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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도문에서→ 역사는 어느 한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 그 나라의 民族性, 周邊 國家들의 政勢 등등 많은 要因들이 통합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역사는 살아 있어서 어떤 것은 微微하게, 어떤 것은 强하게 현재에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 여행 사이트를 만들면서 일부 자료를 내 나름대로 정리도 했지만 인터넷을 참고하였다. 허락을 받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든다. 일부 여기에 실린 사진은 인터넷 자료도 있지만.내가 직접 하얼빈 731部隊를 방문해서 보고 듣고, 구입 스캔도 하고 '南京 大 虐殺事件'을 비롯하여 여러 도서를 참고 하였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하얼빈 731부대 앞에 記載된 글이다.어찌 731부대 하나뿐인가? 정신대, 남경사건, 독립군의 투옥,일제의 학정......여기 일일이 나열해도 나 못할 정도로 수없이 많다. |
그래도 일부 모르는 사람에게 꼭 알려야 하는 마음에서 여행사이트중 따로 이 사이트를 開設하였다. 마루타란 책을 3번 읽고 또 읽으면서 항상 마루타의 본 고장 하얼빈을 방문하고 싶었다. 이번 여행은 다른 사람은 백두산과 독립군 활동지 저 허허벌판 東北3省일지 몰라도 나는 731부대를 방문하고싶었는데 용케 내 희망과 맞아 떨어져, 원하는 여행을 할 수 있어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 부디 지난날의 日帝의 蠻行을 反芻하고 다시는 그런 잔인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위해, 정치하는 사람들은 우리 民族 歷史를 쓰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 |
8월14일 화 어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일이 두가지가 생긴다 | ||
그 이유는 다른 사람과의 달리 어쩌면 내가 이번 여행의 목적이 이 731부대를 방문하기 위해서이다. 내 눈으로 그 현장을 목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우연히 서점앞에서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던 중 서점에 들렸다가 놀라운 책을 뒤적인 적이 있었다. |
기억이 새로운 그 책은 10여년 전의 정현웅의 5권짜리 장편소설 ‘마루타(통나무)’(1988, 도서출판 다나)라는 책을 1권부터 5권까지의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려가면서 일본군의 잔혹상에 치를 떨었었다. 두 번 세 번 거퍼 읽으면 읽어갈수록 마음에 깊은 상처로 다가왔다. 추리소설이지만 이 책의 내용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만주 731부대에 근무하는 일본군 장교들의 삶을 소설로 재구성했다. 일본군 장교들의 사랑과 이념 갈등이 소설의 얼개를 이루고 있었지만, 사람에게 독가스, 세균 등 생체 실험을 가했던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잔혹함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 마루타’가 전하는 충격적인 메시지였다. 살아있는 사람을 고속으로 회전하는 원심분리기에 매달아 체액이 빠져나가는 속도를 측정하고, 발가벗은 사람을 영하 수십도의 혹한에 내몰고 동상에 걸려 죽는 속도를 체크하고, 만주의 한 마을의 유일한 식수원인 우물에 세균을 집어넣어 세균이 마을에 전염되는 속도를 체크하고, 지하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에게 콜레라균, 페스트균이 든 만두를 먹였던 731부대의 이야기는 아직 주검조차 태어나서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나에게 너무도 충격적이었고 끔찍했었다. 