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7년(선조 10) 세움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석화리(忠淸北道 淸原郡 北二面 石花里, 돌꼬지) 마을 끝 언저리 야트막한 야산아래에 시멘트 블럭담을 두르고 열려 정려비가 서 있다. 옛날에는 정려각이 함께 서있었지만 세월따라 정려각은 쓰러지고 사라진체 정려비만 남아 있으리라.....
이곳 석화리는 경주이씨들의 집성촌으로 1980년대만해도 65가구정도 세거하였지만 지금은 17가구 정도 세거하고있는 곳으로 전해지는데 비석의 건립시기는 만력정축년(萬曆丁丑年,1577년 선조 10)이니 지금으로부터 448년전이다.
이 비의 주인공은 조선시대의 열녀로 본관은 안정(安定)이며, 어모장군(禦侮將軍) 나운걸(羅云傑)의 딸이자, 진사(進士)를 지낸 경주이씨(慶州李氏) 25世 송당공(松堂公) 이혼(李渾>한당공 곤(鯤)의 장자)의 부인이다. 나씨는 어렸을때부터 성품이 정숙하였는데, 나이 22세가 되자 경주이씨 문중의 이혼과 혼인하였다.
효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남편을 따랐는데, 남편의 등에 등창이 나서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에 나씨가 칼로 그 왼손 무명지를 잘라 피를 먹였으나 남편은 살아나지 못하고 죽었다. 남편의 초상을 치르자 나씨는 식음을 전폐하고, 곡하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여 보는 자가 모두 감동하였다고 한다.
또 집에 강도 수십 명이 들었으나 피하지 않고 끝까지 신주를 지키는 등 열행이 뛰어났다. 이러한 지극한 열행(烈行)이 조정에 알려져 1577년(선조 10)에 왕명으로 정려되었다. 현재 이곳 석화리 열녀 정려 비(烈女旌閭碑)외 미원면 가양리(米院面 佳陽里)에 나씨의 기적비(紀跡碑)가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