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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을해박해(乙亥迫害)(1815년)
1815년의 박해 - 대구(大邱)와 원주(原州)의 순교자
1. 박해(迫害)는 다시 시작되고(노래산(老萊山)의 박해)
① 조선에는 흉년(凶年)이 꽤 자주 드는데, 이 나라는 쇄국(鎖國)이라는 오랜 전통(傳統)을 고집하고 있어, 다른 나라 사람들과 거의 아무런 교역(交易)도 하지를 않고, 따라서 외부(外部)의 구원(救援)을 도무지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흉년(凶年)이 들면 죽는 사람이 많으며, 특히 외교인(外敎人)중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하다. 특히[외교인 중에는]이란 말을 쓴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保護)로 그런지, 혹은 신자(信者)들 사이의 박애(博愛)의 정신이 돈독(敦篤)하여서 그런 것인지, 어떻든 모든 점을 고려(考慮)해 볼 때, 신자 중에 기아(饑餓)로 죽는 이는, 우상(偶像)을 숭배(崇拜)하는 동족들보다 그 수가 훨씬 적다는 것은 밝히 드러난 사실이다.
그러는 가운데 1814년의 추수는 거의 완전히 허사(虛事)로 돌아가, 일찍이 사람이 겪은 기억(記憶)이 없을 만큼 무서운 기근(饑饉)이 전국을 엄습(掩襲)하였다. 추수하였던 얼마 안 되는 곡식(穀食)은 겨울동안에 이미 소비되었고, 봄이 오자 나라 안 전체(全體)가 참혹(慘酷)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고, 또한 곤궁(困窮)으로 인하여 막연히 길을 나섰던 많은 사람들도 도중에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② 이와 같은 불행(不幸)을 당하는 중에, 전지수(* 전지순,전지순)라는 흉악(凶惡)한 배신자(背信者)는 교우(敎友)들의 등을 쳐 먹을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는 경상도(慶尙道)의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돈과 옷가지와 양식을 구걸하였다. 교우(敎友)들은 할 수 있는데 까지는 동냥을 주었으며, 또 그들의 곤궁(困窮)한 처지(處地)에 비해서, 아마도 많은 동냥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가진 것들이 모두 바닥이 드러나 애긍(哀矜)이 줄어드니, 전지수는 구걸로 받는 것에서 별로 만족(滿足)을 느끼지 못하여, 교우들을 밀고(密告)할 생각을 품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복수(復讐)도 되고, 한편으로는 저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약탈(掠奪)하여, 저들의 그 오죽잖은 재물(財物)을 거침없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하자는 심보에서였다.
기근(饑饉)이 들면 못된 본능(本能)이 더욱 힘차게 발동한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며, 벌을 받지 않고도 꽤 많은 노략질을 할 수 있다는 미끼로 탐욕(貪慾)이 움직일 포고(捕校)들의 지지를 받으리라는 것을 미리부터 확신(確信)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가 밀고(密告)를 하러가니, 관장(官長)과 그 부하(部下)들은 아주 기꺼이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교우들이 큰 축일(祝日)은 집에 돌아와서 지내는 풍습(風習)을 다들 알고 있었는지라, 첫 번 거사(擧事)를 부활주일(復活主日)에 기습적(奇襲的)으로 하기로 결정하니, 그해는 부활축일(復活祝日)이 2월 22일이었다.
③ 이 날이 되어 교우들이 함께 모여 큰 소리로 경문(經文)을 합송하고 있을 때, 배신자(背信者)를 앞장세운 한 떼의 포졸(捕卒)이 청송(靑松)고을 노래산(老來山) 마을을 별안간 습격(襲擊)하였다. 박해(迫害)를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교우들은 너무나도 의외여서, 처음에는 도둑들이 쳐들어 온 줄로 알고, 몸이 날쌔고 기운이 센 고성운(高聖云) 요셉의 지휘에 따라 힘으로 대적(對敵)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관헌(官憲)이 파견한 포졸(捕卒)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곧 모든 저항(抵抗)을 그치고 고성운(高聖云) 요셉조차도 어린양같이 양순(良順)하여져서 맨 먼저 포승(捕繩)을 받았다. 이번 출동으로 많은 신자가 붙들려 청송(靑松)의 상부관청(上部官廳)인 경주진영(慶州鎭營)으로 압송되었다. 며칠 후에 다른 포졸(포졸)들이 진보(眞寶)고을 머루산(지금의 영양군(英陽郡) 석포면(石浦面) 포산동(葡山洞)에 해당)마을을 불의에 습격하여 많은 신자를 잡아 안동진영(安東鎭營)으로 압송하였다.
④ 이 슬픈 소식(消息)은 오래지 않아 사방으로 퍼져나가, 신자들은 다시 공포(恐怖)에 떨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의례히 그러했듯이, 어떤 교우들은 탈출(脫出)하여 다른 도(道)로 피신(避身)을 하였고, 그렇게 할 능력(能力)이 없는 신자들은 마을에 그냥 처져, 끊임없는 불안(不安)속에서 붙잡힐 때를 기다리며, 낮에는 숲속이나 산중에서지내다가 밤이 되면 몰래 마을로 내려와, 음식을 조금 준비해가지고는 이내 맹수(猛獸)들이 우글거리는 숲 속으로 다시 찾아들었다. 그들의 눈에는 맹수(猛獸)들이 오히려 포졸(捕卒)들 보다는 덜 무섭게 보였던 것이다. 사방에서 교우(敎友)들이 많이 붙들려 옥마다 교우(敎友)들로 이내 꽉 차고 말았다.