주로 한국, 중국 등 피지배국 정치범을 중심으로 공급되던 실험대상, 즉 마루타가 모자라면 만주 하얼빈 시내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아 실험대상으로 썼다는 ‘소설 마루타’의 증언은 나 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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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줄거리를 잠깐 소개하자면 ‘소설 마루타’는 주인공 일본 관동군 장교 ‘요시다’(吉田)가 정보장교로 관동군에 부임해서, 결국 반전활동으로 마루타까지 됐다가 총살로 인생을 마감하기까지의 내용을 다룬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읽은 기억하기로 소설의 서문에서 정현웅 작가는 “요시다는 가공된 인물”이라고 했는데 가공된 인물을 실화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이유는 “도대체 당시 731부대에 근무했던 관동군 장교 중에 양심적인 인물이 단 한명도 없어서”였다고 쓴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그랬을까’는 여전히 남는 의문이다. 그밖에는 731부대의 창설자이자 총책임자인 이시이 시로 중좌 등 실존했던 관동군 장교들이 소설 마루타에 등장한다. | ||
↑철저히 비밀에 붙이기 위해 가면서 破壞시킨 당시의 731部隊 그리고 實驗材料 마루타의 屍體 燒却場 |
‘ 가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만주 731부대가 언론에 등장할 때면, 기억은 지나간 날 ‘소설 마루타’를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더해지던 놀라움과 공포심으로 달음질친다. 최근 미국 중학교 교재인 게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는 자전적 소설 ‘요코 이야기’(미국에서는 ‘대나무 숲 저 멀리-so far from the bamboo grove’라는 제목으로 출간)의 저자 요코 가와시마 왓킨슨의 아버지가 731부대에 근무했었다는 게 세간의 관심을 끌면서, 다시 ‘소설 마루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
글자를 보자면... 前事不忘 後事知思...........전에 있었던 일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그런 의미겠지......김계옥가이드는 731부대에 대해 조금씩 설명하지만 마루타 책을 읽은 나로서는 이해가 될 듯...그러나 일행은 그저 사진과 설명을 듣고서 울분을 참지 못한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잘 알지 못해는지... |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행동이 일제가 지난시절 우리민족에게 가한 일본의 행동이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과 말을 뺏고 혼과 정신을 앗아간 것은 물론 잔인한 고문과 살인을 서슴지 않은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고...마루타를 영화화 하여 나오기도 하였고 또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것 하나 세계최대 규모의 비밀부대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731 부대로 알려진 이곳에선 36년부터 45년까지 9년간 약 3천명 이상의 마루타가 독가스, 동사실험, 세균 실험의 `재료`로 사라졌는데. `KBS 스페셜``발굴보고, 731부대의 한국인 희생자들`이라는 제목의 다큐를 방송한 적이 있다. 이날 방송에는 하얼빈 사회과학원 731연구소의 김성민 소장이 20년간의 노력 끝에 수집한 731부대 희생자 1463명에 대한 증거문서를 공개하였다. 방송은 이 가운데 특히 한국인으로 확인된 6명의 희생자들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다루었다. 증거문서엔 이들의 원적, 출생지, 나이, 직업, 주소, 활동범위, 수집정보, 체포장소 및 시간, 731부대 이송시기 등이 자세히 나와있었다. |
과연 이들은 누구이며 어떤 연유로 악명높은 731부대에 오게 됐을까. 관동군 헌병사령부는 이들을 `반일정서를 강하게 품고 있는 자` `이용가치가 없는 자` 등으로 분류했다고 한다. 김성민 소장은 바로 그들이 만주 땅에서 피흘려 싸우던 조선의 항일투사들이라고 말한다. `KBS스페셜`은 중국 현지 취재를 통해 항일운동가 심득룡과, 731부대 한국인으로 신원이 밝혀진 4명의 행적을 추적, 일제에 대항해 싸우며 조국을 구하려 했던 독립투사들이 남긴 의미는 무엇일까? 나에겐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한편 731 부대는 약 3000여명의 병력을 거느렸으며 8개의 부서가 존재했다고 마루타 책에 적혀있었다. 내가 읽으면서 전율했던 바로 그 부분이다. 1부는 페스트, 콜레라균 등 각종 전염병균에 대한 연구를 중점 실시해 300~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감옥에 수감된 마루타들에게 세균실험을 자행했고. 2부가 이들 세균을 사용하는 실행부서였구요. 제4부인 생산부는 말 그대로 병균과 세균을 대량생산하는 부서 였었다. 이러한 부대는 731 부대를 포함해 총 5개의 부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하얼빈 인근의 `관동군 방역급수부'라 불렸던 731부대(1941년 8월 1일 만주 제731부대로 개칭)를 비롯해 창춘 인근 멍자둔의 `관동군 군마방역국'이라는 100부대, 일명 `에이'라는 난징의 1644부대, 일명 `나미'라는 광둥의 8605부대 그외 싱가폴에도 1개의 부대가 있었다. |
