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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다시금 좀 뒤숭숭합니다. 이 코로나19가 2020년을 통째로 잡아먹으려나 봅니다. 도무지 기약도 없고 알 수도 없네요. 성실하게 집콕을 하면서도 가끔은 시장도 나가야 하고 필요한 사람도 봐야 합니다. 마스크는 필수, 그나마 마스크 구입하느라고 줄 서는 일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값도 내렸네요. 재난지원금도 진작 바닥났으니 역시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기나긴 장마로 식품 값이 올라 있습니다. 이 달 지나면 좀 나아질까요? 아니면 좀 덜 먹고 살아도 되겠습니다. 그 기간 해가 잘 들면 잘 자라겠지요. 아무튼 모두 힘든 때를 지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고생하는 사람은 의료진이 아닐까 싶습니다. 벌써 반년이 넘었으니 말이지요.
어렵고 힘든 때라도 말없이 수고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사회가 견딥니다. 그러니 불평하지 말고 함께 이겨나가야 하겠습니다. 불평한다고 나아지는 것이 있습니까? 자기 마음만 상할 뿐이지요. 하나님과 맞장 뜨려는 꼴뚜기가 나타나서 온 교회가 욕을 먹고 있습니다. 무슨 일 날까 두렵습니다. 알아서 정치나 할 것이지 왜 목사 탈까지 쓰고 야단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시끄러운 한 해입니다. 곧 여름도 지날 것이고 좋은 때를 기다립니다. 희망을 가지고 또 한주를 기다립니다. 세상은 시끄러워도 시간은 가게 되어있고 시대도 걸맞게 변화되어 가겠지요. 일단 건강하게 버티기를 바랍니다. 남는 자가 이기는 겁니다. ^&^
2020년 8월 22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0-08-16주일설교(사람이 되는 길)
<오케이 마담>
가끔 비행기 사고를 뉴스에서 접합니다. 일단 사고가 발생하면 생존 가능성이 가장 낮은 사고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습니다. 현장에서 탈출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안은 평범한 공간이 아닙니다. 수백 km로 달리고 있는 공간입니다. 그 속도대로 내려야 할 공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착륙지점을 잃는다면 어찌 하겠습니까? 또 한 가지 위험은 조종사입니다. 대체가 어렵다는 문제입니다. 누가 감히 나서서 운전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기장과 부기장에게 사고가 나면 이 운반체는 그야말로 폭탄과 같은 운명이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어디다 들이 받느냐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드물게 공중 납치 사건도 발생합니다. 때로는 비행기 운전 가능자가 무리 가운데 껴있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기장을 위협하여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운항을 하도록 만듭니다. 본인을 직접 위협할 수도 있고 승객이나 승무원 등 다른 사람을 위협해서 강제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기장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혹시 자기네가 직접 운전을 할 수 있는 경우에는 그 위협은 단순히 위협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내에 있는 사람들이 함부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약점이면서 강점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도 살고 싶으면 함부로 행동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이런저런 비행기 사고가 겁이 나고 두렵다면 비행기 여행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실제 비행기 여행을 마다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 비싼 여행은 그럴 만한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대부분 사람들이 선망하고 있습니다. 사고를 당한다면 그야말로 불운일 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혹 그런 사고를 당한다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일까요? 사실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우리는 그런 불운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리라 확신하며 비행기에 탑승합니다. 그런데 한 가족에게 일어납니다. 아마도 가족을 이루고서는 첫 해외여행이 되는 모양입니다. 부부야 그렇다 치고 그 딸(아마도 초등학생?)에게는 특별한 경험이 되겠지요. 돌아오면 특히 친구들에게 기막힌 이야깃거리가 될 것입니다.
