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바다역사의 산 증인, 수필가 서부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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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로 그린 수필가 서부길 선생
커피로 그린 수필가 서부길 선생
“원래는 제주 남방 200km가 조기 월동지(越冬地)였어요. 대가리를 뻘에 파묻고 거꾸로 동면을 하다, 봄이 되면 목포 앞바다를 거슬러 영광 칠산 앞바다와 격렬비열도를 거쳐 덕적도까지 올라와요. 그리고는 사루골, 청석골 등 바다 속 갯골을 타고 해주 앞바다로 이동해, 대부분 연평도 앞 모래밭에 산란을 하죠. 일부는 발해만 앞까지 올라가기도 하고요. 그래서 해마다 4,5,6월이면 전국의 조기잡이 배들이 죄다 연평도로 몰려들어, 바다 위 어시장인 ‘파시(波市)’가 장관을 이뤘더랬죠. 어부들이 고기그물을 밟고 바다 위를 걸어 다닐 정도였으니, 조기가 얼마나 엄청나게 잡혔는지 상상이 갈 거예요. 이제 희미한 전설이 되어버렸지만, 연평도는 ‘3떼’로 유명했어요. 조기떼, 어부떼, 색시떼가 그것이죠. 연평도 가는 여객선이 온통 울긋불긋 차려입은 용동권번 기생들로 미어지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조기철이 끝나는 9,10,11월에는 갈치잡이가 또 성행했죠. 갈치는 제주도 근해에서 서식하다 중국의 장강(양자강) 하류까지 내려가 산란하는 어종이에요. 갈치떼도 역시 풍요로워서 그물을 내리는 족족 만선이었어요. 보통 어선들은 조금 때 출항했다 사리 때 고기 잡고, 다시 조금 때 귀항하는 보름 간격의 사이클로 조업해요. 생선 값을 비싸게 받을 수 있는 서울과 가까워 갈칫배들도 죄다 인천으로 몰려들곤 했죠. 간혹 어황(漁況)이 시원치 않을 경우에만 신선도나 연료비를 감안해 잡은 고기를 목포에서 출하했는데, 그때는 선주들이 선원부인들을 죄 동원해 목포로 내려가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어요.”
선생님 칭찬 덕분에 책 읽고 글을 쓰는 습관 들여
해양문학이라는 장르로 대한민국 문단에서 인정받고 있는, 수필가 서부길(70세)선생을 만수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갯벌작가상(2010년)과 제27회 수필문학상(2017년)을 수상한 선생의 이력은 평생을 해양수산과 공무원으로 봉직한 체험에서 곰삭은 것이다. 고희(古稀)라는 연세가 무색하게 선생은 시종일관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해박한 기억력으로 굽이굽이 부침을 거듭해온, 인천의 바다역사와 물고기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풀어냈다.
“1998년 11월, 제2차 ‘한일어업협정’때 받은 ‘청특(청구권자금특별회계)’이 ‘어업현대화’자금으로 지원되면서, 소위 통통선이라 불리는 야끼다마(소구발동선) 일색이던 인천어선들의 현대화가 본격 시작됐어요. 선박 톤수와 동력이 대형화되고 SSB무전기와 방향탐지기, 레이더, 로랑(선박항법장치) 등의 첨단기기들을 갖춰 비로소 원근해어업이 본격적으로 가능해진 거죠. EEZ(배타적경제수역)가 겹치는 중간수역이 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되면서 일본의 대형어선들에 의한 한국어민들의 피해가 늘어나자 정부가 부랴부랴 내놓은 대책이었어요. 그 바람에 성능이 좋아진 배로 제주도 앞바다까지 진출해, 월동 중인 조기들을 싹쓸이하면서 결국 조기 씨가 말라버리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죠. 연평도 앞바다까지 조기들이 올라오기도 전에 모조리 잡아버리는 통에 멸종위기 직전까지 내몰리게 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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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잡이 나가는 송도어민들 (1970년대, 사진 서부길 제공)
인천 동구 배다리에서 태어났단다. 생후 한 살 때 6.25가 터지자 할머니 등에 업혀 평택까지 피난을 가야했다. 피난길에 버려진 아이들이 지천이던 시절이었다. 삼촌, 고모만도 무려 10남매에 주렁주렁 달린 어린 형제자매들까지, ‘사람새끼라 차마 버릴 수 없었다’며 할머니는 생전에 선생을 놀리시곤 했다. 옛 문화극장 앞 금곡동에서 자랐는데, 아버지는 낡은 용달차로 미군 구호품과 원당을 실어 나르는 운수업을 하셨다. 잦은 차량고장과 기사봉급으로 집안형편은 늘 빠듯했지만, 다른 집 아이들처럼 배를 곯은 적은 없었다. 창영초등학교를 다녔는데, 1년 선배인 강재구소령이 바로 윗동네에 살았단다.
