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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원사다. 작년부터 미국 동부 뉴욕식물원에서 일하고 있다. 이전 경력은 정원이나 식물과는 거리가 멀다. 경영학을 전공한 후 15년 정도 IT 회사 몇 곳에서 근무했었다. 미국으로 건너와 마흔다섯에 학부 과정에 편입했다. 두 바퀴 띠동갑 친구들, 조카보다 어린 학생들과 어울리며 조경개발과 식물과학 두 전공을 마쳤다. 미국에서 정원가로 자리를 잡기까지 겪은 여정 속에서 그동안의 신앙생활을, 특히 교회와 관련한 경험과 생각들을 자주 복기하게 되었다. 새로운 진로를 찾아 떠났던 모험은 참된 교회를 찾아 헤맸던 구도의 길과 새끼줄처럼 엮여있었다. 순례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은 지금 정원의 빅뱅 시대이다. 최근 5년간 서울식물원을 비롯해 대규모 국립 수목원 두 곳이 새로 문을 열었고, 2015년 민간정원 제도가 생기면서 현재까지 74곳이 주무관청에 등록됐다. 2013년에 열린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기폭제 역할을 했다. 행사 후 순천만 일대 정원은 제1호 국가정원으로 지정되었고, 산업도시 울산 태화강 일원이 생태 복원의 상징으로 부각되면서 두 번째 국가정원으로 등록되었다. 세계 조경계의 슈퍼스타로 알려진 네덜란드 자연주의 조경 디자이너 피트 아우돌프(Piet Oudolf)가 태화강에 정원을 조성 중이다. 우리나라 정원 역사에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영국과 미국의 저명한 교육기관에서 훈련받은 정원가들이 국내의 조경 회사와 공공정원, 수목원과 식물원에서 활동하면서 정원디자인과 프로그램이 다채로워졌다. 거기서 파생된 다양한 저작물들이 정원 산업과 문화의 확산을 촉진했다. 한국 정원의 메카로 부상한 제주의 지역 방송국은 정원을 주제로 한 정규 프로그램을 편성했고, 10만 명 이상 구독자를 확보한 정원 전문 유튜브 채널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정원의 대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다.
교회는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교회의 실패와 관련한 수많은 통계와 언론 보도들을 들출 것도 없이, 어느 학자의 말을 인용하면, ‘제도교회는 죽었다’. 속이 후련한 표현이다. 간판은 교회인데 교회다움을 찾아보기 어려운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인지 종교가 아닌 영성에 주목하자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영성을 어떻게 정의하든 제도화된 종교보다는 복음의 본질과 가치를 담아내기에 더 적합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교회와 정원의 성장곡선이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도 아이러니하지만, 영성이라는 말이 교회보다 정원에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 당혹스럽다. 최초의 인류가 정원사임을 암시하는 종교가 왜 이런 모순을 겪고 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이렇듯 엇갈린 길을 가는 듯한 정원과 교회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면서, 나는 두 개의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사랑의 짐과 고민의 짐. 필립 얀시가 쓴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이다. 정원과 교회를 통해 유익을 많이 누려왔는데, 유익을 갚기 위해 내가 짊어진 짐은 이 두 가지 물음이다. 좋은 정원은 어떤 정원인가?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답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물음들과 씨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으니 바로 수목원에서 보낸 100일의 시간이었다.
길 위의 예배
미국으로 건너온 후 3년째인 2018년 가을, 뉴욕 주립대 코블스킬(SUNY Cobleskill)에서 식물학과 조경개발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졸업 요건 중 하나가 인턴십 600시간이었다. 마지막 학기를 인턴으로 보내야 했다. 당초 계획은 지도교수 조언대로 조경설계 사무소에서 자리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여파가 뉴욕은 물론 세계를 강타하던 시절에 근처에서 인턴을 채용하는 설계 회사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지원 범위를 공공정원으로 확대하고, 집에서 먼 곳도 알아보던 중, 뉴욕 롱아일랜드 한 수목원에 지원하여 극적으로 채용되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었다. 장원(莊園)이라 부르는, 정원과 농장 그리고 숲이 딸린 영국식 대저택으로 1920년대에 지금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당시 철도 회사와 보험회사를 소유한 대부호였던 영국 출신 코(Coe) 가문이 살던 곳인데, 1943년 뉴욕주에 부지를 기증하여 주립공원이 되었다. 부지면적은 165만 제곱미터, 약 50만 평이다. 숙소는 수목원 부속 건물 중 하나로 한때 대학 기숙사로 쓰이기도 했었다. 약 20여 개의 방과 커다란 세미나실, 주방과 화장실 등을 갖추었다. 코로나 관련 규정상 두 명 이상 수용할 수 없었기에 커다란 건물에서 혼자 지냈다.
