 길 가운데 버렸으나 소와 말도 피하여 다녔음으로 하는 수 없이 야산에 버렸지만
새들이 날아와서 날개깃으로 덮어 주었다.
왕은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깨트려 보았으나 깰 수도 없어
다시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더니 그 어머니는 알의 이면을 물건으로 덮어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드디어 껍질을 깨고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골상이 武骨(무골)로서 기이하게도 영특하여 보령 칠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德性(덕성)을 두루 갖추고 다른 아이와는 다르게 항상 활을 스스로 만들고
활쏘기를 잘하여 실수 없이 백발이면 백발이 적중하였다.
부여나라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朱蒙(주몽)이라 하는 고로 이름이 되었다.
금와 왕의 일곱 아들과 함께 놀면서 유희를 하더라도 주몽은 항상
그들 보다 재능이 뛰어나 그의 맡아들 帶素(대소)가 父王(부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보통 사람으로 출생 한 것도 아니고 그는 보통 사람보다 너무도 용맹합니다.
만약에 일찍 죽이지 않으면 뒷날 나라를 빼앗을 역모를 기도하지는 않을지
그 후환이 두렵습니다.” 하면서 父王(부왕)에게 소청을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으시고 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양육하는 목동이 되게 하셨다.
주몽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날쌘 駿馬(준마)는 몰래 먹이를 적게 먹이고
둔한 駑馬(노마)에게는 먹이를 많이 주어 살이 찌게 하였다.
왕은 살이 찐 駑馬(노마)는 자신이 타고
먹이를 적게 주어 살이 야윈 駿馬(준마)는 주몽이 타고
야산에서 사냥을 하면서 주몽은 화살도 적게 가졌지만
주몽이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다.
왕자와 모든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기로 모의한 음모를
주몽의 어머니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고자 하는구나.
너는 지략과 재능이 어느 누구 보다 뛰어나니 어디를 가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없겠는가? 그 같은 사실을 알은 이상 더 지체하지 말고 욕이 되어도
이곳을 떠나도록 하라 멀지 않는 장래에 이 어미가 찾도록 하겠노라.
<비문 2>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鄒牟王, □□□□□□ : 朱蒙之母柳花라 사료됨.
-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고 수레를 타고 순행하며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 臨津(임진: 나루터)에서 왕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옥황상제 하느님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입니다.
라고 추모왕은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삼국사기 본문에 주몽은 어머니(하백녀 유화 :사소)의 명령을 받고
친구 烏伊(오이), 摩離(마리), 陝夫(섬부)등 세 사람은 벗이 되어
南夫餘(남부여)의 奄利大水(엄리대수) 임진(나루터)에 도착하였으나
강을 건널 수는 없고 군사들은 추격하여 왔으므로 친구들은 두려워하였다.
군사들이 임박하자 鄒牟王(추모왕)은 기도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하백의 딸입니다.
저들이 나를 죽이고자하여 금일 도피하게 되었으니 추격하여 오는 자들에게
잡히지 않도록 수호하여 주소서! 라고 추모왕은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비문 3> 爲我連 浮龜. 應聲卽爲連 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나를 위하여 거북을 떠오르게 하여 다리로 연결하여
강을 건너 갈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라고 하시니 소리에 응하여
곧 거북이가 떠올라 교량을 만들어 주어 강을 건넌 후에 거북이는 흩어졌다.
이에 비류곡 忽本(홀본) 서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건국하였다.
<삼국사기>에 곧 자라들이 물위에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
주몽은 떠오른 자라의 등을 밟고 무사히 강을 건너자 자라들은 곧 흩어지고
추격하던 기마병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모두 돌아갔다.
주몽의 일행이 毛屯谷(모둔곡)에 도착하였더니
각기 다른 옷을 입은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한사람은 삼베옷을 걸치고, 한사람은 장삼(중의 옷)을 걸치고,
한사람은 주로 물속에서 자라는 水藻(수조)옷을 입고 있었다.
고주몽이 질문하기를 그대는 어디에 살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며
성은 무엇이며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고 물으니
麻衣者(마의자)가 대답하기를 이름은 再思(재사)라고 합니다.
