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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한가위
구상
어머니
마지막 하직할 때
당신의 연세보다도
이제 불초 제가 나이를 더 먹고
아버지 돌아가실 무렵보다도
머리와 수염이 더 세었답니다.
어머니
신부(神父) 형이 공산당에게 납치된 뒤는
대녀(代女) 요안나 집에 의탁하고 계시다
세상을 떠나셨다는데
관(棺)에나 모셨는지, 무덤이나 지었는지
산소도 헤아릴 길 없으매
더더욱 애절탑니다.
어머니
오늘은 중추 한가위,
성묘를 간다고 백 만 시민이
서울을 비우고 떠났다는데
일본서 중공서 성묘단이 왔다는데
저는 아침에 연미사(煉彌撒)만을 드리곤
이렇듯 서재 창가에 멍하니 앉아서
북으로 흘러가는 구름만 쳐다봅니다.
어머니
어머니
추석달
구재기
작은 꽃으로
한 가슴을 다스리며
하늘의 열매를 맺어왔구나
둥그런 소망 하나 길러 왔구나
솔숲 동산에 올라
솔바람 한줄기를 맞으며
내일을 비는 소년아, 소녀야
기다리며 사는 법을 익혀 왔구나
구름 벗어난 하늘 아래
네들의 부드러운 손을 맞잡고
뜨거운 입술의 땅, 그 품에 안기어
아무런 근심 없이 헤이는 이 가을의 정수(精髓)
꽃잎 지는 뜨락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떨리는 심장으로
내일을 그리는 소년아, 소녀야
소중한 꿈은 땀과 눈물로 지켜야 한다
아침에서 저녁까지
정성된 마음을 모으고 모아
굳게 닫힌 하늘의 문을 열고
숨결 같은 노래 하나 엮어 왔구나
한가위 전날 밤
구재기
토방밑에 달빛 모지락스레 쏟아지기 바쁜데 부엌에서는 그제서야 엿을 고기 시작한다. 시집온지 달포나 될까하는 막내 사촌 형수는 화덕 앞에 쭈그려 앉아 조심스러이 달걀전을 부치는가 하면 제육이며 수육꽂이에 한창이고, 무쇠솥 위 떡시루는 헉헉헉헉 숨차게도 뿌연 김을 뿜어 올린다.
부엌문 앞을 얼씬거리던 누렁이가 괜스리 몸을 추스리다가 하늘을 바라보며 머엉머어엉멍 짖어대다가 그만 부지깽이를 맞고 깨갱거리고, 담장 밑 남새밭가 대추나무의 대추알이 익어 가는지 집안 가득 단내가 풍기면서 박덩이 같이 여물어 가던 열 나흘 날 저녁달이 대추나무에 걸려 움쩍도 못하는 것을 보고는 가슴에선 듯 숨결에선 듯 어머니는 갑작스레 시집간 딸아이의 해산 소식이 궁금하다며 전화를 걸었다.
조무래기들이 발가를 벗고 히히히히 한 물통 속에서 몸을 씻어대는 한가위 전날 밤.
추석은
김사빈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집 뒷마당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보름달이다.
달밤에 달구 잡기 하다 넘어져
무릎이 깨어져 울던 일곱 살이다
한참 잊고 살다 생활에 지쳐
고향 생각나면 달려가던
뒷동산에 만나던 첫사랑이다.
큰어머니가 해주던 찹쌀 강정과
송화 가루로 만든 다석이다
울담 안에서 오가던 정을
건네주던 푸성귀 같은
내 사랑 여인아
책갈피 속에 곱게 간직한
진달래 꽃잎 같은 내 친구야
괴롭고 힘들 때
영혼의 안식처
내 쉼터인 것을
추석 지나 저녁때
나태주
남의 집 추녀 밑에
주저앉아 생각는다
날 저물 때까지
그때는 할머니가 옆에
계셨는데
어머니도 계셨는데
어머니래도 젊고 이쁜
어머니가 계셨는데
그때는 내가 바라보는
흰 구름은 눈부셨는데
풀잎에 부서지는 바람은
속살이 파랗게
떨리기도 했는데
사람 많이 다니지 않는
골목길에 주저앉아 생각는다
달 떠 올 때까지.
