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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85 ~ B.C. 42
카이사르를 암살한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왜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그를 죽였는지 이유를 요구한다면,
이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카이사르에 대한 나의 사랑이 결코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로마를 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카이사르가 죽음으로써 모두가 자유인으로 살기보다
카이사르가 살아서 모두가 그의 노예로 죽는 것을 원하십니까?
카이사르는 나를 사랑했기에, 나는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그가 행운을 타고났기에,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가 용감했기에, 나는 그를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가 야심을 품었기에, 나는 그를 죽였습니다.
그의 사랑에 대한 눈물, 그의 행운에 대한 기쁨,
그의 용기에 대한 존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야심에 대해서는 죽음이 있습니다.
-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연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중에서
1. 공화정을 수호할 운명을 타고난 아이
마르쿠스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는
같은 이름을 가진 아버지와 세르빌리아 케피오니스 사이에서 기원전 85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내란 중 폼페이우스(Pompey the Great)에 의해 살해되었다.
어머니는 스토아학파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카토와 이복남매 사이였고,
남편을 전쟁에서 잃은 몇 년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부가 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브루투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일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브루투스가 태어났을 당시
카이사르의 나이는 겨우 15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신빙성은 크지 않다.
(카이사르가 죽고 나서 공개된 유언장에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아닌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제2 상속인으로 지정된 것만 봐도
브루투스 마르쿠스가 아들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브루투스의 조상 중에는
과거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창건한 루키우스 브루투스가 있다.
그는 어렸을 때 로마 7왕의 마지막 왕이자 어머니의 오빠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에 의해
아버지와 형제들이 처형당하자 바보 흉내를 내며 살아남았다.
로마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왕자들은 델포이에 신탁(神託)을 들으러 갔는데
여행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그를 데려갔다.
왕자들이 호기심에 델포이 신전에서 누가 왕위를 계승할 것인지를 물어보자,
로마에 가서 가장 먼저 어머니에게 입을 맞추는 자가
왕이 될 것이라는 신탁이 내렸다.
브루투스는 로마에 들어서자마자 땅에 입을 맞추었는데,
이는 그가 신탁에서 말한 어머니는
다름 아닌 인류의 어머니인 땅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후 왕의 막내아들인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가
사촌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의 아내인 루크레티아를
겁탈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루크레티아는 아버지와 남편에게 복수를 부탁하고 자살했다.
마침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브루투스는 무장봉기를 주도하였고,
결국 왕정을 종식시켰다.
그가 기원전 509년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면서
로마의 공화정은 시작되었다.
브루투스의 어머니는 세르빌리우스 가문 출신으로
그 가문은 참주암살자(tyrhannicidus)로 명성이 높았던
세르빌리우스 아할라의 후손이었다.
그는 기원전 439년 스푸리우스 마일리우스가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고
공화정을 종식시키고자 할 때
단도를 품고 공회당으로 들어가 그를 찔러 죽인 인물이다.
브루투스의 외삼촌인 카토는
부패가 만연한 당시의 로마에서는 보기 드물게 청렴결백한 인물이었다.
그는 오랜 기간 카이사르와 대립하였고,
과거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군대를 해산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로마로 귀환하도록 하는 원로원의 결정을 이끌어 낸 것도 그였다.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내전을 본격화한 카이사르에 맞서 싸우던 카토는
패색이 짙어지자 기원전 46년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브루투스는 카토를 로마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생각했으며,
훗날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토의 딸인 클라우디아 포르키아와 결혼하여 카토의 사위가 되었다.
2. 카이사르의 사랑을 받았던 브루투스
브루투스는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을 좋아하여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 아카데미 학파의 철학
및 외삼촌인 카토의 영향으로 스토아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특별한 공무가 있을 때 말고는 항상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심지어 자신의 운명을 건 전투가 있기 바로 전날까지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브루투스가 사망하기 약 3년 전에 태어난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브루투스는 심성이 착한데다가
수양과 철학으로 마음을 닦고 터득한 바를 실천했기 때문에
당대의 로마인들은 브루투스를
보기 드물게 훌륭한 인격을 가진 인물로 여겼다고 한다.
카이사르 역시 브루투스를 매우 아꼈다.
