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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너무너무와 메주☆]의 앞표지(우)와 뒤표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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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와 메주]
윤시목 시집 / 지혜시선 485 / 도서출판 지혜(2014.06.10)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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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는 있다
윤시목
매우몹시아주무척, 아니
너무너무 모던한 여자와 몸을 나눈 끝,
아이를 낳았는데
남자와 여자를 한몸에 타고났을 뿐, 아이는
너무너무 건강했어
뿌리에는 감자,
줄기에는 토마토가 열리는 식물이 발명되었다는
너무너무 신기한 뉴스가 있은 후
아이의 배꼽이 머리에 붙었어도 말 않을 참이었어 나는,
왜냐고?
대덕 연구단지를 너무너무 모르던 고모님이
백내장 따위에 실명을 했거든 자아,
이쯤 왔으면 너도
매우몹시아주무척, 아니
너무너무 인간적인 메주를 그만 쑬 때도
되었잖니
동물의 왕국
윤시목
총소리 났다
땅!
이라고 받아쓰기엔 살기殺氣가 모자르고
꽝!
아니 그 소리는 너무나 혁명적이다
탕!
총소리에도 표준어가 있다
우리 밖의 통속성에다 방울을 달아본다
이를테면 빈속에 연신 피워대는 담배도
총잡이의 시각으론 반항이다
탕! 탕!
어쩌다 담을 넘은 호랑이가 총을 맞았다
사육사가 던져주는 먹이를 사흘이나 거절한 놈이다
주검은 곧
상식의 먹이로 요리되겠지
한낮을 넘기면서
호랑이는 담장을 넘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주장이 스을슬
자리를 잡아간다 호랑이보다
내 관심사는 총소리가 어떻게 다뤄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실여부를 떠나
진실이란 언제나 방아쇠의 재량 아닌가
동물원의 평화가 마치
사료에 묻어오는 일기예보처럼 가변적이다
필기도구를 내던진다
보지 않아도 저녁 뉴스는 뻔하다
총소리의 바른 표기는 끝내 죽은 호랑이에게 넘겨졌다
독도의 나라
윤시목
반도의 누이야
금싸라기 달밤 보름날이다
천 고랑 만 고랑 유채꽃 바다엔 누이야
어릴 적 눈물 짜거운 어머니
하얀 무명 치마저고리도 떠오른단다
쑥부쟁이 자손들
북으로 남으로 물쪼가리처럼 흩어진 손짓들
너무 그리워 꿈속을 걸어나와 먼동을 깨운다
설악산 금강산 오호라
머얼리 임진강 나루 붙들어맨 사랑들이여
누이야 단풍숲 바다에 맨몸을 담그고
꼿꼿이 깃발 흔들어 여기도 내 땅이란다
동도東島 서도西島 괭이갈매기 어린 둥우리까지
눈물겨워 등질 수 없는
반도의 메마른 살과 뼈
마라도에서 대청도 휘휘둘러 누이야
북간도에도 배고픈 계절 가고 그들의 노래 회돌면
그 울음이 두루미 하얀 날개짓이면
햇살 뜨뜻한 머리맡에 또 한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다오
그리운 누이야
그날의 첫입술을 나에게 주렴
고사목
윤시목
잊혀지지 않습니다
잎으로 못다한 손짓들
욕망의 새끼들
회초리처럼 살아나 바람을 찌릅니다
눈발보다 더 차겁게
노을보다 더 붉게
종아리 치며 울부짖는데요 우우!
텅 빈 하늘색 스크린에
까마귀 한 마리 날아들지 않습니다
역광 속의 그 이름이 사라지고
살아서 꽃이 되지 아니한
죽어서 흙이 되지 아니한
슬픔이 거느린 검은 뼈대들
계절 밖에 빈 가쟁이 걸어 놓고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태워주세요 뿌리까지
겨울 숙제
윤시목
눈 내리지 않는 이 겨울이 이상하여라
아이는 흰 도화지에 땅만 그리네
산도 들도 온통 아스팔트뿐이네
아이야 겨울 그림은
눈사람고 그리고 소나무도 그리고
초가집도 그리고
들판은 하얗고 하늘은 새파랗고
아이들은 씩씩해야 한단다
새 대신 아이는 어미의 거뭇한 속을 쏟아놓네
큰길가엔 아무도 살지 않네
한쪽 귀퉁이
전봇대 위에 올라앉은 까마귀 한 마리,
도화지 밖에서 그때 불자동차 지나고
병든 시계가 쓸쓸히
열두 점을 치고 있었네
애인의 나라
윤시목
대통령으로 그 사람은 어떠냐고 물어왔다
투표를 안 하겠다고 했다
이 사람은 어떠냐고 물었다
차라리 날 청와대로 보내달라고 했다
그럼 누가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귀먹은 베토벤이라고 했다
국무총리는 베르디를 시키면 된다
국가는 9번 교향곡이나 나부코를 부를 것이다
헌법은 필요없고
영토는 물론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
국민은 나와 그녀뿐이다
어떠냐,
이만하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겠지?
시인의 집
윤시목
자리 싸움에서 시인이 졌다
황동규를 들어내고 옷장을 들인다
별표전축 자리엔 휴지통이 들어앉는다
일상의 이름으로 죽어줘야 하는 것들
베토벤 또는 현대시...
무릇 책장과 음악이란 이름이 빛나는 자들의
수음도구 같은 것
책들을 다락에 처박는 건
내 몸에서 손톱을 뽑는 일이다
할 말이 궁해진 책장이 아픈 소리를 내자
나는 노끈에 묶여
눈앞이 캄캄한 내 집에 유배되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실제상황이다
솔직히 나의 문학적 핸디캡이란
오늘의 운세 밖으로 밀려난 가장의 내부사정일 뿐
아내는,
아내들은 결코 시인을 사랑하지 않는다
가장이 어떻게 시인일 수 있는 거냐
꽃을 털린 풀모가지들에 대해
이제 나는 아는 바 없다
윤동주마저 사라진 거실
적당히 팔아넘긴 사내를 없었다,로 받아적다
오늘 밤에도 별은 바람에
스치거나 말거나
쇠똥구리의 신화
윤시목
개나리 꽃길을 걸으며
재채기를 일삼았다면 다음날 설사는
철부지 낭만에 대한 경고다
불빛이 점점 미끄러운 거리
그 비탈에는 난간이 없네
몸통 째 구르는 내리막이
너희들의 눈엔 즐거운 경사일지 몰라도
발랑 뒤집어진 쇠똥구리 입에
제우스의 똥 덩어리는 비극이다
결코 나를 죄인이라 부르지 않겠다
시지프스 울고 간 도시
시장바닥에서 거둔 하루를 욕으로 받아쓰고
제우스의 똥구멍을 두 손으로 밀어버린다
배고파도 내 밥을 먹으며 살자.