추석 무렵
맹문재
흙냄새 나는 나의 사투리가 열무맛처럼 담백했다
잘 익은 호박 같은 빛깔을 내었고
벼 냄새처럼 새뜻했다
우시장에 모인 아버지들의 텁텁한 안부인사 같았고
돈이 든 지갑처럼 든든했다
빨래줄에 널린 빨래처럼 평안한 나의 사투리에는
혁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호치키스로 철하지 않아도 되었고
일기예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나의 사투리에서 흙냄새가 나던 날들의 추석 무렵
시내버스 운전사의 어깨가 넉넉했다
구멍가게의 할머니 얼굴이 사과처럼 밝았다
이발사의 가위질소리가 숭늉처럼 구수했다
신문대금 수금원의 눈빛이 착했다
추석 달을 보며
문정희
그대 안에는
아무래도 옛날 우리 어머니가
장독대에 떠놓았던 정한수 속의
그 맑은 신이 살고 있나 보다.
지난 여름 모진 홍수와
지난 봄의 온갖 가시덤불 속에서도
솔 향내 푸르게 배인 송편으로
떠올랐구나.
사발마다 가득히 채운 향기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또 빌던 말씀
참으로 옥양목같이 희고 맑은
우리들의 살결로 살아났구나.
모든 산맥이 조용히 힘줄을 세우는
오늘은 한가윗날.
헤어져 그리운 얼굴들 곁으로
가을처럼 곱게 다가서고 싶다.
가혹한 짐승의 소리로
녹슨 양철처럼 구겨 버린
북쪽의 달, 남쪽의 달
이제는 제발
크고 둥근 하나로 띄워 놓고
나의 추석 달은
백동전 같이 눈부신 이마를 번쩍이며
밤 깊도록 그리운 얘기를 나누고 싶다.
한가위의 오늘 밤
박목월
달을 보며 생각한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한가위의 오늘 밤
달을 보는 어린이들.
한라산 기슭에도
태백산 골짜기 두메 산골에도
오늘 밤 달을 보는
어린이 어린이들.
몇 명이나 될까
헤아릴 순 없지만
오늘 밤 달을 보는 어린이 어린이들.
성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달빛에 빛나는 하얀 이마
달빛에 빛나는 까만 눈동자
모르는 그 누구도
달을 보면서
오늘 밤 달을 보는
나를 생각할까.
모르는 그 누구도
달을 보면서
오늘 밤 달을 보는 내게로
따뜻한 마음의 손을 내밀까.
그야 모르지
그야 모르지만 오늘 밤
달을 보는 모든 어린이들이
어쩐지 정답게 느껴진다.
언제 만날지
어떻게 사귀게 될지
그야 모르지만 오늘 밤
달을 보는 나는 따뜻한 마음의 손을
서로 잡고 있는 것 같다.
추석 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
서정주
추석전날 달밤에 마루에 앉아
온 식구가 모여서 송편 빚을 때
그 속에 푸른 풋콩 말아 넣으면
휘영청 달빛은 더 밝아오고
뒷산에서 노루들이 종일 울었네
저 달빛에 꽃가지도 휘이겠구나
달 보시고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
대수풀에 올빼미도 덩달아 웃고
달님도 소리내어 깔깔거렸네
추석
오상순
추석이 임박해 오나이다
어머니!
그윽한 저----
비밀의 나라에서
걸어오시는 어머니의
고운 발자국소리
멀리서 어렴풋이
들리는 듯 하오이다.