⑤ 경주(慶州)에서는 고문(拷問)과 굶주림으로 인하여 많은 신입교우들이 배교(背敎)를 하였고, 따라서 이들은 곧 석방(釋放)되었다. 그러니 이들의 동료(同僚)중에는 좀더 용기(勇氣)를 보여주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용감(勇敢)하게 증거(證據)하였다. 전하여지는 바에 의하면, 저들 중에 7명은 굶주림으로 쓰러졌든지, 고문(拷問)으로 죽었든지, 어떻든 상급관청으로 이송(移送)되기 전 3월에 옥사(獄死)하였다고 하는바, 그들의 이름은 아래와 같다.
박춘청(* 비망기에는 박춘성으로 나옴)의 아버지 박(朴)바오로와, 박(朴)바오로의 사촌(四寸) 박(朴)관서인데 이분은 홀아비였는데, 새로 교(敎)에 들어와 박해(迫害)가 일어나자 비로소 영세하였다. 다음은 박(朴)바오로의 외삼촌(外三寸)인 고산(高山) 김 서방인데, 고산에서 왔다하여 이렇게 불리었다. 여기에 경상도(慶尙道) 사람 김사일,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경상도(慶尙道)의 이 외딴 지방에서 그때 일어난 일을 목격(目擊)한 증인(證人)도 없고, 이에 대한 기록(記錄)도 없는 만큼, 적극적으로 확언(確言)할 마음은 나지 않는다.
⑥ 신앙(信仰)을 끝까지 증거(證據)하며, 주림과 고문(拷問)에도 쓰러지지 아니한 신자(信者)들은 오래지 않아 경상도(慶尙道) 감영(監營)이 있는 대구(大邱)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와 그의 아내 최성열(崔性悅) 발바라, 또 그의 사위 최「여옥」(봉한(奉漢)) 프란치스꼬, 김시우(金時佑) 알렉스, 고성대(高聖大) 베드로와 그의 아우 고성운(高聖云) 요셉, 그리고 김 아가다 ․ 막달레나이다. 이제 이들 각 사람에 대하여 몇 마디씩 적기로 하자.(* 경주(慶州)와 안동(安東) 진영(鎭營)에 갇혀 있던 신자 촌 71명 중 20명은 배교하고 즉시 석방되었다. 이중 배교하였으나 판결을 못 받은 16명과 병으로 아직 취초(取招)를 못 받은 여교우(女敎友) 2명을 뺀 나머지 33명은 대구의 감영(監營)으로 이송(移送)되었다. 여기에는 청송(靑松)에서 붙잡힌 신자가 14명, 진보(眞寶)에서 붙잡힌 신자가 13명, 영양(英陽)에서 붙잡힌 신자가 6명 등 도합 33명이었다.)
1)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와 그의 아내 최성열(崔性悅) 발바라
산골(* 손골) 박씨(朴氏)네 외조부(外祖父)인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에 대해서는 그가 형벌(刑罰)을, 백절불굴(百折不屈)의 항구심으로 참아 받은 후, 그에게 내려진 사형선고(死刑宣告)가 집행(執行)되기 전에 옥사(獄死)하였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의 아내 최성열(崔性悅) 발바라라는 서(徐) 과부라는 이름으로 신자들에게 더 알려져 있었는데, 본시 홍주(洪州) 땅 한내장벌(지금의 예산군(禮山郡) 고덕면(古德面) 대천리(大川里) 사람이었다 한다. 이 여인은 얼굴이 어여쁘고 성격이 온화(溫和)하며, 참을성이 있었고, 덕행(德行)이 비범하여, 사람들의 눈을 끌었었다. 1801년 전에 입교(入敎)하였는데, 첫 남편을 여의고,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에게 개가(改嫁)하였다. 부활축일(復活祝日)에 붙잡혔는데, 붙들리던 바로 그때에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을 당하게 되었으나, 이것을 용감하게 참아 받았다. 얼마 후에 이 여인은 삼모장(三毛杖)으로 하도 혹독한 형벌(刑罰)을 당하여, 옥에 돌아오자 결심(決心)이 약해져서 배교(背敎)할 마음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에 그녀의 사위인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꼬가 그녀를 도와주고 위로(慰勞)하여, 그들이 함께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幸福)스러운 일인가를 감격적으로 말하며, 이렇게 좋은 기회(機會)를 놓치지 말라고 권면(勸勉)하였다. 사위가 이렇게 간곡히 권유(勸誘)한 덕으로 모든 유혹(誘惑)이 사라지고, 그날부터 이 여인은 갖가지 고문(拷問)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견디어 나갔다. 이리하여 이 여인은 다름 증거자(證據者)들과 함께 대구(對句)로 이송되었다.
2)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꼬
㉠최「여옥」(봉한(奉漢)) 프란치스꼬는 진강이라는 아명(兒名)으로 부르는 이들도 많았는데, 이 위에서 말한 부부의 사위였다. 홍주(洪州) 다래골(지금의 청양군(靑陽郡) 화성면(化城面) 농암리(農岩里) 태생으로, 어머니와 같이 입교한 후 무성산(茂城山, (공주(公州)의 무성산)에 와서 살았다.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서울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어머니, 누이와 함께 상경(上京)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성사(聖事)를 받고, 종부(終傅)를 받을 수가 있었다. 그
의 누이는 서울의 장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고,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꼬는 시골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동정(童貞)으로 살 생각이었으나, 사촌(四寸)의 모범(模範)도 있고 다른 친척 몇몇이 권하기도 하여, 마음을 고쳐 서석봉(徐碩封) 안드레아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 뒤로 그는 처음의 계획(計劃)을 끝까지 이행(履行)하지 못한 것을 가끔씩 후회(後悔)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아내와 집안과의 아주 좋은 의가 상하는 일은 조금도 없었다.
