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위종의 미국 횡단 여행은 한 달이 걸렸다. 위종은 9월 신학기에 중급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를 왕복했던 기차 여행은 위종의 의식을 더욱 성숙시켰으며 사물을 보는 그의 시각을 놀라울 만큼 넓고 깊어졌다. 그는 이른 나이에 문명의 진보가 인간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몸으로 직접 체험했다. 그 여행은 인종차별과 같은 인간의 부정적인 일면을 일깨우기도 했지만 반면에 차별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위종의 인성을 변화시키며 그의 의식을 더욱 따뜻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27)
위종은 그날, 눈 덮인 겨울궁전 광장에서 흰 눈 위에 뿌려지던 노동자들의 붉은 피를 잊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눈밭에 뿌려진 선홍색 핏자국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지금까지 위종에게 그저 아름답고 낭만적인 곳이었다. 하지만 피의 일요일이 지나간 이 도시는 위종에게 다른 의미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위종은 요즈음 이 도시를 떠돌아다니는 음산한 기운이 자신의 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을 받았다. 위종은 자신의 의식 속에 슬금슬금 똬리를 틀고 있는 이 기운이 자신을 오랫동안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혁명의 기운이었다.
(144-145)
공고사(控告詞)
대한제국 황제 폐학의 칙명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된 전 부총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대한제국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은 존경하는 각국 대표 여러분께 다름과 같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대표 여러분, 대한제국의 독립은 1884년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강대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에 의해 보장되고 승인되어왔습니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당시의 의정부 참관이었던 이상설은 일본이 만국공법을 무시하고 무력을 이용한 것으로 말미암아 예부터 유지해온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의 호의적 외교관계가 파기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에 관하여 우리 대표단은 존경하는 여러분께 일본이 현재의 결과에 이르기까지 자행했던 모든 협박 그리고 폭력 및 범법 행위를 보고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일본의 폭력 수단이 만국공법을 위반하였음을 탄핵합니다. 각각 대표 여러분께서는 이러한 일본의 행동이 국제조약을 명백하게 위반했는지 아닌지를 공평한 입장에서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일본인은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동의 없이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둘째, 일본인은 그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대한제국 정부에 무력을 사용했습니다.
셋째, 일본인은 대한제국의 모든 법률과 관례를 위반했습니다.
…
(163-164)
그 순간 연설회장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적이 감돌았다. 위종은 조용한 장내를 천천히 둘러보며 잠시 숨을 고른 뒤에 입을 열었다.
“세상에 부자와 빈자가 있듯이 강한 나라가 있으면 약한 나라도 있습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모두 먹어치우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을 정의의 신이 지배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믿는 정의의 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웃의 재물을 탐해서는 안 되고, 이웃을 사랑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예수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하지만 문명국가의 시민이자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여러분은 지금 일본의 침탈과 압제로 고통받는 우리 대한제국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아직 잘 조직되어 있지는 않으나 독립과 자유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확고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인의 잔인하고도 비인도적인 침략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에 처하더라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다시 하나로 뭉쳐서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저항할 것입니다.”
(175)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열강들은 식민지 탈취라는 목적을 책상 아래 숨기고 입으로만 평화를 부르짖었다. 이런 자리에서 ‘일본의 불법적인 외교권 탈취’라는 한국 대표단의 주장은 애초부터 잠꼬대 같은 소리에 불과했다. 더불어 암암리에 식민지 나눠먹기를 묵계했던 열강들이 한국 대표단의 참가 봉쇄를 담합했기 때문에 특사들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헤이그를 떠나야 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문이 인류의 평화와 이익보다는 오직 국익만을 좇는 제국주의 국가들에만 열려 있었다는 것이 대한제국 특사들에게는 불운이었다.
(222-223)
근대적인 유럽식 장교 교육을 받은 위종은, 나이는 약관이었지만 이미 전술과 전략 등 전반적인 군사 분야에서 모든 의병장을 지휘하고도 남을 만한 능력이 있었다.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와 같은 외국어 구사 능력도 탁월했고 만국공법과 전제주의와 공화주의 정치 체제에 관해서도 해박했다. 위종의 국제 정세에 관한 깊은 통찰력과 법 지식은 안중근이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안중근은 만국공법과 세계사를 포함하여 열강들의 제국주의 행태에 관한 위종의 논리 정연한 해설을 들으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그것은 지금까지 안중근이 경험하지 못했던 신학문이 깨우쳐준 충격이었다.
(231)
연해주 연합의병은 1908년 여름의 국내진공작전을 끝으로 최재형계와 이범윤계가 완전히 갈라서고 말았다. 동의회 결성 당시부터 내재되어 있던 양측의 갈등이 깊어져 더 이상 함께 의병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연해주 토박이 세력이었던 최재영계와 간도에서 망명해왔던 이범윤계의 세력이 쌍방의 지휘체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연합작전을 벌인다는 것은 처음부터 한계가 있는 전략이었다. 여기에 이범윤의 군자금 횡령 같은 문제가 불거져 양측이 더욱 반목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의 잘잘못을 들추어냈고 두 계파 사이의 갈등은 깊어만 갔다.
(254)
러시아 정부의 대일본 유화 정책의 실체를 파악한 위종은 이런 환경에서 대규모 의병전쟁으로 항일운동을 강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투쟁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만주 지역에 파병된 일본군은 아예 만주를 점령하기 위해 더욱 많은 병력을 증파했다. 따라서 만주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러시아와의 충돌은 시간 문제였다. 어느 한쪽이 물러서지 않는 한 또 한 번의 전쟁을 피할 수가 없었다. 위종은 조국 독립을 위해서는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프랑스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했지만 영국과 미국은 이미 일본과 야합하여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으며, 신해혁명으로 갓 태어난 신생 중국은 내전으로 남의 형편을 눈여겨볼 처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만이 그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269)
제정러시아 역시 일본과 동일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 위종의 판단이었다. 다만 일본을 서두르는 편이고 러시아는 좀 느릴 뿐 목적지는 역시 식민 제국주의였다. 주변의 약소국을 식민지로 탈취하는 것도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일했다. 이와는 반대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은 반제국주의 혁명이었다.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은 각 민족의 운명은 민족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원칙을 최초로 주장했다. 레닌의 민족자결원칙은 비록 러시아 내 소수민족의 자치와 독립에 국한된 주장이었지만 위종은 그의 주장이 조선의 민족 해방에도 강력한 우군이 되리라고 확신했다.
(303-304)
우수리 원주민과 자작나무는 한국인과 소나무의 관계와 같다. 이들은 사람의 영혼은 나무에서 태어나며, 이승에서 삶을 마치면 남자의 영혼은 버드나무로, 여자의 영혼은 자작나무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이들은 숲속의 모든 나무에 정령이 깃들어 산다고 여긴다.
봄이 되면 나무는 잠을 깨고 새로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난다. 숲에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는, 영혼이 영원히 순환하는 곳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살아 있으며 서로 에너지를 교환한다고 믿었다. 그 에너지는 자연에서 잠시 빌려 쓰다가 언젠가는 자연에 돌려줘야 하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삶과 죽음이란 이런 주기의 반복이며 에너지의 순환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나무도 꼭 필요한 만큼만 베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