밤
오탁번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추석
유용주
빈집 뒤 대밭 못미처
봐주는 사람 없는 채마밭 가
감나무 몇 그루 찢어지게 열렸다
숨막히게 매달리고 싶었던 여름과
악착같이 꽃피우고 싶었던 지난 봄날들이
대나무 받침대 세울 정도로 열매 맺었다
뺨에 붙은 밥풀을 뜯어먹으며
괴로워했던 흥보의 마음,
너무 많은 열매는 가지를 위태롭게 한다
그러나 거적때기 밤이슬 맞으며
틈나는 대로 아내는 꽃을 피우고 싶어했다
소슬한 바람에도 그만 거둬 먹이지 못해
객지로 내보낸 자식들을 생각하면
이까짓 뺨 서너 대쯤이야
밥풀이나 더 붙어 있었으면
중 제 머리 못 깎아
쑥대궁 잡풀 듬성한 무덤 주위로
고추잠자리 한세상 걸머지고 넘나드는데
저기, 자식들 돌아온다
낡은 봉고차 기우뚱기우뚱
비누 참치 선물세트 주렁주렁 들고서
추석
유자효
나이 쉰이 되어도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으로 잠 못 이루고
철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어머니, 아버지.
아들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깊은 밤.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달빛의 손길.
모든 것을 용서하는 넉넉한 얼굴.
아, 추석이구나.
추석
이성복
밤하늘 하도 푸르러
선돌바위 앞에 앉아 밤새도록 빨래나 했으면 좋겠다
흰 옥양목 쳐대 빨고 나면 누런 삼베 헹구어 빨고
가슴에 물 한번 끼얹고
하염없는 자유형으로 지하 고성소까지 왕복했으면 좋겠다
갔다 와도 또 가고 싶으면 다시 갔다 오지
여태 살았지만
언제 살았다는 느낌 한번 들었던가
달빛 기도
이해인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 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 내
좀 더 환해지기를
모난 마음과 편견을 버리고
좀 더 둥글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려니
하늘보다 내 마음에
고운 달이 먼저 뜹니다
한가위 달을 마음에 걸어 두고
당신도 내내 행복하세요, 둥글게
추석달
정희성
어제는 시래기국에서
달을 건져내며 울었다
밤새 수저로 떠낸 달이
떠내도 떠내도 남아 있다
광한전도 옥토끼도 보이지 않는
수저에 뜬 맹물달
어쩌면 내 생애 같은
국물을 한 숟갈 떠 들고
나는 낯선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보아도 보아도
숟갈을 든 채 잠든
자식의 얼굴에 달은 보이지 않고
빈 사발에 한 그릇
달이 지고 있다
한가위 날이 온다
천상병
가을이 되었으니
한가위 날이 멀지 않았소.
추석이 되면
나는 반드시
돌아간 사람들을 그리워하오.
그렇게도 사랑 깊으시던 외할머니
그렇게도 엄격하시던 아버지
순하디 순하던 어머니
요절한 조카 영준이!
지금 천국에서
기도하시겠지요.
한가위
최광림
어머니,
오늘은
당신의 치마폭에서 달이 뜨는 날입니다
아스라한 황톳길을 돌아
대 바람에 실려온 길 잃은 별들도
툇마루에 부서지는 그런 날입니다
밀랍처럼 곱기만 한 햇살과
저렇듯 해산달이 부푼 것도
당신이 살점 떼어 내건 등불인 까닭입니다
새벽이슬 따 담은
정안수 한 사발로도
차례 상은 그저 경건한 풍요로움입니다
돌탑을 쌓듯
깊게 패인 이랑마다
일흔 해 서리꽃 피워내신 신앙 같은 어머니,
다만 살아온 날 만큼
당신의 고운 치마폭에
두 무릎 꿇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눈물 비친 웃음 한 소절
입김으로 펄펄 날리며
모두가 오래도록 그랬음 정말 좋겠습니다.
추석 날 아침에
황금찬
고향의 인정이
밤나무의 추억처럼
익어갑니다
어머님은
송편을 빚고
가을을 그릇에 담아
이웃과 동네에
꽃잎으로 돌리셨지
대추보다 붉은
감나무잎이
어머니의
추억처럼
허공에
지고 있다
○●○●○●○●○●○
한가위
구상
어머니
마지막 하직할 때
당신의 연세보다도
이제 불초 제가 나이를 더 먹고
아버지 돌아가실 무렵보다도
머리와 수염이 더 세었답니다.
