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맥아더
요약 미국의 군인으로 2차 대전 이후 연합군 점령기에 일본을 통치하고, 한국전쟁에서는 UN군 총사령관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함
| 외국어 표기 | Douglas MacArthur(영어) |
| 출생 - 사망 | 1880년 ~ 1964년 |
육군 고위장교인 아버지 아서 맥아더의 아들로 아칸소주(州)의 리틀록에서 태어났다. 1903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육군에 근무하여 1930년 육군참모총장으로 발탁되며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대공황 으로 인해 약해지던 군사력을 보존하는 데 힘을 썼다. 1936년 필리핀 군(軍)의 고문으로 근무하다가 이듬해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같은 해 잔 페어클로스와 재혼하여 마닐라에서 외아들 아서를 얻었다. 1941년 7월 현역으로 소환되어 미국 극동군사령관으로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필리핀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전투를 수행하고 2차대전을 맡게 된다. 1944년 태평양지역의 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45년 7월에는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奪還)하고, 이어 8월에 일본을 항복시켰다. 1945∼51년에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군국주의 자 제거, 일본군 해산, 자유헌법 기초 등을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사회적인 면에서 상당한 개혁에 성공했다.
1950년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주한 UN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어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북한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 이남으로 후퇴했고, 2개월 후 북한으로 재진격했다. 그는 만주폭격과 중국 연안봉쇄 등을 주장하였고, 1951년 4월 트루먼 대통령은 그가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제한전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하여 사령관 자리에서 해임시킨다. 귀국 후에는 레밍턴 랜드 이사회 회장으로 취임하였으나 그 일 이외 대부분은 은거생활을 했다.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보수파(保守派)에 속하였으나 대통령 후보 지명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1964년 워싱턴 D.C.에서 타계하여 노퍽에 묻혔다.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맥아더[ Douglas MacArthur ]
국적출생 - 사망출생지직업
미국의 군인. 아칸소의 리틀록 출생. 육군 사관 학교ㆍ육군 대학(U.S.M.A., West Point)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고(1903), 일본ㆍ필리핀 등지에서 근무, 제1차 대전(1914~18) 때는 참모 장교로서 종군했다. 1919년 육군 사관 학교 교장이 되고, 1925년 육군 소장ㆍ1928년 마닐라 방면 군사령관을 거쳐 1930년 육군 대장ㆍ1930~35년 육군 참모 총장이 되었다. 1935~37년 필리핀 정부 최고 군사고문을 거쳐, 1937년 퇴역했다. 1941년 7월 현역에 복귀함과 동시에 필리핀 주재 미국 극동군 사령관이 되고(1941.7), 1942년 일본군이 마닐라 함락 후 서남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어(1942.3), 대일(對日) 반공 작전을 지휘, 1944년 원수(元帥)가 되었다. 1945년 일본군을 격파하고 필리핀에 심축, 동년 9월 전함 미주리 호(號) 상에서 행해진 일본 항복 조인식에 임석(臨席)하고(1945.9), 이후 대일(對日) 점령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도쿄에 주재하면서 일본의 민주화와 자립 재건을 위해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 1948년 대통령 선거전에 공화당의 출마요청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고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 총사령관에 취임, 작전을 지도하여 인천 상륙작전 등의 빛나는 전공을 세웠으나, 전국 교착화(膠着化)의 타개책으로 만주 폭격을 주창하여(1951.4) 트루먼 정부와 충돌, 해임되었다.(1951.4). 귀국 후, 래밍턴 랜드 회사 사장에 취임, 조용한 만년을 마쳤다. 그의 한국에 있어서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인천에 동상(銅像)이 건립되어 있다.
출처:(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2026-07-16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