브루투스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 전쟁이 벌어졌을 때
폼페이우스가 비록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뇌 끝에 원로원파를 이끌고 있던 폼페이우스의 편에 가담했다.
폼페이우스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명성이 자자한 브루투스의 합류를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여,
그가 자신의 진영에 도착했을 때
마치 자신의 지휘관이라도 오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를 끌어안고 반갑게 맞았다고 한다.
브루투스가 비록 적의 편에 섰지만
카이사르는 부하 장병들에게 전투를 할 때
브루투스를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로 그를 특별하게 생각했다.
폼페이우스가 전쟁에서 패하자
브루투스는 라리사 지방으로 갔다가
카이사르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의 의사를 표시했다.
카이사르는 그가 무사한 것을 무척 기뻐하였으며
곧 그를 불러 용서해줬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하 장군들과 동등하게 대우해 주었다.
또한 브루투스의 부탁을 받아
자신에게 맞섰던 카시우스 롱기누스(Cassius Longinus)까지 사면해 주었다.
카이사르는 단지 자신의 과거 애인의 아들이어서
브루투스를 아낀 것이 아니라
브루투스의 인격과 능력 자체를 높게 평가했다.
과거 브루투스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했을 때
그것을 지켜보던 카이사르는
곁에 있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 젊은이가 어떤 꿈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 번 마음먹은 건 끝까지 이룰 사람인 것 같군."
폼페이우스가 전쟁에서 패한 후
행방이 끊겼을 때
카이사르는 단지 브루투스의 예측만 듣고
다른 부하 장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로 그를 쫓으러 갔다.
그러나 그들이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
폼페이우스는 이집트 왕에 의해 암살당한 후였다.
이집트 왕은 폼페이우스의 망명 요청을 받아주면 카이사르가 분노할 것이고,
폼페이우스의 요청을 거부하면
나중에 폼페이우스가 앙갚음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후 카이사르는 전쟁을 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나면서
갈리아 지방을 브루투스에게 맡겼다.
브루투스는 그 곳을 통치하면서 매우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거기에 더해 자신의 치적을 모두 카이사르의 공으로 돌렸다.
카이사르는 돌아온 후 브루투스가 다스리고 있던 여러 지역을 지나면서
자신의 영광을 한층 더 빛내고 있는 브루투스를 보고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얼마 후 로마를 담당하는 정무관(政務官)의 자리가 비자
사람들은 브루투스나 카시우스 중 한 명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의 편을 들어주었고
결국 브루투스가 로마의 정무관이 되었다.
카시우스는 이 일을 계기로 카이사르에 대해 개인적 원한까지 품게 되었고,
결국 카이사르 암살 음모를 주도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브루투스를
카이사르 암살 음모에 끌어들인 것도 그였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카이사르 밑에서 누구보다 큰 권력을 가질 수도 있었으나,
카시우스가 중간에 끼어들면서 카이사르로부터 멀어지고 말았다.
기원전 44년 2월
카이사르가 종신독재관에 오르자
원로원 의원들은 카이사르의 부인에도
그가 황제에 오르고자 할 것이라고 염려하면서 암살 모의를 하기 시작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이는
평소 카이사르를 증오했던 카시우스였지만,
암살 모의를 실행에 옮길 수 있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브루투스였다.
카이사르 역시 다른 누구보다 브루투스를 염려했다.
그의 높은 정신과 고상한 인격,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따르는 수많은 친구를 두려워한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의 도덕성과 정의로움을 믿었으므로
어느 정도는 마음을 놓고 있었다.
카이사르를 암살하기로 마음먹은 카시우스가
원로원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함께 거사를 치르자고 하자
이들은 만약 브루투스가 나선다면 기꺼이 참여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에게는 브루투스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과 권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브루투스가 나선다면 카이사르의 암살이
개인적 원한이나 시기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숭고한 행동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카시우스는 그들의 말을 듣고
로마 정무관직 때문에 사이가 벌어진 브루투스를 찾아가
넌지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건넸다.
"3월 1일에 카이사르의 부하들이 그를 왕으로 내세우겠다고 제안을 할 것이라는데,
그 날 원로원에 나갈 생각이오?"
브루투스는 나가지 않겠다고 대답하였고,
이에 카시우스는 그들이 부르러 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브루투스는
"만약 그런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이 나라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가 죽을 것이오!"