㉡ 포졸(捕卒)들에게 붙잡힐 때 그는 동료들에게 이르기를, 관헌(官憲)이 문초(問招)를 하면 모든 것을 자기에게 뒤집어씌우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다름 사람들보다 한층 더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을 당하였다. 그러나 항상 겸손하고 꿋꿋하여, 한시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대구(大邱)로 옮겨져 연거푸 지독한 고문(拷問)을 당하였기 때문에, 여러 번 까무러치기까지 하였으나, 그의 결심(決心)과 용기(勇氣)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았으나, 형 집행일(刑執行日)이 오기 전에 매를 너무 많이 맞아서인지, 장독(杖毒)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옥중(獄中)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때는 을해(乙亥, 1815)년 5월이요, 나이는 30을 갓 넘었었다.
3) 김시우(金時佑) 알렉스
㉠ 김시우(金時佑) 알렉스는 시우재라고도 하는 연산(連山) 김씨(金氏)인데, 청양(靑陽)고 을의 양반(兩班) 집안에 태어났다. 성품(性品)이 착하고 어질어, 뛰어난 열심히 신자의 본분(本分)을 지켰으나, 오른 쪽 몸이 반신불수(半身不遂)로서, 살림살이가 몹시 가난하여 장가도 들 수가 없었다. 그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교우들의 애긍시사(哀矜施捨)를 받아 생명을 부지해 나갔다. 제법 학식(學識)이 있고 재간이 많은 그는 오른손으로는 글을 쓸 수기 없었기 때문에, 왼손으로 서책(書冊)들을 베껴, 그것으로 잔돈푼이나 얻어 썼다. 그가 기회(機會)있을 때마다 교우들에게 교리(敎理)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많은 외교인(外敎人)들을 가르쳐 입교(入敎) 시켰다. 그래서 그 지방에서는 신심(信心)과 학식(學識)으로 평판이 높았다.
㉡ 그도 교우들을 따라 노래산(老來山)으로 가서 부활축일(復活祝日)에 교우들이 잡히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자기는 붙잡히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울기 시작하였다.
어째서 우느냐? 고 포졸(捕卒)들이 묻자
나도 천주교 신자인데 병신이라고 잡아가려 하지 않는군요.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네 소원이 그렇다면 같이 가자. 포졸(捕卒)들이 말하니, 그는 기쁜 낯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경주진영(慶州鎭營)에 끌려 나가 병신의 몸으로도 여러 번 형벌(刑罰)을 당해야 했는데, 그의 항구한 마음은 관원(官員)들조차도 칭찬하게 되었다.
㉢ 대구(大邱)로 이송(移送)되어 처음에는 영장(營長) 앞에, 다음에는 감사(監司) 앞에 끌려 나갔다. 감사(監司)가 그에게 물었다.
네가 예수를 흠숭(흠숭)한다고 하는데, 그 예수라는 자가 저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매에 죽은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러면 다름 사람들에게 맞아죽은 사람을 흠숭할 이유가 무엇이며, 그의 죽음이 어째서 그리 훌륭하단 말이냐? 김시우(金時佑) 알렉스는 대답하였다.
9년 동안 장마가 졌을 적에, 하우(夏禹) 임금님은 나라를 끊임없이 두루 다니시며 백성을 구하려고 갖은 일을 다 해보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이나 자기 궁궐 대문 앞을 지나치면서도 들어가기를 거절 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이 훌륭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요컨대 자기 신민의 물질적 구원밖에는 어떤 것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하우(夏禹) 임금님이 고금을 통해 이름을 날리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만방의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시려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이렇듯 은혜를 베푸신 이를 섬기지 않는 자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감사(監司)님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분을 흠숭하고 천주교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감사(監司)는 창피를 당하자 성이 발끈 나서, 김시우(金時佑) 알렉스의턱을 부수어 말을 못하게 하고, 고문(拷問)을 한 층 더 심하게 하라고 명령을 하였다.
㉢ 김시우(金時佑) 알렉스는 끝까지 천주를 증거(證據)하다가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았고, 자기가 받은 선고(宣告)에 서명을 한 후에 감옥으로 돌아가, 처형(처형)의 날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른 죄수들처럼 짚신을 삼을 수가 없으므로, 오래지 않아 수중에 돈이한 푼도 없게 되어, 음식을 갖다 주는 여인에게 아무것도 줄게 없게 되었고, 이 여인은 그를 나무라며 아무것도 갖다 주지 않았다. 형벌(刑罰)로 쇠약해지고, 굶주림에 시달려, 김시우(金時佑) 알렉스는 대구(大邱)로 이송되어 온지 두 달 가량이 지나 옥에서 숨을 거두니, 때는 1815년 5월이나 6월경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그는 불구(不具)와 재간과 재능, 관원(官員)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변호(辯護)한 용기(勇氣), 특히 동정신분(童貞身分)으로 인하여, 이 나라의 신자들에게 귀한 존재가 되어, 이들은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을 자기들 교회(敎會)의 영광(榮光)중의 하나로 쳐 내려오고 있다.
4) 고(高)「여빈」성운(聖云) 요셉과 고(高)「성일」성대(聖大) 베드로 형제
㉠ 두 형제는 덕산(德山)고을 별암(지금의 예산군(禮山郡) 고덕면(古德面) 상장리(上長里)마을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모에게서 천주교교리를 배워 어려서부터 본분을 지켰다. 그런데 고성대(高聖大) 베드로는 성격이 꽤 포악(暴惡)하여 모든 사람들이 무서워 하였으나, 아우는 성정(性情)이 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형제가 다 같이 뛰어난 효성(孝誠)으로 사람들의 시선(視線)을 끌었으며, 아버지가 병으로 누워계신 8개월 동안에 그들은 날마다 아버지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祈禱)들 드렸다. 그들이 합심하여 성경(聖經)을 읽고 권면(勸勉)을 하는데 부지런함은 많은 신자들에게 모범(模範)이 되었다.