가족여행, 그것도 해외여행이고 지상낙원 비슷한 ‘하와이 여행’입니다. 더구나 경품 당첨으로 가는 여행이니 자체 경비는 걱정할 일도 아닙니다. 우리 형편에 무슨, 하고 생각했지만 딸 ‘나리’를 생각해서라도 ‘가자!’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에 오릅니다. 잘 가더니만 웬 이상한 사람들이 갑자기 비행기를 점령합니다. 승객들이 놀라고 소리 지르고 야단이 납니다. 몇 사람만 있으면 제한된 공간의 비행기 점령은 쉽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조종실을 장악합니다. 테러범들 조장이 지시를 내리는 대로 항로 변경을 꾀합니다. 겁에 질린 승객들이 아우성을 치지만 꼼짝 못합니다. 여차하면 총알이 날아갈 것입니다. 목숨 건 영웅이 아무 때나 나오는 것은 아니지요.
일백 명이 넘는 승객들 가운데는 별의별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얼굴은 검은 마스크로 가린 젊은 여성, 눈빛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치 뭐나 되는 듯한 모습입니다. 테러범들이 찾는 바로 그 대상처럼 보입니다. 국회의원도 있습니다. 사실 국회에서도 제 구실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역시나 아직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인데 가만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나서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구색이 맞지 않지요. 코미디를 만듭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여행을 하다니, 아마도 임신한 며느리 원정 출산을 강제하는 듯합니다. 그러니 이 며느리의 시어미 앞과 뒤가 다릅니다.
손자 봐주러 간다는 젊어 보이는 할아버지는 스스로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려다가 괜스레 말쟁이(?)한테 걸려서 귀가 따가워집니다. 다행히(?) 이 테러 사고가 그 고난에서 구해줍니다. 빠질 수 없는 이야기의 감초 역할을 하는 승무원, ‘현민’은 상사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제임스 본드라도 흉내 내려는 듯 왔다갔다 바쁩니다. 고소공포증으로 오금을 떠는 젊은 공직자가 동승하는데 한쪽 구석에 자리하더니 이야기 다 끝날 때까지 눈을 가리고 잠에 취합니다. 꽤나 유명한 배우가 그래도 이 역을 맡아주었습니다. 소위 카메오 역할이지요. 물론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얼굴만 잠깐 보여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인공 집안 식구입니다. ‘석환’과 ‘미영’ 부부와 딸 ‘나리’지요.
액션 영화로 막을 엽니다. 여느 영화에 뒤지지 않는 장면이 전개됩니다. 조금 뒤에는 재래시장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잘 나가는 꽈배기 집, 소문난 대로 하루 분량 반나절도 되지 않아 완판입니다. 집에는 컴퓨터 수리공 남편이 애처가로 재택근무 중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랑의 열매 ‘나리’가 함께 있습니다. 그다지 풍족하지 않아도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입니다. 어느 날 해외여행 경품에 당첨이 됩니다. 사실은 남편의 선물이지요. 그래서 신나게 비행기에 오릅니다. 그런데 그들을 기다린 뜻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액션과 코미디가 비빔밥으로 기내식사가 되어 올라옵니다. 코미디를 그럴 둣한 이야기 속에 담아 액션과 더불어 볼거리와 들을 거리로 반죽해서 내놓았습니다. 쫄깃하면서도 신나게 맘껏 즐길 수 있습니다. 영화 ‘오케이 마담’(OK! MADAM)을 보았습니다.
<최후의 결전>
자본주의의 약점 중 하나가 무엇인가 보면 가진 사람이 돈을 번다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진 사람이 투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돈이 돈을 버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대출을 받고 융자를 받는다고요? 누가 공짜로 돈을 빌려줍니까? 담보가 있어야 합니다. 역시 가진 것이 없으면 그냥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술과 아이디어를 팔면 된다고요? 맞습니다. 가진 자가 사다가 자기 것으로 장사하면 그만입니다. 역시 돈이 돈을 벌도록 해줍니다. 그 무슨 말이냐, 우리 대기업들이 처음부터 대자본을 가지고 돈을 벌었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초기에는 정말 배짱 하나로 시작한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주변 모두가 열악한 환경에서 가능했습니다. 콜럼버스의 달걀 세우기처럼 말이지요.