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들은 카시우스는 안심을 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로마인들은 당신에게 나라를 구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당신이 진정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들은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을 것이오."
실제 당시 많은 로마인들은 브루투스에게
그의 선조인 루키우스 브루투스가 했던 바와 같이
공화정을 지켜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었다.
친구와 시민들은 찾아와서 끊임없이 설득을 하였고,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격려의 편지가 쏟아졌다.
브루투스가 정무관으로 법정에 나가 있으면
그의 자리 옆에 종이쪽지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브루투스, 아직도 잠에서 안 깨셨소?"
"당신 정말 브루투스 맞소?"
어느 날 브루투스는 친구인 카이우스 리기리우스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그를 본 리기리우스는 몸을 일으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브루투스, 자네가 자네다운 큰일을 계획한다면 내 병은 다 나을 것이네."
브루투스를 갈등하게 했던 것은
공화정을 지키려는 자신의 신념과 주위 사람들의 기대,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카이사르의 자신에 대한 애정이었다.
그의 이러한 갈등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통해
셰익스피어는
고뇌하는 인간의 비극성을 [햄릿]에 앞서 보여주었다.
즉,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고뇌하는
햄릿의 원형이 되는 인물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브루투스이다.
차이점은 브루투스의 경우
반대로 "죽이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고민했던 것이다.
그런 브루투스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인 것은
카이사르의 행동이 아닌 카이사르에게 아첨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민중의 이름을 빙자하여
카이사르에게 온갖 영광을 주려고 했다.
또한 그의 동상을 만든 것도 모자라
한밤중에 몰래 동상 위에 왕관을 씌어놓기까지 했다.
종신독재관으로 만족하지 않고 카이사르는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부추기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브루투스는 카시우스에게 카이사르 암살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고,
그 즉시 그는 카이사르 암살 모의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믿을 만한 사람들을 모으며
동지들을 하나씩 늘려나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브루투스의 이름만 듣고도
이 위험한 음모에 뛰어들었다.
이즈음 카이사르의 총애를 받던
또 한 명의 브루투스인 데키무스 브루투스 역시 합류했다.
그는 카시우스의 설득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가,
나중에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만나 그가 이 계획의 주동자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이 일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마침내 원로원의 소집 날짜가 3월 15일로 정해졌다.
카이사르 역시 여기에 참여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원로원 의원들이 모이게 될 장소 역시 정해졌는데,
우연의 일치로 폼페이우스의 동상이 서있는 건물이었다.
당일 브루투스는 옷에 단검을 품고
다른 공모자들과 함께 카시우스의 집으로 갔다.
그들은 계획의 실행을 다시 한 번 결의한 후
폼페이우스 기념관으로 들어가 카이사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시간이 꽤 많이 지났음에도 카이사르가 나타나지 않았다.
흉몽을 꾼 카이사르의 부인 칼푸르니아가
그를 붙잡아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도 부인이 그토록 미신에 집착해서
나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불안해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때 암살 공모자의 한 사람인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찾아와
그를 재촉하여 겨우 길을 나섰다.
마침내 암살 공모자들이 불안을 못 견디어 해산하고자 할 때
카이사르가 마차를 타고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카이사르가 회의장으로 들어서자
60명에 달하는 공모자들이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들 중 틸리우스 킴베르가 추방당한 동생을 도와달라면서
카이사르를 붙잡고 부탁을 하자,
다른 사람들도 도와달라면서 카이사르의 손을 잡기도 하고
머리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이들의 부탁을 물리치다가
계속 귀찮게 굴자 화가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그때 틸리우스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옷을 잡아당겼고,
카이사르의 뒤에 있던 푸블리우스 카스카가
맨 먼저 칼을 뽑아 카이사르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 칼은 깊숙이 꽂히지 못했고
이에 카이사르는 카스카를 잡고
"카스카, 이 천한 놈! 이게 무슨 짓이냐?"라고 외쳤다.
겁을 먹은 카스카가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르자,
이내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나갈 길을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 보다
브루투스가 칼을 움켜쥐고 오는 것을 발견하자,
저항을 포기하고 옷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암살자들은 한동안 카이사르를 찌르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래서 저희들끼리 다치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그렇게 죽었다.