㉡ 고성대(高聖大) 베드로는 첫 번째로 1801년에 고산(高山) 저구리골(지금의 전북 완주군(完州郡) 운주면(雲洲面) 저구리)에서 잡혀 전주(全州)로 압송되어 가서, 처음에는 용감히 신앙을 증거(證據)하다가, 목숨을 건지겠다는 유혹(誘惑)에 넘어가 배교(背敎)하고 풀려나왔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쳐
이 큰 죄를 보속(보속)하려면 칼을 맞아야 한다. 고 가끔씩 뇌었다. 그 후 그의 아우와 함께 노래산(努萊山)으로 이사를 갔다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부활축일(復活祝日)에 둘이다 붙잡혔다. 형벌(刑罰) 중에도 흔들림이 없이 대구(大邱)로 함께 이송(移送)되어가서, 그 항구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형(死刑)에 처함을 받는 은혜(恩惠)를 입었다.
5) 김(金) 아가타 ․ 막달레나
이 위에서 이야기 한 바 있는 박(朴)바오로의 처제(妻弟) 로서, 경상도(慶尙道) 상주(尙州)고을 은재(지금의 상주군(尙州郡) 이안면(利安面) 저음리(猪音里)에서 태어났다. 입교한 후 노래산(努萊山)으로 피난하여 갔다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체포(逮捕)되어, 여러 차례에 걸친 고문(拷問)을 용감무쌍하게 감수(甘受)하였다.
무식하기도 하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죽으려 하느냐? 하고 관헌(官憲)이 물으니, 그녀는
아무리 비천하고 아무리 무식하다 하여도, 조물주 천주의 은혜를 몰라보고, 그분을 배반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녀의 항구심(恒久心)음 변함이 없이 다른 증거자(證據者)들과 같이 대구감영(大邱監營)으로 이송(移送)되었다.
⑦ 요약해서 말하자면, 노래산(努萊山)에서 부활축일(復活祝日)에 붙잡혀, 경주진영(慶州鎭營)으로 압송(押送)되어 간 신자들 중에는, 그들의 믿음이 약함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 많았지만, 그중에서 몇몇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充實) 하게 섬긴 것을 보면서 우리는 위로(慰勞)를 받는다. 그중 6명은 이미 그들의 괴로운 생애(生涯)를 끝마쳤고, 대구(大邱)에 그대로 남아있는 이는 4명 뿐 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사형선고(死刑宣告)는 받았으나, 언제 형이 집행(執行)될지는 몰랐다. 새로운 동료(同僚)들이 그들과 함께 모이게 될 것이다.
2. 머루산의 박해(迫害)
① 노래산(努萊山)의 신입교우들이 잡힌 지 며칠 뒤에, 머루산(지금의 영양군(英陽郡) 석포면(石浦面) 포산동(浦山洞)에 해당) 신입교우들도 체포(逮捕)되어, 안동진영(安東鎭營)에 끌려갔다는 사실도 잊혀지지 않았다. 이들의 사적(事蹟)도 비슷한 광경으로 엮어졌다. 통탄스럽게도 많은 신자들이 배교(背敎)하는 한편, 용맹(勇猛)한 증거자(證據者)들도 찾아볼 수 있으니, 이들의 항구심은 동료(同僚)들의 낙오(落伍)로 인하여 더욱 돋보이는 것 같다.
1) 김「명숙」흥금(興金)
㉠ 홍주(洪州)고을 태생으로 1801년에 입교한 김「명숙」흥금(興金)은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연풍(延豊)고을 교우들이 사는 곁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대 박해(大迫害)가 일어났을 때 붙잡혀 서울로 이송(移送)되어가자, 김흥금(金興金) 「명숙」은 진보(眞寶) 땅으로 도주하였는데, 1815년에 그는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오래 전에 아내와 사별(死別)하고, 아직 미혼(未婚)인 19세 된 아들 장복(長福)과 이제 겨우 혼기(婚期)에 이른 딸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 열심이 지극한 이 부자(父子)는 즐겨 애긍시사(哀矜施捨)를 많이 하여, 갖가지 자선(慈善)의 일을 하였다. 포졸(捕卒)들이 왔을 때에 이들 세 식구는 함께 있다가 안동(安東)으로 압송(押送)되었다. 얼마 안 있어 딸은 관속(官屬)에게 강탈되어가서,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영 소식(消息)을 알 수가 없었다. 김흥금(金興金)「명숙」과 그의 아들은 고문(拷問)을 기꺼이 당하였고, 한시도 신앙(信仰)을 배반(背反)하지 않았다.
㉢ 그들은 이내 굶주림과 형벌(刑罰)로 핍진(乏盡)하여 안동 감옥에서 같이 세상을 떠나니, 때는 1815년 3월경이었다. 김흥금(金興金)「명숙」의 나이는 51세였다. 이 두 분 증거자(證據者)는 박해 중에야 성세(聖洗)를 받았으므로, 본명(本名)은 알 수가 없다. 그때부터 교우들 간에는 박해(迫害)가 일어나면, 거의 모든 예비신자(豫備信者)들에게 세를 주어, 이 성사(聖事)를 받지 않은 채 죽는 위험(危險)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습관(習慣)이 되었다. 같은 해 1815년에는 나중에 이야기가 나오는 회장(會長) 김 암브로시오 가 교리(敎理)를 배웠건 안 배웠건, 원하는 사람에게는 빠짐없이 세를 준 것을 볼 수가 있다.