똥 덩어리 4인분 주세요
위험한 접근
윤시목
이틀째 악몽을 꾸고
이틀째 세수를 하지 않았다
엽기적 살인자를 잡아놓고 티브이가
이틀째 수선이었으며
경이적인 폭염이 이틀째
유세를 부렸다
그녀의 연서가 이틀이나 허공을 맴돌았고
이틀째 아침을 걸렀거니와
아내를 이틀째만나지 못했다
이틀째 종말론자들이 다녀갔고
이틀째 젊은 채권자들이 짖어댔다
그리고 이틀 만에 본 아이들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백년의 무게로 다가서는 이틀
분실이 가능한 백년
이틀을 잃고도 오늘이 낯설구나
또 다시 이틀이여
사이비論
윤시목
향기를 쫓는 파리는
파리가 아니다 파리는 무식하다
파리는
파리라는 사실을 모른다 파리는
예정없이 난다 파리의 식욕은
무단히 첨부된 날개 때문이다
필생의 낯짝에 향방을 명시하지 않은
파리,
파리의 과거는
똥통이다 그러면 나는
파리가 되려는가
파리를 때려잡는다
거기 널브러진 냄새와 나는
깊이 연루돼 있다
존재의 그늘
윤시목
길이 안 보여 미치겠어
어젯밤엔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나는 오른쪽과 왼쪽,
신발을 바꿔 신었어
쉽지 않았지 오른발 흉내를 낸다는 게
걸음걸음 언제나 그 길인데
아스팔트가 새삼스럽게 이름을 묻더군,
이름? 누군들 저 딱딱한 도심을 꽃말로 풀어가랴만
꽃턱에 올라앉은 욕망의 무게와
글쎄 나는 언제까지 무관한 척 굴까
낮은 키의 출입구며 낡은 책장,
뒷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 벽시계,
가슴 속 옛애인의 누드 사진까지
거기 그대로인데 나는 끝없이 옮겨 앉아야 한다는 사실이
겁이 나, 화도 나고
그래도 모른 척 하는 실존주의가 기구하군
간신히 아는 나를 밀고 다닐 뿐이지
결코 내일의 향방을 알려주지 않는 오늘
혹자는 꿈이지만 꿈이 아닌 이 어눌한 걸음을
삶이라 부르기도 한다
살얼음
윤시목
돌을 씹은 이빨
허공에 내지른 주먹
꼿꼿이 세운 머리칼
부르다 만 노래
혹은 불면찌꺼기,
그런 거 그런 거 올려놓지 마세요
가슴이 꺼집니다
두 눈 감고 흐르는 몸살물살
그렇게 그렇게 사랑은 멀어졌어도
그대여,
깨진 유리창 안에 아직
햇살이 남았네요
안개
윤시목
1.
강가에 이르러 길을 무든다
마을이 안 보인다 어디로 숨었을까
여의도에서 날아든 조간신문엔 불쏘시개 같은 낭설뿐이다
여렴풋이 낚싯배 몇 척이 강바닥에 침수한
간밤의 별빛을 끄을리는 모양인데
둑가의 늙은 봄버들이 궁금히 여기는 것은
동 서 남 북,
아니면 고공으로 나는 새들의 안부겠지
편지마다 요즘 고향길이 멀어졌다고
그 대신 콘크리트는 철 만났다고,
검은 도회지에 잿빛 희망들이 범람하기 시작한다
아침의 눈짓이 저토록 트릿하다면 머잖아
한계령 고갯길ㄷ고 위험하다 이 시간 이후
발가락은 돌부리를 조심하라
2.
방송국의 송신탑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아침 뉴스를 아이들과 함께 듣는다
아이들의 귀가 점점 당나귀를 닮아간다는 사실은
다 아는 비밀,
바다를 건너간 내 여자의 그후 소식이 궁금하다
내 유년을 방목한 대전천은,
이미 떠난 새들은 왜 자꾸 개천 바닥에
잊혀진 얼굴을 풀어놓을까
세월도 해가 지나면 회색이 입혀지는 걸까
때로는 열망이 차가운 아침
밤새 죽은 별이 밟히고 누이가 실종되고
고향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비보가 날아든다
백짓장에 낮게 깔리는 인기척들
누가 무엇을 보았는가
바람에 관하여
윤시목
태생이 개마고원 어느 골짜기
은사시나무 숲이라고 한다
중 없는 절간의 풍경소리를 들으며
잔뼈가 굵어졌다고 한다
주린 배에 시퍼런 달빛 들이키고
칼끝을 세웠다고 한다
맨 지붕에 널린 홑이불이 차가워서
입술이 쩍쩍 갈라졌다고 한다
언덕 위 강아지풀들
그러니 가을이 눈물겹지 않겠느냐
가장 선명한 글씨
윤시목
불면을 적시는 봄비
그 은밀한 내력에 노랫말을 붙일 때
누군가 총을 겨누고 손들엇!
그러면 새벽녘의 나는
안착이 두려운 풀씨
담벼락에 매달린 민들레를 보고 있을 때
누군가 총을 쏘며 죽어랏!
그러면 변두리에서 사는 나는
총소리보다 먼저 죽었다
죽음보다 먼저 일어났다
그러면 너는 총을 맞은 것인가
나는 지금 살아있는가
죽고 싶다,
힘 있게 살자는 뜻의 이 거짓말이
오늘은 길가에 누워 신음조차 부끄럽거늘
누군가의 손길이여 이제는
내가 꼼짝 못하는 총소리를 들려다오
개망초로 한 세월 떠돌았거나
사투리로 한 세상 울부짖었거나
누군가의 사랑이여 이제는
너에게 구두를 보낸다
윤시목
뒷축이 닳았을 때
구두는 본색을 쓰윽 내민다
이젠 내 곁을 떠나겠다는,
순간 내 발길이 그녀의 정조관을 걷어찬다
나가떨어진 것은 구두,
남은 한쪽 발이 쓸쓸히 웃는다
갑자기 나는 외다리로 세상을 살아온 기분이 된다
구두와 나는 한동안 보폭을 달리 했다
밤마다 입술은 헐거워지고 그녀의 언성은 점점 높아만 갔다
내가 나보다 급히 달아날 때
구두는 더 빨리 제 발을 저버리는 법,
이별이란 대체 어느 순간이 제 격일까
만남도 그러했다
그녀와의 첫날밤이 기억나질 않는다
혹자는 구두와의 불협화음을
구두끈 하나 제대로 못 매는 내게 있다고 한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내 허리는 이제 굴욕의 각도를 넘어섰다
구두의 배신이 발목의 무관심 때문이라면
그렇다, 이번엔 내가 너를 버린다
잘 가라 모멸이여!
살구꽃
윤시목
나 마실 갈란다,
생때부리는 삼순이 뜰팡에 내려놓고
할머니 뒷걸음으로 삽짝 나서네
온다던 방물장수는 왜 아니 오냐
빈 들판에 연둣빛 소문 나돌고
풋강아지 이름 짓는 것도 이맘때
꽃바람 타고 풀풀 날리는
삼순이 어깃장은 한 짐도 넘어라
할머니 할할 웃으며 다시 돌아와
끝도 없는 삼순이 도로 안아들이네
얼레꼴레, 동네 머스매들 어디 갔다냐
우리 삼순이 쪽 째진 사추리 안 보고,
이때 살구나무 타고 앉은 낮달
네 이 노옴, 거들던
지금쯤 마당은 눈부시것다
제비 두어 마리 바쁘것다
할미꽃
윤시목
철조망 이 편
한 날개로 이승을 다한 누이
무덤 밖에 촛불 밝혔다
이 땅에 피어
맵씨도 꽃잎도 어여쁘련만
백발로 흩날린 첫날밤
쇠꼬챙이 인연
천지간에 비 뿌리고
오늘은 골짜기 햇살도 파다한데
가슴에 박힌 대못이 부끄러워
마을엔 다시 내려가지 않겠다고,
죄인인 듯
죄인인 듯
어즈버, 꽃이 숨어서 운다
여인이 지팜이 쥐고 온다
철조망 저편은
봄도 아니 오는가
해바라기
윤시목
영감은 인공 때 나가 여직 안 오구
애비는 팔자에 없는 월남 귀신이 되었지
한 삼년 기침하다 에미도 가구
살붙이라고 시장 삼순이년 뿐인디
아, 고 년도 젖가슴 불룩해지더니
할미 몸내 난다구 밖으로만 싸돌구
너른 마당이라고 눈 줄 데가 있나
마실 오는 년놈이 있나
날은 길구 뙤약볕은 점드락 쏟아지는디
체부遞夫가 이 늙은이 속 알랑가 모르것네
저노무 해바라기는 누굴 기다리나
주야장천 담 너머만 살피구 잇당께
왜, 벌써 가실랑가?
