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山 鄭大基
1886~1953
[허만하-유홍준 시인의 문학편지] 대숲을 건너는 바람 소리
연초록 바람 이는 것 먼 눈에 똑똑히 보여
한겨울 절개 지키는 대선비의 벗이 된건 당연
하동 땅 옥종 대숲 속에 살면서 먹을 갈아 대만을 그리다 별세한 지사 한 분이 있었는데 행여 그분 이름을 들어 본적 있나요.
벽산 정대기란 분으로 그는 언제나 이 대는 왜놈을 찌르는 창이다 하며 대를 그렸다는 이야기를 청남 오제봉 선생한테서 들은 적이 있소. 그 무렵,인연이 닿아 그 어른 대 그림 한 점을 입수하여 지금껏 애장하고 있소. 청남은 벽산의 대를 해강의 것 보다 더 높이 평가하더군요. 벽산의 대는 고아한 품격에 스며 있는 팽팽한 기백을 가지고 있소. 하루는 벽산이 살았다는 대숲을 찾아 옥종면 일대를 헤매었지만 종내 알 길이 없었소. 매운 바람 설치는 한겨울에 꼿꼿한 절개를 지키는 대가 선비의 벗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솔,대,매화나무를 '세한삼우(歲寒三友)'로 삼았던 고매한 정신이 둘레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쓸쓸해집니다. 유형,우리는 끝내 정신의 대숲에 살기를 함께 약속합시다. 변경에서 시를 쓰는 외로움을 맑은 긍지로 삼도록 대숲을 건너는 바람소리가 귀띔해 주고 있소. 유형이 삼불차를 말했던 영양의 주실마을에서 태어난 조지훈 시인을 생시에 몇 번 뵙고 막걸리 잔을 나눈 적이 있지만,'지조론'을 썼던 그의 생애는 그대로 곧은 대에 비길 만 했지요. 현대를 살다간 선비였지요. 그제는 조지훈 시인과 각별한 친교를 가졌던(서로 말을 놓았지요) 김종길 시인의 구수한 육성을 듣고 하루가 즐거웠소. 통화가 끝날 무렵 주실 어딘가에 조지훈 기념관이 조성된다는 이야기 들었소. 그때 문득 주곡 숲 지훈 시비 둘레만이라도 대숲을 함께 조성했으면… 혼자서 바랐지.
유형이 지금 살고 있는 대숲이 있는 마을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문득 내가 보았던 아름다운 한 마을 생각이 났소. 앞에서 이야기한 옥종을 지나 돌고개를 넘어 굽이치는 내리막길에서 만났던 죽전이란 마을 모습이오. 이 마을은 두꺼운 대숲에 완전히 둘러 싸여 있었소. 대숲에서 연초록 바람이 이는 것이 먼 눈에 똑똑히 보였소. 이 한적한 고갯길을 생시의 황매천이 걸었던 일을 그 후에 읽었던 그의 시에서 알았소. 선비의 선비였던 매천 황현이 밟았던 길. 그 무렵도 이 대숲 마을은 잊혀진 것처럼 제자리에 있었겠지요.
조지훈 시인이 좋아했던 한시 한 구절이 내 여행 수첩 첫머리에 올라 있소. 지난 번 하루 일정으로 부산을 찾았던 김종길 시인의 만년필 글씨요. 멀리 가야산 연봉이 보이는 창원의 방리재 차안에서 써 주신 것이오.
看盡千山雪滿眉 (산다운 산 다 보고 남은 산 없으니 눈썹에 흰 눈이 가득하다)라는 허방산(舫山)선생의 한 줄이요. 그 맑은 울림,이 답신 편으로 형의 책상 곁으로 보내오.
[허만하-유홍준 시인의 문학편지] 비에 젖은 대숲으로의 산책
문장 빌리지 말란 당부 문학도로서 새겨둬야
낙엽 깔린 세상 지나는 사람의 자취도 이렇듯
비 때문에 저는 지난 주말을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베트남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를 빌려보며 보냈습니다.