2) 최 안드레아와 마르띠노 형제
㉠ 최(* 최윤금?) 안드레아는 진보(진보)고을에서 그곳 포졸(포졸)들에게, 제일 먼저 붙잡혔다. 그는 한 달 동안을 그곳의 감옥에서 있으면서, 4, 5차례나 문초(問招)와 고문(拷問)을 당하였으나,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충성심(忠誠心)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안동영장(安東營將) 앞에 끌려 나가 똑같은 항구심을 보여주었고,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을 당한 끝에 거의 죽어가는 몸으로 옥리(獄吏)들에게 끌려 옥으로 돌아갔다. 그때에 신심(信心)이 지극하여 동정서원(童貞誓願)을 발한 바 있는 그의 동생 마르띠노가 형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쫓아와서, 그를 위로(慰勞)하고 보살펴주었다.
㉡ 최(崔) 안드레아는 관청에서 매일 쌀 열 줌을 받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기근(饑饉)으로 인하여 모두 포졸(捕卒)과 옥리(獄吏)들이 가로채고, 그에게까지 차례가 것은 거의 없었다. 최(崔) 마르띠노는 형의 목숨을 보전(保全)하기 위하여, 관장(官長)을 만나보고 형이 이런 사기(詐欺)의 희생(犧牲)이 된다는 것을 알려, 규정된 양식(糧食)을 틀림없이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 포졸(捕卒)들은 그들의 부당한 이익(利益)이 이렇게 허사(虛事)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성이 나서, 최(崔) 마르띠노에게 말하였다.이 망할 자식아. 네가 우리 것을 도둑질했다. 네놈 때문에 우리는 견디어 낼 수 없게 됐다. 그런데 혹시 너도 천주학쟁이가 아니냐? 최(崔) 마르띠노가 그렇다고 대답하니, 포졸(捕卒)들은이놈도 천주학쟁이이니 이놈을 처치해버리면 어때? 아무런 후환도 없을 텐 데 하고 서로 주고받더니, 발길로 몹시 차고 때리기를 오랫동안 계속하였다. 이 일은 3월 어느 날 저녁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그날 밤 늦게 최(崔) 마르띠노는 그 일로 해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당년 56세였다. 옥에 남아 있던 최(崔) 안드레아는 훌륭한 용기(勇氣)로, 무수한 괴로움과 궁핍(窮乏)을 참아 받다가 그해 11월 쯤 해서 굶어 죽었다.
3) 이 무렵에 박(朴)이라는 신자가 있어, 같은 진보(眞寶)고을에서 아내와 같이 붙잡혀 고문(拷問)을 당하여도 흔들리지 않고 용감히 신앙(信仰)을 증거(證據)하다가, 이 관청 저 관청으로 끌려 다닌 끝에 대구(大邱)에까지 이송(移送)되어, 그곳 옥중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생애(生涯)가 어떠하였는지는 모르고, 어떤 환경(環境) 속에서 죽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3. 대구감옥(大邱監獄)의 순교자(殉敎者)들
이제 안동(安東)에서 대구(大邱)로 이송되어 경주(慶州)에서 붙잡혀 온 교형(敎兄)들과 만나서 나중에 그들과 같이 승리(勝利)를 거두는 영광(榮光)을 누린 증 거자(證據者)들 가운데, 중요한 분들을 알리기로 하자. 이들은 이시임(李時壬) 안나,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꼬, 김약고배(金若古排) 야고보,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이다.
1) 이시임(李時壬) 안나
㉠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덕산(德山)고을 높은뫼(지금의 예산군(禮山郡) 고덕면(古德 面) 몽곡리(夢谷里) 사람이었다. 그녀는 양반 집 딸인데 1827년에 전주(全州) 감옥에서 죽은 그의 아버지 이(李)성삼(*오빠)에 대하여는 나중에 말하겠다.
㉡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재색(才色)을 겸비한 처녀로서, 뛰어난 열성(熱誠)으로 수계 (守誡)를 하며 동정(童貞)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외교인(外敎人)들이 이 사정(事情)을 알게 되어, 불평을 하며 이 문제로 인하여 사람들이 하도 귀찮게 굴어, 가족이 견디어 낼 수가 없음을 보고,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집을 나가, 몇몇 동정녀(童貞女)들이 일종의 조그만 수도원(修道院)을 만들어 공동생활(共同生活)을 하고 있던, 멀리 떨어진 집에 가서 살기로 결심(決心)하였다.
㉢ 박(朴)이라고 하는 교우(敎友) 뱃사공이 그녀를 거기까지 데려다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안나가 그에게 맡겨지자, 그녀에게 폭행(暴行)을 가하였고, 그도 아직 결혼하기 전 이어서 강제(强制)로 결혼(結婚)을 하였다. 비통하기는 하였지만,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체념(諦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사는 중에 아이를 낳았고, 그 후 몇 해 아니 되어 과부(寡婦)가 되었는데, 여전히 모든 신자의 본분(本分)을 충실하게 지켜나갔다. 1815년에 진보(眞寶) 포졸(捕卒)들에게 붙잡혀, 그곳에서 문초(問招)를 당한 다음, 그 항구한 마음의 덕으로, 대구감영(大邱監營)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고문(拷問)을 용감히 참아 받고 나서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았다.