그의 온 몸에는 23군데의 상처가 났고,
특히 가슴과 옆구리 사이의 한 곳이 치명적이었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
브루투스는 연설을 하기 위해 연단으로 올라섰으나
공모자들을 제외한 의원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때 카이사르의 심복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왕정을 옹호할 뿐 아니라
매우 교만하고 사나운 인물이기 때문에
그를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안토니우스를 죽이는 일은
정의에 어긋난 일이며
이제 카이사르가 죽었으므로
안토니우스도 자신들의 편으로 돌아설 것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말렸다.
처음에는 브루투스의 예상이 적중하는 듯 보였다.
다음 날 원로원은 회의를 열었는데,
이때 안토니우스, 키케로 등이 나서서
암살자들과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제안은 곧바로 통과되었다.
그날 밤 안토니우스는 암살자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고,
다음 날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에게 내란을 막은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브루투스와 그의 동지들에게는 땅을 나누어 주었다.
이때 브루투스는 크레타섬을 하사 받았다.
사건은 이렇게 매듭지어지는 듯 했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유서와 장례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안토니우스는 유서를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장례식도 성대하게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시우스는 이 의견에 맹렬히 반대했지만,
브루투스는 이 문제를 안토니우스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
카이사르는 유서에서 시민들에게 각각 75드라크마씩의 돈을 나누어 줄 것과
티베르강 건너편에 있는 자신의 정원을 시민들에게 개방하겠다고 했다.
이를 전해들은 시민들은 카이사르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며칠 후 장례를 치르면서 안토니우스는
관례에 따라 카이사르의 공적을 기리는 연설을 하게 되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카이사르의 옷을 집어 들고
그가 얼마나 많이 찔렸는가를
하나하나 헤아린 후,
카이사르가 얼마나 로마인들을 사랑했는지를 말했다.
그러자 감동 받은 군중들은
암살자들을 모두 죽이라고 부르짖었고,
이내 암살자들의 집을 찾아 불을 질렀다.
암살자들은 미리 빠져나와 목숨은 건졌지만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렸다.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책에서
브루투스가 두 개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고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안토니우스를 살려둔 것,
그리고 둘째는 안토니우스에게 유서와 장례 절차를 일임한 것이다.
결국 브루투스와 그의 동지들은
안토니우스가 교묘하게 태도를 바꾼 탓으로 로마를 떠나야만 했다.
참고로
카이사르가 죽음을 당하면서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보며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지만,
실제 역사서에는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셰익스피어가 극적인 효과를 위해
그의 작품에 그런 표현을 집어넣은 것이다.
그리고 암살 후 브루투스가 연설을 하고
바로 뒤이어 안토니우스가 연설한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 또한 극적인 효과를 위해 셰익스피어가 지어낸 것이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후
곧바로 피 묻은 칼을 든 채
로마 중심에 위치한 카피툴리움 언덕에 올라가서
군중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연설을 했고,
안토니우스는 위에서 말한 대로
며칠 뒤 카이사르의 장례식에서
카이사르의 피 묻은 옷을 손에 든 채 연설을 했다.
브루투스가 쫓겨난 로마는
안토니우스의 세상이 되었으나,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us)가
로마로 돌아오면서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카이사르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시민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면서 인기를 얻었고,
이어 예전에 카이사르를 섬기던 병사들이
그에게 오면서 단번에 안토니우스와 대항할 만한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로마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로 나뉘어
세력다툼을 벌이게 되자
크레타섬으로 피신해 있던 브루투스는
이를 기회로 삼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그리스어 실력과 높은 명성을 바탕으로
아테네, 마케도니아 등 그리스 지역을 다니면서
대규모 군대를 모았고,
과거의 친구들 역시 속속 그의 진영에 합류했다.
브루투스가 그리스 지역을 넘어
아시아 지역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하고자 할 무렵
로마의 정세가 달라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의 지원에 힘입어
안토니우스를 이탈리아에서 쫓아내고 절대 강자로 군림하면서,
원로원의 허락 없이 대규모의 군대를 보유하면서 집정관이 되려고 했다.
이에 당황한 원로원이
브루투스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을 결정하자,
옥타비아누스는 한편으로는 안토니우스에게 화해를 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군대로 로마를 포위한 후
스스로 집정관의 자리에 올랐다.