평일에는 수목원에 속한 여러 정원을 돌며 조경 인턴으로 일하고, 주말마다 집에 다녀왔다. 집까지 차로 약 네 시간이 걸렸다. 인턴 기간 매주 그 길을 왕복했다. 약 두 시간 동안 롱아일랜드와 뉴욕시의 혼잡한 도로를 헤쳐 나오면, 나머지 두 시간은 한적한 산길이다. 나의 미국 생활에 깊숙하게 들어온 길, 뉴욕의 주도 알바니와 뉴욕시를 잇는 ‘타코닉 파크웨이’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접어드는 허드슨 밸리의 강산은 아름다웠다. 매주 숲의 색이 바뀌었다. 그 길은 내 예배처가 되었다. 산길을 달리며 찬양하고 기도드렸다. 교회에서 늘 그랬듯이 음치라서 소리를 낮출 필요도 없었고, 옆 사람을 의식해 작은 소리로 기도할 필요도 없었다. 운전에 집중하느라 제약이 많았지만, 예배자로서는 참으로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예배를 비롯한 모든 모임이 온라인으로 바뀌거나 폐지되었던, 참으로 당혹스러운 시기였는데, 나는 어떤 면에서는 황금기를 보내고 있다고 느꼈다. 십 년 치 밀린 수련회를 참석하는 기분이었다. 젖은 장작처럼 눅눅해진 영혼이 새로워지는 경험이었다. 출석하던 교회에서는 미디어팀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담임목사를 포함해 필수 인원 대여섯 명 중 일원으로 예배를 생중계하기 위해 매주 예배당에 갔다. 송출되는 영상과 음향을 따라 예배의 흐름에 영혼을 태웠다. 텅 빈 예배당이 충만해지는 것 같았다. 당시 온라인 예배가 진정한 예배인가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었는데, 그마저도 본질을 비껴간 언쟁으로 느껴졌다. 평일의 뜨거움이 주일을 달구었다. 예배자로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처음 경험했던 길 위의 예배는 약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집을 떠났다. 하지만 고향 교회를 떠날 준비가 안 되었고 빚진 마음도 있고 해서, 중고등부 교사로 1년 봉사하기로 했다. 주말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공과 교재 〈말씀과 삶〉을 예습하기도 하고, 잠에 빠지기도 했다.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서울에서 청주로 향하는 중부고속도로는 산과 강을 많이 통과했다. 통유리 창을 통해 아름다운 풍경들이 다큐멘터리처럼 시야에 들어왔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면서 미묘한 계절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갈색 풍경이 연둣빛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금세 꽃 잔치가 벌어졌다. 검정에 가깝도록 짙어진 초록은 이내 현란한 가을 단풍으로 변했다. 하나님께서 창밖 풍경을 통해 작은 수고를 기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시는 듯했다. 큰 위로를 받았다. 사계절 풍경이 나의 시선과 심정에 쌓이는 동안, 나는 그것을 지으신 분과 나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례는 일찌감치 받았지만, 인격적 관계라는 것이 형성된 시간은 청주행 버스 안, 어쩌면 길 위에서였는지도 모른다.
길 위의 예배가 이어진 것은 미국에 건너온 지 3년째 되던 해, 이곳에서 식물과 조경을 공부하면서부터다. 학교는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였다. 안갯길, 빗길, 눈길, 맑은 날, 흐린 날, 바람 부는 날, 봄날, 가을날…. 같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때 읽고 있던 《오늘이라는 예배》를 따라, 오늘은 오늘의 예배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길 위에서 기도했다. 영어 스트레스, 코로나로 칩거 중인 사춘기 자녀들, 학교생활과 이후 진로에 대한 긴장과 염려와 두려움…. 그 짐들을 길 위에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짐을 버리고 길을 물었다’. 응답 대신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로 미국까지 왔든지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밟고 사는 땅의 식생을 알기 원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내가 이해하던 정원은 화단이었다. 그런데 그오가는 길을 통해 뉴욕 동부의 산과 들, 강과 계곡, 농가와 목초지, 철길과 도로를 지나면서 정원의 의미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사람이 자연과 맺는 관계의 터전으로 확대되었다. 정원의 언어로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 지역의 의미가 통합되는 시간이었다. 왜 춥고 낯선 뉴욕 북부의 땅과 식생에 정을 붙이게 하시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등굣길을 조경학 0교시라고 이름 붙였다. 약 3년의 학교생활 동안 내가 가장 사랑하던, 또 가장 유익했던 수업 시간이었다.