衲衣者(납의자)가 대답하기를 武骨(무골)이라 하고,
水藻者(수조자)는 黙居(묵거)라 하고 姓(성)은 말하지 아니 함으로
고주몽은 이들에게 姓(성)을 지어 주었다.
再思(재사)의 성은 克(극)씨로, 武骨(무골)의 성은 仲室(중실)씨로,
黙居(묵거)의 성은 小室(소실)씨로 지어 주고 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 지방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하느님의 명을 받아 나라를 창업하여
백성들을 계도하고자 여기에 왔는데 적절한 시기에 어진 賢者(현자)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세 사람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하고
각자의 능력에 맞는 소임을 맡기고 함께 卒本川(졸본천)에 도착하였다.
그 山河(산하)의 경관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농사 짓기에도 토양이 알맞아 실제로 듣던 것과 같아 드디어 도읍을 결정하였다.
다만 주몽왕께서 거처하실 거실을 비류수 근처의 忽本西山(홀본서산)위에
성을 쌓고 임시 오두막집을 만들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그로 인하여 성을 고 씨라 하였다.
고주몽은 졸본천에 도착 하였을 때 부여왕은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의 딸을 妻(처)로 주고
왕이 돌아가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때 주몽의 나이는 22세이며 漢(한) 孝帝(효제) 建元(건원) 昭王(소왕) 2년이며
신라의 시조 혁거세 21년 甲申(B.C. 57)년 이였다.
어느 날 왕은 沸流水(비류수) 강물에 채소 잎이 흘러 내려오는 것을 보고
강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고
사냥을 하면서 沸流國(비류국)에 도착하여 보니,
그 나라의 국왕 松讓(송양)이 나와서 왕에게 하는 말이
과인은 이 벽지의 해변 모퉁이에 국왕으로 있으면서
아직까지 군자다운 임금을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그대를 만났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구려.
그런데 자네는 면식이 없으니 어데서 왔으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대답하여 보시게 하였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의 아들로서
某所(모소)에 도읍을 정한 왕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더니
松讓(송양)이 하는 말이 나의 가문은 누세를 이어 왕이 되어 내려 왔는데
가뜩이나 지형이 적은 땅에 주인이 둘인 것은 용납 할 수 없으며
그대는 도읍을 정한 날짜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나라에 부용 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라고 하자
왕은 그의 말을 듣고 분하여 말로서 서로 다투다
역시 활쏘기를 하여 승자에게 패자가 따르기로 하였다.
역시 松讓(송양)은 능력이 부족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2년째 여름에 松讓(송양)은 나라를 가지고 항복하여 왔기에
그 땅을 多勿(다물)이라 하고 松讓(송양)을 都主(도주)로 책봉해 주었다.
고구려의 말에 옛 땅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多勿(다물)이라 하는 고로 이름이 되었다.
<비문 4> 不樂世位, 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 爾興治.
-추모왕은 세속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즐거워하지 않으시자
하느님께서 황룡을 내려 보내시니 왕은 반갑게 맞이하시었다.
추모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머리를 밟고 하늘로 올라가시며,
세자 유류왕을 걱정하시며 도로써 잘 다스려 나라를 부흥시켜라. 말씀하셨다.
‘삼국사기’ 永樂卽位(영락즉위) 3년째 봄 3월에
황룡이 골령에 나타나 왕이 친히 영접하였더니 곧 하늘로 올라갔다.
가을 7월에는 경사스러운 구름이 골령(홀본) 남쪽에 청적색으로 나타났다.
4년째 여름 4월에는 안개구름이 7일이나 하루에 네 번씩 일어나
사람들의 얼굴색을 분별 할 수 없었다.
7월 가을에 城郭(성곽)에 궁실을 만들었다.
6년째 가을 8월에는 궁전에서 神雀集(신작집)을 만들어 각 가정에 배포하고,
10월 겨울에 왕은 烏伊(오이)와 扶芬奴(부분노)에게 명하여
태백산의 동남쪽에 있는 荇人國(행인국)을 토벌하여 쟁취하고
그 땅에 城(성)을 쌓고 邑(읍)이 되게 하였다.