어머니
신부(神父) 형이 공산당에게 납치된 뒤는
대녀(代女) 요안나 집에 의탁하고 계시다
세상을 떠나셨다는데
관(棺)에나 모셨는지, 무덤이나 지었는지
산소도 헤아릴 길 없으매
더더욱 애절탑니다.
어머니
오늘은 중추 한가위,
성묘를 간다고 백 만 시민이
서울을 비우고 떠났다는데
일본서 중공서 성묘단이 왔다는데
저는 아침에 연미사(煉彌撒)만을 드리곤
이렇듯 서재 창가에 멍하니 앉아서
북으로 흘러가는 구름만 쳐다봅니다.
어머니
어머니
추석달
구재기
작은 꽃으로
한 가슴을 다스리며
하늘의 열매를 맺어왔구나
둥그런 소망 하나 길러 왔구나
솔숲 동산에 올라
솔바람 한줄기를 맞으며
내일을 비는 소년아, 소녀야
기다리며 사는 법을 익혀 왔구나
구름 벗어난 하늘 아래
네들의 부드러운 손을 맞잡고
뜨거운 입술의 땅, 그 품에 안기어
아무런 근심 없이 헤이는 이 가을의 정수(精髓)
꽃잎 지는 뜨락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떨리는 심장으로
내일을 그리는 소년아, 소녀야
소중한 꿈은 땀과 눈물로 지켜야 한다
아침에서 저녁까지
정성된 마음을 모으고 모아
굳게 닫힌 하늘의 문을 열고
숨결 같은 노래 하나 엮어 왔구나
한가위 전날 밤
구재기
토방밑에 달빛 모지락스레 쏟아지기 바쁜데 부엌에서는 그제서야 엿을 고기 시작한다. 시집온지 달포나 될까하는 막내 사촌 형수는 화덕 앞에 쭈그려 앉아 조심스러이 달걀전을 부치는가 하면 제육이며 수육꽂이에 한창이고, 무쇠솥 위 떡시루는 헉헉헉헉 숨차게도 뿌연 김을 뿜어 올린다.
부엌문 앞을 얼씬거리던 누렁이가 괜스리 몸을 추스리다가 하늘을 바라보며 머엉머어엉멍 짖어대다가 그만 부지깽이를 맞고 깨갱거리고, 담장 밑 남새밭가 대추나무의 대추알이 익어 가는지 집안 가득 단내가 풍기면서 박덩이 같이 여물어 가던 열 나흘 날 저녁달이 대추나무에 걸려 움쩍도 못하는 것을 보고는 가슴에선 듯 숨결에선 듯 어머니는 갑작스레 시집간 딸아이의 해산 소식이 궁금하다며 전화를 걸었다.
조무래기들이 발가를 벗고 히히히히 한 물통 속에서 몸을 씻어대는 한가위 전날 밤.
추석은
김사빈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집 뒷마당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보름달이다.
달밤에 달구 잡기 하다 넘어져
무릎이 깨어져 울던 일곱 살이다
한참 잊고 살다 생활에 지쳐
고향 생각나면 달려가던
뒷동산에 만나던 첫사랑이다.
큰어머니가 해주던 찹쌀 강정과
송화 가루로 만든 다석이다
울담 안에서 오가던 정을
건네주던 푸성귀 같은
내 사랑 여인아
책갈피 속에 곱게 간직한
진달래 꽃잎 같은 내 친구야
괴롭고 힘들 때
영혼의 안식처
내 쉼터인 것을
추석 지나 저녁때
나태주
남의 집 추녀 밑에
주저앉아 생각는다
날 저물 때까지
그때는 할머니가 옆에
계셨는데
어머니도 계셨는데
어머니래도 젊고 이쁜
어머니가 계셨는데
그때는 내가 바라보는
흰 구름은 눈부셨는데
풀잎에 부서지는 바람은
속살이 파랗게
떨리기도 했는데
사람 많이 다니지 않는
골목길에 주저앉아 생각는다
달 떠 올 때까지.