호박꽃
윤시목
되봐도 그놈이 그놈
암만 봐도 그놈이 그놈
더도 말고 황소 몰던 즈 애비
대갈통만한 년놈만 살아남거라
더도 말고 쌀섬 져나르던 즈 에미
궁둥짝만한 년놈만 살아남거라
그 목청 어디 가나 삼순할매
콩밭에 주저 않은 삼순이 불러 갈하되
이년아, 어쩔라구 게서여,
배암이 밑구녕 보자데!
정짓문 냅다 벽을 때리고
들마루 밑 백년 묵은 놋요강이 웃었다
바쁜 벌떼는 그 속 모르지
난蘭
윤시목
화전지 위에 누워 있는 계집
어둘녘이면 옷고름 스르르 풀어젖히며
용마루 위의 암코양이처럼 정욕을 벼리는데
늙은 환쟁이 눈엔 그 눈꼬리가
지아비를 찌르는 검으로 그려져 있다
봉창에 매달린 꽃잎은 연분홍
봄비가 속절없다면 자못 떨리는 그 입술은
불씨 차가웠던 겨우내
못다 푼 몸내가 외간을 부르는 걸세
늦기 전에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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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평생 광야를 떠도신 할아버지,
외롭다면 당신 뒤나 따를 일이었다.
왜 하필 이 길이었는지.
유구하게 나는 주거지역의 해묵은 잿빛 공허만 퍼먹고 살았다.
그러므로 앨러지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 ―
그 오랜 가려움을 시라고 끄적였다.
설령 떠벌임으로 분류된다 해도 이제 내 사정권을 떠난 말,
무탈이나 빌 일이다.
시와 시인이 사태가 난 시대에 산다.
세상을 무겁게 한 죄가 커서 시집 따윈 절대 내지 않으리라, 공언했
지만 그건 반항이라는 세력들에게 수시로 몰매를 맞곤 했다.
무릎 꿇은 내 모습이 조금 안쓰럽다.
하지만 체념도 때로는 힘이 된다 주장한 건 당신들,
그중 가장 유난을 떤 친구에게 진심 살짝 번한다.
고맙다.
4월 어느 날
尹 柴 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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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시목 詩集 [※너무너무와 메주※]
[ 해설 ] -
말과 세계 사이의 균열 :
존재의 가려움 혹은 꽃의 노래
김석준 문학평론가
1. 말의 표정
“시와 시인이 사태가 난 시대”(「시인의 말」)에 시 쓰기는 여전히 자신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는가? 사실 윤시목 시인의 『너무너무와 메주』는 우리가 처한 21세기의 시의 현실을 되짚어 볼 수 있게 만드는 작품집인데, 그것은 담론의 욕망으로 중층결정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내밀하게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들이 난무하고, 거짓들이 진실처럼 행세한다. 이를테면 윤시목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말과 세계 사이의 균열을 시니컬한 태도로 건너게 되는데, 그것은 “진실”(「동물의 왕국」)을 압박하는 존재론적 태도에 다름 아니다. 언어가 진리를 발음하지 못하고, “평화”(「최첨단 우화」)에 관한 열망은 역설적이게도 “욕망의 새끼”(「고사목」)만을 쫓는 갈등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삶이 성찰되고, 이 세계의 표정이 읽혀진다. 말하자면 『너무너무와 메주』는 꽃과 존재 사이에 매개된 삶의 가려움을 다양한 시선으로 응결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상식의 먹이”(「동물의 왕국」)로 전락한 현대성에 대한 반시대적 고찰이라 하겠다. 때론 이 세계를 향하여 분노의 총구를 겨누면서, 때론 “화살표의 은유”(「육하원칙」)에 기입된 의미의 체계를 꼼꼼하게 따져 물으면서, 윤시목 시인은 말-세계를 알레고리적 현실에 응결시키고 있다. 희망은 부재하고, 삶의 잔여만이 “역광 속의 그 이름”(「고사목」)을 흔적으로 남겨놓은 채, 죽음으로 퇴락하는 것이 현대인의 자화상이라 하겠다.
몸과 마음이 군실거린다. 여기저기 가렵고, 해결이 불가능한 그 무엇인가가 이 세계의 심연에 자리해 늘 심화의 불이 돋게 만든다. 도대체 이 삭막하고 험난한 21세기를 어떤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사실 윤시목의 그것은 어두운 색조로 삶과 세계 사이에서 생성된 파열음을 위트있게 그려내고 있는데, 그것은 어떤 삶의 진면목을 드러낸 것인가? 반항이고, 저항이다. 분명 시인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은 소시민의 삶-시간-세계에 기입된 “불면찌꺼기”(「살얼음」)를 요목조목 따져가면서, “삶의 의미”(「민들레 통신」)를 새로운 시선으로 부조시키고 있다. 물론 그 저항이나 반항의 포즈가 그리 강렬한 것은 아니지만, 따라서 시인이 전개한 말들의 토포스가 삶의 심연에게 응고된 페이소스인 것 또한 사실이지만, 윤시목에게 시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점 위에 응고된 생태사회학에 관한 담론적 사유를 시말 속에 발화시키는 것이라 하겠다. 마치 금번 상재한 『너무너무와 메주』가 인간학과 생태학 사이에 기입된 담론적 욕망을 언어의 내밀한 운동으로 부조시키고 있듯이, 윤시목 시인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자연과 세계 사이에게 기입된 의미의 지층을 존재의 언어로 고양시킨 너무도 인간적인 말들의 운동이라 하겠다.
2. 꽃의 노래: 삶의 잔영들
꽃의 노래는 과거로 흐르는 시간의 가역적인 운동이다. 꽃의 생태학은 인간에게 허여된 시간의 문양이자, 삶의 토포스가 지정되는 생태학적인 운명이다. 말하자면 윤시목 시인의 꽃의 존재론적 양태에 관한 의미적 고찰은 인간학을 반조하는 시간의 거울이라 하겠다. 시간이 역류하고, 삶의 잔영들이 선명하게 부조된다. “눈매 곱상한 언년”(「매화」)의 초상이 “연두빛 소문”(「살구꽃」)으로 떠돌고, “외할머니 제삿날”(「동백」)에 색인된 애절한 사연이 떠오른다. 어쩌면 시인에게 꽃의 다양한 문양들은 “외딴 산비알”(「망초」)에 응고된 지난한 노동의 삶이거나 “홀어미 삭신”(「감자꽃」), 즉 근육과 뼈마디에 한의 삶과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윤시목의 꽃에 관한 소묘는 삶의 잔영들이 대입된 인간학적 토포스이거나 삶이 유전되는 존재의 양식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꽃의 사상은 존재의 사상이자, 존재론적 운명이 투시되는 이 세계의 실물이다. 꽃잎 하나하나에 실려 있는 세세한 사연들을 시말로 발화시키면서, 시인은 자기에게 속했던 과거 시간의 다양한 사태들을 꽃-말로 치환시키고 있다. 꽃은 인간이고 세계이자, 삶이 현현되는 존재의 역동적인 운동이다.
