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말에 나올 교수신문 칼럼에 쓴 글입니다. 실제 나갈 때는 조금 편집되기도 하니까 원문을 실을께요. 함께 공유하지요.
중국포럼에 참석자가 많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회의실이 거의 만석이었고, 중간에 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이 매너있는 발표가 되었습니다. 강의가 워낙 재미있었기도 하구요. 6월에도 흥미로운 발표가 있으니 많이 참석하기 바랍니다.(6월 17일 수요일 4시-) 차후 공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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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공문서관
강진아(경북대학교 사학과)
역사학 연구자라면 친숙해져야할 곳이 공문서관이다. 당안(檔案) 혹은 아카이브(Archives)를 모아둔 이러한 기관은 각 국에 하나씩은 다 있다. 현대사를 연구하면 원시자료인 당안 자료의 활용은 필수적이므로 자주 이용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비교가 된다.
작년에 다녀온 런던공문서관(National Archives)은 여러 의미에서 인상적인 곳이었다. 이곳에는 19세기와 20세기 동아시아 연구자에게는 아주 유용한 자료가 많은데, 특히 각 국 주요 도시의 영사관 보고서는 당시 현장의 정치, 사회분위기를 생생하게 중계하는 사료들이다. 중국 각지의 영국 공사관 및 영사관 보고서의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기는 하지만, 한중관계에 관심이 있던 차에 뒤져본 한말 한성 영사관 보고서도 적지 않았다.
이곳과 소장 자료를 보며 가장 놀란 것은 넓은 부지에 쾌적한 열람실과 전자시스템도 아니었고, 민비시해사건만으로도 천 여 페이지의 영문보고서를 베이징 공사관을 경유해 런던으로 날리는 기민하고 풍성한 보고서의 양도 아니었다. 종이였다. 1894년의 한 보고서를 읽던 중, 그만 손을 베고 말았다. 복사지나 책에 손을 베이는 것은 다반사였지만, 백년이 더 된 종이에 피를 보다니. 영사관에서 사용한 종이는 은은한 푸른빛이 나고 압인을 누를 수 있을 정도의 다소 두께가 있는 종이였다. 오늘 날의 출판사 종이보다 훨씬 훌륭했다. 20세기 초 중국의 해관무역통계에서 양지(洋紙), 즉 수입종이가 늘 주요 품목이었던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납득이 갔다. 세계를 경영했던 제국이, 그만한 재력을 가지고 정보와 문서시스템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국가만이 생산할 수 있었던 종이였던 것이다.
중국 당안관에서 손에 들었던 1930년대 성정부 당안들은 벌레가 슬어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한 장 넘길 때 마다 바스러지는 종이 덕분에, 논문을 살리고 역사를 죽이는구나 양심과 싸워야했었다. 이에 비하면 일본 도쿄 록본기에 있는 외무성당안관 자료는 종이 자체는 런던 자료와 비교할 수 없었지만 비교적 양호한 보관 상태로 열람할 수 있었다. 런던 자료의 뛰어난 보관 상태에 감탄하던 나에게 한 일본 학자는, 런던은 건조해서 보관이 용이한 것이라고, 습윤한 일본에서 자료 보관하는 어려움과 비교할 수 없다고 강조했었다. 런던당안관에는 첨부 문서 형태로 당시 조선정부가 한성 영국총영사관에게 보낸 문서나 조약 원본도 소장되어 있는데, 종이와 봉랍(封蠟, seal)까지 흠집 하나 없이 완정하게 보관된 것을 보면 종이 외에도 기후 탓도 있으리라. 하지만 백 년 뒤 이국의 역사학도의 손에 피를 보게 한 종이는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종이라면 어떠랴. 그나마 기록과 보관의 중요성을 알고 후세에 자료를 남겼다면. 대영제국, 중화제국, 일본제국의 자료는 풍부하고 넘쳤다. 산실되고 흩어져있는 조선의 당안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지난 정권에서는 기록학과 문서보존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목소리가 학계에서 적잖이 나온 덕택에 기록보존에 대한 정책적 배려도 다소 늘어났었다. 그러나 요즘은 어쩐지 시들해졌다. 제국들은 정보를 생산, 유통, 보존하여 세계를 통치했다. 한반도는 그러나 그 제국들의 동향에 생존을 걸어야하는 지역이다. 세계를 경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정보의 체계적 집적과 보존 처리가 필요한 곳이다. 예산이 없어서일까? 그래도 세계 12위의 무역대국인데.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공사 현장을 생각한다. 멀쩡한 길을 뒤엎고 새로 도로를 까는 공사현장이 대구지역에만 많아진 것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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