물 위의 예배
조경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거기서 다루는 주제 중 하나가 생태 복원이라는 얘길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난해한 분야에 처음부터 관심 있지는 않았다. 계기가 있었다.
수년 전 4대강 사업이 시작되면서 나는 영혼이 절망하는 것을 느꼈다. 로마서 8장 표현대로 피조물의 신음과 탄식이 온몸으로 들리는 듯했다. 특히 유년 시절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추억의 터전이었던 모래여울이 사라지게 되니 하나님께 죄송했고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4대강 사업이 지류로 확산되면서 경북 영주 내성천에 댐이 건설되었다. 물과 모래가 함께 흐르는 강 내성천이 사라질 판이었다. 우리 가족은 “내성천에 물과 모래가 흐르게 해주세요”라고 적힌 커다란 현수막을 제작해 내성천 탐사 여행을 떠났다. 낙동강이 보이는 안동 부용대를 시작으로, 강의 제1지류인 내성천 물길을 따라 올라갔다. 아이들은 모래여울에서 정말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넓고 맑은 모래여울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행복해 보였다. 약간의 부채 의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주일성수하지 않으면 천국 갈 수 없다고 협박하지 않는 목사님 덕분에 우리 가족은 내성천 물 위에서 가족 예배를 드렸다.
몇 년 후 우리 가족은 두 번째 물 위의 예배를 드렸다. 세계에 두 곳밖에 없는 오랑우탄들의 서식지, 팜유(야자유) 농장을 개간하느라 열대우림이 사라지고 있는 아픔의 땅, 보르네오섬이었다. 우리가 여행한 지역은 도로보다 뱃길이 더 발달해있었다. 선장과 요리사를 포함해 네 명의 선원이 딸린 배를 빌렸다. 3박 4일간 물줄기를 따라 보르네오섬을 여행하면서 세 곳의 오랑우탄 보호구역을 돌아보았다. 강 위에서 드리는 예배로 여행을 시작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노래하고 로마서 8장 말씀을 읽었다.
모래여울에서만 사는 물고기 흰수마자가 사라진 내성천, 불에 덴 오랑우탄이 신음하는 보르네오섬은 아담과 하와가 떠나버린 에덴과도 같다. 두 곳 모두 무책임한 정치와 무자비한 자본이 파헤친 곳이다. 그런데 우리 가족은 그 아픔의 땅에서, 죄책감과 부채 의식 대신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주시는 위로와 치유의 힘을 경험했다. 그 시간의 추억들이 회개와 회복의 의지를 새롭게 하라는 메시지처럼 여겨졌다.
보르네오 여행 당시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인도네시아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이들을 자연주의 혁신학교로 알려진 발리 그린스쿨(Green School Bali)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거기 머무르는 동안 방학을 이용해 주변 섬들을 여행했다. 특히 보르네오섬은 선진국 자본들이 농장 개간을 위해 밀림을 파괴하면서 지역 공동체와 서식지가 유린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에서도 중요한 학습 주제로 다루던 곳이었다. 섬에서 활동하는 여러 비영리단체가 방문 강연을 하기도 했고, 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생들에게 이르기까지 수준에 맞는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활용했다. 유치원 아이들은 동물 보호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거나 연극을 발표했고, 고학년 친구들은 비영리기구를 포함한 사회적기업을 설립하거나 운영하는 데 필요한 기금 모금, 프레젠테이션 등 필요한 과정들을 학습했는데, 창의적 문제 해결 방법론인 디자인 사고(Design Thinking) 개념이 수업에 도입되었다. 튀김 요리가 많은 곳이었지만, 학교 조리실에서는 팜유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수업에 들어간 동안 나는 학교 카페에 앉아 다른 부모들과 대화하거나 앞으로의 진로를 탐구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학생들 국적은 38개국에 걸쳐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든, 이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은 이미 학교 커뮤니티 안에 대단히 탄탄한 공동체성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지속가능성, 지역성, 공동체성 같은 주제들이 학교의 핵심 가치였고, 아이들 교육과정뿐 아니라 학교에서의 일상에도 깊숙하게 녹아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보태면 참으로 완벽한 곳일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같은 뜻을 품어서인지, 영어는 서툴렀지만 한국보다 말이 잘 통했다. 그 학교에서 1년을 지내는 동안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았고, 나는 인생 후반기를 그동안 교회가 놓친 많은 것들 중 하나 ―사람과 자연의 손상된 관계 회복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결심, 혹은 어떤 부르심― 를 자각했다. 그렇게 동화 같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간호사인 아내는 한국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생활비를 보내기도 했고, 친자매처럼 지내던 동생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의미 있는 시간을 채워나갔다. 발리에서 예정했던 기간이 절반쯤 지났을 때, 십여 년 전 접수했다가 지연되었던 이민 수속이 재개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건너왔다.