㉣ 이시임(李時壬) 안나가 이렇게 오죽잖은 뱃사람과 함께 살기로 동의(同意)한 것을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겁탈(劫奪)의 자세한 경위(經緯)를 다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서는 풍속(風俗)에 근거(根據)를 두고 나라의 관습(慣習)이 된, 이 가증(可憎)스러운 속담(俗談)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남편이나 부모의 권한(權限)에 있지 않는 여자는, 누구든지 먼저 차지하는 자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부모의 집을 떠났으니, 바로 이 경우에 해당(該當)하는 것이었다. 뱃사공이 그녀를 자기의 (所有)로 만들었고, 또 소송(訴訟)을 제기하였더라도 아무런 소용(所用)이 없었을 것이다. 이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려면 많은 학대(虐待)를 받았어야 할 것이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 위험(危險)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또 거기에서 벗어난다 해도 어디로 갈 수 있었겠는가? 도중에 또 다른 불한당(不汗黨)의 손아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 그래서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그녀의 명예(名譽)와 처녀성(處女性)을 잃은 이상, 아무런 말도 없이 정당(正當)한 결혼(結婚)할 수 있는, 이 교우와 혼인(婚姻)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여인(女人)을 천대(賤待)하고, 멸시(蔑視)하는 것이 말하자면 자연법(自然法)처럼 되어 있는 조선(朝鮮)이나 그 밖의 비(非)그리스 도교 나라에서는, 여자들 자신도 이런 사상(思想)을 가지고 있었다. 즉 여자들은 권리(權利)도 책임(責任)도 없다고 생각하고,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경우에는 정말로 사슬에 묶인 것처럼 생각하여, 거기에서 해방(解放)되어 나갈 마음조차 품지를 못한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사상(思想)이 신자들 간에는 통용(通用)되지 않는 것은 덧붙여 말할 필요조차 없으니, 외교인(外敎人)게 강탈(强奪)되어 갔던 신자 과 부(信者寡婦)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필사적(必死的)으로 항거(抗拒)하여, 강탈자에게서 해방(解放)되어 나오고야 만 사실을 여러 차례 볼 수 있다.
2)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꼬
㉠ 김(金)「경서」희성(稀成) 프란치스꼬는 예산(禮山) 여사울(지금의 예산군 신암면 (新岩面) 신종리(新宗里) 마을의 부유한 중인(中人) 가정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또 열렬한 교우(敎友)인 그의 아버지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 자신도 아들을 철저히 교육시켰다.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는 1801년 박해(迫害) 때에 붙잡혔으므로, 기회 있을 때마다 가족(家族)들을 권고(勸告)하여, 자기 본을 따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훈련(訓
練)을 시켰고, 집안끼리 또는 이웃과 화목(和睦)하게 살며, 고신극기(苦身克己)로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靈魂)을 구하라고 가르쳤다.
㉡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꼬의 열심은 그때부터 나날이 더해가기만 하였다. 아버지의 본을 따르겠다는 거룩한 경쟁심(競爭心)을 발휘하여, 그는 세속(世俗)의 물건 따위는 모두 우습게 생각해서, 재물(財物)을 버리고 일월산(日月山) 중에 있는 경상도(慶尙道) 영양(英陽) 고을 곧은장으로 가서 숨어 살았다. 거기에서 그는 나무뿌리와 도토리 등으로 연명(延命)하며, 그 이후로는 늘 금욕생활(禁慾生活)을 하였다. 해마다 사순절(四旬節) 시기에는 대재(大齋)를 엄히 지키고, 여러 가지로 고신극기(苦身克己)를 하였다. 타고난 급급한 성정(性情)을 이기려고 어떻게나 노력하였던지, 그는 오래지 않아 양순(良順)한 인내(忍耐)의 모범(模範)이 되기에 이르렀다.
㉢ 1815년에 배신자(背信者) 전지수가 안동(安東) 포졸(捕卒)들을 데리고 느닷없이 그를 잡으러 왔다. 그때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꼬는 산에 있다가 포졸(捕卒)들이 내려오라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 아들 문악에게 일렀다.
나는 천주의 명이니, 가야 한다. 너는 나를 따라오지 말고, 온 집안을 보살 피며 특히 네 할머니를 극진히 모셔라.
그런 다음 아주 기쁜 낯으로 하산하여, 포졸(捕卒)들과 배반자(背反者)까지도 관대하게 대접하고, 어머니에게 하직(下直)을 고하며,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간청하면서, 착하고 상냥한 말로 위로(慰勞)하였다. 그런 다음 아내를 향하여, 어머니 말씀을 잘 듣고 잘 봉양(奉養)해드리며, 아이들을 잘 가르치라고 부탁한 후, 마지막으로 자기의 뒤를 따르라는 부탁을 하였다.
㉣ 그러고 나서 명랑하고 웃는 낯으로 포졸(捕卒)들을 따라 나섰다. 안동(安東)읍에 이르러 첫 번 신문(訊問)을 당하고, 며칠 안 있어 대구(大邱)로 이송(移送)되었다. 형벌(刑罰) 가운데서 그가 보여준 용감한 항구심(恒久心)은 관헌(官憲)들을 당황하게 하였으나, 이내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았다.
3) 김 야고보 화준
김약고배(金若古排) 화준 야고보에 대해서는 그 자세한 내력(來歷)을 알 수 없으나, 청양(靑陽)고을 수단이(지금의 청양군(靑陽郡) 사양면(斜陽面) 신왕리(新旺里))에서 태어났다. 성격이 온순(溫順)하고 참을성이 있었으나, 하느님을 섬김과 영혼(靈魂)을 구하는 일에는 크나큰 힘을 보여줄 줄을 알았고, 성교회(聖敎會)의 규구(規矩)를 충실히 지키며 기도(祈禱)와 성경(聖經)읽기에 부지런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어디에서 체포(逮捕)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청송(靑松)에서 체포되었음), 1815년에 붙잡혀 안동(安東)읍으로 압송(押送)되어, 거기에서 관장(官長)의 갖은 유혹(誘惑)과 약속(約束)에 항거하며,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에도 참아 견딘 후, 대구(大邱)로 이송(移送)되었고, 마침내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게 되었다.