사정없이 젊은 날
어디든 목숨 하나 못 내릴 것이냐
인생이란
내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백정과 논다니의 낯 두꺼운 설움 딛고
울뚝밸로 맞바람 치며 사는 것
아들아,
누가 근본을 물어온다면
대차게 말하렴
번지 없는 땅 한줌을 움켜쥐고
가시 세워 우리는 산다고
-「엉겅퀴」부분
꽃의 노래는 인간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의 체계와 공명하는 존재의 노래이다. 꽃문양을 응시하는 시인, 꽃의 존재론적 양태와 인간학을 이접시키는 시인, 고백이 애절하게 이루어진다. 고백은 근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일 뿐만 아니라, “인생”전체를 무로 수렴시키는 존재의 과정이다. “내 것”이라고 호명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근본”이 없는 자인데, 그것은 “아버지는 백정이고/어머니는 논다니”였기 때문이다. 물론 엉겅퀴 꽃말이 원죄에 대한 벌을 상징하거나 근엄 혹은 엄격을 의미하지만, 윤시목 시인의 그것은 꽃을 인가학적인 삶의 양태로 의인화하여 삶-시간-세계를 반조하고 있다. 때론 할미꽃을 “이승을 다한 누이”(「할미꽃」)로 소묘하면서, 때론 흐드러지게 핀 채송화를 “꽃잔치”(「채송화」)로 형용하면서, 꽃과 인간학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의 체계를 한의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설움”이 북받치고, 시간은 젊음을 늙음으로 변이시켜 생이 구조화된 의미의 지층을 성찰하게 만든다. 마치 꽃의 문양 전체가 시간을 살아낸 운명의 형식과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존재의 공간을 의미하듯이, 삶과 세계 사이의 의미적 거리를 꽃-말 속에 총체적으로 응고시키면서, 시인은 자신에 속한 삶의 의미를 바람 속에 실려보내고 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울뚝밸로 맞바람 치며” 오늘도 “질척이는 시장 바닥”에서 “목숨”을 연명하며, “번지 없는 땅 한 줌” 위에 뿌리를 내린다. 설령 생 전체가 부평초처럼 뜬금없이 왔다 사라져가는 신기루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시인은 가슴의 심연에 “가시”를 키우면서 인생의 의미를 참구하고 있다.
구천에 걸어둔 내 모가지
다시 태어난 꽃인 이유
나는 모르네
나는 내 다른 시작이고
날마다 끝인 것을
너도 모르네
-「씀바귀」전문
너는 돌아오고 나는 두 손 흔들 때
삼백예순 마디 그리움 접고
길길이 나부껴서 꽃인 것을
사랑인 것을
우리는
-「강아지풀」부분
모든 앎이 파열하고 해체된다. 말하자면 윤시목 시인에게 “꽃말”은 산산히 흩어진 말의 체계이자, 그 해체된 삶의 언어를 통해서 인간학적 진실과 상면하는 존재의 언어이다. “이승길”과 “저승길” 사이 놓여 있는 반복의 의미를 정확하게 모른다. “시작”이 왜 동일한 것으로만 재귀하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저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천년”이라는 시간을 견디며 어둠으로 침전된 “고샅”(「분꽃」)길 위에서 방황하고 있을 따름이다. 만약 생이 그와 같은 것으로 구조를 이루고 있다면, 도대체 생명은 무엇이며, 인간은 그 무수한 반복의 운명을 감내해야만 하는가?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른다. 시작과 끝 사이에 아포리아가 선험적으로 매개되어 있어 있는 한, 우리는 그저 모른다는 사실만을 발음하고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윤시목 시인에게 꽃의 노래는 삶의 잔영을 반조하는 의식의 거울이자, 미궁으로 휘어진 인간학의 조건과 만나는 존재의 노래임에 틀림없다.
꽃잎에 “맺힌 말”(「봉숭아」)들의 다양한 양태들을 주밀하게 살피면서 시인은 “홀로” 쓰디쓴 인생의 참의미를 깨달아가고 있다. 설령 꽃문양에 색인된 그 모든 의미의 체계들이 저녁 어스름 “황혼길”에 흩어지는 “나부랭이”로 산화하는 퇴락의 흔적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시인은 그 모든 존재의 길이 “그리움”이라는 주름에 접힌 “사랑”의 흔적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전쟁을 불러일으켰던 좌우 이념의 질곡도 사라지고, 그저 “누이”의 애절한 삶-시간-세계를 위무하게 된다. 또 다시 “바람”이 분다. 사랑을 사랑해야겠다.
되살아 내 세상이면
하얗게 파랗게 열대여섯 살에 만나
산자락에 오두막 짓고
딸 하나 낳아서
죽을 쑤든 밥을 짓든
사립문 활짝 열어놓고 삶세
새 새끼처럼
멍석 위 뒹굴면서 네 사랑 내 사랑
젖꼭지 깨물어주며 삶세
죽어서 한낮엔 흙이 되고
밤엔 오동나무 책상이 되고 싶다던
아랫말 내 친구야!
- 「도라지꽃」전문
“밑구녕”(「호박꽃」)이 빠지더라도, 긍정의 힘이 생을 유의미하게 만든다. “화선지에 누워있는 계집”(「난蘭」)의 요염한 자태가 떠오르고, “삼순이 어깃장”(「살구꽃」) 놓는 말투가 귀에 삼삼하다. 꽃에 관한 모든 것은 인간학에 기입된 오욕칠정의 세계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언어에 대한 감각이라 하겠다. 사랑의 呂律이 넘쳐흐른다. 물론 그 사랑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시간을 역류시킨 것이거나 부활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사랑은 생을 조건짓는 절대의 표상이다. 하얗고 파란 순수한 사랑이 몽상된다. 도라지꽃 문양 속에 “열대여섯 살” 소망이 실려 있었으며, 마침내 “꽃등불”(「박꽃」)을 환하게 밝히게 된다. 가난한 시절에 “이밥”(「싸리꽃」)에 관한 신화도, “눈썹 새로 그린 청상”(「목련」)의 애절한 사연도, “월남 귀신”(「해바라기」)의 한 맺힌 원한도 이제 사랑의 심급에 이르러 사랑의 안온한 모음을 발음하게 된다.
살고지고, 살고지고, “딸 하나”낳고 행복하게 살고지고, 노래를 부르면서, 시인은 이 세계가 만들어놓은 삶의 양태들을 포월의 정신성으로 고양시키고 있다. 마치 이 세계를 지탱하는 근본 테제가 신성가족에 깃들인 인륜성이듯이, 사랑은 삶-시간-세계를 떠받치는 절대적인 시금석이라 하겠다. 때론 “새 새끼처럼”알콩달콩 교감을 나누면서, 때론 살짝 “젖꼭지”를 깨물어 리비도를 도발하기도 하면서, 윤시목 시인은 이 세계 공간을 평화의 공간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비록 후기산업사회를 가르는 욕망의 체계로 인해 늘 갈등만을 일삼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는 하지만, 시인은 혼자만의 공간 속에서 시간을 역류시켜 사랑의 여율을 향유하고 있다. 풍요롭다.
