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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난설헌의 생가 솟을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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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정근 |
| 엊그제 저멋더니 하마 어이 다 늘거니/ 소년행락 생각하니 일러도 속절없다/ 늘거야 서른 말씀 하자니 목이 멘다/ 부생모육 신고하야 이내 몸 길러 낼 제/ 공후배필은 못 바라도 군자 호구 원하더니/ 삼생의 원업이오 월하의 연분으로/ 장안 유협 경박자를 꿈가치 만나잇서/ 당시의 용심하기 살얼음 디듸듯/ 삼오이팔 겨오지나 천연여질 절로이니/ 이 얼골 이 태도로 백년기약 하얏더니/ 연광이 훌훌하고 조물이 다 시하야/ 봄바람 가을 믈이뵈 오리 북 지나듯 설빈화안 어디두고 면목가증 되거고나/ 내 얼골 내 보거니 어느 님이 날 괼소냐/ 스스로 참괴하니 누구를 원망하리
우리나라 규방문학의 금자탑 허난설헌의 규원가(閨怨歌)다. 그녀의 작품 규원가는 우리 국문학사(史)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품이며 가사문학의 정수이고 규방문학의 진수이며 우리 문학의 금자탑이다.
숨막힐듯한 조선사회에서 여자로 태어나 부모님 슬하에 곱게 자랐건만 시집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남자로 인해서 피었다 스러지는 여자의 한(恨)을 목화에서 실을 뽑아 올리듯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 또 있을까?
숨소리마저 제대로 못 내고 숨죽여 살아야하는 남성 우위의 조선 사회에서 허난설헌의 출현은 사건이었고, 기방(妓房)문학은 있지만 규방(閨房)문학은 없다는 남존 여비의 조선 사회에서 허난설헌의 작품은 쿠데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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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초희가 뛰어놀았던 마당과 사랑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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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정근 |
| 강원도 강릉하면 선비의 고을이라는 것과 경포대가 떠오른다. 경포대가 해수욕장으로 개발되면서 경포대 일대가 위락시설로 변모했지만 경포대는 아름다운 호수다. 경포대와 지근거리에 율곡 이이를 낳은 신사임당의 오죽헌이 있고 강릉 선비의 대표적인 저택 선교장이 있다. 또 식도락가들의 군침을 돋게 하는 곳이 있으니 초당 두부다. 그 초당(草堂)이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의 호(號)다.
허엽의 호가 있어서 초당동이 되었는지 초당동이 있어 허엽이 호(號)를 초당으로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경포대를 끼고 있는 조선시대 저택이 허난설헌의 생가로 굳어졌다. 일설에 의하면 홍길동이 강릉시의 마스코트로 채택되면서 김감록의 생가가 허균의 생가로 둔갑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인할 길이 없고 강릉시는 강원도 문화재 자료 59호로 보호하고 있다.
허난설헌은 1563년(명종18년) 경상감사를 지내고 동인의 영수(領袖)이던 허엽(許曄)의 둘째딸로 강릉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許楚姬). 별호는 경번(景樊). 그녀의 큰 오빠 허성은 이조와 병조 판서를, 둘째 오빠 허봉 역시 홍문관 전한을 지냈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알려진 허균은 형조와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그녀의 동생이다.
난설헌이 일곱 살 때 지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은 그녀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대 문장이었다. 일곱 살밖에 안된 어린 소녀가 선녀가 살고 있다는 상상속의 세계에 궁전이라는 광한전을 생각하고 상상속의 하늘의 황재가 살고 있다는 백옥루를 연상하며 그 궁전을 건축하는 상량문을 지었다는 것은 그 당시 문인 재사들을 뒤집어지게 하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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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밭으로 연결된 협문. 닫혀진 문에서 댕기머리 소녀 허초희가 금방이라도 뛰어 나올것만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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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정근 |
| 우뚝 선 솟을대문을 따라 경포호수 쪽으로 난 담장 끝에 솔밭으로 연결된 작은 협문이 하나 있다. 하인을 비롯한 아랫것들이 방앗간을 드나들던 문이다. 상하를 아직 숙지하지 못한 어린 난설헌이 댕기머리 치렁대며 솔밭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보이는 것 같다.