추석 무렵
맹문재
흙냄새 나는 나의 사투리가 열무맛처럼 담백했다
잘 익은 호박 같은 빛깔을 내었고
벼 냄새처럼 새뜻했다
우시장에 모인 아버지들의 텁텁한 안부인사 같았고
돈이 든 지갑처럼 든든했다
빨래줄에 널린 빨래처럼 평안한 나의 사투리에는
혁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호치키스로 철하지 않아도 되었고
일기예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나의 사투리에서 흙냄새가 나던 날들의 추석 무렵
시내버스 운전사의 어깨가 넉넉했다
구멍가게의 할머니 얼굴이 사과처럼 밝았다
이발사의 가위질소리가 숭늉처럼 구수했다
신문대금 수금원의 눈빛이 착했다
추석 달을 보며
문정희
그대 안에는
아무래도 옛날 우리 어머니가
장독대에 떠놓았던 정한수 속의
그 맑은 신이 살고 있나 보다.
지난 여름 모진 홍수와
지난 봄의 온갖 가시덤불 속에서도
솔 향내 푸르게 배인 송편으로
떠올랐구나.
사발마다 가득히 채운 향기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또 빌던 말씀
참으로 옥양목같이 희고 맑은
우리들의 살결로 살아났구나.
모든 산맥이 조용히 힘줄을 세우는
오늘은 한가윗날.
헤어져 그리운 얼굴들 곁으로
가을처럼 곱게 다가서고 싶다.
가혹한 짐승의 소리로
녹슨 양철처럼 구겨 버린
북쪽의 달, 남쪽의 달
이제는 제발
크고 둥근 하나로 띄워 놓고
나의 추석 달은
백동전 같이 눈부신 이마를 번쩍이며
밤 깊도록 그리운 얘기를 나누고 싶다.
한가위의 오늘 밤
박목월
달을 보며 생각한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한가위의 오늘 밤
달을 보는 어린이들.
한라산 기슭에도
태백산 골짜기 두메 산골에도
오늘 밤 달을 보는
어린이 어린이들.
몇 명이나 될까
헤아릴 순 없지만
오늘 밤 달을 보는 어린이 어린이들.
성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달빛에 빛나는 하얀 이마
달빛에 빛나는 까만 눈동자
모르는 그 누구도
달을 보면서
오늘 밤 달을 보는
나를 생각할까.
모르는 그 누구도
달을 보면서
오늘 밤 달을 보는 내게로
따뜻한 마음의 손을 내밀까.
그야 모르지
그야 모르지만 오늘 밤
달을 보는 모든 어린이들이
어쩐지 정답게 느껴진다.
언제 만날지
어떻게 사귀게 될지
그야 모르지만 오늘 밤
달을 보는 나는 따뜻한 마음의 손을
서로 잡고 있는 것 같다.
추석 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
서정주
추석전날 달밤에 마루에 앉아
온 식구가 모여서 송편 빚을 때
그 속에 푸른 풋콩 말아 넣으면
휘영청 달빛은 더 밝아오고
뒷산에서 노루들이 종일 울었네
저 달빛에 꽃가지도 휘이겠구나
달 보시고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
대수풀에 올빼미도 덩달아 웃고
달님도 소리내어 깔깔거렸네
추석
오상순
추석이 임박해 오나이다
어머니!
그윽한 저----
비밀의 나라에서
걸어오시는 어머니의
고운 발자국소리
멀리서 어렴풋이
들리는 듯 하오이다.