총 5개의 부대가 있었지만 이중 731부대가 가장 이름높았던 까닭은 바로 관동군 방역급수부 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731부대가 이러한 세균전 부대의 총 본부와 같은 역활을 했기 때문이다 731 부대는 이시이 소장이 부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다른 생물부대와의 합동작전 및 연구를 수행 했다. |
마루타는 일본어로 껍질만 벗긴 통나무라는 뜻인데 이들은 실험대상 포로들은 마루타 oo번 과 같은 방식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생체실험에는 한국인 중국인 몽고인 러시아인이 희생되었다.731부대는 페스트·콜레라·장티푸스·매독 등의 생균을 주사나 음식물에 섞어‘마루타’의 몸에 투입하고,‘표본 채집’을 위해서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해부하기까지 했으며 동상과 독가스에 관한 실험에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사용하고, 거꾸로 매달아놓으면 사람이 몇 시간 만에 죽는가 하는‘실험’도 행했다. 이밖에 화염방사기의 성능실험에 산 사람을 사용하였으며 신형 총의 관통력을 테스트 하기 위해 사람들을 일렬로 새워두고 머리에 총을 쏘는 등의 실험 또한 행했다 |
←左. 右→그림설명 : 마루타의 여러 생체실험중인 사진(내장을 도려내어 실험재료로 사용한다 막 도려낸 폐, 심장, 허파 등을 쇠붙이에 꿰어 놓으면 그대로 움직인다고 하는데...사진이 나오질 않아 탑재못했다) 비인간적 |
당시 방역급수부대로 위장하였다가 1941년 만주 731부대로 명칭을 바꾼다. | ||
또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만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살아남은 150여 명의 마루타들까지 모두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
1947년 미 육군 조사관이 도쿄(東京)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1936년부터 1943년까지 부대에서 만든 인체 표본만 해도 페스트 246개, 콜레라 135개, 유행성출혈열 101개 등 수백 개에 이른다. 생체실험의 내용은 세균실험 및 생체해부실험 등과 동상 연구를 위한 생체냉동실험, 생체원심분리실험 및 진공실험, 신경실험, 생체 총기관통실험, 가스실험 등이었다. 1940년 10월 27일에는 난징[南京]의 1644 세균전 부대와 함께 중국 닝보[寧波]에 페스트균을 대량 살포하여 100명 이상을 사망하게 하였고, 1941년 봄에 후난성[湖南省]의 한 지역에 페스트 벼룩을 공중 살포하여 중국인 400여 명을 희생시켰다고 되어있다. |
특히 이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 일본군도 경험 부족으로 자체 1개 사단의 병력이 감염당한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최근 731부대 장교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문서가 일본의 한 대학에서 발견되어 일본군의 세균전 및 생체실험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이에 따르면 페스트균을 배양해 지린성[吉林省] 눙안[農安]과 창춘[長春]에 고의로 퍼뜨린 뒤 주민들의 감염경로와 증세에 대해 관찰했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이로 인해 중국인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종전 후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세균전 연구결과를 모두 미군에 넘기는 조건으로 전범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면책된 것으로 알려졌다. |
중국 정부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731부대의 시설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23개 시설을 대상으로 2001년 3월초부터 본격적인 복원공사를 진행 중에 있다 |
14) 水攻-물속에 넣어 생명력이 얼마나 지속되는 가를 실험 |