난설헌은 아직 피지도 않은 나이 15세에 명문가의 김성립과 혼인하면서 불행을 잉태하게 된다. 남편 김성립은 당대의 5대 문장가집 출신인 자신의 부인 난설헌에게 열등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런 남편의 방탕한 생활과 기방 출입은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남편의 학대와 시집살이의 고단함이 그녀의 시상(詩想)을 북돋았는지 모른다.
이러한 일화도 전해저 내려온다. 김성립과 친구들이 집을 얻어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김성립의 친구가 거짓으로 '김성립이 기생집서 놀고 있다'라고 놀려댔다. 난설헌이 이를 전해 듣고 안주와 술을 보내면서 시(詩) 한 구절 써서 보냈다.
"(郎君自是無心者, 同接何人縱半間)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기에 이간질을 시키는지요?"
이를 보고 사람들은 난설헌이 시(詩)에도 능하고 기백도 호방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서찰을 보내야 하는 여자의 쓰라린 마음을 알기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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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와 회랑으로 연결된 안채. 여기에서 그 유명한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 지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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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정근 |
| 비단 폭을 가위로 결결이 잘라/ 겨울 옷 짓노라면 손끝이 시리다/ 옥비녀 비껴들고 등잔가를 저음은/ 등잔불도 돋을 겸 빠진 나비 구함이라(야좌-夜座)
숨 막힐 것 같은 시집살이의의 고단함속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시를 읊을 수 있는 것은 선경(仙境)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었던 그녀만이 그려낼 수 있는 절창이 아니고 무엇인가. 특히 마지막 두 줄. '옥비녀 비껴들고 등잔가를 젓는 것이 불꽃도 돋을 겸 빠진 나비 구함' 이라는 절구는 오직 그녀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절묘함이 아닐 수 없다.
기방에 파묻혀 사는 님을 그리며 기나긴 밤 독수공방으로 밤을 지새우다 등잔불 저음은 불 속에 빠진 나비 한 마리 구함이라니…. 역시, 허난설헌다운 절창이다. 지아비를 하늘처럼 모셔야하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안주인이 부군(夫君)을 바라보는 시각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의 여인들보다 더 세련되고 더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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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에서 태어난 허초희가 꽃가마 타고 경기도 광주로 시집갈때 넘어갔던 대관령 옛길 표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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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정근 |
| 맑은 가을 호수에 옥 같은 물 흐르는데/ 연꽃 무성한 깊은 곳에 목란 배 매어 두고/ 님 만날까 물 건너로 연밥을 던져놓고/ 남의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 무안했네(채련곡-采蓮 曲)
옷고름 입에 물고 수줍음을 표현하는 우리네 여인의 모습을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은 아직 우리 가사 문학에서 발견된 바 없다. 오로지 가사 문학의 천재 허난설헌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절창이다. 하지만, 천재도 인간이고 미인도 인간이다. 그녀에게 마지막 슬픔을 안겨준 것은 스승이나 다름없는 오라버니 허봉의 죽음이었다.
아버지 허엽을 경상도 땅 상주에서 비명횡사로 여의고 딸을 가슴에 묻은 다음 해 아들 희윤이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게 되니 억장이 무너지고 정신 상태가 황폐화되기 시작한다. 지아비에 시름을 당하고 자식을 가슴에 묻은 것이 병이 되었던가, 난설헌 그녀는 아직 젊은 나이에 죽음을 예비하게 된다.
가녀린 여인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숙명 앞에 통곡하면서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마음을 다잡으며 시상(詩想)을 가다듬던 그녀에게 스승처럼 받들던 오빠 허봉의 죽음은 난설헌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은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강직한 성품 때문에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 갑산으로 귀양 갔던 오빠 허봉이 임금의 방면으로 유배생활은 풀렸지만 한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떠돌다 객사했다는 소식은 그녀에게 절망이었다.