나의 수목원, 나의 수도원
곳곳에 눈이 쌓여있던 3월의 첫날 수목원 숙소에 짐을 풀었다. 와이파이 신호는 있었으나 인터넷 서비스가 되지 않았다. 휴대폰 안테나의 막대기는 하나만 떴다. 줌(Zoom)으로 수요예배에 참석하고, 목요일에도 형제들과 성경공부를 했는데 전파가 약해 곤욕을 치렀다. 휴대폰을 들고 강한 신호를 찾아 기숙사 건물을 헤매다가, 세미나실 한쪽 구석에서 안테나 막대기 두 개가 뜨는 곳을 찾아냈다. 거기 자리를 잡고 예배와 성경공부에 참여했다. 공포 영화 배경으로 써도 좋을 만한 1920년대 건축물에서, 수요일 목요일 밤마다 나는 두 개의 안테나에 감사하며 더 간절해졌다. 어쩌면 예배자로서 처음으로 충분히 가난하고 겸손해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또 다른 도전은 삼시세끼 해결이었다. 와이파이를 제외한 모든 것이 갖춰진 주방 덕분에 근근이 식사를 해결했다.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과 음식도 도움이 많이 되었지만, 차를 타고 30분 정도 나가면 교포뿐 아니라 많은 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슈퍼마켓 H마트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타운 이름이 제리코(Jericho)였다. 장을 보러 갈 때는 ‘여리고성을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H마트로 간다’고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적막한 숙소에서 혼자 요리할 때마다 내게도 로렌스 형제의 영성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평일에 업무가 끝나면 카메라를 들고 정원을 다녔다. 식물 식별은 정원사에게 구구단과도 같다. 식물마다 이름표가 달려있던 수목원만큼 식물 공부하기 좋은 곳은 없었다. 4월을 지나 5월로 접어들면서 꽃향기와 잎 색깔, 나무의 질감에 매료되었다. 한번 나갈 때마다 수백 장씩 찍어온 사진들을 밤늦도록 분류하면서 식물들 이름과 모양을 익혔다. 연구 과제로 미국의 자생난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수목원 부지에 속한 숲속에 자생하는 복주머니란의 일종이었다. 일반적으로 꽃이 분홍색이지만 아주 드물게 하얀색 변이가 생기는데 그걸 찾는 게 디렉터의 주문이었다. 몇 차례 숲속을 뒤지면서 여러 곳의 자생난 군락을 발견했다.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논문 몇 편을 참고해 보고서를 쓰면서 꽃가루받이 곤충을 유인하기 위해 특이하게 진화된 꽃의 모양과 뿌리에서 이루어지는 곰팡이 균류와의 복잡한 공생 관계를 알게 되었다. 한 포기 복주머니란이 간직한 이 오묘한 창조의 언어를 어떻게 세상이 귀 기울일 만한 언어로 환원할 수 있을까. 교회는 언제부터 이 언어를 상실하게 되었을까.
탐구의 즐거움이 구도의 열망을 낳는 곳, 고독한 듯 분주한 곳, 형편없는 자아와 직면하고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는 곳, 그리고 생명과 자연의 신비로 충만한 곳. 그 수목원은 나에게 수도원이었다. 놉의 제사장이 다윗에게 건넸던 그것을 나도 수목원에서 얻었다. 말도 땅도 낯선 곳에서 사회로 진출할 채비를 차렸고, 뉴욕식물원 문턱을 넘어 가드너로 일할 수 있는 기본기를 익혔다. 진정한 교회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는 여전히 구도자의 심정이고, 소유와 과시의 수단으로 시작된 과거의 정원을 넘어, 공유와 포용을 지향하는 정원이 어떤 것인지도 이제 막 탐구를 시작한 참이다. 최근 정원 분야에서 활발하게 일어나는 흐름 중 하나인 자연주의 또는 생태주의 추세는, 교회가 공공성과 지역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과 본질적으로 같은 가치들을 추구한다. 그것들이 무엇인지 앞으로 하나씩 나누고자 한다. 정원의 길과 교회의 길이라는 주제로 글감이 충분할까 염려하지 않는다. 그보다, 그 접점에서 일어나는 다이내믹하고 깊은 통찰들을 부족한 글로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걱정한다.
새내기 정원가로서, 참된 교회를 찾아 떠나는 평범한 성도로서, 이 여정을 고국의 나무를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