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늘푸른언덕
어린 아기가 태어나 스스로 몸을 가누기 시작하면 다음 단계로 홀로서기를 위한 걸음마를 배우게 됩니다.
보통 어린 아기가 온전한 걸음마를 배우기까지 넘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하게 되는데 어느 통계에 의하면 약 2000번을 넘어져야 비로소 스스로 걷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어린 아기가 온전히 서서 걷기까지 약 2000번을 넘어지는 동안 아기의 부모는 물론 그 어느 누구도 그를 나무라거나 또 넘어졌다고 큰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어린 아기가 걷는 연습 과정에서 ‘넘어짐’이란 실패를 거듭하고 있음에도 핀잔은 커녕 그 아름다운(?) 도전에 애정 어린 눈길과 함께 박수와 칭찬을 보냅니다. 어린 아기의 부단한 실패와 지칠 줄 모르고 다시 일어나는 노력을 대견하게 여기기까지 합니다.
아무도 어린 아기의 넘어짐을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관대하고 너그럽습니다.
이처럼 어린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반드시 겪게 되는 이 넘어짐은 과연 실패입니까?
아니면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일종의 성장의 과정입니까?
아마도 넓은 의미에서 온전한 인격체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삶의 요소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런 어린 아기가 어느덧 자라나서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몸을 상하기도 하고 때론 귀한 물건을 깨거나 망가뜨리면서 부모와 자식들 간에는 본격적인 삶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성장해가는 아이들의 잦은 실수와 잘못을 보면서 우리 어른들은 얼마나 관대하고 너그러울 수 있을까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위로하면서....
물론 가족이라면 상황에 따라서는 그나마 용납이 됩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런데 그것이 남이라면 어떻습니까? 관대해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안타깝게도 이러한 관대함이 거의 사라져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걸핏하면 남의 허물을 헐뜯기 십상이고 때론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배척하기도 합니다. 더구나 남이 잘 되는 꼴은 더더욱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미래의 꿈이 왕성해지는 청소년 시기에 아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칭찬과 격려와 위로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가 되면 아이들은 질풍노도와 같이 반항하는 마음이 생기고 온전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한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이 때 이러한 잘못을 한 자녀의 온전한 성장을 위하여 대개의 부모들은 훈육이라는 구실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사랑의 매를 들기도 하고 잔소리가 때로는 도를 넘어 심한 욕설이 되어 거침없이 뱉어 냅니다. 아이들의 참된 성장을 위한 약이라고 변명하지만 때론 그것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그 때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향하여 진정성을 담아 이런 말을 던져보면 어떨까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네 나이 때 아빠(엄마)는 더 심했었단다.
하면서...
대한민국의 지난 100년사를 조명해 보면 36년간의 암울한 일제 치하의 시기와 이어지는 동족 상잔의 비극인 전쟁을 통하여 전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는 불명예로 시작하여 가장 짧은 시간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한 나라로 우뚝 서게 됩니다. 경제 기네스북에 오르기에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자랑스럽게도 괄목할 성장을 이룩합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경제 도약의 저력을 대한민국의 남다른 교육열과 한국인 특유의 근면성에 있다고 입을 모읍니다.
대한민국 교육은 홍익인간의 정신에 입각하여 지덕체를 겸비한 완전한 인격체를 육성한다는 뚜렷한 교육 지표가 그 특징입니다. 게다가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모든 면에서 바르고 착하게 살아가는 것을 추구함과 동시에 한 점 흐트러짐과 실수가 용납되지 않음을 교육의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세대들의 교육 철학으로 당연히 자녀들에게 엄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른 길을 걷는 것은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쩌다 그 길을 벗어나면 마치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주입하는 교육 방식은 한편 생각해 보아야 할 중차대한 이슈라는 생각을 어른이 되고서야 뒤늦게 깨닫습니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이러한 빛과 같은 교육의 그림자와 같은 허구와 모순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제도권 교육 안에 있는 대상들이 하나같이 100점을 추구하고 모두가 1등을 해야 한다는 1등 의식이 팽배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1등만이 인정받고 게다가 품행까지 항상 바르고 모범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낙오된 불량 학생으로 낙인 찍히는 획일화된 제도권 교육의 모순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쩔 수 없이 순위가 결정되는 경쟁구도에서 행여 뒤처지게 되는 경우 그 학생을 대하는 시선과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런 학업 열등감을 가진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 있습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아이들에게 먼저 자존감을 세워주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상대적으로 우수한 아들을 선물처럼 얻고도 이 한마디를 제대로 건네지 못해서 실패한 뼈저린 자녀 교육의 경험담을 자서전적 이야기에 담아 약 6년 전에 책으로 써서 세상에 내 놓은 적이 있습니다.
‘백 점 아들 육식동물 아빠’입니다.
학업에 우수한 형질을 가진 아들을 완벽한 인격체로 양육해 보겠다는 잘못된 판단으로 칭찬과 관대함 없이 앞만 보고 달렸던 15년간의 치열한 교육의 끝에 겪었던 큰 시행착오를 뒤늦게 반성하는 졸고입니다.
아들과 오랜 시간을 동행하면서 전혀 인색했던 말!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였습니다.
오늘의 화두 관련하여 성서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를 들여다봅니다.
먼저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시험하려 간음한 여인을 예수 앞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바닥에 뭔가를 쓰시면서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당시 율법에 간음하다가 잡히면 이를 목격한 증인들이 돌로 치는 법이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증인의 조건에 ‘죄 없는 자’라는 부대조건을 붙여버립니다.
‘죄 없는 자’라는 조건 앞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없었기에 다들 슬금슬금 도망치고 말았다는 사이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물론 간음한 여인이 결코 무죄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한복음 8장 11절 이하) 하심으로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다음부터는 죄를 짓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다음 예화는 유명한 성서 이야기로 예수의 애제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의 예언대로 세 번 예수를 부인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이 밤에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태복음 26:34)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시고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이어서 그를 앞장서서 따르던 시몬 베드로를 향하여 이 말씀을 하실 새 베드로는 아직 일어 나지 않은 일이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수탉이 울기 전 정확히 세 번 그를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리고 울며 후회합니다.
십자가 사건 후 예언하신 대로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을 물으시면서 세 번 부인한 잘못을 온전히 사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 뒤에 숨은 마음이 바로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입니다.
인류 역사상 이러한 정신을 몸소 실천하시며 가르쳐 주신 가장 숭고하고 완벽한 사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눈과 같이 희게 하시며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 온전히 기억나는 시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참된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위로해 주시며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그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자신을 조롱한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그들의 무지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시는 모습과 십자가 상에서 피를 토해내시며 인류를 구원한 십자가 사랑이야 말로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씀의 대언처럼 들립니다.
물론 이 말을 남용하여 모든 일에 다 관대하라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불의에는 강력히 저항하되 불완전한 인격체인 우리들이 저지를 수 있는 허물과 잘못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수용하는 너그러운 마음의 자세를 통하여 다시는 그런 잘못과 과오를 범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마치 주님의 음성처럼 다가옵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살아가면서 자신의 잘못과 이어진 실패로 낙망한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일어 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는 주님의 위로입니다.
<늘푸른언덕>
첫댓글 어린 아기가 온전한 걸음마를 배우기 위해서
수없이 넘어지는 과정을 겪어야 하듯이
우리의 삶에서 더 큰 도약을 위해서는
때로 넘어짐이란 과정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힘과 용기를 더해 줄 단비같은
한마디 위로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늘푸른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