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4부 2
집으로 돌아온 브론스끼는 방에서 안나가 보낸 쪽지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몸이 아프고 불행해요. 외출도 못 하겠어요. 하지만 더 이상 당신을 안 보고 견딜 수는 없어요. 저녁에 와주세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7시에 회의에 갔다가 10시까지는 거기 있을 거예요.’ 집에 들이지 말라는 남편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집으로 자신을 부르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한순간 스쳐 갔지만, 그는 가기로 마음먹었다.
올겨울 대령으로 승진한 브론스끼는 연대에서 나와 혼자 지내고 있었다. 그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소파 위에 드러누었다. 요 며칠 목격했던 추잡한 장면들이 5분가량 뒤죽박죽 혼란스레 떠오르더니 안나에 대한 인상과 곰 사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몰이꾼 사내의 이미지와 뒤섞였다. 그러다가 이내 브론스끼는 잠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공포에 떨며 잠에서 깨어난 그는 황급히 촛불을 켰다. ‘그게 뭐지? 뭐더라? 꿈에서 본 그 무서운 게 대체 뭐지? 그래 맞아, 몰이꾼 사내였어. 몸집이 작고 지저분하고 뻣뻣한 턱수염이 났던 것 같아. 그가 허리를 굽힌 채 뭔가를 하다가 갑자기 프랑스어로 이상한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지. 그래, 거기까지가 꿈에서 본 전부였어.’ 그가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끔찍했을까?’ 그는 그 사내와 그가 지껄였던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어를 다시 한번 생생하게 떠올렸다. 그러자 싸늘한 공포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망상이내!’ 브론스끼는 속으로 이렇게 뇌까리고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8시 30분이었다. 그는 벨을 울려 하인을 부른 다음 꿈에 관해서는 까맣게 잊은 채 늦을까 봐 안달하며 서둘러 옷을 입고 현관으로 나섰다. 까레닌가의 현관에 당도하여 시계를 보니 9시 10분 전이었다. 회색 말 한 쌍이 매인, 천장이 높고 폭이 좁은 사륜마차가 현관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그것이 안나의 마차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나한테 오려고 했군.’ 브론스끼는 생각했다. ‘그게 더 나았을 텐데. 도무지 이 집에는 발을 들이기가 싫단 말이야.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숨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가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어릴 적부터 몸에 밴 당당한 자세로 썰매에서 내려 출입문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문이 열리더니 모포를 손에 든 수위가 손짓으로 사륜마차를 불렀다. 세세한 것들에는 둔감한 편이었던 브론스끼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자신을 쳐다보는 수위의 놀란 표정을 알아차렸다. 곧이어 바로 그 문가에서 브론스끼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와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 원추형의 가스등 불빛이 검은 모자 밑의 창백하고 해쓱한 얼굴과 비버 털가죽 외투 깃 사이로 반짝이는 하얀 넥타이를 곧장 비추었다. 까레닌의 흔들림 없는 흐릿한 시선이 브론스끼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브론스끼가 목례를 하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입을 꽉 다문 채 모자 위로 손을 올리고는 그대로 지나쳐 갔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사륜마차에 오르더니 창문으로 모포와 쌍안경을 건네받고는 마차 안으로 사라졌다. 브론스끼는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의 눈썹은 일그러져 있었고, 두 눈은 오만과 독기가 서린 빛을 뿜고 있었다.
‘꼴좋게 됐군!’ 그는 생각했다. ‘그가 결투를 해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 한다면, 나 역시 거기에 응하며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텐데. 저건 나약하거나 아니면 비열한 거야…..그가 나를 비겁한 인간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나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고 지금도 그럴 마음은 없어.’
브레데 부인의 별장 정원에서 안나와 속 얘기를 서로 털어놓은 뒤 브론스끼의 생각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그에게 모든 것을 내맡긴 채 오로지 그의 결단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있는 안나의 나약함에 자신도 모르게 굴종하였고, 지레 앞서서 모든 것에 굴복해 버렸으며, 그 무렵 그에게 들었던 생각, 즉 이런 식으로 지속되는 관계가 끝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버린 지 오래였다. 그의 야심 찬 계획은 또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는 모든 것이 규정되어 있는 행동 범위를 벗어나 버렸다고 느끼면서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를 통째로 내맡겼으며, 그러한 감정은 그를 점점 더 강하게 그녀에게 얽어맸다.
대기실에서 그는 멀어져 가는 안나의 발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다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이내 응접실로 돌아갔음을 알아챘다.
“안 돼요!” 그를 보자마자 안나가 소리쳤다. 그 외마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이렇게는 안 돼요.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훨씬, 훨씬 더 빨리 그 일이 일어날 거예요!”
“뭐가 말입니까?”
“뭐냐고요? 나는 괴로워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 시간, 두 시간을…….아니요, 더 말하지 않을래요! 당신과 싸울 수는 없어요. 그래요, 당신도 어쩔 수가 없었던 거예요. 됐어요, 그만 말할래요!”
그녀는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서 그윽하고 환희에 찬 눈빛으로 한참동안 유심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보지 못한 동안 그의 얼굴을 하나하나 자세히 떠올려 곱씹은 터였다. 모든 남녀의 만남에서 그러듯이,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그의 모습을 자신이 상상한(비할 데 없이 멋진,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하나의 이미지와 합쳐 놓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