“전교생이 6천명이나 되다보니 한 반에 100명도 넘는 아이들이 우글우글 대는 데다, 전쟁으로 학업이 중단된 누나와 형들까지 같은 학년에 뒤섞여 공부했어요. 교실이 비좁아 3부제 수업은 예사였죠.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에 취미를 붙이게 된 건, 순전히 4학년 때 인천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새로 부임하신 여선생님 덕분이에요. 국어책을 읽는 선생님의 입술이 어찌나 예쁘던지,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벌게지곤 했어요. 그런 선생님이 어느 날 제가 쓴 글짓기를 칭찬하시고, 발음이 또렷하다며 아이들 앞에서 낭독까지 하게 했죠. 꿈만 같았어요. 그때부터 더욱 더 선생님 칭찬을 듣기 위해 부지런히 책을 읽고 글을 써댔죠. 그것이 재미로 이어지더니 끝내 평생 습관이 된 거예요. 제 문학성은 아마도 그때 발아를 시작했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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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차로 조개를 실어 나르던 송도갯벌 (1960~1970년대, 사진 서부길 제공)
미국의 잉여농산물법(PL480)에 의해, 미국에서 버터와 치즈를 만들고 남은 우유가루와 옥수수가루를 무상으로 학교에서 양재기로 봉지에 퍼주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쪄 떡을 만들어 허기를 달랬다.
배다리 주위의 밭은 대부분 화교들이 경작했다. 거름으로 쓰려고 파놓은 똥 고개에 빠져 인분毒이 오른 아이들도 여럿이었다. ‘산토닌’이라는 기생충 약을 허기진 아이들에게 강제로 먹이는 바람에 시도 때도 없이 독한 ‘횟배앓이’에 시달렸는가 하면, ‘이’를 박멸한다며 1급 발암물질인 DDT를 등교하는 아이들 옷 속에 손 펌프를 이용해 살포하기도 했다. 참담한 유년시절의 추억들이 선생의 기억회로 속을 비집고 와르르 쏟아졌다.
“저뿐 아니라,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은 모두 인천중학교를 지원했어요. 분명히 합격선을 넘을 만큼 문제를 잘 풀었다고 자신했는데, 막상 발표 때 보니 제 이름이 없는 거예요. 황당했죠. 인중 떨어지면 송도나 동산중으로 진학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전 인천서중에 입학했어요. 학비가 비싼 사립대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공립학교를 아버님이 강권하셨거든요. 당시 우리 집 7남매가 줄줄이 학생이었던 데다, 지금처럼 의무교육이 시행되지 않던 때라 불가피한 선택이었죠. 황해도 용호도에 있던 수산학교가 전쟁 통에 인천으로 옮겨오면서 ‘경기수산고등학교(현 해양과학고)’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는데, 인천서중은 그 경기수산고의 병설학교였어요. 그때 벌써 해양수산 쪽으로 제 운명이 정해졌지 싶어요. 고등학교도 경기수산고 제조과(수산식품가공)로 진학했죠. 3년간 바다수산자원과 해양미생물에 대해 열심히 배웠어요.”
![조개까기대회.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news.incheon.go.kr%2Fupload%2Feditor%2F20190320%2F064e851a-e87a-489a-8efc-44de710488bd.jpg)
▲조개까기 경진대회 (현 라마다 호텔 앞 1960년대 말, 사진 서부길 제공)
인천 앞바다 손바닥 보듯 훤한 수산 공무원으로 '평생'
글 잘 쓰고 발음이 정확하다고 소문이 나, 중1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졸업식 송사와 답사를 붙박이로 도맡았단다. 진짜 아나운서나 성우가 되어볼 요량으로, 196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 퇴계로의 서울성우학원에 등록했다.