선생님,또 하나의 필봉이 있다는 주실마을은 제 눈엔 뭐니뭐니해도 지훈 시비가 서 있는 주곡쑤(숲)가 압권이었습니다.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우연히 주곡쑤 뒤편 '둠벙'에서 물 위를 노니는 원앙 한쌍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편지를 읽으며 지훈 동탁이 태어난 조씨 가문의,빌리지 말아야 할 세 가지라는 뜻의 가훈 '삼불차(三不借)'가 기억났습니다. 재물과 사람,문장을 빌리지 말라는 뜻의 삼불차,그 중에서 유독 제 눈길을 끄는 것은 '사람'과 '문장'이고요,후손을 보지 못해도 시앗을 보지 말라는 가훈은 참 앞서간,사랑과 평등의 정신이었다 싶습니다. 아마도 제가 주실에서 만난 원앙의 의미가 바로 이 가훈을 접하기 위한 전조가 아니었나 여겨집니다. 또 다른 가훈,남의 문장을 빌리지 말라는 당부는 자존심 강하고 지조 있는 한 가문의 도도한 정신이 깃든 것임을 느끼게 되는데요. 여기서 빌린다는 의미는 차용이 아니라 훔친다는 뜻일 테고,문학을 하는 저로서는 늘 곁에 두고 새겨야 할 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선생님,제가 사는 동네엔 산자락에 연해 커다란 대밭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시골집 뒤꼍도 온통 대나무 천지였는데,아무래도 저의 삶은 대나무와 분리해 생각할 수가 없는가 봅니다. 비가 갠 오후,흐린 눈을 닦고 창밖 대밭을 건너다 봅니다. 어느 때보다 싱싱한 댓잎을 볼 수 있습니다. 저 대밭 밑 땅 속에,황소 수천 마리가 숨어 사는지 사력을 다해 뿔(죽순)을 돋우어 올리던 때가 엊그제였는데,벌써 햇대 이파리는 하늘을 가리고 남을 만큼 자랐습니다. 저 대나무는 뻔질나게 강으로 쫓아나가던 어릴 적 제 낚싯대였지요. 그렇군요. 저기 수백 대의 낚싯대(대나무)가 서 있지만 대숲은 아무 것도 낚으려 들지 않는군요. 대숲은 이미 제 낚싯대 끝에 수천 마리 푸른 피라미떼(이파리)를 달고 있기 때문이군요.
비가 갠 날 오후에 대숲 아래를 지나가 보았던 경험도 생각납니다. 그때 저는 알았지요. 누군가(무언가)를 잘못 건드리면 물벼락 맞는다는 거요. 그래도 비에 젖은 그 대숲 지나가 보는 거 괜히 마음 설레고 이상하던 것,아무것도 (누구도)건드리지 않고 대밭을 (세상을)지나가긴 참 어렵다는 것 말입니다. 맑디 맑은 가을 날 대숲을 지나가 보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대숲 속을 지나갈 땐 아무리 뒤꿈치를 들어도 들킨다는,들켜버린다던 생각. 낙엽 깔린 세상 지나가는 사람의 자취가 다 이렇다던 생각…. 안되겠습니다,편지를 접고 검은 우산을 쓰고 대숲으로 산책을 나가 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 산책길의 동행은 아무래도 선생님입니다. 선생님과의 인연에 감사합니다.
첫댓글 허만하 시인이
벽산 정대기 선생을 "하동 땅 옥종 대숲 속에 살면서" 하셨는데 하동에서 1886년 8월 12일 출생하셨으나
현재의 서울에 초년에 가셔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상해로 망명 하시고 고국에 돌아오셔서도 현재의 서울
경성에서 활동 하셨으며 해방직전 경남 진주에 오셔서 활동 하시다가 한국전쟁중 와병으로 고향인 하동에
돌아 오셔서 1953년 7월 17일 별세 하심.
이렇게 또 역사의 훌륭하신 한분을 뵙고 갑니다.
어찌 이시간이 행복하지 않을수 있겠는지요?
벽산 어르신이 제 조부님 되시는데
허만하 시인이 벽산선생의 후학, 국전심사위원장을 지내시고 대가이신 작고하신 청남 오제봉 선생께
듣고 몇년전 글을 쓰셨는데 잘못 들으신 부분이 있어 옥종땅 대숲을 찾으신다고 고생 하셨습니다.
네 그러시군요 이런 훌륭하신분을 할아버님으로 두신 카페지기님을 알게된것이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할아버님의 핏줄을 이어 받으셨나 봅니다.
염치 없지만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 드립니다.
과찬 이신데
혹시나 언급되신 어른들께 누가 되는 행동이나 할까 조심 스럽습니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잘먹고 잘사는 것도 모자라 더 누려보겠다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하는 작금의 세태를 보며
부디 프란님의 조부님 벽산 정대기 선생님과 같은 우국지사의 후손들이 잘되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진주 의곡사에 묵죽비가 세워져 있고 많지는 않지만 작품을 소장 하신분들
또한 알고 계시고 올바른 평가를 하신분들이 이미 작고 하셨으나 그분들에게 듣고
마음에 새기는 명망가들이 계시는 반면 이용하여 이속을 챙기려고 그네들 마음대로 전시회를 하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서화책을 만들어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참 진실이 있고 또한 그당시
신문기사등 역사자료가 말하고 있기에 자손들은 묵묵히 할일을 하고 있습니다. 새삼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