3. 문화의 지형도: 존재의 가려움 혹은 총의 노래
시간의 저편에 꽃의 몽상 속에 피어오르는 인륜적 사랑을 꿈꾼다면, 그것의 이편, 즉 현재의 시간은 “사랑이여, 이제 나는 비장하다”(「까치소리」)를 외치는 갈등의 공간이다. 현실은 비장하고, “같이 살자는 것들의 내일”(「까마귀 겨울」)은 결코 오지 않는다. 말하자면 『너무너무와 메주』는 시간의 어제와 오늘 사이를 이질적인 언어로 봉합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처한 시의 현실이다. 꿈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고, 더 이상 별의 낭만을 노래하지 않는다. “자본을 앓는 태양”(「오늘도 걷는다, 마는」)만이 오늘을 가열하게 비춘다. 존재의 가려움을 느낀다. 아니 과거의 시간으로 흘렸던 안온한 삶과 사랑의 서사는 파열하고 해체된 채 현재와 미래의 분노만을 시말 속에 발화시키게 된다. 존재에 기입된 가려움 혹은 총과 하이에나의 노래.
시말은 하이에나의 이름으로 인간 생태학을 반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세계를 향해 분노의 총구를 겨누는 것이자,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心勞를 술회하는 언어적 전술이라 하겠다 “내일마다 오늘이 무서운 날”(「더 크게 노래하기」)들이 반복된다. 아니 시인에게 현재는 늘 “잿빛 희망”(「안개」)으로 변주되는 절망의 전언들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윤시목 시인에게 “시는 좆도 아니다”(「사건이 있었다」)로 표상되거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삼류시인의 비애나 분노”(「病棟에서」)가 “말짱 거짓말인 서정시”와 “자본주의 혓바닥”(「쌀독과 장미」)에 집중될 때, 시말이 도달하는 궁극적 실제는 무엇인가? 사실 윤시목의『너무너무와 메주』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말을 현동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시말의 현재가 환멸의 세계상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코끼리처럼 코끼리처럼
씩씩한 상아로
호랑이의 난폭을 무찌르고
검은 채찍들은 이기고 싶어
-「아침의 시그널」부분
달빛을 향해 미친 듯 울부짖을 때가 있다
그때 내 육신은 창칼처럼 부끄럽고
영혼은 수은주처럼 차가웠다
산 자의 밥그릇이 죽음과 거래될 수 있는가
허기는 나를 지키는 마지막 권리이다
-「하이에나의 이름으로」부분
밤거리에 출렁이는 비겁한 가슴들을
여기서는 문화라 부릅니다
-「진돗개」부분
후기산업사회의 문화의 지형도는 낯설고 불길하다. “비겁”이 만연해 있으며, “가슴 아픈”일들이 문화의 이면에 침전된다. 나는 “개”이고, 하이에나의 이름으로 이 세계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어쩌면 존재의 가려움은 문화의 음흉한 기획이 만든 부작용인지도 모른다. 표면적으로 문화는 인륜적 삶이 실현되는 가장 숭고한 가치의 체계로 무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것의 심연엔 무자비한 욕망으로 일렁이는 야만적 폭력으로 구조화되어 있을 따름이다. 특히 시인이 “밤거리에 출렁이는 비겁한 가슴”을 문화라고 지목한 순간, 문화는 “굴욕”의 산물이거나 그리 건전하지 않은 정신성을 표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욕망이 일렁이고, 네온싸인 찬란한 밤거리를 헤맨다. 문화는 화려한 이미지들로 채색되어 있지만, 화려한 꼭 그만큼의 무게로 점점 정신적인 것의 황폐화를 부추긴다. 네크로필리아가 선호되고, 생을 생으로 기술하는 방법이 고사된다. “주먹”이 난무했으며 마침내 이 세계가 이룩한 문화의 지층 내부에 “이빨로 누런 세상”만이 남게 된다. 말하자면 윤시목의 그것은 아프리카 대평원의 생태학적 사실들을 하이에나늬 이름으로 유비시키면서 문명적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감행하고 있다. 때론 “해변의 별밤”이 밝게 비추는 진도의 어디쯤을 상상하면서, 때론 “기억의 통로”(「꽃가게의 꽃」)에 색인 된 “불면의 발톱”(「이무기」)을 날카롭게 벼리면서, 시인은 “어머니”의 이름으로 이 세계가 만들어 놓은 죽음의 심연을 응시하고 있다.
문화는 결코 숭고한 “지혜”의 산물이 아니다. 문화는 욕망의 체계이자, 모든 인간학적 현실을 “불모의 땅”으로 이끄는 죽음의 공간이다. “육신”은 부끄럽고, “영혼”은 차갑게 식어 굴종의 시간만을 견딘다. 다시 말해서 “아침의 시그널”은 청아한 기상의 나팔을 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열한 하이에나의 처절한 “울음”만이 “우우-/아아-”동물의 왕국처럼 울릴 따름이다. 문화는 “호랑이의 난폭”이고, 자본의 음흉한 “검은 채찍”이다. 마치 지젝이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고도의 문명사회를 이룩한 자본주의의 현실을 폭력으로 비유한 것처럼, 윤시목 시인의 그것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명의 그늘을 암울한 색조로 그려낸 것이라 하겠다. 비록 말과 말 사이에 혹은 문화의 실체 내부에 우화를 기입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문화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따라서 시말은 강렬한 반항이나 저항의 정신을 우회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완곡어법만이 문화의 위치를 정확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방법이다. 아니 역으로 강렬한 문화의 코드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알레고리적인 우화를 통해서 문화의 이면을 응시하는 것으로 족하다 하겠다. 우아 우아 반복적으로 외치면서 개가 되고, 도시의 하이에나가 되는 것이 문명의 실체이자, 문화가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이다.
백년의 무게로 다가서는 이틀
분실이 가능한 백년
이틀을 잃고도 오늘이 낯설구나
또 다시 이틀이여
-「위험한 접근」부분
인간을 파는 가게는 없다. 속옷 가게에서 디오게네스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선 가게에선 얼어터진 사랑을 팔고, 과일 가게에선 안 팔리는 시집을 팔고
순대집에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판다
-「시장 한 바퀴」부분
물 한 방울에 목숨이 사로잡히고
물 한 방울에 일생이 녹아내리고
이마 위에서 시간을 올려놓는다는 것
기다린다는 것
그것이 형벌이다
-「종유석의 비밀」부분
문화의 위치는 시간이 직조해낸 다양한 삶의 문양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백년의 무게”가 단 “이틀”의 무게보다 가볍게 평가되듯이, 시인의 그것은 인간학적 현실, 즉 존재의 가려움을 시간의 형식으로 치환시켜, 삶의 조건들을 조망하고 있다. 존재는 가볍고 시간은 무겁다. 왜냐하면 시간은 그 자체로 반복과 기다림이라는 “형벌”과 마주한 “디오네게스”이거나 시지포스로 표상되기 때문이다. “악몽”을 꾼다. 아니 현대성을 가르는 시간의 형식은 “엽기적 살인자”를 양산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시간을 믿지 않고, 미래의 시간만을 진리의 표준으로 삼는 “종말론자”의 가열한 외침으로 구조화되어 있을 따름이다. 문화는 점점 이상해져, 기괴하고 낯선 것만을 최고의 과제로 삼기에 이른다.
문화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삶은 이중성 위에서 스스로를 현상시키게 되는데, 그것은 낯설고 신기한 것과 친숙해지는 과정이거나 외로움 속에서 소외를 느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문화의 위치가 존재의 위치를 지정하는 한, 우리는 그저 시간에 종속된 채 존재의 가려움을 감각하게 된다. “불쏘시개 같은 낭설”(「안개」)만이 난무하지만, 이내 “줄거리가 뻔한 영화”(「권태」)로 추락하여 문화적 일상이 권태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두개골”은 “구멍”이 숭숭 나고, “영혼과 육신”은 파열한 채 시간의 형벌을 견디고만 있다. 시인에게 궁극적으로 존재의 가려움은 시간의 문양 내부에 기입된 문명의 부산물이자, 존재가 처한 무기력한 운명이다.