개발과 발전은 모두에게 장밋빛 꿈을 줍니다. 마을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몰려오고 상업이 융성해집니다. 그만큼 기회도 많아질 것입니다. 땅만 일구며 살던 생활에서 벗어나 도시생활을 누려볼 기회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평생 땅만 바라보며 살던 어른들과는 다르게 살 수 있으리라는 꿈을 젊은이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일터가 생깁니다. 땅 파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달콤한 유혹입니까? 하늘 바라보며 날씨 타령 하지 않아도 돈이 생길 수 있다는데 어른들도 구미가 당길 수 있습니다. 철도만 들어오면 생활이 달라집니다. 우선 이 공사에 여러분이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당장 오십시오. 일거리가 많습니다. 그러니 어서 자기 지분의 땅을 넘기십시오. 합당한 보상을 해드립니다.
축제의 날에 한쪽 광장에서 철도 회사의 선로 준공식이 열립니다. 이제 이 작은 마을도 눈부신 발전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새로운 삶이 열릴 것입니다. 이제 농사일 그만해도 됩니다. 문제는 철로가 이 농부들의 땅을 관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길을 한참 돌아야 할 형편입니다. 그만큼 시간과 경비가 들어갑니다. 그러니 어서 저 농부들의 땅을 사들여야 합니다. 그 농부들은 한 세기 전 시실리 섬에서 이민을 온 사람들입니다. 이제 갓 미국 시민권을 부여받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평생 땀 흘려 일구어 온 그 황무지가 옥토가 되고 더 중요한 것은 ‘내 땅’이 된 것입니다. 오래 전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알지도 못하던 땅에 와서 그 긴 세월 자식과 자손을 보며 일군 꿈입니다.
그냥 땅이 아니란 뜻입니다. 전 인생이 들어갔고 비로소 내 힘으로 얻어 자손에게 물려줄 기업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땅에 피 땀을 쏟아 일궈낸 작품입니다. 천금을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곳입니다. 합당한 보상이라고요? 믿어집니까? 저들도 장사하는 건데 쉽게 합당한 가격을 정하겠습니까? 그 동안의 노력과 정성을 계산해주겠습니까? 저들에게는 농토가 아니라 그냥 땅일 뿐입니다. 땅의 효용성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위에 철로만 깔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 땅 값을 합당하게 계산해주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합당한 보상’은 입에 바른 말일 뿐입니다. 인생을 걸고 자식들의 미래를 건 그 땅을 그렇게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이제 땅을 차지해야 할 업주와 땅을 지키려는 농부와의 격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익을 위한 토지수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도시 계획이나 공공사업을 위해 정부나 기관에서 강제 수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정당한 보상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일방적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공시지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거래되는 시가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시가로 보상하는 경우는 없다고 봅니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넘겨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힘 있는 자가 이기는 것이지요.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공익을 위해서.’ 다수의 주민을 위해서 소수의 주민이 희생을 감내합니다. 그야 명분이 있으니 참을 만합니다. 달리 도리도 없지요.
문제는 사업주의 욕심입니다. 공사는 빨리 진행하고 싶습니다. 가능한 경비를 줄이면서 속도를 내야 합니다. 달래다가 위협하기도 하고 한 사람 한 사람 설득하여 땅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극구 응하지 않는 농부에게는 어쩝니까? 힘으로 쫓아내려 합니다. 총잡이도 부르고 떼를 지어 농가를 급습합니다. 아직은 법보다도 힘이 앞서는 때이기도 합니다. 물론 법으로 대항하려 해도 농부들은 시간도 돈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조금이라도 건지려면 협상에 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숨까지 잃고 맙니다. 남은 가족은 헐값을 받고 쫓겨날 것입니다.