난설헌은 비탄에 잠겨 실성한 것이나 다름없이 일년동안을 통곡으로 보내다 아들과 딸과 오라버니가 기다리는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1589년 3월 19일 그녀의 나이 27세였다.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난설헌을 두고 한 말일는지 모른다. 이때 사람들은 허난설헌의 죽음을 삼한(三恨)을 품고 저 세상으로 갔다고 애석하게 여겼다.
첫째는 중국과 같이 큰 나라가 아닌 조선(朝鮮)과 같이 작은 나라에 여자(女子)로 태어난 것을 한(恨)하고, 둘째는 남존여비가 보편타당한 가치로 굳어진 조선사회에서 남성이 아닌 여성(女性)으로 살아간 것을 한(恨)하고, 셋째는 호탕한 성품과 시재(詩才)를 겸비한 지아비를 만나지 못한 가련한 여인(女人)이 한(恨)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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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 협문앞에 있는 우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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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정근 |
|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란새는 채색 란새에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여라(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허균이 지은 학산초담에 나오는 몽유기(夢遊記)다. 구수훈이 쓴 이순록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동생 허균이 누이 난설헌을 칭송하기 위하여 기록해 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참으로 놀랍도록 아름답다. 죽음을 생각하는 그녀의 생각이 환상적이다. 그녀가 꿈속에서 노닐었던 광상산(廣桑山)은 실재하지 않은 환상의 산이다.
광상산이 바로 난설헌이 살고자했던 이상 세계였는지 모른다. 특히 주목되는 구절은 부용삼구타(芙蓉三九朶)라고 적은 시(詩)의 구절이다. 물론 부용은 연꽃을 말하는 것이지만 삼구타는 구구단으로 해석하는 것이기에 스물일곱 송이가 늘어졌다가 다음 구절인 '붉게 떨어져 달빛 서리 위에 차갑기만 하여라'로 이어지고 있다.
스물일곱이라는 수는 그녀의 짧은 생애와 같은 27이기에 이로 미루어 난설헌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27세가 되던 삼월 열 아흐렛날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으며 "금년이 바로 3삼 9구의 해에 해당하니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 라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난설헌은 세상을 떠나면서 생명을 불태우듯이 써내려간 자신의 시집(詩集)과 시편들을 모두 불태우라고 유언을 하였다. 그 유언대로 그녀가 죽자 그 주옥같은 시들은 모두 불태워졌다. 물론 시댁 사람들이 한 일이지만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통탄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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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가 주변에 빽빽히 들어선 소나무 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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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이정근 |
|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의 시의 세계를 아깝게 여기던 그녀의 동생 허균이 전국 곳곳에 흩어져있던 시편들을 모아 목판본으로 시집을 출간하였으나 형조 판서로 있던 동생 허균이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애((愛)제자 기준격(奇峻格)의 배신으로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광해군 10년 8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덩달아 그녀의 시집도 탄압받게 되어 불태워졌다.
하지만 중국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주지번(朱之番)에게 전달된 허난설헌의 시집은 중국 명나라에서 출판되어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리며 대륙을 흔들었고 그 출판본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열도(日本列島)를 뒤흔들었으며 일본에서 출판된 허난설헌의 시편들이 조선으로 역수입(逆輸入)되어 경상도 동래(東來) 땅에서 첫 출판되었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자신의 나라에서는 홀대를 받고 제3국에서 평가를 받았으니 말이다. 이리하여 허난설헌 그녀는 동양 3국에서 우뚝 선 여류 시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때가 그녀가 죽은 지 103년이나 흐른 1692년이었다.
시대의 모순에 순응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 나가며 살아야 했기에 비난을 감수해야 했으며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아야했던 허난설헌. 죽은 이후에도 남성 사회의 본류 조선(朝鮮) 선비들로부터 폄하와 비판을 받은 그녀의 작품은 위작과 표절로 매도되었다. 416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녀의 작품과 인간 허난설헌은 완전한 명예회복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