[신작집(神雀集)- 神人 동명성제가 직접 만든 문집)
14년 8월에 왕의 어머니 柳花(유화)가 東夫餘(동부여)에서 돌아가시니
그 나라의 왕 금와는 태후 禮(예)씨를 장례하고 사당을 세워 神(신)으로 모셨다.
10월 겨울에 사신을 부여에 파견하여 지방의 특산물을 올려 보은의 덕을 기렸다.
19년 여름 4월에 왕의 맏아들 儒留(유류), 類利(유리)가
夫餘(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함께 도피하여 돌아오니
주몽왕은 대단히 기뻐하시며 맏아들 유류를 태자에 옹립하셨다.
9월 가을에 왕이 승하하시니 이때의 나이는 41세 이었다.
龍山(용산)에 장례하고 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 1’의 해설과 ‘광개토대왕 비문’의 내용과 일치한다.
삼국사기를 편집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집필할 때
광개토대왕 비문을 참조하였거나 ‘구삼국사기’를 참조하여
고구려 시조 제 1편을 편집하였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비문 5> 大朱留王紹承基業. □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 太王 恩澤 洽于皇天 威武 橫披 四海 掃除 □□庶寧 其業 國富 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州有九宴 駕葉國以甲寅年九月二十九日乙酉 遷就山 陵於 是立碑銘 記勳績 以永後世焉
-대주류왕(대무신왕)은 시조께서 창업하신 국가 기반을 계승하고
□ 제 17대 世孫(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18세에 이르러
왕위에 올라 연호를 永樂(영락)이라 하였다.
태왕(호태왕)께서 베풀어주신 은택과 하늘에 계신 황제의 위세와
武勇에 힘입어 종횡으로 파괴하여 四海(사해: 천하 사방)을 掃除(소제)하여
□□성왕께서 바라시던 나라는 질서가 안녕 되어 가업에 종사하고
오곡이 풍숙하여 백성들은 넉넉한 재물로 잘살게 되었습니다.
끝없는 하늘과 같은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갑자기 돌아가신 후
九州(9주)의 백성들은 슬퍼하며 酒宴(주연)을 올리며 항상 잊지 못하고 있다가
駕葉國(가섭국)으로 甲寅年(414년) 9월 29일 乙酉日
就山(취산: 산능)에 移葬(이장)을 하고 이 능에 비석을 세우고
碑銘(비명)에 훈적을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영원한 귀감이 되게 하였다.
<비문 6> 其辭曰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碑麗不息□ 叉躬率住討 □富山 負山 至鹽水上破其丘部洛 六七百當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平道 東來 □城 力城 北豊五□ 遊觀土境田獵而還
-그 훈적을 말하면 영락 5년 乙未년에 왕은
碑麗(비려)가 쉬지 않고 침략함으로 몸소 군사를 통솔하고 토벌하여
□富山(?부산)과 負山(부산)의 鹽水(염수) 위에까지 이르러
그 부락 6~7백을 파괴하고 牛馬(우마)와 양떼를 얻은 것은 이루 칭할 수 없었다.
임금님은 수레를 타고 □平道(평도)를 지나
東來(동래)의 □城(?성)과 力城(역성)과 北豊(북풍) 五□(5성)을 유람하시면서
국토의 경계를 관찰하시고 수렵도 하시고 환도하시었다.
<비문 7> 百殘 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而以 倭以 辛卯年 來渡海破 百殘新羅以 爲臣民以 百殘
-백잔(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 왔다.
倭(왜)는 辛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파괴하고
백잔(백제국)과 신라를 臣民으로 삼았다.