고향 시실리를 떠나 미국 땅에 평생을 쏟아 만든 ‘내 땅,’ 아들 ‘마르코’에게 넘겨줄 아비 ‘세바스챤’의 꿈입니다. 그 땅을 지키려다 결국 목숨을 잃습니다. 아비와 잦은 충돌은 하지만 아버지의 정신은 이해합니다. 그 아버지가 살해당하자 총을 듭니다. 함께 땅을 지키려는 주민들과 힘을 합합니다. 저들의 불법행위에 마음 상하던 보안관도 합세하지요. 그렇게 이 불법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려던 사업주를 밀어냅니다. 영화 ‘최후의 결전’(Blood Red)을 보았습니다. 1989년 작품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동산에 목숨을 걸고 있는 상황과 대비되는 듯합니다.
성경 창세기 3 : 1 - 5 2020년 08월 16일
설교 : 사람이 되는 길 김종우 목사
가끔 ‘동물의 세계’를 시청합니다. 하찮은 동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과 다른 뛰어난 특징을 가진 동물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그런 점을 우리 사람이 이용하는 것돌도 있습니다. 아주 좋은 예로 개의 뛰어난 후각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세관에서 마약 검색을 하는데 잘 이용합니다. 물론 실종된 사람을 찾아내는데도 유용합니다. 요즘은 총으로 사냥하니까 별로 쓰임새가 없지만 옛날에는 매를 가지고 사냥에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동물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우리가 동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새가 되어 날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했지만 요즘은 비행기 타고 날아갑니다. 아무튼 우리 사람은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종종 동물과 비교하여 사람을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웃고 지나가기에는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만약 선택을 해야 한다면 다음 세 가지 중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 ‘짐승 같은 놈’과 ‘짐승만도 못한 놈’ 그리고 ‘짐승보다 더한 놈’입니다. 어느 쪽이 그래도 사람에 가까운지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일단 여기 사용한 ‘짐승’이란 단어가 그다지 좋은 뜻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지요. 사람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사람보다는 못한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셋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한다 해도 달갑지 않습니다. 사람은 분명 짐승과는 다르고 또한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그렇게 짐승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을 보게 되지요. 물론 짐승도 짐승 나름입니다. 정말 짐승보다 못하다 할 때 그 짐승이 오히려 사람보다 나은 것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새끼를 낳아 기르는 본능이라든지 주인에게 충성하는 성실함이나 자기 본연의 재능 같은 것을 보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오래 전 공전의 히트를 친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에서 우리는 어느 농촌의 한 노인과 한평생을 같이한 한 마리의 소를 보았습니다. 죽기까지 사람을 위해 헌신한 그 소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인들 그렇게 하기가 쉽겠습니까?
사람을 짐승으로 비유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좋은 뜻으로 하는 경우도 있고 좋지 않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듭니다. ‘곰처럼 둔한 놈’ ‘여우처럼 간교한 놈’ ‘쥐새끼처럼 빠른 놈’ ‘소처럼 일만 한다’ ‘그 사람은 회장님의 충견이야’ ‘왜 토끼 눈을 하고 그래?’ 등등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비유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두 사람이지요. 다만 짐승을 빗대어 표현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눅 13 : 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 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여우’는 헤롯 왕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진짜 여우로 알아듣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게 비유라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짐승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짐승이 정말 짐승일까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번 보지요. 계 13 :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짐승이 나옵니다. 우선 머리가 일곱입니다. 그런 짐승이 있습니까? 그런데 바다에서 나옵니다. 우선 바다와 짐승하고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짐승이 나온다면 들에서 나온다든지 아니면 숲에서 나온다고 해야 제격이지요. 물론 바다에도 짐승이 있기는 합니다. 물개나 바다표범 바다코끼리 등등. 이런 바다 동물도 짐승이라면 짐승이겠지요. 그렇다 해도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말은 아무래도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무튼 있다고 치고 그 짐승의 모양을 보겠습니다.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합니다. 상상이 됩니까? 차라리 서로 짝이라도 맞는다면 그래도 좀 낫겠다 싶습니다. 뿔은 열인데 머리는 일곱입니다. 그렇다면 머리에 뿔이 하나씩 달렸는데 어떤 머리는 뿔을 두 개 가졌다는 말인가요? 아무튼 괴물 중의 괴물 같은 이 짐승을 왜 진짜 짐승으로 봐야 하는지 그것부터 질문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하나하나 답을 찾아가도록 합니다. 물론 답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 속에 있습니다. 잠 30 : 2 - 3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잠언 기자가 고백합니다. 자기 자신을 짐승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왜 짐승이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은 곧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려면 당연히 하나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요(요 1 : 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말씀하십니다. 여기 지식이 세상 지식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영생이 곧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멘!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짐승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아는 사람들이었는가 모르는 사람들이었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를 이끌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모른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백성을 가르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뭐라 하십니까? 