28) 위를 떼어내고 소장과 식도를 바로 연결하여 그 변화를 관찰하는 것. |
어찌 인간으로서 인간을 그렇게 잔인하게 다룰 수 있을까? , |
예로 들어 上下가 아래위로 붙어서 외字로 變形 카드 '카'라든지(은행에 가면 위로 카드를 넣으면 아래로 돈이 나온다) 쇠金이 마치 나무 木이 3개 붙어서 나무 빽빽할 삼'森'로 되듯이 쇠 金도 세 森처럼 세 개짜리로 변형되듯이....... |
비록 731 부대의 파렴치한 행태를 묵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일본군이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무엇인가 우위를 차지 할 수 있는 무기를 찾으려 했던 최초의 동인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
그리고 지속되는 중국과의 전쟁은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인간을 실험대상으로 쓸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이른바 중국 계획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작전 기지로 하얼빈이 결정되었다. 1938 년 이미 핑판에 다양한 시설을 건립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나서 이시이는 1932 년 8월 실로 막대한 예산으로 <광동군의 전염병 및 수질정화국>을 세운다. 이 부대는 1941년 까지는 731부대라고 불려지지도 않았고, 그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았다. 1941 년에는 <광동군의 가축전염병 예방국>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로서 일반적으로 100 부대로 알려졌다. 약 3,000 명의 일본인 직원이 그의 휘하에 있었다. 그리고 충분한 노동자와 <실험 대상>이 그의 지휘체계 아래 놓이게 됨에 따라 이시이는 살아 있는 신이 되어 자신의 의료학교에서 수백 명의 의사들을 훈련시켰다. 그러한 의사 가운데 한 명인 겐 유아사는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 거리낌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
"나는 주사 바늘을 살균 소독하지 않고 요추 신경을 마취하려는 의사에게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는 그를 죽이려는 거야>라고 대답했다" |
이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에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다. 무감각으로 일관한 것이었다. <어떤 의사들은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을 구덩이에 내던지려고 할 때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주사기로그들의 심장에 공기를 주입했다. 다른 의사(731부대의 군의관은 전후 정계, 학계, 의료계, 교육계, 재계 등 각 영역에서 높은 지위를 확보했다.)들과 나는 그 당시 그들을 목 졸라 죽이려 했다. 마침내 한 나이 든 하사관이 말했다. "존경하는 선생님, 그들에게 마취를 하면 죽을 겁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들을 구덩이에 내던졌다.> 실험 대상자들이 공포에 대해 무감각해지도록 부채질한 것은 731부대의 공포통치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끊임없는 비애만 있었을 뿐이었다. 개별적인 살해에서 대량 학살에 이르기까지 731부대는 다양한 실험을 했다. 역사가 자신들을 감싸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은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페스트에 감염된 쥐들을 고공 폭탄처럼 방출했다..42 가구에서 43 명의 사람이 죽었다. 나머지 생존자들은 각기 흩어져, 필사적으로 이 전염병을 막으려했다.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은 <내 여동생의 죽음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여겨집니다. 동생은 혼자서 작은 오두막에 있었지요. 그 애를 돌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동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동생을 보러 갔지요. 목이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어요. 그리고 눈을 뜬 채 죽어 있었어요.>라고 그 날을 회상했다. |