오늘도 디오게네스처럼 저자거리를 배회하면서 “사랑”과 삶의 현주소를 점검한느데, 그것이 바로 이 시대가 처한 문화의 현실이다. “시장 한 바퀴”는 이 세계의 문화의 지형도이자, 삶이 향유되는 “희망과 외로움”의 변증법적 공간이다. 한 생이 저물고 또 다른 생이 문화의 공간으로 들어온다. “생애의 히스테리”가 반복적으로 터져나오기도 하고, 아름다운 “인생”의 의미가 참구되기도 한다. 어쩌면 윤시목 시인에게 문화는 차이를 향유하는 반복의 형식이거나 다양한 삶의 양식이 얼기설기 얽힌 혼효의 공간인지 모른다. 마치 “과일 가게”에 놓은 “시집”처럼, 혹은 “속옷 가게”와 디오게네스의 외로움 사이의 유비처럼, 문화는 부조리와 희망을 가르는 삶이라는 반복의 형벌이라 하겠다.
대통령으로 그 사람은 어떠냐고 물어봤다
투표를 안하겠다고 했다
이 사람은 어떠냐고 물었다
차라리 날 청와대로 보내달라고 했다
그럼 누가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귀먹은 베토벤이라고 했다
국무총리는 베르디를 시키면 된다
국가는 9번 교향곡이나 나부코를 부를 것이다
헌법은 필요없고
영토는 물론 한반도와 그 부속도시
국민은 나와 그녀뿐이다
어떠냐
이만하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겠지?
-「애인의 나라」전문
“가장의 홀바지에 겨울은 재앙”(「영하14」)이자 치명적이고, 누군가의 “감시망”(「길고양이 사냥」)은 점점 더 집요해진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나라를 만들 때, 가장 아름다운 인륜성을 실현시키는가? 물론 윤시목의 그것은 아나키즘적인 성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 따라서 시인의 나라는 마돈나와의 열렬한 사랑이 실현되는 사랑의 공간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인륜성이 실현되는 문화의 집체적인 국가라는 형식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결코 내일의 향방을 알려주지 않는 오늘”(「존재의 그늘」)만이 삶의 진실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시인에게 국가는 허구이고, 문화는 한낱 비루한 욕망의 덩어리일 뿐이다. “총소리”(「가장 선명한 글씨」)가 온 세상에 울려퍼진다. “매우몹시아주무척”과 “너무너무”사이에 “아니”라는 “인간적인 메주”(「너무너무와 메주」)가 존재하는 한, 정치는 삼류이고, 경제는 천민자본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역설이 요동치고, 알레고리적인 국가 이념이 “당신과 나”사이에 매개된다. 황홀하고 달콤한 “애인의 나라”는 “나와 그녀”만이 건설할 수 있는 사랑의 공간이다. “헌법”도 필요없고, “국가”는 베토벤의「합창」으로 대신하면 그만이다. 모든 국가의 이념에 총구를 겨눈다. 반항과 저항의 완성은 국가 전체를 부정성으로 기술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베토벤과 베르디”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의 구조라 하겠다. 문화가 부정되고, 국가가 한낱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채, 진정한 사랑과 자유에 대한 물음으로 역전시킨다. 애인의 나라는 국가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대통령의 권위를 부정하는데, 그것이 바로「너무너무와 메주」가 언표하고 싶은 시말의 정체라 하겠다. 때론 말의 심연에 저항과 반항의 총구를 겨누면서, 때론 “미욱한 사람의 넌센스”(「순환도로-한수 시인에게」)로 문화의 지층을 파열시키면서, 시인은 자신에게 속한 언어를 존재의 가려움으로 대체하고 있다.
거짓보다 절망이 솔직하다
덧없으므로 부재의 무게여
끝으로 내 이름을 지워다오
-「나야말로」부분
집착을 버렸더니 시장바닥에 누워 있어도 좋았다
두려움을 버렸더니 죽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천 원짜리 고등어」부분
나는 누구일까
이놈의 일생은 공연히 밀려갔다
밀려왔다
-「나는 귀신이 보고 싶다」부분
거기 널브러진 냄새와 나는
깊이 연루돼 있다
-「사이비論」부분
“파열”하는 삶과 “공란이 붐비는 사랑록”(「뭐가 지나갔냐」) 사이의 균열을 봉합하는 것은 가능한가? “검버섯 여든네 점”(「아버지」)으로 탄화된 아버지의 주검이 문화의 실재를 증명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삶-시간-세계를 인륜성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가? 존재의 가려움은 삶에 기입된 시간의 엘러지이다. 말하자면 윤시목 시인에게 문화는 “사이비교의 교주”(「붉은 신호등」)이고, 봉합이 불가능한 죽음의 전언이다. 코기토의 중심에 위치한 “나”라는 존재가 해명이 불가능한 마물로 존재하는 한, “나는 누구일까”를 반복적으로 묻다가 스스로를 “공해”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나는 “절망”이고, “부재”다. 나는 나의 정체를 정확하게 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내가 “거짓”으로 구조화된 “욕망”의 객체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세상이 점점 무거워져”만 가고, 나는 “쓰레기 행정”가에서 쓰레기로 추락한 채 몰락한다. 문화 속에 나는 가려움의 실체인 엘러지이자 불필요한 존재이다.
죽음이 응시된다. 죽음은 문화의 변주곡이다. 설령 문화의 지층 내부에 “이름”과 이미지가 상호 응결된 상생의 여율이 흘러넘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화는 인간학적 꿈과 이념을 죽음이나 절망으로 노래하는 죽음의 변주곡일 따름이다. 레퀴엠이 울려퍼진다. “필생”의 “향방”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우리는 너나 할 것없이 “파리의 식욕”처럼 “향기”에 유혹된 채, 죽음이라는 덫에 걸려넘어진다. 죽음을 촉지하는 시인, 죽음을 현전의 시공간으로 몰고오는 언어의 주술사, 이를테면 윤시목 시인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 위치한 나의 존재론적 층위를 “욕심, 미움, 사소함, 집착, 두려움, 그리고 명예”등의 세속적인 욕망이라고 간주하면서, 진정한 버림의 경지를 사유한 것이라 하겠다. 소유는 문화의 사이버이고, 버림은 진정한 자기의 발견이다. 설령 삶의 순간순간 오욕의 “냄새”와 깊이 연루되어 있을 혐의가 짙은 것 또한 사실이지만, 시인의 그것은 점점 덧없는 것으로 산화하는 존재의 무게를 “부재의 무게”로 대위시킨 채 무위의 세계로 이입해 들어가고 있다.
허명으로 남아 있던 “이름”이 지워지고, 무거운 죽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나는 개이고, “천원짜리 고등어”이자, “반항”의 총소리다. 점점 산다는 것 자체가 흉흉해졌으며 마침내 문화 내부에는 낯선 불길함이 가득 차게 된다. 왜냐하면 생애의 형식 전체가 “귀신”과 만나는 과정으로 환원되어 인간학 전체가 중음신으로 몰락해 가기 때문이다. 말과 세계의 균열이 점점 가중되고, 나는 내가 아닌 것으로 탄화되어 문화의 중심에 죽음을 기입하게 된다. 설령 이 세계의 의미구조를 정확하게 발설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시인은 이름과 길 사이에 놓여 있는 진실을 죽음의 끝자락에서 응시하고 있다.