집정관이 된 옥타비아누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브루투스를 비롯한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얼마 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그리고 레피두스는
로마의 판도를 셋으로 나누어
각각 가지기로 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키케로를 포함한 2백여 명의 인물들을 사형시키거나 추방시켰다.
브루투스는
그들의 행동에 분노하면서
자신이 반드시 그들과 싸워 이겨
로마 시민들에게 자유를 되찾아 줄 것이라고 공언했다.
마침내 기원전 42년 10월
브루투스 및 카시우스의 군대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연합군은
필리프 평원에서 대치했다.
이렇게 엄청난 숫자의 군대가 결전을 벌이게 된 것은
세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브루투스 측의 군대는 상대의 군대보다 숫자가 훨씬 적었고,
여러 가지 불길한 징조 역시 나타나
카시우스는 전투를 미루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하루속히 전쟁을 매듭지어
조국의 자유를 찾아야 하며,
전쟁 비용 때문에 시달리는 로마 시민들을 위해서도
전투를 미루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하면서 당초 계획대로 밀어붙였다.
이때 브루투스는 카시우스에게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으며 전투 결과가 좋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카이사르를 죽인 3월 15일
이미 나는 나라를 위해 죽었던 사람이오.
그날 이후 지금까지 자유와 영광을 누리며 살았던 것은
새로운 인생을 한 번 더 살았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10월 3일 첫 전투가 벌어졌다.
브루투스는 친구인 메살라(Messala)와 함께
옥타비아누스 쪽을 맡았고
카시우스는 안토니우스 쪽을 맡았는데,
브루투스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으나
카시우스는 적의 진영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면서
적에게 포위를 당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브루투스의 기병대는 카시우스를 돕기 위해 기병부대를 보냈는데,
카시우스는 그 부대를 적의 부대라 생각하여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
결국 브루투스는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매우 비통해 했다.
이후 10월 23일 두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해가 막 기울어지기 시작한 오후 3시쯤
브루투스는 부대를 거느리고 적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적의 좌익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번에도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되는 듯 했다.
그러나 적의 포위를 막기 위해 길게 늘어섰던 중앙 부대가
적의 돌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적은 곧바로 브루투스가 지휘하고 있는 부대까지 포위해 버렸다.
이때 브루투스의 부하 중 루킬리우스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적의 기병대가 브루투스에게 달려들자
일부러 말의 속도를 늦추면서 자신이 브루투스라고 소리쳤다.
브루투스의 얼굴을 알지 못했던 기병대는 그를 안토니우스에게 데려갔다.
그가 브루투스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자
병사들은 매우 당황했으나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병사 여러분들은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큰 성과를 거두었소.
만약 브루투스를 잡아 왔다면 나는 어떻게 처리할지 무척 고민을 했을 거요.
그러나 안심하시오.
이 사람은 적으로 두기보다 친구로 삼고 싶은 사람이오."
한편 쫓기던 브루투스는
자신들의 호위병들과 어느 동굴 속으로 들어가 몸을 피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그는 호위병들을 하나하나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마친 후 그는 이제 자살을 하려 하니 자신을 좀 도와달라고 했다.
호위병들은 극구 만류하였고,
그 중 한 병사는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멀리 떠나자고 했다.
그러자 브루투스가 말했다.
"그래야지요.
그러나 발이 아닌 손으로 떠나야지요."
이윽고 그는 병사들의 손을 잡으며
어느 한 사람도 배신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 고맙고
부디 안전한 길을 찾아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말한 후,
절친한 친구인 스트라토와 함께 동굴 밖으로 나와 자살했다.
안토니우스는 존경의 표시로
브루투스의 시체를 자신이 가진 가장 값비싼 천으로 싼 후 화장하였고,
그의 재는 어머니인 세르빌리아에게 보내졌다.
브루투스와 함께 전투를 벌였던 메살라는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편에서 안토니우스에 맞서 싸웠다.
옥타비아누스는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과거 브루투스를 위해 싸웠지만,
악티움 전투에서는 나를 위해 가장 열심히 싸워주셨소."
그러자 메살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언제나 가장 올바른 쪽을 위해 싸우는 사람입니다."
- 최용섭, '인물 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