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어른이 없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다 자란 사람’, 즉 성인(成人)이 없다는 뜻이 아님은 물론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어른’을 ‘나이나 지위나 항렬이 높은 윗사람’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윗사람이면 당연히 높임을 받아야 하는데 점차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지 않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이를 두고 어른도 몰라보는, 어른이 없어진 시대라고 탄식할 만하다. 이런 불만을 토로하는 분들은 어른들을 깍듯하게 모시며 살아온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본인이 정작 어른 대접을 받아야 할 시기에 내뱉는 이런 탄식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맹자는 나이 오십 된 이가 비단옷을 입고 칠십 된 이가 고기반찬을 먹을 수 있게[五十者可以衣帛矣 七十者可以食肉矣] 해 주고 나서야 왕도정치를 시도할 수 있다면서, 반백의 노인이 길거리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나서서 대신 날라줄 정도로 어른을 대접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른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전통이다. 그런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좋은 옷,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고 젊은이들의 도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다시 국어사전을 들춰 보면, ‘어른’에는 ‘한 집안이나 마을 따위의 집단에서 나이가 많고 경륜이 많아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나이만 많다고 누구나 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존경을 받을 만해야 어른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런 면에서 요즘 어른이 없다는 말은, 어른다운 어른이 없음을 탄식하는 말이기도 하다. 어른다운 어른, 존경받을 만한 어른이란 무엇일까?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오래 사는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과 지식이다. 그러나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아는 것도 가장 많다는 사실이 당연시되는 것은 직접경험과 구술 전수에 의존했던 시대에나 통할 이야기다. 더구나 각종 분야의 전문가 집단과 웹 검색 도구가 그 자리를 차지한 오늘, 어른이 지닌 경험과 지식은 급변하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달라진 세상에서, 어른이 꼭 필요하기는 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다운 어른이 없다는 탄식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 여전히 우리는 어른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별적인 지식과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경로와 방법은 늘어났지만, 그것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늘날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어른은, 말이나 글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그 길을 보여주는, 그래서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어른이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 시대에도 존경할 만한 어른들이 적지 않다. 아무리 시대가 급변한다 해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을 한발 앞서 이미 걸어가 본 어른의 지혜를 빌리는 것은 여전히 소중하다. 다만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책이나 대중매체 등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곁에서 삶을 나눌 만한 어른인데, 불행하게도 언젠가부터 주변에서 이런 어른의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 문제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어른 되는 일에 우리 자신이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어른이 되는 것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어른다운 어른에 이르는 이도 드문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는 매년 5월 셋째 주 월요일을 ‘성년의 날’로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는데, 성년으로서의 책무와 자부심을 부여하기 위한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대체로 젊은이들끼리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즐기는 날로 인식되고 있다. 어른이 되는 날을 특별히 기념하여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는 것은 동서고금에 두루 있는 문화다. 우리 전통시대의 관례(冠禮)도 여기에 해당한다. 총각머리 대신 상투를 틀고 관을 씌워주며 어릴 때부터 불려온 이름을 대신할 자(字)를 지어주는 것이 관례의 중요한 절차다. 관을 씀으로써 누가 봐도 더 이상 아이가 아님을 알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이름을 아무나 함부로 부르지 않음으로써 이제 어른으로서 대접해 주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날을 시작으로 일상의 외관과 호칭이 달라지는 것은 그 자체로 본인에게 큰 변화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관례의 절차가 당사자를 평소에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의 주례와 도움, 참관 가운데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어른이 된 이들이 새로운 어른 하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관례는 이제 막 어른이 되는 사람을 위한 의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에게 역시 끊임없이 ‘어른다움’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게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전통시대의 관례를 부활시키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정해진 의식을 치른다고 어느 날 갑자기 명실상부한 어른이 될 리도 만무하다. 어른이 되는 것을 두렵고 소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유와 책임을 누릴 수 있는 덕성을 갖추는 변화라는 점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근본적인 위치 전환을 뜻하는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어른다움을 위해 겸허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어른이 늘어난다면, 어른다운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는 일 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어른을 어른 대접할 줄 모르는 세태,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시대를 탄식하는 데에서 그친다면 서로를 향한 반목과 실망만 남을 것이다. 어른 대접을 요구하기 이전에, 혹은 어른다운 어른을 찾기 이전에, 나 자신이 어른으로서의 덕성을 갖추어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되물을 일이다. ‘어쩌다 어른’이라는 방송 강연 제목처럼 우리는 그저 어쩌다 보니 나이를 먹고 이러저런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어른이 되었을 뿐, 진정 어른으로서 갖추고 배워야 할 것들은 놓친 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