아직은 어둠이다 말해놓고
그 난간에 의혹을 걸어둔 저 반쪽달의
속셈은 무엇일까
새벽 네 시
회색도 검은색도 아닌
얼마나 깊은 어둠인지도 모르면서
모든 길은 머무는 자가 아니라
앞으로 걷는 자를 위해 뻗어있다는 화살표의 은유를
믿어본다
아래로 흐르는 건 오직 물이듯이
시간은 끝없이 사라지고 또 돌아온다
그래서 사람과 길이 만나는 곳에
아침의 명패를 세워놓고
소금에 절인 목소리로 달빛이 묻는다
너는 누군고
그리고 다섯 발의 총을 더 맞았다
투항하지 않았다
-「육하원칙」전문
시말의 내부 여기저기에서 총성이 터져나온다. 과거로만 흐르던 꽃의 노래는 완벽하게 파열한 채, 총의 노래로 변이된다. “다섯발의 총”을 맞고 나와 문화 사이에 놓인 균열을 죽음으로 봉합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묻는다. 길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미심쩍게 존재에 걸려 있는 “의혹”을 심문한다. 도대체 시간의 “속셈”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시간이라는 마물에 응고된 채 “아직은 어둠”인 공간 속을 헤매는가? 엄밀히 말해서 시간에 관한 물음은 그리 쉽게 답해질 수 없는 문제이자, 인간이 속한 세계 전체를 아포리아로 이끄는 근본원인인 까닭에 그것은 영원 속에 위치해 있거나 미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시인 윤시목은 시간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묻으면서, 시간의 정체가 무엇인지 “육하원칙”으로 따져묻고 있다. 물론 아직 물어지지 않은 다섯 번의 잔여의 질문들이 남아 있지만, 따라서 시간이 언제, 어디서, 왜 생겨나왔는지 여전히 미궁인 채로 남아 있지만, 시인에게 시간에 관한 물음은 시말이 생성될 수 있는 초기 조건인 동시에 이 세계를 심문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 근거라 하겠다. “새벽 네 시”와 심연의 “어둠”사이로 시간이 흐른다. 시간은 여여하게 흘러 생성과 소멸 사이에 존재하는 균열을 반복의 형식으로 봉합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간이 처한 본질이다. 때론 비가역적인 시간의 본성을 “화살표의 은유”라고 명명하면서, 때론 간절한 “목소리”로 시간 사이사이 놓여 있는 존재의 길을 탐문하면서, 시인은 시간의 본질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물론 시간의 산책자인 인간에게 시간은 문명적 삶 전체를 미혹시키는 원인이자, 영원히 심문해야할 과제이기도 하다. 시간의 의미구조와 체계를 아주 치밀한 육하원칙이라는 총구로 겨누어 보지만, 인간학이 처한 문화의 공간을 환멸과 절망의 공간으로 이끌어갈 따름이다. 어둡고 미망에 사로잡힌 채, 반복이 만들어 놓은 시간 앞에 굴복하게 된다.
4. 마무리를 대신하여: 시의 현재, 과연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고원의 어디쯤에 펼쳐진 “은사시나무 숲”(「바람에 관하여」) 속을 배회하면서 몽상 속에 빠져들며 시의 집에 침잠한다. “오늘 분의 빈곤”(「오늘도 걷는다, 마는」)이 스멀스멀 기어나왔으면 시인으로의 삶-시간-세계 전체가 “모멸”(「너에게 구두를 보낸다」)에 빠져든다. 도대체 21세기라는 척박한 시의 현실을 어떤 말의 본새로 건너야 하는가? 시의 집이 난파된 채 안온한 몽상을 도발하지 못할 때, 시인은 대저 무엇으로 사는가? 시의 현재가 냉혹하지만 정확하게 계산된 자본의 구조에 종속되어 있는 한, 시가 말할 수 있는 말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윤시목 시인의『너무너무와 메주』는 창조적 작가의 몽상이 불가능한 지대에서 언어를 도발하고 있는데, 그것은 말-세계가 그리 생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시의 현재는 암울하고, 시말은 냉소적이다.
자리 싸움에서 시인이 졌다
황동규를 들어내고 옷장을 들인다
별표전축 자리엔 휴지통이 들어앉는다
일상의 이름으로 죽어줘야 하는 것들
베토벤 또는 현대시…
무릇 책장과 음악이란 이름이 빛나는 자들의
수음도구 같은 것
책들을 다락에 처박는 건
내 몸에서 손톱을 뽑는 일이다
할 말이 궁해진 책장이 아픈 소리를 내자
주인공은 노끈에 묶어
눈앞이 캄캄한 내 집에서 유배되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실제상황이다
솔직히 나의 문학적 핸디캡이란
오늘의 운세 밖으로 밀려난 가장의 내부사정일 뿐
아내는
아내들은 결코 시인을 사랑하지 않는다
가장이 어떻게 시인일 수 있는 거냐
꽃을 털린 풀모가지들에 대해
이제 나는 아는 바가 없다
윤동주마저 사라진 거실
적당히 팔아넘긴 사내를 죽었다, 로 받아적다
오늘 밤에도 별은 바람에
스치거나 말거나
-「시인의 집」전문
시는 더 이상 문화의 총아가 아니다. 그렇다고 정신성을 대변하는 궁극적인 실재는 더더욱 아니다. 시의 집이 담론의 욕망으로 중층 결정되어 있는 한, 시말은 존재의 집을 숭고하게 건설하는 심혼의 언어일 수만은 없다. 시인은 패자이고, “일상의 이름”으로 축조된 자본이 승자이다. 이를테면 한때 진실을 압박한다고 믿어졌던 시의 집은 경색이 되어 세계와 아름답게 공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말과 세계 사이의 균열만을 조장하고 있을 따름이다. 점점 이해와 소통의 장에서 멀어지는 “현대시”는 더 이상 독자들에게 환영받는 아름다운 노래가 아니라, “자리 싸움”만 일삼는 “수음도구”로 전락한지 이미 오래다.
황동규가 사라지고, 윤동주마저 시인의 집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차피 시의 현재는 황혼의 들녘에서 서서 저물어가는 운명을 승인할 수밖에 없는 사형언도가 내려졌을 뿐만 아니라, 앨빈 커넌의『문학의 죽음』에 의해 재차 사형언도가 확정판결을 받기에 이른다. 문학은 더 이상 읽혀지는 것은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문학, 특히 시는 자신만의 협소한 의식의 통로에 이몰이 된 채 말과 세계 사이의 치명적인 균열을 봉합할 수 없다. 그저 말을 위한 말들만이 난무한 채 스스로 붕괴 위기에 봉착하기에 이른다.
이미지가, 시뮬라크르가 21세기를 선도하는 전위부대로 등극한 이래로 말은 진부한 것이거나 소크라테스의 등에처럼 귀찮은 존재로 몰락하게 된다. 가상적인 이미지가 사유를 압박하고, 진실을 호도한다. 말하자면 자본적인 이념을 이미지로 환치시킨 후기산업사회는 시적 가치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상의 이름밑으로 소거시켜 시의 진실을 차폐시키기에 이른다. 시인의 “아내”조차 시를 불신하는 마당에 누가 시를 읽고 노래하겠는가. 철저하게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21세기에 시의 운명은 예술의 위치에서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있으나마나 한 존재, 계륵같은 존재로 평가되는 시의 위치가 바로 시의 현주소이자, 시인의 집을 경색시킨 근본원인이다.