<비문 8> 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軍□□首攻 取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 利城,□□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舍 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 □□城, □而耶羅城, 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 □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 □□□,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曾□城, □□盧城, 仇天城, □□□□, □
-6년 丙申(병신)에 왕은 몸소 □軍(수군)을 통솔하시고
백잔(백제국)의 殘黨(잔당)을 토벌하시어 軍(군)의 □□首(??수)를 공격하여
18城(18성)을 쟁취하고 模盧城(모로성) 幹저利□城(간저리*성) 閣미城(각미성)
牟盧城(모로성) 미沙城(미사성) □조城(*조성) 阿旦城(아단성) 古利□(고리성)
利城(이성) 雜미城(잡미성) 奧利城(오리성) 句牟城(구모성)
古模能羅城(고모능라성) 頁□力而耶羅(혈*력이야라)
<28字***缺(결>
利城(이성) 鄒城(미추성) 利城(리성) 大山韓城(대산한성) 掃加城(소가성)
敦拔□(돈발*) 婁賣城(루매성) 散□城(산*성) □婁城(*루성) 細城(세성)
牟婁城(모루성) 兮婁城(혜루성) 蘇灰城(소회성) 燕婁城(연루성)
析支利城(석지리성) 巖門至城(암문지성) 林城(림성) □城(*성) 就鄒城(취추성)
□拔城(*발성) 古牟婁城(고모루성) 閏奴城(윤노성) 貫奴城(매노성) 三穰城(삼양성)
□羅城(*라성) 仇天城 (구천성) □□□□을 쟁취하였다.
<비문 9> 其國城賊不服氣敢 土百戰王威赫怒渡阿利水 遺刺迫城橫 □使國城百殘王困逼獻出男女生白一千人細布 □歸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 □迷之御錄其後順之誠 於是□五十八城村七百將殘王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
-그 나라 城(성)의 도적들은 광개토대왕의 기풍에도 감히 항복하지 않으므로
대왕은 성난 노도와 같은 위세로 아리수 강을 건너 백전백승을 거두었다.
城(성)을 종횡으로 압박하자 刺史(자사)를 사신으로 파견하고
백제의 잔당과 그의 왕은 곤경에 처하자 남녀 1,000명과 비단을 헌납하면서
대왕을 찾아와 금일 이후는 영원한 노예가 되어 복종하고
태왕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서약을 시켰더니
自進하여 사죄함으로 御錄(어록)에 남기고 赦免(사면)해 주었다.
그 후는 지극 정성을 다하여 순종하였다.
이에 58성과 촌마을 700과 將帥(장수)와 殘兵(잔병)과 왕의 동생과
아울러 대신 10명과 법사도 도읍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비문 10> 八年戊戌敎遣偏師觀 帛진土谷因便抄得莫 新羅城加 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朝貢論事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 和通王巡下平穰而 新羅 遣使白王云 倭人滿 其國境潰破城池以 奴客爲民歸 王請命 太王恩後 稱其忠□□違使還吉以□
-8년 戊戌(무술)에 法師(법사)를 파견시켜 불교의
觀音經(관음경)을 번역한 원문을 주었다.
그로 인하여 인편으로 토속물과 비단을 가져 왔다,
新羅城(신라성)의 太羅谷(태라곡)에서 남여 300여명은
자진하여 조공 바치는 일을 의논하였다.
9년 己亥(기해)에 백제의 殘黨(잔당)과 倭(왜)는 위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였으므로 倭(왜)와 和通하기 위하여
대왕은 ‘臣民國(신민국)’을 순행하고자 平穰(평양)에 머물러 계셨는데
신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대왕에게 아뢰기를
수많은 왜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城池를 파괴하고
백성들을 客地(객지)로 회귀시켜 노예로 삼고 있습니다.
왕은 태왕님께서 請命(청명)하신 충성의 은혜는커녕
귀국하고서는 위반하고 있으니 환국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奴客(노객) :客地(객지)로 회귀시켜 노예로 삼음
<비문 11>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從 男居城至 新羅城 倭滿其中 官兵方至 倭賊退□來 背急追至任那加羅從 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拔
-10년 庚子(경자)에 敎書(교서)를 내려 騎馬步兵 5만 명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기로 하고 신라의 男居城까지 쫓아갔더니
신라성에 倭兵(왜병)이 가득 차 있었다.
관병이 그 성중에 도착하자 왜적들이 후퇴하기에
황급히 달아나는 적을 등 뒤까지 바짝 추격하여 任那加羅(임나가라: 대마도)까지
쫓아가 城(성)을 拔本(발본) 索出(색출)하여 즉시 항복시키고,
拔本(발본)한 城(성)은 安羅人(안라인)이 戌兵(술병)하도록 하였다.