<콜레라, 탄저병, 그리고 여러 병원균이 공급되는 식수와 음식에 넣어져 제공되었어요. 어떤 경우에는 콜레라 균이 묻어 있는 사탕을 한 지방 행사에서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답니다.> |
."1942년 일본이 창데에 투하한 세균폭탄에 대해 미국은 강도 높게 비난했다.이 때의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였다. 몇 주 후 미국은 생물학전 연구소 건립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이를 허가한 대통령도 루스벨트였다. 다소 의아스러운 것은, 그 후 미국정부는 일본의 세균폭탄에 대해 더 이상 비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50년 전에는 몰랐었따는 논리는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을 잃은 듯하다. | |
수십 명의 독일 전범은 사형당하거나 투옥되었지만, 1960년 이후 투옥되거나 사형이 실행된 일본인 과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
인터넷 웹 사이트 지금 이 주소를 일러주었는데 이 글을 보고 계실려나? |
일본의 대외 침략... 일본은 1860년대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전후해서 급격히 근대화의 길을 걸으면서, 종래 조선정부의 대일외교정책에 순응하여 수동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던 대(對)조선의 외교방향을 능동화하여,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권피탈에 이르기까지 긴 침략의 장정(長征)에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일본은 대원군의 하야로 개국으로 급전(急轉)한 조선 정계의 기류를 타고, 조선의 문호 개방에 첫 수호국(修好國)으로서 한반도에 상륙한 이래, 개화파와 수구파의 쟁패(爭覇),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격변 속의 조선정계에 교묘히 대처 ·편승하면서 꾸준히 세력을 부식하여 나갔다. | |
여기에는 한국위정자들의 무능과 이완용(李完用)을 필두로 한 친일내각, 이용구(李容九) ·송병준(宋秉畯) 등으로 대표되는 일진회(一進會) 등 매국노들의 반역행위도 큰 몫을 하였고, 미국 ·영국 등 열강국들의 묵인도 일본에게 도움을 주었다. 일본은 한국병합을 달성한 뒤 종래의 통감부를 폐지하고 보다 강력한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같은 해 10월 1일부터 구체적인 한반도의 경영에 들어갔다. |
이 731부대와 함께 잔인하게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고문한 또 다른 곳이 바로 유대인 학살장소인 폴란드의 아우슈비츠(Auschwitz) 강제 수용소이다 글쎄다..언제 꼭 방문하고 싶은 곳... | ||
↖희생자들의 신발 ↑학살로 희생된 여인의 머리카락,화학약품으로 탈색이되 똑 같이 노란색이다. ↗살해된 유태인 |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强大國의 몇사람의 사상은 無抵抗의 국민을 虐殺함으로써 지배를 유지하는 것은 체제여하를 막론하고 체제대립이 激化될 때, 그리고 戰爭시 똑 같은 일들이 反覆되어진다는 사실이다. 근대 帝國主義戰爭에서는 民族主義·쇼비니즘을 이용해서 적대국민을 劣等·極惡시한 결과 자주 大量殺戮이 행해졌는데 그들에 있어서 적당 한 이유를 만들어 붙이고 그렇게 진행되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의 대량학살과 生體實驗등을 통하여 과학과 기술로 문명이 발전한다고 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야만적인 本能이 감소한다고 말할 수가 없으며 終戰 이후에도 다양한 형태의 대량학살은 持續되어 졌다. 하나의 국가 혹은 체제, 집단의 利益에 부합이 된다면 언제든지 이런 일이 다시 일어 날 수 있으며 개인의 생각에 따라서 수백만의 생명이 사라진 것이 단지 통계상의 숫자로만 여겨지는 무감각한 세상이 앞으로도 재현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신의 存在를 믿는 이와 그렇지 않다고 紛紛하는 사람사이에 나 만은 死後의 세계를 믿는데 이는 수많은 死後經驗者를 통해 듣고, 體驗했던 이야기로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코 웃음을 칠 줄도 모를 일이다. 