동아방송 인기 아나운서였던 전영우씨가 가르치던 곳이었다. 학원을 끝마치고 KBS라디오 단막극에 내레이션이나 보조출연자로 출연도 했다. 하지만 쥐꼬리만 한 출연료로는 서울에서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지방공무원 5급 공채시험에 합격해 인천시청 수산과로 발령이 났다.
“군대 3년 빼고 그렇게 평생을 해양수산과 공무원으로 살았어요. 서해5도는 물론이고 영종, 대부, 영흥바다까지 손바닥 보듯 훤해요. 뭍에서 섬으로, 다시 섬에서 섬으로 돌며 어업지도를 하고 어민행정을 펼쳤죠. 조차(潮差)가 무려 9m로 세계에서 2번째인 인천은 온통 매립의 역사예요. 가좌동 삼익가구 인근의 인천교, 송도신도시, 영종신공항, 인천동아매립지, 연안부두초입의 낙섬, 소래, 북항, 청라지구 등 1980년에서 2000년 초반까지 매립이 진행된 지역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찰 정도죠. 둑 쌓고 침전만 시키면 바로 금싸라기 땅으로 변하는 엘도라도였던 셈이지만, 매립으로 사라진 인천의 갯벌은 무려 3,000만평이나 돼요. 여의도 전체의 10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면적이에요. 문제는 그 대가로 인천이 치러야할 바다생태계의 붕괴와 어족자원의 피해는 수치로 계량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이죠. 미래에 어느 쪽이 진짜 이익이 될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지만요. 1990년대 초반 수산과장(서기관)을 하면서는, 어민들의 한화 화학성능시험장 반대시위,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시위, 송도매립과 신공항건설로 인한 어민생존권 보장시위까지, 최일선에서 어민들과 시 공영개발사업단 사이를 중재하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조상대대로 조개 캐고 고기 잡아 아이들 키워내던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송도4개 어촌계 1,256명의 어민들의 형편과 처지를 너무 잘 알고 또 친밀하게 지내오던 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죽을 맛이었어요. 속만 새카맣게 타들어가던 제가 견디기 위한 방편으로 붙잡은 게 바로 수필문학이에요.”
1989년 문학 사랑하는 동료들과 ‘공무원문학동호회’ 결성
1989년 몇몇 뜻있는 동료들과 함께 ‘공무원문학동호회’를 결성하고, ‘문학산’이라는 공무원문예지를 창간해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전국최초였던 ‘문학산’은 내무부수범사례로 선정되어, 전국 공무원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다. 2대회장을 역임했고, 은퇴한 지금도 명예회원과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는 갯벌문학회 회장을 맡았고, 2005년엔 ‘청라문학’ 창간멤버로 2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잡지며 신문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아 2권의 수필집, ‘바다, 그 영원한 꿈(2007년)’과 ‘파일을 열며(2017년)’를 출간했다.
“평안도 어민들이 피난 내려오며 가져온 어법 중 하나가 ‘안강망(鮟鱇網)’이에요. 흔히 ‘물텀벙이’로 불리는 ‘아귀’라는 물고기의 한문이름이 ‘안강어(鮟鱇魚)’인데, 조류에 따라 맹종죽으로 만든 수해(그물윗뜸)는 위로 벌어지고, 쇠로 된 암해(그물아랫뜸)는 아래로 드리워지는 모습이 마치 아귀 입모양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재미난 이름이죠. 폭 50m에 길이가 200m인 이 안강망을 한번 내리면 그물이 터질 정도로 조기들이 끌려 올라오던 좋은 시절이 있었어요. 자연이나 생태도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한번 무너지면 되돌리기가 요원해진다는 점에서 특히 그래요. 물고기 한 마리의 미래가 종래에는 인류의 미래일 수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이제 되새겨 볼 시점인 거죠.”
글. 커피그림 유사랑 I-View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