밤
오탁번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추석
유용주
빈집 뒤 대밭 못미처
봐주는 사람 없는 채마밭 가
감나무 몇 그루 찢어지게 열렸다
숨막히게 매달리고 싶었던 여름과
악착같이 꽃피우고 싶었던 지난 봄날들이
대나무 받침대 세울 정도로 열매 맺었다
뺨에 붙은 밥풀을 뜯어먹으며
괴로워했던 흥보의 마음,
너무 많은 열매는 가지를 위태롭게 한다
그러나 거적때기 밤이슬 맞으며
틈나는 대로 아내는 꽃을 피우고 싶어했다
소슬한 바람에도 그만 거둬 먹이지 못해
객지로 내보낸 자식들을 생각하면
이까짓 뺨 서너 대쯤이야
밥풀이나 더 붙어 있었으면
중 제 머리 못 깎아
쑥대궁 잡풀 듬성한 무덤 주위로
고추잠자리 한세상 걸머지고 넘나드는데
저기, 자식들 돌아온다
낡은 봉고차 기우뚱기우뚱
비누 참치 선물세트 주렁주렁 들고서
추석
유자효
나이 쉰이 되어도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으로 잠 못 이루고
철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어머니, 아버지.
아들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깊은 밤.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달빛의 손길.
모든 것을 용서하는 넉넉한 얼굴.
아, 추석이구나.
추석
이성복
밤하늘 하도 푸르러
선돌바위 앞에 앉아 밤새도록 빨래나 했으면 좋겠다
흰 옥양목 쳐대 빨고 나면 누런 삼베 헹구어 빨고
가슴에 물 한번 끼얹고
하염없는 자유형으로 지하 고성소까지 왕복했으면 좋겠다
갔다 와도 또 가고 싶으면 다시 갔다 오지
여태 살았지만
언제 살았다는 느낌 한번 들었던가
달빛 기도
이해인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 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 내
좀 더 환해지기를
모난 마음과 편견을 버리고
좀 더 둥글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려니
하늘보다 내 마음에
고운 달이 먼저 뜹니다
한가위 달을 마음에 걸어 두고
당신도 내내 행복하세요, 둥글게
추석달
정희성
어제는 시래기국에서
달을 건져내며 울었다
밤새 수저로 떠낸 달이
떠내도 떠내도 남아 있다
광한전도 옥토끼도 보이지 않는
수저에 뜬 맹물달
어쩌면 내 생애 같은
국물을 한 숟갈 떠 들고
나는 낯선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보아도 보아도
숟갈을 든 채 잠든
자식의 얼굴에 달은 보이지 않고
빈 사발에 한 그릇
달이 지고 있다
한가위 날이 온다
천상병
가을이 되었으니
한가위 날이 멀지 않았소.
추석이 되면
나는 반드시
돌아간 사람들을 그리워하오.
그렇게도 사랑 깊으시던 외할머니
그렇게도 엄격하시던 아버지
순하디 순하던 어머니
요절한 조카 영준이!
지금 천국에서
기도하시겠지요.
한가위
최광림
어머니,
오늘은
당신의 치마폭에서 달이 뜨는 날입니다
아스라한 황톳길을 돌아
대 바람에 실려온 길 잃은 별들도
툇마루에 부서지는 그런 날입니다
밀랍처럼 곱기만 한 햇살과
저렇듯 해산달이 부푼 것도
당신이 살점 떼어 내건 등불인 까닭입니다
새벽이슬 따 담은
정안수 한 사발로도
차례 상은 그저 경건한 풍요로움입니다
돌탑을 쌓듯
깊게 패인 이랑마다
일흔 해 서리꽃 피워내신 신앙 같은 어머니,
다만 살아온 날 만큼
당신의 고운 치마폭에
두 무릎 꿇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눈물 비친 웃음 한 소절
입김으로 펄펄 날리며
모두가 오래도록 그랬음 정말 좋겠습니다.
추석 날 아침에
황금찬
고향의 인정이
밤나무의 추억처럼
익어갑니다
어머님은
송편을 빚고
가을을 그릇에 담아
이웃과 동네에
꽃잎으로 돌리셨지
대추보다 붉은
감나무잎이
어머니의
추억처럼
허공에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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