다시 살아 돌아온 내 친구의 手術로 인한 저승사자와의 血鬪, 어렸을 적, 들었던 친구아버지의 관속에서 다시 일어난 사건, 내 어머니의 잠깐 동안의 死後세계의 체험과 돌아가신 후에 일어난 사건들, 내 기도중에 보았던 하나님의 모습,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證明.........이런 것들을 보노라면 獨逸軍의 아우슈비츠 유대인 虐殺事件, 日本軍의 731 마루타 生體實驗의 殘忍한 歷史的 事件들의 주인공의 사후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 하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코 웃음칠 것이다. 그러나 斷言하건데 살아있음에 感謝하고 모두를 사랑하고 내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幸福한 微笑로 세상을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이 이야기의 결과는 당신이 죽음앞에 섰을때, 아니 당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헤맬때 그렇지 않는 당신을 지켜보는 남아있는 사람앞에서의 悲慘한 당신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홀로 코스트는 개인과 소수의 偏見 그리고 政權의 維持를 위해 일어난 悲劇일 뿐 어떠한 理論과 論理로도 說明될 수 없는 殘酷한 行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現狀은 反復되고 있으며 언제라도 再現될 可能性은 存在한다. 이것이 人間의 本性이다. 얼마나 殘忍한 노릇인가? (그러면 아우스비츠수용소는 어떤 곳인가? Auschwitz는 폴란드 남부 비엘스코주의 도시. 크라코프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있다. 폴란드의 원래 지명은 오슈비엥침이다. 독일 최대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학살수용소가 있었던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중 나치스는 이곳에서 250만∼4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는데 이 때문에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은 나치스의 유대인 대량학살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1919년 폴란드가 독립함으로써 폴란드에 귀속되었고, 세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39년 독일군에 점령되게 되었다. 1940년 4월 27일 하인리히 히믈러가 첫번째 수용소 건립을 명령했으며, 같은 해 6월 14일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송되어왔다. 히틀러의 명령으로 41년 대량학살시설로 확대시켰다. 1941년 10월 인근의 브제진카(독일어로는 '비르케나우') 마을 외곽에 비르케나우라고도 불렸던 '아우슈비츠 2호'를 증축했다. 이후 45년 1월까지 폴란드인·러시아인과 전유럽의 유대인·집시 등이 살해되었다. 이들은 면밀한 수송계획에 따라 각지에서 모아 건강한 사람은 강제노동수용소로, 나머지는 가스실에서 살해·소각하였다. 그들의 의류는 군수공장의 강제노동자들에게 배급되었고, 금·은·보석류는 국립은행으로 보냈다.) | |
다하우수용소에 수감 중인 유태인 |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
수용소 이야기 부헨발트수용소 Buchenwald ..최초이자 최대의 수용소 중 하나로, 당시 독일 튀링겐에 있던 바이마르 북서쪽에서 7㎞가량 떨어진 숲 언덕에 있었다. 1937년 세워져 북쪽으로는 작센하우젠, 남쪽으로는 다하우에 있던 집단수용소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
남경 대학살이란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만의 것이다. 역사의 교훈은 과거를 기억하고 이로부터 배우는 사람에게만 가치 있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남경 대학살은 일본과 중국 모두에 의해 적당히 은폐되어 왔다. 가해자인 일본이야 당연히 숨기고 싶어했겠지만, 중국 역시 외침(外侵)에 수도가 유린된 이 전례 없이 수치스러운 사건을 되새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