○戌兵(술병) :병사로 성을 지킴
<비문 12> 新羅城 □城倭滿 倭潰城 六 □□盡吏能來安羅人戌兵 □□□□□□□□□□□□□□□安羅人戌兵 昔新羅寐錦未有身來朝□開土境好太□□新羅寐錦□□僕勾□□□□朝貢
-신라성의 □성에도 왜병이 가득 차 있기에
왜병들이 있는 城(성) 여섯 개와 □□城을 다 궤멸시키고
관리를 두어 安羅人(안라인)을 戌兵(술병)하도록 하고
□□□□□□□□□□□□□□□도 안라인이 술병 하도록 하였다.
옛날 신라는 寐錦(침금: 한 이불 속에 잠을 자는 형제)이였기 때문에
아직까지 임금이 몸소 조공을 바친 적이 없으므로
광개토호태왕께서는 □□의 신라 임금에게 만은
僕勾(복구: 벼슬이름) □□□□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비문 13> 十四年甲辰而 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 □連船 □平穰□ 相遇王 幢要截 蕩刺 倭寇潰 敗斬 煞無數
-14년 甲辰(갑진)에 왜는 궤도를 벗어나 약정을 지키지 않고
帶方界(대방계)를 침입하여 □石城( 석성)에 수많은 선박(배)을 연결해 놓고
平穰(평양)의 □에서 왕과 서로 만나 줄 것을 요청하면서
幢旗(당기)에 칼을 꽂아 찌를 듯이 방탕한 짓을 하기에
倭寇(왜구)를 궤멸시켜 참패시키고 무수히 참살시켰다.
<비문 14> 十七年丁未敎遣出騎五萬 □師□合戰 斬煞湯盡所稚鎧鉀一萬餘領 軍資 器械不可稱數 還破沙□城 婁城城
-17년 丁未(정미)에 교서를 내려 기마보병 5만 명을 파견하여
□師(?사)와 □로 연합 전투를 하여 다 참살시켜 소탕하고
갑옷 1만여 벌과 군수 물자와 기계를 칭할 수 없는 숫자를 노획하고
沙□城(사 성),과 婁城(루성)의 城(성)을 파괴하고 돌아왔다.
<비문 15> 卄年 庚戌 東夫餘 舊是鄒牟王 屬民中 叛不貢王 躬率往 討軍到 餘城而 餘城國변 □王恩 普處於是旋還 叉其慕化隋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社婁鴨盧 肅斯舍鴨盧 □立婁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 20년 庚戌
-(경술)년에 동부여의 옛 추모 왕(동명성왕)의 속민 중에서 반란을 하였거나
조공을 받히지 아니한 왕은 몸소 군사를 통솔하여 토벌하시고
나머지 다른 城(성)과 다른 국왕은 곳곳을 돌면서 은혜를 베푸시고 환국 하셨다.
또한 (호태왕)의 은덕에 감화되어 따라온 관리는
미구누압노, 비사마압노, 사누압노, 숙사사압노, □입누압노이다.
무릇 공격하여 파괴시킨 성은 64개이고, 마을은 1400개 이었다.
<비문 16> 守墓人 烟戶 賣句余民國 烟二 看烟三 東海賈國 烟三 看烟五 敦城( ) 四家盡爲看烟 ( )城一家 爲看烟碑利城 二家爲國 烟 平穰城 民國 烟一 看烟十( )連二家爲看烟 住 婁人國 烟一 看烟십二梁谷 二家爲看烟 梁城 二家爲看烟 安連 卄二家 爲看烟 改谷 三家爲看烟 新城三 家爲看烟南蘇城 一家爲國烟 新來 韓穢 沙水城國烟一 看烟一 牟婁城 二家爲看烟 豆比鴨 岑韓五家爲看( )句牟客頭二家爲看烟永底韓一家爲看烟舍조城韓穢國烟三看烟卄一古家耶羅城一家爲看烟炅古城國烟一看烟三客賢韓一家爲看烟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巴奴城韓九家爲看烟各模盧城四家爲看烟各模盧城二家爲看烟牟水城三家爲看烟幹弓利城國烟二看烟( )( )( )城國烟六看烟<11字缺>三家爲看烟豆奴城國烟一看烟二奧利城國烟二看烟八須鄒城國烟二看烟五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大山韓城六家爲看烟農賣城國烟一看烟一閏奴城國烟二都烟卄二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전城國烟一看烟八味城六家爲看烟就咨城五家爲看烟三穰城卄四家爲看烟( )那城一家爲國烟那旦城一家爲看烟句牟城一家爲看烟於利城八家爲看宴比利城三家爲看烟細城三家爲看烟
-守墓人(수묘인) :묘를 지키는 사람,
烟戶法(연호법) :호적법의 일종. 호주와 같은 지위,
賣句余民國(매구여민국)과 東海賈國(동해매국)의 敦城(돈성) ( )( )城.