4)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와 김(金) 아가다 ․ 막달레나
㉠ 김계원 안드레아는 종한(宗漢)이라고도 하는데(종한은 관명(冠名), 필시 김진후(金震厚) 비오의 3남 한현(漢鉉)일 것이다), 면천(沔川) 고을 솔뫼 사람이며, 이 위에서 이야기한 바 가 있는 김진후(金震厚) 비오의 아들이었다. 부모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어려서부터 하느님을 섬기고 공경(恭敬)하기를 배웠다. 아버지가 20년 이상이나 끊임없는 박해(迫害)의 대상(對象)이 되었던 까닭으로, 그의 어린 마음은 불행(不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어, 모든 세물(世物)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신앙(信仰)이 굳세어지고, 그가 하늘에서 받은 싹이 자라게 되었으며, 그가 당할 어려운 시련(試鍊)에 준비태세(準備態勢)를 갖추게 되었다.
㉡ 이와 같이 박해(迫害)를 겪고, 추방(追放)을 당하는 가정에 살던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는 오래지 않아 부모(父母)와 친지(親知)와 조상(祖上)의 산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경상도(慶尙道) 안동(安東) 고을 우련발이라는 산골 깊숙히 위치한 낯선 고장에 가서 살았다. 거기에서 17년 동안을 숨어 살며, 오직 애긍(哀矜)에 힘쓰고, 기도(祈禱)와 성경(聖經) 읽기와 그 밖의 모든 신자의 본분(本分)을 지키는 일에만 부지런하였다. 사순절(四旬節) 시기에는 다른 보통의 극기행위(克己行爲)는 말할 나위도 없고 대개는 날마다 대재(大齋)를 지켰다. 그의 일상의 양식(糧食)은 조밥에 소금을 얹어먹는 것 이었고, 그것을 장만하지 못하는 날에는 나뭇잎이나 도토리, 풀뿌리, 산나물 같은 것을 먹고 지내며, 영양(營養)이 더 있고 맛이 더 나은 음식을 구할 생각을 하는 일이 없었다.
㉢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고 고생스러운 생활 중에서도 늘 거룩한 기쁨이 충만(充滿)하여, 낮에는 주로 천주교서적(書籍)을 베껴 사방에 전파(傳播)하였고, 저녁에는 신자(信者)들을 가르치는 일에 지극한 열성(熱性)을 보여, 가끔 자정이 지나도록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일이 있을 지경이었다. 또한 외교인(外敎人)들에게 신앙(信仰)을 전파하는 일에도 열정적(熱情的)이어서 그들을 가르쳐 많이 입교(入敎)시켰는데, 거기에는 그의 말에 힘입은 경우도 있었으나, 이에 못지않게 기도(祈禱)와 모범(模範)의 효력도 크게 작용(作用)하였다.
㉣ 이러한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였는데, 4월 23일에 안동(安東) 포졸(捕卒)들에게 잡혀, 그 고장 영장(營將) 앞으로 끌려 나갔다. 영장(營將)은 우선 그에게서 배교(背敎)한다는 말을 유도(誘導)해 내려고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자 옥에 가두게 하였다가, 이틀이 지난 후, 감사(監司)의 명령(命令)으로 다리에 매질을 시킨 뒤에, 대구(大邱)로 이송하였다.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가 대구감영(大邱監營) 문전에 이르렀을 때, 그 안에서 나와 혼자 자유롭게 가는 여교우(女敎友) 한 명을 만났다. 이것을 보고 놀란김 종한(金宗漢) 안드레아가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그 여교우(女敎友)는 죽음을 면하려고 배교(背敎)한 길이라고 대답하였다.
㉤ 이 여교우(女敎友)는 김(金) 아가다 ․ 막달레나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서는 그렇게도 꿋꿋하게 형벌(刑罰)을 참아 받는 것을 우리가 보았는데, 대구(大邱)로 와서는 마침내 고문(拷問)의 혹독(酷毒)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음이 약해져서 신앙(信仰)을 배반(背反)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는 한숨을 쉬며, 그 여교우(女敎友)에게 말하였다.
이거 아주 좋은 기회를 놓치십니다. 그래 무슨 기대를 가지고 더 살 것 같습니까? 지금 여기서 나가지만은 그래 몇 해나 더 살 것 같습니까?
김(金) 아가다 막달레나는 대답하였다.
하긴 내가 지금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만, 오늘이나 내일 죽지 말라는
법이 없지요.
그렇다면 지금 착하게 죽는 것이 천만 번 낫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며, 아주 힘 있는 말로 그 여교우를 권면(勸勉)하여 마지않았다.
㉥ 이에 여교우(女敎友)는 은총(恩寵)의 힘을 입어 눈이 뜨여,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와 같이 이내 진영(鎭營)으로 도로 들어갔다. 포졸(捕卒)들이 욕설을 퍼붓고, 때리고, 밀치고 하면서, 전력을 다하여 그 여교우가 관장(官長) 앞에까지 나가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허사(虛事)였다. 김(金) 아가다 막달레나는 틈을 엿보아 살짝 빠져 들어가 관장(官長)앞에 주저 앉았다. 관장은 그녀를 알아보고서
놔 주었는데 왜 또 왔느냐?고 물었다. 김(金) 아가다 막달레나는 대답하였다.
아까는 혹형(酷刑)을 견디기가 힘에 겨워서 천주를 배반했는데, 이건 크나큰 죄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 관장님 앞으로 왔습니다. 만일 원하시면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러나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실한 신자입니다.
관장(官長)은 김(金) 아가다 ․ 막달레나를 미친년으로 몰아 내쫓게 하였으나, 그녀는 어떻게 하여 다시 관장(官長)앞으로 오게 되었고, 배교(背敎)한 것을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취소(取消)하였다.