1937년 7월 일본은 노구교(盧溝橋)사변을 빌미로 중일 전쟁을 시작한다. 먼저 천진을 점령한 일본은 이어서 계속 남하하기 시작하였고, 3개월만인 그해 11월 12일 상해를 점령한다. 남경에 있던 장개석 정부는 11월20일 사천성 중경(重慶)으로 피난을 하게된다. 남경에 남아있던 15만명의 중국군대는 남경을 수비하게 되었고, 일본군은 10만의 병력으로 이를 공격하게 된다. 12월 초에 일본군은 남경의 외곽을 점령하게 되고, 남경 시내에 대해 선무활동을 펴서 투항을 권유하나, 중국 수비대는 대포로써 대답하여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인다. 12월10일 새벽3시에 일본군은 남경시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재차 남경의 수비대에투항을 권유하나 굽히지 않자 드디어 12시에 남경 총공격 명령을 내린다. 12월12일 오후, 남경수비대장 唐生智는 장개석의 명령을 받아“본대는 포위망을 뚫고, 일부는 장강을 건너 탈출하라”는 지시를 수비대에 내린다. 이 명령은 결국 가장 중요한 도시전투에서 조직적인 저항도 못하는 동시에 안전한 후퇴도 못하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와서, 결국 대부분이 일본군에 포로가 되어 집단처형을 당하였다. 12월 13일 오전, 일본군은 남경시내에 부대별로 입성하였고, 대학살의 서막을 올리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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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필히 상세한 계획을 세워 행동에 옮김으로써 일본군의 위상을 높이고 중국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이 지침에 따라서 남경의 13여군데에서 거의 동시에 학살이 저질러졌으며, 사망자수가 30만에 달하는 전대미문의 만행이었다 |
산 채로 매장되거나, 구덩이에 던져진 뒤 디젤유를 뒤집어쓰고 집단으로 불타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일본군은 탄환을 아끼기 위해 서너 명을 겹쳐 놓고 총을 쏘아 사살했으며, 그보다는 칼을 썼다. 수많은 시신이 양자강에 던져졌다. |
역사는 똑 같은 것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기에.....2007년 근무하던 학교앞 교통사고난 장면을 목격하고...사고가 일어나는 일들을 가끔씩 보지만 사건은 일어나면 부랴부랴 생색을 내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두 잊어 버리는게 현실이다. 역사또한 잊혀질까봐 마음이 아프다 | |||
칼로 배를 찔러 죽이고 그 기쁨으로 기념촬영하고 있는 일본군(左)와 남경대 학살사건의 현장 사진들(中, 右) |
일본 군부와 우익은 일찍부터 만주의 이권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등이 앞장서 만주침략계획을 모의했다. 이들은 류탸오거우에서 스스로 만철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측 소행으로 몰아, 만철 연선에서 북만주로 일거에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관동군은 세계공황으로 열강의 간섭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장쉐량[張學良]이 베이징[北京]에, 또 봉천 군벌의 주력이 장성선(長城線) 이남에 집결해 잔류 수비대가 동삼성에 분산되었던 '절호의 기회'를 포착해, 1931년 9월 18일 이후 만주 점령작전을 시작했다. 관동군은 5일 만에 랴오둥[遼東]·지린[吉林] 성의 거의 전지역을 장악하고, 이 지역 군벌들에 압력을 가해 두 성의 독립을 선언하게 했다. 이어 11월에는 소·만 국경을 이루는 동북3성 전역을 장악했고, 1932년 1월 장쉐량의 반만항일 거점인 진저우[錦州]를 점령하고 3월 1일 만주국을 세웠다. 국제연맹은 중국측의 제소에 따라 리턴 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사보고서를 채택,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했다. 그러나 러허 성[熱河省]마저 점령한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침략으로 세력을 강화한 일본 군부와 우익은 정국을 장악하고 일본을 파시즘 체제로 전환시키는 한편 1937년에는 중일전쟁,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류탸오거우 사건 [柳條溝事件]-1931년 9월 18일 밤, 펑톈[奉天] 북부 류탸오거우에서 남만주철도의 선로가 폭파된 모략사건.-만주사변의 발단이 되었다. 폭파를 담당한 사람은 펑톈 독립수비대의 고모토 스에모리[河本末守] 중위 등이며, 만주에서 무력행사를 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를 비롯한 관동군(關東軍) 간부들이 계획한 것이다. |
왼쪽사진-남경대 학살사건의 사진들....계단에 수많은 중국남경인들이 여기 저기 쓰러져 있다. 일본군은 시내진입하기 전에 먼저 우물에 극약을 뿌리고 독가스를 뿌린후 진입을 한다. |