碑利城(비리성), 平穰城(평양성) 婁人國(루인국)의 梁谷(양곡),
梁城(양성) 改谷(개곡) 新城(신성) 南蘇城(남소성) 韓穢(한예)의 沙水城(사수성)
牟婁城(모루성) 豆比鴨岑(두비압잠) 句牟客頭(구모액두), 永底韓(영저한)
舍조城(사조성) 耶羅城(야라성) 炅古城(경고성) 客賢韓(객현한),
阿旦城(아단성) 雜珍城(잡진성) 巴奴城(파노성) 模盧城(모로성) 牟水城(모수성),
幹弓利城(간궁리성) ( )( )( )城.
<11字 **** 缺결>
豆奴城(두노성) 奧利城(오리성) 須鄒城(수추성) 百殘(백잔) 南居韓國(남거한국),
大山韓城(대산한성) 農賣城國(농매성국) 一閏奴城國(일윤노성국) 古牟婁城(고모루성),
전城(전성) 味城(미성) 就咨城(취자성) 穰城(양성),
( )那城(나성) 那旦城(나단성),
句牟城(구모성) 利城(리성) 比利城(비리성). 細城(세성) ****
<비문 17>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 敎言祖王先王 但敎取遠近舊民守墓酒掃 吾로慮舊民轉當리劣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率所略來韓穢令備酒掃言 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卄家慮其不知法則復取舊民一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烟삽看烟三百都合三百家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님께서 생존 시에
시조 왕과 선대왕에 대하여 하교하신 말씀은
먼 옛날과 근래에 쟁취한 신민국의 백성들에게 묘소를 지키는 법과
酒掃法(주소법)을 교지로 말씀하셨다.
내가 염려되는 것은 오래되면 환경이 좋지 않아
백성은 당연히 옮겨서 살게 될 것이다.
만약에 우리나라가 만년 후에 세력이 약해지더라도 묘소만은 안전히 지켜야 된다.
다만 내가 몸소 군사를 통솔하여 취득한 곳에 침략자가 쳐들어오면
韓, 穢(한. 예)에 령을 내려 대비하고
酒掃法(주소법)은 교지와 같이하라.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敎令(교령)에 따라 韓, 穢(한. 예)에 220가구를 취하여
묘를 지키게 하였으나 염려한 것과 같이 법칙을 잘 알지 못하여
다시 옛 부터 지켜온 백성과 새로 110가구를 취하여
都合(도합) 330가구를 守墓(수묘)하여 看守(간수)하도록 하였다.
<비문 18> 自上祖先王以來墓上不安石碑致使守墓人烟戶羌錯 惟國 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 其烟戶 不合羌錯 又制守墓人 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亦不得천買其有違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시조 上王부터 先王 이래로 묘소를 안전하게 지키지 못 할 것 같아
碑石에 묘를 지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烟戶(연호)한 것이니 착오 없어야 한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님께서 시조왕과 先王(선왕)의 묘소에
다 碑石(비석)을 새우고 그 碑銘(비명)에 烟戶(연호)를 기록하였다.
守墓人(수묘인) 제도를 착각하거나 합당치 못하다고 한다거나
금일 이후부터 서로 매매하여 취득 할 수 없다.
비록 부유하여 풍족한 사람이라도 역시 매입하여 취득 할 수 없다.
법령을 위배하며 매입하는 자는 제정된 수묘 법령에 의하여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비명해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