물론 금번 상재한 『너무너무와 메주』가「시인의 집」이라는 심급 위에서 펼쳐진 것은 사실이지만, 시말을 예상보다 더 심각한 문제적 국면을 지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의 집에 관한 담론적 사유는 시의 생산력을 부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가 예술의 권좌에서 완벽하게 몰락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별”과 “바람”이 몽상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정전적 가치로 존중되지 않는다. 시인의 집에서 윤동주가 사라지고, 황동규마저 사라져버린 순간, 모든 정전적 가치가 “스치거나 말거나”로 평가되는 한, 시인은 무기력한 존재이거나 시의 생산력이 한미하다는 사실을 자인하게 될 뿐이다.
시의 현재가 이와 같다면,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실 『너무너무와 메주』는 이 부분을 유예시킨 채 시인과 시의 존재론적 위치를 탐문하고 있는데, 그것은 시의 예술의 상품적 가치와 완벽하게 절연한 채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시의 정전적 가치만을 임무를 삼은 시의 역사는 자본으로부터 소외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가장이 어떻게 시인일 수 있는 거냐”라는 독설을 양산하게 된다. 모든 예술이 자본의 총량으로 환원되는 시대에 시는 자본화될 수 없는 것이거나 자본을 거부하는 유일한 예술이다. 왜냐하면 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지만, 희소가치를 전혀 지니지 않은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의 정전적 가치의 희소성은 소유하고 향유하는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자, 어느 누구에게도 속할 수 없는 말씀, 즉 로고스로 존재할 따름이다.
그것은 역으로 시만이 초역사적인 예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로고스의 위치로 승격될 수 있는 언어의 예술인 시만이 참된 예술적 가치의 시현이라고 말하면 과도한 것일까? 물론 윤시목 시인의「시인의 집」은 시와 시인의 현주소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지만, 따라서 일상의 이름 앞에 압살당할 시와 시인의 운명을 시말 속에 응고시켰지만, 그것은 언어를 예술적 소재로 한 시의 태생적인 한계에 다름 아니다. 정신을 벼리고, 시말 내부에 심흔을 담아내는 것으로 역사의 공공재로 남아 이 세계와 완벽하게 공명할 수 있다면, 시는 인류 최대의 예술로 고양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 하나의 유보조항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말과 표현 사이의 교감이나 동감을 어느 적정선에서 이루어내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이 지점이 시예술이 처한 언어의 역설인데, 그것은 시의 정전적 가치에 대한 열망의 실현이 대중과 완벽하게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시인의 집」의 담론적 사유가 시의 상품과 가치와 미래 운명을 역설적으로 그려내고 있듯이, 말과 표현 사이의 한계라는 외줄을 절묘하게 건너는 시말만이 정전적 가치와 대중적 가치를 동시에 육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윤시목 시인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시의 현재의 위치를 정확하게 지시한 것이지만, 따라서 일상과 아내 시이에 위치한 시인의 존재론적 운명을 아프게 그려낸 것이지만, 그 운명을 감내하는 자만이 진정한 시인의 위치로 고양될 수 있다는 역설을 함의하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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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윤시목 시인은 인간의 순수함이 전혀 때묻지 않은 시인이며, 그 순수함을 “사육사가 던져준 먹이를 사흘이나 거절한” “호랑이”([동물의 왕국])처럼, 힘에의 의지로 승화시킨 탐미주의자라고 할 수가 있다. 비록, 그는 [시인의 집]에서처럼 그 존재론적 위기를 겪고 있기는 하지만, “대통령은 귀먹은 베토벤, 국무총리는 베르디, 국가는 9번 교향곡, 헌법은 필요 없고, 영토는 물론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국민은 나와 그녀뿐”이라는 [애인의 나라]에서처럼, 이 땅에서의 지상낙원(에덴동산)을 꿈꾸는 낙천주의자라고 할 수가 있다.
『너무너무와 메주』는 “가장이 어떻게 시인일 수 있는 거냐”([시인의 집])라는 아내의 항변처럼, 자리 싸움에서 진 시인이 그 이상하고, 우울하고, 괴기하고, 음습하며, 불온하기까지 한 생존방식을 통해서, ‘시인의 나라’와 ‘애인의 나라’를 꿈꾸는 시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윤시목 시인은 야수파적이고 탐미적인 시인이며, 다른 한편, 현대문명사회를 조롱하는 냉소주의자이자, 지상낙원을 꿈꾸는 낙천주의자라고 할 수가 있다. 요컨대 그는 대단히 뛰어나고 탁월한 시인이며, 잠 자는 거인에서 이제 마악 잠을 깬 거인으로 등극한 제일급의 시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 반경환, {애지}주간 철학예술가
역설이 요동치고, 알레고리적인 국가 이념이 “당신과 나”사이에 매개된다. 황홀하고 달콤한 “애인의 나라”는 “나와 그녀”만이 건설할 수 있는 사랑의 공간이다. “헌법”도 필요없고, “국가”는 베토벤의「합창」으로 대신하면 그만이다. 모든 국가의 이념에 총구를 겨눈다. 반항과 저항의 완성은 국가 전체를 부정성으로 기술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베토벤과 베르디”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의 구조라 하겠다. 문화가 부정되고, 국가가 한낱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채, 진정한 사랑과 자유에 대한 물음으로 역전시킨다. 애인의 나라는 국가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대통령의 권위를 부정하는데, 그것이 바로『너무너무와 메주』가 언표하고 싶은 시말의 정체라 하겠다. 때론 말의 심연에 저항과 반항의 총구를 겨누면서, 때론 “미욱한 사람의 넌센스”(「순환도로―한수 시인에게」)로 문화의 지층을 파열시키면서, 시인은 자신에게 속한 언어를 존재의 가려움으로 대체하고 있다.
-김석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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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시목 시인∥
∙ 윤시목尹柴木 시인은 1993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을 했고, ‘호서문학’과 ‘푼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는 『니체의 뒷간(웹시집)』이 있다. 윤시목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너무너무와 메주』는 현대문명사회의 ‘과학의 승리’에 대한 무서운 경고이자 비극적인 인간의 삶을 노래한 시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좀 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에 대한 열망이 황금만능주의를 탄생시켰고, 이 황금만능주의는 곧바로 우리 인간들의 영생불사에 대한 욕망을 탄생시켰다. 그 결과, 이종교배異種交配마저도 마다하지 않는 너무나도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악마들을 탄생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너무너무’는 자연의 법칙을 거역한 인간의 행태에 대한 경고가 되고, 이에 반하여 ‘메주’는 모든 인간의 행위들이 도로아미타불의 헛수고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윤시목 시인은 인간의 순수함이 전혀 때묻지 않은 시인이며, 그 순수함을 “사육사가 던져준 먹이를 사흘이나 거절한” “호랑이”([동물의 왕국])처럼, 힘에의 의지로 승화시킨 탐미주의자라고 할 수가 있다. 비록, 그는 [시인의 집]에서처럼 그 존재론적 위기를 겪고 있기는 하지만, “대통령은 귀먹은 베토벤, 국무총리는 베르디, 국가는 9번 교향곡, 헌법은 필요 없고, 영토는 물론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국민은 나와 그녀뿐”이라는 [애인의 나라]에서처럼, 이 땅에서의 지상낙원(에덴동산)을 꿈꾸는 낙천주의자라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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