남경동포기념관南京同胞紀念館 아직 남경에는 가 보질 못했다. 마루타를 쓰면서 남경학살사건과 일본의 만행과 관련이 있어서 내 여행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게하기 위해 일부 글을 남긴다. 남경대학살에서 살해당한 동포기념관은 남경강동문에 자리잡고 있으며 중국을 침략한 일군집체학살 유지와 살해당한 동포의 장지이다.살해당한 동포들을 추모 하기위해 남경인민들은 1985년에 기념관을 부설하였고 1995년에는 그것을 더 확장 하였다고한다. 기념관의 면적은 28000평방미터를 차지하며 건축면적은 3000평방미터를 차지 한다고 한다. 건축물은 회백색대리석으로 쌓아올려 기세가 장엄하고 경건하다. 역사자료, 문물, 건축, 조각, 영화 등 종합수법으로 남경대학살의 특대학살사건을 전면 전시한 역사 전시관이다 |
도망하는 사람을 개가 뜯어먹고 있다 |
생매장하고 있는 중국인, 조선인 |
학살현장으로 끌려하는 중국인 |
731부대를 방문하며 마치는 글...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중국 만주땅을 점령하여 일으킨 전쟁이 만주사변으로, 1932년 3월 1일에는 만주국이라는 일본 괴뢰정부까지 세웠는데, 그게 바로 식민지가 된 조선을 발판으로 중국을 침략하는데 일차적으로 만주땅을 집어삼킨 것이다. 일본은 전쟁 당시 세균전을 위해 인체에 대해 생체 실험까지 자행했던 곳이 바로 흑룡강성 하얼빈시 교외의 일본관동군방역급수부(731부대)본부 소재지인 것은 앞서 이야기 했고... 731부대가 이른바 ‘마루타’라고 일컬어진 인체 실험용으로 포로를 가두기 위한 특설 감옥과 세균 실험실 등이 그것인데. 3천 여명을 ‘마루타’생체 실험으로 살해, 세계 전쟁사상 최대의 세균 실험을 자행했던 그 본거지이다. 중국측은 2차 세계대전 중 잔악한 생체 실험으로 악명 높았던 일본 관동군 731부대 시설에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 세계 문화유산 등록을 추진 중인데 731부대가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면 일본 히로시마의 원폭 등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이어 세 번째 전쟁 관련 기록으로 남게 된다. 중국 측이 지금 계획 중인 세계 문화유산 등록 대상은 ‘중국 침략 일본군 제731부대 범죄 진열관’이 관리하는 부대 본부터 등 23개 시설인데 중국 정부는 중학교 교사로 사용해 왔던 본부 건물, 그리고 잔해가 사라진 특수 감옥과 지하 통로 등을 복원하고 있는 중이다 |
731부대 본부 건물은 일본 관동군이 퇴각하면서 증거 인멸을 위해 폭파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중국 침략 일본군 제731부대 범죄 진열관’은 대로변에 우뚝 솟아 있었으며 그 앞에는 바로 ‘중국 침략 일본군 제731부대 범죄 진열관(侵華日軍第七三一部隊罪證陳列館)’이라고 가로로 크게 세워 놓은 문구가 보인다. 일본 관동군 731부대 본부 건물이다. 역시 본부 건물 앞에도 가로로 바닥에 큰 비석으로 ‘侵華日軍第七三一部隊遺址’라 세워 놓았다. 우리는 그 앞에 택시를 세우고 들어갔는데 수위가 나오더니 별 말은 없었다. 한산한 듯한 느낌을 주었으나 드문드문 찾아오는 사람들도 눈에 띄인다. 압도하듯 다가서 보이는 본부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었고 그 오른편에 지하 발굴이 이뤄지고 있는 모습을 공개해 놓기도 했다. 그 뒤쪽 철길 너머 하늘로 우뚝 높이 원통이 2개 솟아있는 일그러진 건물이 보이는데 그건 보일러실이고.본부 건물의 뒤쪽이 되는데 거기에서 왼쪽으로 가면 또 하나의 부대 정문 같은 게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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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생체 실험용으로 쓸 생쥐 등을 가두어 놓은 흔적이 보이는 조그만 2층 건물이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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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 아픈 마음을 표현해야 하나? 어떻게 이 괴로운 마음을 추스리나??. 내가 왜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그저 글을 읽고 흥미로 돌려 버릴 것인가? 그러면 나는? 나는 누구인가?내가 1830년대에 만주나 조선땅에 태어 태어났더라면......지금 처럼 이 사실의 직접 체험자가 되었다면 후대에 어떻게 남길 것인가? 내가 아닌 당신이 정말 당신이 바로 실험대상인 마루타 였더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