마 23 :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뱀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몰아붙입니다. 요 8 : 44절에서 그들의 아비를 마귀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마귀가 뱀으로 표현되고 있으니 그들이 마귀의 자식들이란 말입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성경을 남보다 더 읽으면 읽었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사람들인데 그들이 어떻게 마귀의 자식들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깨달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을 열 번 백번을 읽고 암송을 한다 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안다는 것과 하나님이 알기를 원하시는 것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 뱀이 등장하였으니 뱀이 처음 등장하였던 때로 돌아가 봅니다. 창 3 : 1 - 5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자 여기 이 뱀이 과연 땅바닥에 기어다니는 뱀인가요? 뒤에 보니까 하나님이 뱀을 저주하십니다. 그 말씀이 혼란을 일으켰는지도 모릅니다. 14절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찌니라” 사람을 범죄하게 만들어 하나님께로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주 받기 전에는 걸어 다녔다고 상상하겠지요.
그렇다고 하고, 또 하나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게 되었다고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다음에 “종신토록 흙을 먹을찌니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뱀이 흙을 먹는 것 보았습니까? 뱀은 살아있는 동물을 산채로 삼키는 놈입니다. 작은 놈은 작은 것을 큰 놈은 큰 것을 그냥 통째로 삼킵니다. 무시무시하지요. 전에 인터넷을 통하여 놀라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자기보다 몇 배나 큰 악어를 삼키다가 자기 배가 터지는 뱀을 보았습니다. 그런 놈이 뱀입니다. 그런데 흙을 먹고 산다고요? 이해가 됩니까? 이 뱀을 이해하려면 계시록에서 찾으면 됩니다. 계 20 :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여기 ‘옛 뱀’이 언제 나타난 뱀입니까? 잘 아는 대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십니다(계 21 : 6). 그러므로 처음과 나중을 실 꿰듯 연결하십니다. 창세기의 뱀이 곧 계시록의 뱀입니다. 마귀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럼에도 고집하여 들짐승인 뱀이 말했다고 우긴다면 우리 하나님 실소하십니다. 더구나 처음에는 걸어 다녔다가 저주 받아서 기어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면 상대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다 비유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성경은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대로 봉한 책과도 같아집니다(사 29 : 11). 시편 기자가 말합니다. 시 49 : 2 - 4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그 오묘한 말씀을 깨달으려면 비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수 없고 결국 하나님 말씀을 모르는 결과가 됩니다. 예수님이 그런 경우를 당하셨습니다. 요 6 : 53 - 5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이 말씀을 비유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머리를 갸우뚱합니다. 60절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그래서 결과는 66절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비유는 시편 기자가 말한 대로 오묘한 말입니다. 그 말씀을 깨닫는 지혜와 명철이 필요하지요.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 말씀을 모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경을 달고 살았던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마귀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들은 멸망하는 짐승이나 진배없습니다. 성경을 암송하며 율법을 지키려고 얼마나 발버둥친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지키는 것은 유익이 없습니다. 지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먼저 똑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조차 분별을 못한다면 문제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열심’으로는 따라갈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뜻과는 반대로 갔지요. 우리 또한 그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단군신화를 알지요. 단군의 출생과 즉위에 관한 신화입니다. 천제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무리 3,000명을 이끌고 내려와 신시를 세워 나라를 다스릴 때,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면서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동굴 속에서 생활하라고 하였습니다. 호랑이는 이 시련을 참지 못하여 나가고 곰은 잘 참고 견디어서 웅녀가 되어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고, 그 단군은 고조선을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짐승이 사람이 된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깨닫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도 같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사람으로 서려면 하나님 말씀을 알아야 하겠다는 것이지요. 짐승이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것이지요. 시 49 : 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그렇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범죄함으로 인하여 즉 사단의 말에 넘어가서 짐승이 되었지요. 이제 다시 사람이 되는 길은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깨달아 지식을 쌓는 것입니다. 어렵지요. 힘든 길입니다. 곰이 웅녀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아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알려고 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23 :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유대사회의 영적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바 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핍박하였습니다. 즉 진리를 갖지 않은 자들이 진리를 가진 자를 괴롭히는 것이지요. 