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첫사랑
이정연
그 사진에 보면 그녀는 밤이슬을 맞으며 달을 쳐다보는 박꽃을 닮았습니다. 야유회에서 무슨 무용을 하고 있는 듯한 그녀의 손짓은 이제 막 꽃에 앉기 전의 흰나비의 나래와 흡사합니다.
그녀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까지 남편의 가슴에 요지부동이던 말하자면 남편의 "첫사랑"입니다. 그런 그녀를 보는 제 마음은 전에는 좀 불편하고 밉기도 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렇지가 않습니다. 앨범을 펼치는 남편의 시선이 아련히 그 사진에 머물러도 역시 그렇습니다. 제가 이런 마음이 드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급하게 앨범 정리를 한 듯 군데군데가 찢겨진 앨범이 듣지 않아도 그녀와 남편의 숨겨진 이야기가 있을 법한 짐작은 진작부터 한 터였고 어머님의 눈을 피해 용케도 살아 남은 그 사진이 가엾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론 서른 둘 노총각이 되도록 내버려 둔 그녀가 그다지 염려스럽지도 않아서 그 사진은 그 앨범 그 페이지에서 온전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그녀가 준 것 없이 미웠습니다. 비오는 날 다정하게 커피 한 잔씩을 하고 사이좋게 앨범을 펼쳤지만 종래는 각자의 베개를 안고 다른 방으로 간 경험이 제게도 더러는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또 멀쩡하다가도 그 앨범만 펼치면 눈빛이 풀리면서 어리버리해지는 남편을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는 아내라면 아마 지독히도 재미없는 사람일거라는 위안으로 스스로를 다독거렸던 순간도 몇 번은 있었으니까요!
어쨌거나 저는 불편한 사연을 간직한 그 사진을 때로는 잊고 또 때로는 기억하면서 어찌어찌 십 년을 지냈습니다. 이제 우리 부부사이도 두 아들이라는 튼튼한 동아줄에 묶여 좋아도 싫어도 별 수 없을 만큼 뻔뻔스러워졌습니다.
삼겹살과 소주병을 앞에 놓고 '내 첫사랑이 근사하다' 아니다 '내 첫사랑이 더 멋있네' 하면서 낄낄대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렇게 입씨름을 하는 중에 남편의 입에서 며칠 전 그녀에게 전화를 했었다는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일순 긴장이 되었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부지런히 삼겹살만 집어 날랐습니다. 이럴 때는 누구나 감정이 앞서지만 그래서 되는 일이 무엇이던가요!
저는 옆집아저씨의 얘기처럼'응! 그래서?' 하면서 미소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누나 같은 제 표정에 남편도 용기를 얻었는지 그녀와의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습니다.
모두들 새 천년의 시작이라며 흥분해서 들떠 있던 어느 날, 이제 막 사 십 줄에 들어선 남편은 이유 없이 쓸쓸하고 또 그 부산스러움에 떠밀려 부침하는 자신이 보잘 것 없어 보였는지 그녀에게 전화가 하고 싶었답니다. 때마침 전업주부인 그녀는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집에 있었고 그렇게 둘은 어른들 안부며 아이의 공부를 묻다가 그녀가 문득 잊은 듯이 '돈은 많이 벌어놓았느냐?'고 묻더라는 겁니다. 천사표인 남편은 사실대로 '지금은 아직 많이 벌지 못했지만 이제 곧 그렇게 될 거'라는 착한 대답을 했다는군요. 그녀는 다시 '돈을 많이 벌어서 뭐 할거냐?'고 물었고 남편은 '가족을 위해 쓸 만큼 남겨두고 나머지는 불우한 이웃을 돕고 싶다'는 말을 했답니다.
연초인 점을 감안해도 그 대답이 너무나 우스워 쿡쿡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그랬더니?' 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다시 그녀는 '그럼 지금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좀 내고 있냐?' 고 물었고 거짓말을 모르는 남편은 사실대로 '없다'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그녀는 '지금 백 만원 월급 받아서 만 원 성금 못 내는 사람은 백 억 벌어도 역시 일억을 내기 어렵다'고 하였다는군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전 그 동안 제 가슴에 알게 모르게 쌓였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니 이젠 그녀가 조금씩 좋아지기까지 합니다.
모르긴 해도 그녀는 사진보다 더 예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살림도 물론 잘 하겠지요. 보나마나 아들 딸 골고루 잘 낳아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겁니다. 남편은 잘 생겼고 돈도 잘 벌겠지요. 그럼요. 당연히 그럴 겁니다.
어떨 결에 뱉어버린 이야기를 숨길수도 없었던 남편은 이제나저제나 불안하게 제 눈치를 살폈지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연초에만 전화하지 말고 비오는 수요일에 전화를 해도, 전화만 아니라 커피를 사 주어도, 아니 밥을 사 주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평소와는 다른 너그러움에 남편은 웬 횡재? 하면서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데 저는 달리 믿어지는 구석이 있거든요. 그렇게 속 깊은 생각을 지닌 예쁜 마음의 그녀라면, 사랑하는 첫사랑의 가정이 온전히 지켜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마 교양과목으로 진작에 통과했을 테니까요!
첫댓글 어머..
너무나 멋진 마음씨..
두분다 교양과목 A+
네...과거는 과거일뿐...좋은마음은 언제나 빛이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