㉦ 관장(官長)은 성이 발끈 나서 김(金) 아가다 막달레나를 결박(結縛) 짓게 한 다음, 어떻게나 몹시 매질을 시켰던지,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오래지 않아 뼈가 모두 허옇게 드러났다. 김(金) 아가다 막달레나는 의식(意識)을 잃은 후 옥으로 옮겨졌는데, 옥에 들어가면서 이내 숨을 거두었다. 그것은 5월 초였으며, 그녀의 나이는 50이 가까웠었다.
㉧ 이번에는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가 문초(問招)를 받을 차례였는데, 그는 조용하고 꿋꿋하게 대답하였다. 관장(官長)이 아무리 신문(訊問)을 계속하고 모진 매를 치게 하여도, 순교자(殉敎者)의 항구심은 변함이 없었다. 관장(官長)은 공연히 시간과 정력만 허비(虛費)한다는 것을 느끼고, 조정(朝廷)에 보
고를 하였다. 조정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굴복(屈伏)을 시키라는 회시(回示)를 보내왔으나,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가 다시 거부를 하자, 세 번째로 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결심(決心)이 흔들리지 않으므로, 드디어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도 자기가 권고(勸告)하여, 김(金) 아가다 막달레나에게 순교(殉敎)의 월계관(月桂冠)을 얻게 해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이리하여 처음에 있었던 7명이라는 수효가 다시 채워졌다. 이 용감한 증거자(證據者)들은 모두 사형선고(死刑宣告)의 무거운 짐을 지고, 매일 같이 처형(處刑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비밀스러운 계획(計劃)으로, 무슨 까닭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사형집행(死刑執行)이 무기연기(無期延期)되기를 허락하셨다. 그래서 이들은 이때부터 옥중(獄中)에서 새 생활을 하게 되었다.이들은 사형(死刑)이 확정(確定)되었으므로, 다시는 고문(拷問)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 대신 궁핍(窮乏)과 굶주림과 갖은 압제(壓制)를 당해야만 했다. 아직도 2년 동안을, 그들은 이렇게 날마다 당하는 긴 순교(殉敎) 가운데서, 그 죽음과도 같은 삶을 이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③ 그 해 5월 이후에는 대량검거(大量檢擧)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신자들이 잡힌 것은 대부분 불집이 시작된 경상도(慶尙道)였으나, 항구하지 못한 신자들이 고문(拷問) 때문에 자백(自白)한 것이 화근(禍根)이 되어, 충청도(忠淸道)에서도 많은 사람이 붙잡혔고, 심지어 강원도(江原道)에서도 몇 명이 붙들리게 되었었다. 이제 배교(背敎)하여 거의 즉시 석방(釋放)된 사람들과, 경상도(慶尙道) 각지의 옥중에서 죽은 이들 외에, 대구감옥(大邱監獄)에 같은 시기에 갇혔던 사람이 백명이 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의 기록(記錄)에 검거된 숫자를 2백 이상으로 적은 것은 조금도 과장(誇張)이 아니었다는 결론(決論)을 내릴 수 있다.
④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가 옥에서 보내온 편지(便紙)와 어떤 목격자(目擊者)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옥에 갇힌 신자 중 대다수가 죽을 때까지 예수그리스도께 충성(忠誠)을 다하였다는 확신(確信)을 갖게 되어, 자못 위로(慰勞)를 받게 된다. 그 중 많은 사람은 여러 지방의 법정(法廷)에서, 우리 성교회(聖敎會)의 중요한 교리(敎理)를 재치 있고 용감하게 전파(傳播)하였다는 말도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옥중에서 무서운 굶주림으로 인하여 세상을 떠났다. 이점은 이 나라의 감옥제도(監獄制度)를 알면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사실 군(郡)에서 아무런 의지(依支)도 없는 죄수(罪囚)들에게 약간의 요미(料米)를 배급(配給)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여러 손을 거쳐 오는 만큼, 저마다 마음대로 조금씩 횡령(橫領)을 하는 까닭에, 불쌍한 수인(囚人)에게 돌아오는 것은 겨우 쌀 몇 알에 지나지 않게 되니, 이것으로는 목숨을 이어 나가기에 넉넉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1815년처럼 전국적으로 무서운 기근(饑饉)이 들었을 때에는, 하급관리(下級官吏) ․ 포졸(捕卒) ․ 포교(捕校) ․ 옥쇄장(獄鎖匠) ․ 집장사령(執長使令) 등등이, 교우(敎友)몫으로 배당된 식량(食量)을 거의 다 횡령(橫領)하였을 것은 틀림이 없다. 거기다가 외교인(外敎人)들이 천주교 신자를 마치 하등동물(下等動物)로 취급(取扱)하여 사람의 축에도 끼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었으니, 이런 짓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⑤ 충청도(忠淸道)에서 체포된 많은 신입교우들은 군아(郡衙)나 감영(監營)으로 이송되어가서, 최종판결(最終判決)을 받고 형벌(刑罰)을 받았다. 당시의 목격자(目擊者)들의 증언(證言)을 들으면, 이 불쌍한 신자들 중 적어도 20명가량은 며칠동안 천신만고(千辛萬苦)를 하며 길로 끌려 다니다가, 어떤 이들은 허기(虛飢)가 지거나 또는 상처(傷處)가 덧나서 길가에서 죽으니, 끌고 가던 포졸(捕卒)들이 버리고 갔고, 어떤 이들은 주막(酒幕)에 들었다가 돈이 없어 아무것도 사먹지 못하여 죽기도 하였다, 또한 많은 신자들은 유혹(誘惑)을 이기지 못하여 부끄럽게 배교(背敎)하였는데, 배교한 자들은 혹은 거저 석방(釋放)되기도 하고, 혹은 이 도(道) 저 도(道)로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그래서 한 여름쯤 되어서는 대구(大邱) 감옥에는 몇몇 증거자(證據者) 밖에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