오늘날도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겠지요. 마치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이고, 하갈이 그 주인 사라를 경시하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고,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한 것처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합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을 핍박합니다. 진리의 편에 있는 사람들이 진리 밖에 있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오히려 압제와 고난을 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24 :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아멘!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가 고백한 내용입니다. 딤전 1 :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그가 누구였습니까? 바울입니다. 자신을 고백합니다. 빌 3 : 5 - 6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 열심 누가 따라가기도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열심이었지요. 하나님이 원하신 열심도 아니고 하나님이 뜻하신 열심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인 줄 알고 행한 자기 열심이었습니다. 이유는,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알지 못하였을까요? 성경은 줄줄 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을 깨닫지 못한 것이지요. 성경에 무엇이 담겨 있기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사랑하라, 이웃 사랑하라 하는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못 지킵니까? 그런 것은 알면서도 못 지키거나 안 지키는 겁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런 수준의 말씀이 아니지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 오묘한 말씀을 깨달으려면 비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뱀이라고, 독사의 자식들 결국 마귀의 자식이라는 저주를 받은 것은 바로 비유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곧이곧대로 듣습니다.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차원이 다르지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늘날 우리 또한 그런 잘못을 거듭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뱀이 와서 하와를 유혹했다, 그 벌로 땅에 기어 다니게 되었다, 그 수준으로 성경을 읽으면 결국 진리와는 상관없는 자가 됩니다. 그 뱀이 흙을 먹고 산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우리 하나님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신다고 우기니 하나님을 우롱하는 처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자기 무식한 것은 누가 뭐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그 고집은 반드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때 경계해야 할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24 :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그 결과를 봅니다. 계 18 : 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복술’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복술’은 무당이 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거짓선지자는 무당과 같은 존재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란 말입니다. 스스로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말씀하셨듯이 거짓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종인데 거짓 선지자요, 거짓선지자이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같은 거짓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주의시켜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후 11 : 13 - 15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사단의 일꾼들이 나는 사단의 종입니다, 하고 나타납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의 말을 듣겠습니까? 사단의 종이 목자로 있는 교회에 출석할 그리스도인들이 있겠습니까? 스스로 마귀 자식이 아니라면 그런 일은 없습니다. 마귀 사단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마 24 :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백성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나는 마귀의 종이다, 하고 나타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는 언제나 사단의 훼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당신 백성에게 미리 경고해주십니다. 대비하고 바른 길을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미리 말씀하십니다. 렘 31 : 2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우선 알 것은 이것이 예언의 말씀이니 비유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 ‘씨’가 씨가 아니라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씨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이 예언을 이루신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마 13 : 24 - 25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여기 ‘제 밭’은 바로 예수님의 밭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거기 두 가지 씨가 있습니다. 좋은 씨와 가라지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빌리면 바로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입니다. 어느 쪽을 먹어야 합니까?
분명 간판은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사람의 씨, 좋은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거짓선지자가 짐승의 씨, 가라지를 뿌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것을 분별하여 먹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 말씀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집에 함께 거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말씀 같은 거짓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을 먹기 원합니다. 그러니 시간을 내어 배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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